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71화 (171/332)

# 171

171. 점핑 이벤트(1)

기어오는 혼돈. 니알라토텝은 인간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왜?’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웠으면서 어째서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세한에게 건넨 것인가.

둘은 적이 아니었나?

애초에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지닌 진천백이 세한에게 진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외우주의 이치와 법칙, 혼돈의 율법.

그것을 완벽히 다룰 수 있다면 아우터갓이라도 무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진천백에 니알라토텝이 줬던 건 그가 인간이기 때문.

인간이 그것에서 끌어낼 수 있는 힘이란 소량에 불과하다.

그러니 위험 따윈 없었고, 그 소량만으로도 세한 따위는 손쉽게 처리하리라 생각했다.

설령 진천백이 죽게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그것은 자신에게 회수되었을 것이다.

만약 진천백이 직접 소유권을 세한에게 양도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해할 수 없군.’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몹시 불쾌했다. 하찮은 벌레 따위가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행동을 했으니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이쪽 우주에 관심이 없는 그라도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인간에게 넘어갔다는 걸 알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뭣보다 이런 사태를 야기한 니알라토텝에게 징계를 가할 수도 있었다.

‘하필 이드라와 관련이 있는 인간이라 섣불리 나서기도 힘들어.’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자신이 가진 힘으로 유혹하거나, 혹은 강제적으로 빼앗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이드라를 수족으로 두고 있었다.

이드라는 아우터갓답지 않은 녀석이지만 지닌바 힘은 니알라토텝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위일 수도 있다.

같은 아우터갓의 힘은 니알라토텝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

환상을 다루며, 꿈을 관조하는.

상상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불러올 수 있는 존재.

솔직히 전령에 가까운 니알라토텝이 정면에서 승부하기는 힘들다.

‘르뤼에를…… 움직여야 하나.’

그건 ‘기존’보다 빠르다.

하지만 자신이 간섭할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가 끝이다.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오랜 시간을 살며 이런 기분을 느껴본 건 처음이다.

그렇기에 니알라토텝은 이 기분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

“지금 바로 떠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우광은 나와 지수를 보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진천백을 쓰러트리고 무림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여전히 정파와 사파가 대립하고, 마교와 혈교가 똬리를 틀고 있지만 평화는 평화다.

아무튼 진천백의 일은 해결됐으니 나와 지수는 서둘러 지구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김 대협과 한 소저는 다른 세계에서 오신 거였구려.”

정파의 대표로 혈교에 온 남궁천호는 어딘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연이가 한 소저를 보고 싶어 할 거요.”

“특별히 친해진 기억은 없지만, 저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수는 이곳과 지구가 시간대가 다르다는 걸 안다.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지구에서의 며칠이 이곳에서의 수십 일, 혹은 수개월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걸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데.’

나는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떠올렸다.

이것을 이드라에게 사용한다면 두 세계의 시간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중원의 무인들은 수준이 높고, 혈교는 특히나 강한 집단이다.

만약 다수의 고수가 필요해지면 이용할 수 있는 강한 무기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소교주는 사매니까요.”

“오빠, 아니 사형. 그거 아직도 계속하는 거예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할 거다.”

그런 내 말에 우광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혈천수라공을 익힌 우리 둘을 그냥 놔주는 건 혈교에게 크나큰 타격이었다.

무공을 남겨두고 가더라도 당장 혈천수라공을 익힌 무인이 없으니 교주의 자리가 비게 되는 것이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추후 자세히 이야기해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아직 확답을 낼 때는 아니다.

하지만 혈교의 교주라는 건 그냥 내버리긴 아까운 직위였다.

뭐든 보험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그럼 남궁 공자도 뒷일을 부탁합니다.”

“맡겨두시오.”

중원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난 무인이 그라는 것도 나름 행운이다.

차기 맹주로 가장 유력한 건 그이니, 좋은 연을 만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럼.”

혈천신교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건 중원의 남은 사람들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살아남은 십존도 몇 있기는 했지만, 천마와 무림맹주가 건제하니 다시 무림이 뒤집힐 일은 없다 봐도 좋다.

“오오.”

