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 점핑 이벤트(3)
1회차에 있었던 악마의 계약자 중에, 7대 악마와 계약했던 인물은 단 하나였다.
아니, 7대 악마는 둘째 치고 흔히 20위권 안에 드는 ‘대악마’급 악마와 계약했던 악마의 계약자조차 불과 다섯 명에 불과했다.
잡다한 악마라면 무수히 많이 지구에 접속해 있었지만, 대악마급은 보통 엉덩이가 무거워 잘 움직이지 않는다.
잡다한 별에 빨대를 꽂지 않아도 넘치는 포인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자젤에 이어 두 명이 더…….’
본디 7대 악마와 계약했던 악마는 단 한 명.
색욕의 악마 마라 파피야스의 계약자였던 크리스 브라이트.
녀석은 분명 내가 이벤트에서 죽였다.
하지만 민수아의 말에 따르면 이번 일에 ‘색욕’도 관련이 있다는 것 같고.
“형?”
“아,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새로운 무기에 대해서 한창 설명하던 시우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제 위험한 일은 다 끝난 거 아니에요? 형이 그렇게 고민할 일이 뭐가 있다고…….”
하기야 시우의 입장에서는 이제 좋은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귀찮게 하던 아카터스도 죽었고, 게임 자체도 이드라가 탈취한 상황이니까.
확실히 좋아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된 건 아니었다.
아직 게임은 진행되고 있었고, 달라진 미래는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번 악마의 계약자 건도 그렇다.
‘분노와 탐욕이라니.’
녀석들이 과연 어떤 놈을 자신의 계약자로 삼았을지 감도 잡기 힘들었다.
거기에 조로아스터교까지 엮이게 될 줄이야.
“아무튼 별거 아냐. 그보다 부탁한 것들은 다 만들었어?”
“네.”
시우는 딱 보기만해도 상당히 좋아보이는 무기들을 쭉 나열했다.
최소 B급 아이템들이었고 좋은 건 A급이었으며 하나는 무려 S급 아이템이었다.
“S급 아이템은 주신 소재들 중에 가장 좋은 것들로만 만든 거예요. 양산은 힘들 거 같아요.”
“이거면 충분해.”
“그럼 다행이네요. B급 아이템은 경매장에 뿌리신다고 했고…….”
“A급과 S급은 아레나 랭킹 보상으로 둘 거야.”
“랭킹 보상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창천 길드가 있는 중국에는 게임의 주력이 되는 두 개의 컨텐츠가 몰려 있었다.
하나는 경매장.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지만 그 규모를 수십 배로 키워 전 세계의 플레이어들이 경매장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건 바로 시우의 물건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사람이 직접 만들었음에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시우의 물건은 뛰어난 드랍템을 먹기 전까지는 반드시 거쳐 가는 물건이었다.
비록 네임드급 몬스터가 떨어트리는 몇몇 아이템들처럼 특수한 능력이 붙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심플한 성능을 자랑하는 만큼 초보자가 사용하기 딱 좋은 물건이었다.
“현재 아레나 랭킹 1위가…….”
“아가트람의 천상환.”
“아 맞다, 그 형이었죠.”
“린은 여신이라서 랭킹에서 제외됐으니까.”
천상환은 신의 검인 클라우 솔라스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승스킬일 뿐이다. 그의 주무기는 검이었지만 클라우 솔라스를 사용하면 죄다 녹아버리는 탓에 괜찮은 무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열 성능을 중점적으로 손보라고 한 거였군요.”
“그래, 맞아.”
천상환에게 딱 맞춰서 만들어진 장비.
간단히 말해 전용장비라고 할 수 있다.
아레나 랭킹 1위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지금 천상환에게 주어지는 것과 같은 전용장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플레이어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면 한층 아레나 랭킹에 관심이 쏠리겠지.
천상환에게 맞춰 만든 S급 무구 말고도 A급 무구 다수가 현재 아레나 랭킹 10위권에 있는 랭커의 것이다.
이걸 플레이어들에게 홍보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플레이어들이 몰려들을 테고, 신들의 경우엔 굳이 내가 홍보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커뮤니티 내에서 떠들고 있으리라.
‘역시 현질을 부르는데 PVP만 한 게 없지.’
보통 게임에서는 아레나와 같은 시스템이 없다.
그런 거 없어도 어차피 플레이어끼리 죽고 죽이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근데 아레나는 다르다.
