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 핏빛하늘을 가르다(6)
‘진천웅, 너는 이것을 보았던 것이냐?’
니알라토텝이 미래의 기억을 자신에게 전할 때 진천웅에게도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혹은 그가 본디 지니고 있던 남다른 혜안으로 미래를 본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진천웅은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은 순간에도 웃고 있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소, 형님.」
하하하, 그렇게 웃으며 그의 동생은 쓰러졌다.
그 웃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동생은 결코 허언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변하는 것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는 법이지.”
진천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허수공간들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날카롭게 빛나는 병기들에는 얇은 검기가 서려 있었다.
“전승 스킬을 가진 건 네놈만이 아니다.”
진천백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세한은 그것을 본 즉시 일제히 허수공간에 넣어두었던 물건들을 사출시켰다.
수많은 칼, 창, 그리고 화살.
진천백의 몸을 꿰뚫기 위해 날아가던 무기들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져 나갔다.
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새빨갛고 새까만 보석이 번쩍이며 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허수공간에서 쏘아진 무기들은 방어벽을 뚫지 못한 채 모조리 튕겨져 나갔다.
그것을 본 순간 세한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걸 진천백에게 줬다고?’
저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니알라토텝이 지니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진천백에게 저것을 쥐어줬다는 거다.
“내가 받은 전승 스킬은 이것이다. 그의 말로는 ‘검은 부등변다면체’라고 하더군.”
알다마다.
저것은 외우주의 신격이 지닌 물건 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물건이다.
“그건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칫하면 너뿐이 아니라 중원 자체가 사라지게 될 거다.”
“알고 있다. 이렇게 잠시 꺼낸 것만으로도 내 목숨이 위험하다는 게 느껴지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았다.
“허나 최후에 이보다 적합한 건 없지.”
검은 부등변다면체.
다른 말로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라 부른다.
본디 태평양에 가라앉은 그곳.
르뤼에에 잠들어 있는 물건이지만 니알라토텝이라면 그곳에서 가져오는 것도 어려운 게 아니다.
외우주에 존재하는 이치, 혼돈의 율법.
그것을 결정화하여 만들어 낸 무언가.
저건 전승스킬도 뭣도 아니다.
단지 ‘온전히 전해줄’ 방법이 없어 전승스킬로서 진천백에게 건넸을 뿐.
‘니알라토텝은 결코 패배할 생각이 없었군.’
미래의 기억을 전달하고, 전승스킬로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건네준 시점에서 나를 반드시 죽일 생각이다.
나아가 중원의 파멸까지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저것을 이용해 중원 전체를 자신의 수족에 두든가.
“큭!”
진천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꺼내는 것만으로 그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막대한 진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진천백은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에 성공했다.
힘을 극도로 억제시키며, 그것을 자신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검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주변에 있던 허수공간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이드라의 힘에 간섭해, 스킬 자체를 취소시켜 버린 것이다.
‘망할 사기템 같으니라고!’
말이 아이템이지, 저건 외우주의 열쇠나 마찬가지다.
외우주에서는 ‘시스템’이라 부르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 열쇠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우주의 법칙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왜 저런 게 이쪽 우주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아우터갓만이 알겠지.
“자, 와라 까마귀. 혈마의 모든 걸, 네가 지닌 모든 걸 사용해서 덤벼라!!”
결정을 몸에 박아 넣자, 그의 전신에 혈관이 꿈틀 거리며 근육이 부풀었다.
그의 몸에서 몰아치는 힘에 하늘의 구름이 밀려나고 바람마저 멈췄다.
나선으로 몰아치는 혈기의 폭풍우에, 한창 싸우고 있던 무림의 무인들조차 병장기를 바닥에 떨굴 정도였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천마는 말했다.
진천백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힘의 개념을 아득히 벗어났다.
“허허.”
남궁천악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혈천신교를 쓰러트려 중원을 구한다는 것 따위는 아무 의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저것을 정녕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에게 대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먼저 움직인 건 진천백이었다.
붉은 번개가 쏘아지듯,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세한의 정면에 도달했다.
콰아앙!!
전혀 반응하지 못했던 아까와 달리 세한은 진천백의 주먹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진천백은 더 이상 이기어검과 같은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무기가 필요하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알데바란과 동급이다.’