남궁 천호의 감탄사가 들리는 동시에, 나와 지수의 등 뒤로 새까만 게이트가 열렸다.

쪽지를 보내기 무섭게 이드라가 열어준 통로였다.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다른 혈교의 무인들까지 모두 불러 모았을 터인데…….”

우광은 여전히 아쉽다는 눈치였다.

만약 미리 말했다면 우리의 주변은 우광과 남궁천호뿐이 아닌 무림 전체의 환대를 받으며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되도록 일이 진행되는 대로 바로 연락하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그동안은 네가 교주 대리가 되어 혈교를 이끌도록.”

“존명!”

우광도 화경에 오른 고수이니 교주 대리로는 나쁠 것 없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는 우광을 한번 응시한 후, 나와 지수는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에서 남궁천호가 영 아쉽다는 눈으로 보내왔지만 지수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어찌 보면 참 불쌍한 녀석이었다.

***

“오, 돌아왔느냐,”

지구로 돌아오자 나와 지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바로 이드라였다.

처음에 우리가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공방 내부를 둘러보면 게임도 현재 특별한 일 없이 운영 중인 것 같았다.

이드라는 내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지수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지수는 그런 이드라의 행동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둘의 모습에 나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별일 없었지?”

“음, 특별한 일은 없었다. 메인 퀘스트가 두 개가 지나가긴 했다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생각보다 가볍게 넘어가는구나. 메인 퀘스트의 보상을 놓쳤으니 꽤나 아쉬워하리라 생각했는데.”

저쪽에서 나도 서브퀘스트를 수행했지만, 특별한 퀘스트 보상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단순한 퀘스트 보상으로는 얻을 수 없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그것이 퀘스트의 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있구나.”

“물론이지. 너도 아주 잘 아는 물건을 손에 넣었어.”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냈다.

혹여나 내 마력이나 신력에 반응할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억제하며 이드라의 앞에 내밀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검은, 혹은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라 불리는 걸 말이야.”

“……맙소사.”

웬만한 일에는 결코 놀라는 일이 없는 이드라조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이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다.

단순히 놀라는 것을 넘어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걸 어디서 구한 것이냐? 이건 중원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분명 그곳에 가라앉아 있을 터인데…….”

“르뤼에?”

“그래, 맞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것은 본디 르뤼에의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드라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찡그렸다.

“맞아, 그렇구나. 중원의 일은 그 무지렁이가 꾸민 짓이었지.”

“네가 예상한 그대로일 거다. 이건 니알라토텝이 자신의 대리자에게 준 물건이거든.”

“이걸 대리자에게? 미쳤군. 세계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나?”

“언제든 회수할 자신도 있었을 테고, 이걸 제법 다룰 수 있는 힘의 소유자였어.”

그런 내 말에 이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러고 보니 그대도 한층 강해진 것 같구나. 그만큼 적이 강했던 것이겠지. 나의 신이 강해지면 나의 힘도 강해지니, 무척 기쁜 일이로다.”

니알라토텝이 관여한 시점에서 이드라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애초에 기어오는 혼돈, 니알라토텝은 인간에게 관여하는 걸 좋아하는 신이었고, 인간을 도와 파멸시키는 것을 즐기는 신이었다.

이번 일도 대략 그런 심리에서 나온 일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지만.’

내 앞에 태평하게 서서 찻잔을 홀짝 거리는 작은 여신.

아마 니알라토텝은 이드라의 행동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

그놈이 인간을 대리자로 삼으면서까지 나에게 승부를 건다는 건 1회차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이걸 이용하고 싶은데 가능해?”

“이용한다고?”

“이거 열쇠처럼 사용할 수 있잖아.”

현재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열쇠를 지닌 건 둘이다.

린과 이미르.

두 개의 열쇠만이 시스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이거라면 독자적으로 시스템을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으음. 해보질 않아서 모르겠군. 이건 이치를 다루는 힘이니 어찌 보면 가능할 수도 있다. 물론, 그만큼 내게는 고된 일이 될 테지만…….”

이드라는 힐끗 나를 보았다.

녀석 답지 않게 망설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작은 한숨을 쉬었다.

“끄응. 애초에 이런 모습이 된 시점에서 이쪽의 패배지. 이리주거라.”