거기서 진다고 플레이어가 죽는 것도 아니며 랭킹에 오르게 된다.
보통이라면 그게 무슨 차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플레이 중에 죽는 건 정석적인 대결에서 죽는 게 아니지만, 아레나는 룰을 갖추고 플레이어간의 싸움을 겨루는 것이다.
당연히 신들은 자신의 아바타가 이기길 바라며, 다른 신에게 뒤처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덕분에 랭킹에 오르기 위해서 아낌없이 게임에 투자를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포인트는 많이 버시지 않았어요?”
“많이 벌었어.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이드라는 입이 귀에 걸렸다.
이미 게임을 오픈할 때 소모되었던 녀석의 포인트는 이미 다 복구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남은 포인트로 이벤트를 예정 중이야. 너도 할 거 없으면 그때 참여해서 포인트 좀 벌어.”
“아, 점핑 이벤트요?”
이미 정보를 들은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벤트 준비도 거의 끝난 상황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벤트를 진행하며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
==
제목 : 곧 이벤트한다는 카더라가 돌고 있음.
내 아는 신이 꿈의 마녀 발닦게 하던 신임.
걔한테 들음.
댓글
익명: 개솔ㄴㄴ 외신이랑 엮는 게 말이 되나?
익명: 근데 나도 이벤트한다는 소문은 들음.
==
언제부터인가 커뮤니티 내에서 이벤트에 관한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유입된 신들을 위한 이벤트라던가.
덕분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려던 신들은 하나둘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제목 : 뉴빈데요 지금 시작하면 돼요?
이번에 유입되서 아바타도 못 정했는데 지금 시작해도 됨?
고인물들한테 뒤지는 거 아님?
댓글
익명: 어, 지금하면 된다. 접지 마. 너 가면 게임 망해.
익명: 지금 이벤트 한다는 소문 돌고 있으니까 존버해라.
익명: 할 거 없으면 상자깡 ㄱㄱ
ㄴ익명: 이 새끼 뉴비 접게 만들려는 분탕이네 조심해라.
==
신규 유저들을 위한 이벤트가 예정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니, 게임 ‘지구’에 대한 정보가 커뮤니티에 상당수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이슈가 되었던 게임이었지만,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기가 부담스러웠던 탓에 관심을 껐던 신들은 이번 이벤트로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주일 후에 이벤트가 시작된다는 공지가 걸리며 더더욱 시선이 쏠리게 된다.
여태 다른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점핑 이벤트 때문.
다른 게임들의 경우, 유입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서버종료의 수순을 밟았던 터라 점핑 이벤트가 무척이나 신선했기 때문이다.
익명 2255 : 점핑 이벤트가 정확히 뭐냐? 뉴비한테 설명 좀.
어릿광대 : 신규 유저들에게 포인트 퍼주는 이벤임. 새롭게 아바타 선택하면 지원 아이템도 주는 듯.
그리스대장 : 이 기회에 나도 부캐나 키워볼까.
어릿광대 : 아죠씨는 부캐 그만 좀 만드세요.
익명 4467 : 그럼 이벤트 시작할 때 찍먹하면 되는 거임? 근데 여긴 옵저버가 좀 신기하네.
불금 : 옵저버 스킨이라는 게 있음. 랜덤박스라고 있는데 그거 돌리면 일정확률로 나온다. 그걸 보통 상자깡이라고 함. 뉴비는 상자깡하지 말고 포인트 모아서 아바타나 키워.
익명 2562 : ㅋㅋㅋ오 좋네. 접속하면 상자부터 지른다. 페트로이아 하다가 왔는데 상자깡은 껌이지ㅋㅋ
한쪽눈미아 : 헐;; 그 흑우겜하다가 온 놈이 있냐.
채팅방에서 올라오는 글들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기존 네임드들이 뉴비들을 위해 올리는 채팅이 있었지만, 그보다 신규 유입들의 질문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 공지도 때렸으니 대부분 끝났네.”
나머지는 이드라가 알아서 할 거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이용한다면 그간 이드라가 고생하던 일들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을 터.
그렇게 되면 그간 바쁘게 살던 이드라도 겨우 시간이 나게 될 것이며, 나와 함께 돌아다닐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미국에 가면 되나.”
아마 아자젤과 신자운은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벤트 관련 일이 마무리되면 합류하기로 했으니 슬슬 가면 되겠지.
“…….”
그렇게 생각하며 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문틈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한지수,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야?”
