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74화 (174/332)

# 174

174. 악마의 청탁(1)

본디 세계최강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국가, 미국.

하지만 지금은 감히 그런 수식어를 붙일 수가 없었다.

가장 많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던 나라였지만 가장 많은 몬스터가 발생한 나라이기도 했다.

미사일도, 총알도 통하지 않은 몬스터들에게 무기를 쏟아부었지만, 그 피해는 국토에 고스란히 돌아왔다.

대신 몬스터의 수가 많은 만큼 플레이어들의 숫자도 많았기에 어떻게든 수습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워낙 막대한 피해를 입은 탓에 국가 기능을 상당수 상실한 상태였다.

“그거야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이야.”

미국도 피해는 컸지만 인명피해가 가장 큰 곳은 중국이다.

인구수가 워낙 많다보니 피해도 가장 컸다.

오히려 한국은 무난한 편이었지만, 이후 진행된 메인 퀘스트에서 개박살 났었지.

2회차에서는 다르긴 하다만.

“늦었어, 까마귀.”

시카고 공항에서 나오니 하얀 양산을 쓴 아자젤이 우리를 맞이했다.

신자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따로 일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 이 아가씨도 같이 왔네?”

“……안녕하세요.”

지수가 떨떠름하게 인사하자 아자젤이 상큼하게 손을 흔들었다.

“난 얘 좋더라. 얼마나 강해질지 궁금해. 그 아이는 상식 밖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아가씨도 제법 대단하거든. 기대되는 걸.”

그렇게 말하는 아자젤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나태의 악마라는 이명처럼 무척 게으른 악마였지만 호기심이 꽤 많았다.

아바돈을 굳이 자신의 힘으로 악마화 시킨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거기다 멀리 볼 것 없이 신자운과 계약한 것만 해도 본인의 호기심 때문이니.

“아무튼 미국으로 왔는데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은 어디 있는지 찾았나?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아직 전부는 몰라. 요 며칠간 조사한 바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이한 무리가 목격됐다고 하더라. 조로아스터교인 모양이야.”

“샌프란시스코라.”

상당히 멀다.

아니, 엄청나게 멀다!

“그럼 비행기를 다시 타야 되나?”

“알다시피 국내선 비행기는 운행되지 않아.”

젠장, 알고는 있었지만 비행기는 해외만 운행된다.

시스템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기차를 타거나 지하철, 혹은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기차로군. 신자운은 이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건가?”

“그래, 맞아. 먼저 보냈어. 거기서 나에게 쪽지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

“그럼 애초에 샌프란시스코로 오라고 했으면 됐잖아.”

“싫어. 그럼 재미없잖아. 난 같이 기차여행을 하고 싶었는 걸.”

아자젤이 그렇게 말하자 지수의 표정이 일변했다.

점차 붉은색으로 변해가는 눈동자에 나는 짧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자젤은 그냥 나를 놀리는 게 재밌을 뿐이야.”

“들켜 버렸네. 그래도 기차여행을 하고 싶다는 건 사실이야. 너희 나라는 너무 작잖아.”

한국이 작긴 하지.

“나름 다른 행성에 왔는데 관광도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니?”

“당장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될 것처럼 말하더니만.”

“그래서 지금 정보를 모으고 있잖아?”

싱긋 웃으면서 말하는 아자젤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기차에 뭔가 있구나.’

어쩌면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는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역시 눈치가 빨라, 까마귀.”

“기차로 운반되는 게 뭐지?”

“그건 직접 보는 게 빠르지 않겠어? 조로아스터교의 아이들도 잔뜩 탈 텐데 말이야.”

역시 그랬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건 본거지고, 이곳에서도 어떤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그냥 좀 제대로 설명해 주면 덧나나?’

아자젤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우습긴 하다만.

“바로 기차역에 가면 되나?”

“물론이지. 그렇지 않아도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기차로 예약해 뒀어.”

그럼 그냥 타기만 하면 되는 거군.

“저 미국은 처음이에요.”

“아, 그래?”

지수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자젤에 대한 오해가 해결되니 그저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든 모양이다.