인간이 황도 12궁 최강 중 하나라 꼽히는 알데바란과 동급이라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진천백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세한의 복부를 강타했다.
혈천수라공의 제 삼 초식인 야차다.
콰과과광!!
복부를 얻어맞은 세한의 몸은 그대로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는 게 아닌 쏘아졌다, 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무림인들이 싸우는 전쟁터를 가로지르며,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의 중턱까지 날아가 충돌했다.
“커헉!!”
충격에 순간 숨이 턱 막혔지만, 이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진천백의 천근추에 황급히 몸을 피했다. 진천백의 발이 산의 중턱을 짓밟자, 높은 산이 마치 거인이 밟은 것처럼 찌그러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거다.’
혈천수라공은 극성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나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은 단 하나.
일초식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극성에 이르렀음에도 세한이 완벽히 익힌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일초식, 이초식, 삼초식.
진천백의 공격을 세한은 모조리 막아냈다.
익숙한 혈천수라공이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의 주먹을 튕겨낸 세한은 그의 옆에 거대한 허수공간을 열었다.
빠앙!!
“……!!”
지구의 지하철, 그곳과 그대로 연결시켜 진천백을 지하철과 그대로 충돌시켰다.
허수공간을 통해 생명체는 넘어갈 수 없지만, 아무도 탑승하지 않은 지하철이라면 이렇게 소환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보통 지하철도 아니라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지하철이다.
그것에 정면에 충돌한 진천백의 신형이 옆으로 날아갔다.
반대편에 허수공간을 열어 지하철을 사라지게 만든 후, 세한은 날아가는 진천백의 머리 위에 공간을 열고 새까만 금속덩어리를 무수히 낙하시켰다.
몽상의 던전에서 린을 향해 떨어트렸던 그것이다.
콰콰콰콰쾅!!
운석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금속덩어리들을 진천백은 주먹을 휘둘러 모조리 부쉈다.
그의 가슴팍에 있는 결정이 검붉은빛으로 빛나며 그의 몸이 한층 가속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진천백의 주먹이 세한의 얼굴을 강타했다.
음속을 아득히 뛰어넘은 주먹에 얻어맞자 생기는 충격파에 폭음이 울려 퍼졌다.
“이것뿐인가?”
첫 번째는 얻어맞았지만 두 번째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그저 막고만 있을 뿐인 게냐?”
막는다, 흘린다. 튕겨낸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어수단을 사용해 진천백의 공격을 막는다.
‘단 한 번.’
세한은 그 단 한 번을 기다렸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진천백의 공격을 견디며, 그 기회를 쫓았다.
쾅, 콰콰쾅!!
진천백의 주먹이 한번 뻗어질 때마다 하남 전체가 흔들거렸다.
지축이 뒤틀리며 주변의 산에선 산사태가 일어났다.
‘분명 한계가 올 거다.’
천살성과 재생 스킬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진천백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지닌 무위와, 천살성의 재생력으로 결정의 힘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한계일 터.
‘앞으로 5분.’
초월의 증명이 끝나는 시간.
5분 안에 진천백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
세한의 눈이 붉은색과 금색으로 타올랐다.
신력과 혈천신공의 내력을 이용해 진천백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치자, 둘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보여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진천백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세한은 그가 나락을 준비했음을 깨달았다.
혈천신공의 마지막 초식.
그것과 정면에서 부딪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기회다.’
나락은 가장 강력한 기술인 동시에 가장 큰 허점을 지닌 기술이었다.
다른 초식과 달리 나락을 사용하는 동안은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세한이 가진 수는 단 하나.
그것도 직선적인 공격이라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후우.”
결정의 빛이 신호였다.
진천백의 크게 진각을 밟으며 그의 양손에서 ‘나락’의 초식이 펼쳐졌다.
사방을 점하며 상대를 찢어발기는 힘이 세한을 향해 덮쳐왔다.
그것에 대항하는 세한의 초식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혈천수라공 제 일초식 수라.
세한이 완벽하게 익힌 초식은 그것 하나였다.
‘진각을 내딛으며, 가장 빠르게.’