“……최근 제가 너무 쫓아다닌 거 같아서요.”
이드라와 살짝 말싸움을 한 이후, 조금 눈치를 봤던 모양이다.
지수는 문틈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아가 너무 쫓아다니면 오히려 오빠가 싫어할 거라고 해서…….”
뭐, 보통은 그렇겠지.
지수가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와 별개로 시종일관 쫓아다니는 건 보통 사람들에겐 부담스럽거나, 무서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야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거기다 ‘착한 아이’가 있는 이상 지수는 결코 선을 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우.”
갑자기 문이 열리자 비틀거린 지수는, 슬그머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핑크빛으로 변해 아롱거리는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이 아닌 걸 보면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모양이군.
“미국 갈 거니까, 준비해.”
“저 두고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악마들과 싸울 확률이 높아서 말이야.”
지수는 타인의 악의에 민감하다.
그리고 악마와 관련된 자를 아주 정확하게 찾아냈다.
대체로 악마의 계약자는 겉으로 티가 나지만, 크리스 브라이트가 그랬듯, 7대 악마의 계약자가 되면 외견을 속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니 지수를 데려가서 나쁠 건 없었다.
“혹시 싫거나, 따로 할 일이 있으면 같이 안 가도 괜찮긴…….”
“아뇨, 괜찮아요. 아시잖아요, 제가 길드에서 할 일이 제일 없는 거.”
내가 말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지수가 황급히 말했다.
‘길드에서 제일 할 일이 없는 건 창우 씨다만.’
전투력도 지수에게 밀리고, 심안을 제외하면 눈도 안 보이는 터라 할 수 있는 일도 적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아레나에 서식하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고 있었다.
“좋아, 그럼 준비해. 바로 갈 테니까.”
“네, 오빠.”
아까 눈치를 살피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지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그런 지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볼을 긁적였다.
‘적어도 게임이 끝나야 내가 뭘 할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이드라든, 지수에게든 타인의 호감에 답해주기가 힘들었으니까.
적어도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닌, 평범한 세계가 될 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만약 그런 시기가 오고, 그때도 내가 살아있다면.
분명 나는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어, 어떡해.’
은발의 여성이 어둠속에서 숨어 몸을 덜덜 떨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그녀의 앞에는 자신의 동생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동생을 두 명의 남성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참, 같은 악마의 계약자면서 겁나 뻐기네.”
“홧김에 기절시켰는데 괜찮나 이거?”
“그럼 지들이 어쩌겠어? 이런 게 같은 7대 악마의 계약자라니. 내참.”
그들은 쓰러진 동생을 보며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은발의 여성, 크리스는 그런 그들을 향해 앞으로 나서고 싶었지만 나서봤자 그저 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적에 가까운 그녀이지만 동급의 악마의 계약자들에겐 그녀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혼자선 아무리 잘 싸워도 저 둘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숨어 있는 년이 하나 있는 것 같지만…….”
“!!”
둘 중 한 남성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크리스가 숨어 있는 곳을 보았다.
“이 계집을 살리고 싶다면 우리 뜻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소리인지 알지? 그럼 적어도 죽이지는 않으마.”
“아, 알겠어.”
크리스가 숨어있는 곳에서 조용히 답했다.
그들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대답하는 크리스의 말에 킬킬 거리며 웃었다.
“아자젤을 찾으면 되는 거지?”
“그래, 그리고 까마귀라는 녀석도 온다고 하더라고. 그놈을 찾아 죽여.”
까마귀라는 말에 크리스는 순간 딸꾹질을 할 뻔했다.
녀석은 자신을 한번 죽였던 자였으니까.
“까마귀는 왜……?”
“우리 악마님이 관심이 좀 있는 거 같거든. 적당히 실력을 보고 싶은 모양이야. 너 같은 걸로 죽으면 우스울 뿐이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실력체크를 위해 보내는 자살 특공대 같은 거다.
하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부했다간 이곳에서 ‘둘 다’ 죽을 테니까.
“알겠어.”
“좋아, 기다리지. 우리는 바빠서 말이야.”
조로아스터교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했나.
크리스는 얼핏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중요해.’
저들은 분명 동생을 죽일 것이다.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과 동생이 동시에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었다.
‘다행히 저들은 그걸 몰라.’
그렇기에 크리스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이제 어떻게 하냐는 거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더라도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동생을 구해야했지만, 자신은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까마귀.’
그가 크리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