중원도 함께 다녀오긴 했지만, 거긴 낯선 세계이니 딱히 여행이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야되니, 마치 기차여행이라도 온 기분이겠지.

‘조로아스터교와 악마의 계약자를 쫓아야 되는 상황이긴 하다만.’

그건 아자젤의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면 될 것이다.

“왜 그러니, 까마귀?”

하얀 양산을 펼치며 웃는, 새하얀 소녀.

하얀 드레스와 긴 하얀 머리칼.

인간세상과는 동떨어진 비쥬얼이다.

괴짜 같은 성격을 지닌 아자젤이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경천동지할 수준이다.

현재의 나로선 도저히 이기지 못할 정도.

단순 수치로만 따지면 아바돈보다 족히 열 배는 강하다.

같은 7대 악마라는 영역에 있으면서도 그 틀을 벗어난 괴물.

“가자. 그 두 아이들이 어떤 인간을 아바타로 삼았는지 빨리 봐야겠어.”

아자젤의 그 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흔히 신위를 가진 이들은 눈동자가 금색의 빛을 띈다.

린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악마의 경우는 붉은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직 아자젤만이 악마중에서 금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악마의 규격을 아득히 넘어선 신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녀의 본질은 악마가 아닌 신이다.

“감히 내 아바타를 죽인다는 헛소리를 한 이유를 어서 알고 싶거든.”

상큼한 미소, 부드러운 시선.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한없이 냉담하며 차가웠다.

***

[앞으로 10분 후, 기차가 출발하오니 탑승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그런 알림이 떠올랐다.

지하철이나, 비행기. 그리고 기차와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모두 나타나는 알림이다.

그것은 이런 시설들이 모두 인간이 아닌 시스템의 관리하에 있다는 말이 된다.

어느 정도 새로운 세계로서 인간사회가 확립되어 가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이 세계가 인간이 아닌 시스템의 손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오빠, 저기 봐요.”

지수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무리의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옷에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어요. 저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인가요?”

“아마 그런 거 같네.”

조로아스트교는 중동에서 시작된 종교로, 자라투스트라가 창시한 종교다.

불을 숭상하며, 아우라마즈다라는 유일신을 모시는 종교.

다른 이름으로는 배화교라고도 부른다.

어째서 그들이 미국에 똬리를 튼 건지는 모르겠지만…….

“씨앗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

“씨앗?”

“어. 조로아스터교의 말을 따르자면 신의 알.”

알이라지만 인간이다.

인간이란 선과 악의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지만, 신의 알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발현된다.

“간단히 말에 너나 나와 같은 특별한 특성을 지닌 인간이야.”

다만 그게 선천적인 것이 아닌, 조로아스터교에 존재하는 술법으로 만들어진 인간일 뿐.

본래라면 미신으로 존재했던 의식이었으나, 이런 세계가 되며 그것이 제대로 구현되고 말았다.

씨앗이란, 그것에 바쳐질 인간이다.

아직 발아하지 않은 불운한 재물.

“1회차에서는…….”

지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말을 멈췄다.

아마 내 기억에서 엿봤던 정보를 떠올린 모양이다.

“실패했지.”

정확히는 다 죽었다.

1회차에도 나는 놈들과 접촉했지만, 뭔가를 알기 전에 알아서 전멸해 버렸다.

그러니 나도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

아마 발아하던 도중에 어떤 사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이번에는 1회차와 달리 7대 악마가 둘이나 관련되어 있으니,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놈들이 자멸할 종교를 상대로 접촉할 리가 없잖아.

“우선 기차가 출발 할 것 같으니 들어가는 게 어떻겠어?”

“그러도록 하지.”

아자젤의 안내에 따라 기차에 탑승했다.

기차의 내부는 한국의 기차와는 상당히 달랐다.

마치 개인실처럼 자리가 나뉘어져 있었다.

‘맨 뒤에 탔군.’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이 기차에 타는 건 까마귀의 눈을 통해 확인했다.

맨 뒷칸에 탄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을 감시하며 몰래 까마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까마귀를 숨긴 후,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악마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닌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면 씨앗을 발아시킬 방법을 찾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끙, 하지만 괜히 그들에게 휘둘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악마의 계약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건 확실한 것 같았다.