가장 기초, 혈천수라공의 기반이 되는 초식.
금색과 붉은색이 세한의 팔에서 섞이지 않고 회전하며 일점에 모여들었다.
일반적인 혈천수라공의 일초식, 수라와는 다르다.
이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단 하나의 초식이었다.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힘이 모인 주먹을 말아 쥔다.
진각을 내딛고, 허리를 비튼다.
그리고 다가오는 진천백을 향해 뻗었다.
‘이거였군.’
대단한 무리를 닮은 초식은 아니다.
그 동작은 지극히 심플하며 단순했다.
단지 내공의 운용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보통의 정신력으론 무리다.
‘이거였구나, 진천웅.’
네가 보았던 것.
범인이 만들어낸, 필살의 일격.
저 주먹에는 진천백 자신이 만들어낸 무리(武理)도 분명 담겨 있었다.
자신의 재능이 부족했기에 수많은 것에서 빌려와 만들어낸 조잡한 초식과 무공.
그것은 진천백의 나락을 꿰뚫을 만큼 강력했다.
콰아아아아!!
진천백의 몸이 꿰뚫리며 멈췄던 바람이 분다.
구름이 밀려나고, 진천백의 뒤에 있던 산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다.
진천백의 힘에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것은 혈천의 끝을 고하는 일격이었다.
***
“결국 나는 넘지 못했다.”
진천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결코 좋은 인간은 아니었기에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니알라토텝은?”
“모른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을 테지.”
반신이 날아간 진천백은 죽지 않았다.
아직 그의 가슴팍에 박혀 있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때문이다.
반신이 날아갔음에도 결정만큼은 아직 박혀있었다.
“이것을 빼면 나는 죽을 테지.”
“빼지 않아도 죽을 거다. 내가 죽일 거니까.”
“하, 하하.”
진천백은 피를 흘리며 웃었다.
그래, 모든 게 끝났다. 진천백은 자신을 지켜보는 신의 시선을 느꼈다.
오직 자신의 쾌락, 궁금증을 위해 힘을 줬던 신.
그 신의 눈에 미미한 불쾌감이 담겨 있다는 것에 그는 제법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힘을 줬음에도 세한을 이기지 못한 것에 한심함을 느끼는 거겠지.
“그런 불완전한 일격을 마지막에 사용하다니 놀라울 뿐이로군.”
“불완전하다는 게 약한 건 아니니까.”
“맞는 말이지.”
진천백은 모든 게 끝났음을 깨달았다.
결국 진천웅을 넘지 못했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을 죽였을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이걸 가져가라.”
진천백은 자신의 가슴팍에 박힌 결정을 천천히 뽑아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뽑자 진천백의 생명이 무섭도록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걸 나한테 준다고?”
“만약 내가 직접 넘기지 않는다면 내가 죽음과 동시에 놈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러니 녀석에게 돌아가기 전에 소유자를 세한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왜지?”
“나는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다.”
본래는 이 힘을 이용해 놈도 죽일 생각이었다.
더 강해지고 더 강해져서 언젠가.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크크크, 좋은 시선이로군.’
진천백은 처음으로 경악한 반응을 보이는 니알라토텝의 시선을 느끼며 웃었다.
거지 같은 삶이었지만, 적어도 눈을 감을 때 웃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뭐, 준다면 받아가마.”
세한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분명 니알라토텝이 이것을 되찾기 위해 별 수를 다 쓰며 귀찮게 하겠지만 괜찮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라면 그럴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물건은 함부로 맡기는 게 아니란다.’
니알라토텝은 인간을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설마 진천백이 적인 세한에게 이것을 넘기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녀석은 인간의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다.
만약 녀석이 인간을 잘 알았다면 이걸 진천백에게 맡기지 않았을 테니.
“어쩌면 너라면, 정말 신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진천백은 자신의 피로 젖은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세한의 일격에 밀려난 구름의 형태 때문에 마치 하늘이 반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이 아닌, 진짜 신을 말이야.”
그렇게 말한 진천백의 눈은 서서히 감겼다.
점차 온기가 사라져가는 그를 보며, 나는 이드라를 떠올렸다.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
그가 말하는 신은, 이 게임에 참여하는 신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존재.
바로, 시스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