이드라는 내게서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이하 결정을 넘겨받은 후, 천천히 공중에 띄웠다.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던 그것은, 점차 붉은빛이 결정의 결을 타고 흐르며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는 지 원.”

투덜투덜거리며 이드라는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공방에서 움직이던 무수한 문자들이 춤을 추며 작은 기둥을 형성했고, 그것들은 하나둘 결정에 박혔다.

웅웅웅.

작은 울림이 공방에 퍼지며 기둥을 타고 기이한 문자 배열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방에 있는 게임의 시스템까지 섞여 들어갔고, 공방 전체에 경고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버그가 침입하고 있습니다.]

[버그를 차단하려면 게임 서버를 종료해야 합니다.]

“이거 괜찮은 거냐?”

“나도 처음이라 모르겠구나.”

아니, 모르면 안 되잖아.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결정에 몇 개의 기둥이 박혔고, 그것들은 점차 새로운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결정을 중심으로 하나의 가림 막을 형성했고, 거기에 긴 튜브가 여러 개가 이어지며 특별한 장치가 만들어졌다.

“너 물건도 창조할 수 있었어?”

“물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은 무리지. 내가 지금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저것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저것이라면 이런 물건을 창조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세계의 이치. 혼돈의 율법.

그 자체가 하나의 법칙인 물건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정도는 간단할지도 모른다.

뭣보다 저런 물건을 다루려면 직접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이용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음, 끝났다.”

더 이상 경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깜박이며 게임 시스템 쪽으로 알 수 없는 코드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커다란 건 건드릴 수 없지만, 우리가 시스템을 만질 수 있는 권리는 얻었다고 할 수 있도다.”

애초에 이쪽 세계의 물건도 아니니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한 것이다. 괜히 외우주 최고 사기템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이걸로 어쩔 생각이냐. 뭔가 생각이 있으니 이걸 내게 부탁한 거겠지?”

“아, 물론이야. 우선 중원과 지구의 시간대를 맞춰줄 수 있어?”

“으음, 해봐야 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드라의 목소리는 상당히 작았다.

“너 답지 않게 약한 소리네.”

“그게…… 이걸 다뤄보는 건 나도 처음이라 어쩔 수 없구나.”

“아무튼 알겠어. 그거 말고도 해야 할 게 많지만 우선 그것부터 부탁할게. 게임 운영에도 도움이 되는 거니까 너에게도 나쁠 건 없을 거다.”

“……역시 운영자 따위는 하지 말걸.”

이드라는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입술을 비쭉이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런 이드라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정말 너 없으면 어쩔 뻔했냐.”

“…….”

머리를 쓰다듬자 이드라의 몸이 어쩐지 경직된 느낌이었다.

마치 긴장한 소녀와도 같은 모습.

쭈뼛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꽤나 신선해서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턱.

지수가 내 손목을 잡기 전까지 말이다.

“……언제까지 쓰다듬으실 거예요? 신님에게 이러면 불경죄예요.”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신을 존중했다고.”

“방금 전부터요.”

싱긋 웃으며 말했지만 지수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뭐, 뭐냐. 나는 하지 말라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신이 인간에게 머리 같은 거 쓰다듬어지면 안 돼요. 위엄이 없잖아요.”

“난 세한의 아바타인데 뭐가 문제인 게냐! 그리고 지금은 신도 아니야!”

“아, 뭐라는 거야, 진짜.”

이드라가 붉어진 얼굴로 항변하자 지수가 냉랭한 어조로 답변했다.

어쩐지 점차 격해지는 둘의 말싸움에 나는 슬그머니 공방의 밖으로 나왔다.

“……미치겠네.”

지수의 호감도 알고 있고, 이드라도 내게 묘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안다.

다만 지수의 마음에 대해선 아직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고, 이드라는 아우터갓인지라 그 감정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Tekeli-li.”

“마시라고?”

“Tekeli-li.”

마침 공방의 입구에 온 리리가 내게 따뜻한 찻잔을 건넸다.

마치 이걸 마시고 힘내라는 것 같았다.

‘설마 촉수괴물에게 위로를 받을 줄이야.’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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