다만 현재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됐냐는 건데.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시카고에 씨앗을 숨겨뒀던 모양이야. 계약자들과 접촉하며 씨앗을 발아시킬 힌트를 얻었고, 이제 발아시키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로 운반하는 거지.”

“……너도 들은 건가?”

“당연한 거 아냐? 난 귀가 밝아.”

태연하게 말하는 아자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나태의 악마쯤 되면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

“기차 내에 악의가 가득해요.”

지수가 눈살을 살며시 찡그리며 말했다.

악의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7대 악마의 계약자는 둘뿐이라며?”

“걔네가 이끄는 하수인들이나, 따르는 하위 계약자가 있을 수도 있잖니. 거기다 걔네 꿍꿍이는 나도 몰라.”

그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자젤이 굳이 내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수인인지, 계약자인지 모를 놈들이 움직이면 말해줘.”

“알겠어요.”

하필 움직이는 기차라 까마귀로 감시할 수도 없었다.

“아, 출발한다.”

지수의 말과 함께 기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행 기차.

앞으로 54시간 동안 우리는 이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한다.

***

「씨앗은 찾았나?」

“예, 맨 뒷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수는 몇 명이지?」

“저희로 충분합니다.”

「그래 우리는 아자젤과 까마귀 놈을 찾느라 바쁘니 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해라. 만약 제대로 못하면 알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게일님.”

사내는 전화를 통해 게일이라는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덜덜 떨었다.

상대는 악마의 계약자다. 말 한마디면 자신이 부여받은 힘을 빼앗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아자젤과 까마귀의 행방을 찾지 못하신 겁니까?”

「그래, 분명 일주일 전에 왔을 터인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군. 대체 그년은 뭐하고 있는 건지.」

“머, 멍청한 계집이니까요.”

게일은 그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죽이지 않은 건 그녀의 계약자인 마라 파피야스에게 밉보기 싫어서였을 뿐이다.

괜히 성가셔지는 건 질색이니까.

「흥, 아무튼 그놈들은 대체 어디있는 건지 모르겠군.」

“혹시 안 오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는 없다. 다만 아직까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녀석들을 봤다는 말은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오고 있는지도 몰라」

“다른 방법?”

「까마귀는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고, 아자젤이라면 다른 능력을 지녔을지도 모르지.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네놈은 씨앗이나 제대로 탈취해 오도록 해라.」

“옙, 알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게일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무례한 태도였지만 사내는 그저 안도할 뿐이었다.

“……모두 들었겠지? 기차가 소등하면 움직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현재 기차에 탄 악마의 하수인들은 총 서른 명.

거기에 계약자도 세 명이나 있었다.

7대 악마의 계약자와 같은 고위 악마는 아니지만, 나름 괜찮은 악마와 계약한 이들이었다.

참고로 사내도 세 명뿐인 계약자 중 한 명이었다.

‘씨앗을 탈취하고 기차에 있는 놈들을 모두 죽인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

씨앗을 얻는다면 주도권은 조로아스터교가 아닌 자신들이 가지게 된다.

덜컹, 덜컹.

벌써 기차가 출발한 지 여덟 시간 정도가 흘렀다.

사내는 기차의 불이 꺼지고부터 천천히 숫자를 셌다.

“모두 움직여라.”

기차 내에서 옅은 기척이 움직였다.

자신이 이끄는 악마의 하수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이곳에서 도망쳐오는 조로아스터교를 붙잡거나 척살하는 것이었다.

‘지루한 일이지만 간단해서 좋군.’

사내는 이번 일이 실패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은 자신들보다 수준이 까마득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차에 탄 서른 명이 전부 움직일 필요도 없이 열 명만 움직여도 충분히 씨앗을 빼앗을 수 있었다.

탕.

“응?”

갑자기 기차 유리창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는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

붉은 눈.

달리는 기차의 벽에 붙어, 열차의 창문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무언가.

“자, 잠깐!!”

콰창!!

유리창이 부서지며 하얀 손이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 손은 사내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부서진 유리파편이 달빛에 반사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사내가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