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 핏빛하늘을 가르다(2)
무림맹에서 열린 회합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혈교와 무림맹은 같은 배를 타게 되었고, 이 일은 전 무림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마교와 사파 측에서도 무림맹과 접촉을 꾀했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혈천신교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천신교가 움직이면 다 죽는 거 아녀?”
“혈마조차 혈천신교를 막지 못하고 죽었잖아. 무림맹도 거의 괴멸까지 갔었고. 승산이 있는 싸움인가?”
“혈교의 소교주가 상당한 고수라고 하던데…… 그래봤자 혈마보다는 약하지 않나?”
당장 어떤 객잔에 들어가도 뒤숭숭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무림 정세에 관한 이야기가 태반일 정도였다.
“혈천신교의 정예가 곧장 하남으로 올 것 같습니다.”
“흐음.”
제갈혁의 말에 무림맹주 남궁천악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혈교와 마교, 그리고 사파에도 전서구를 보내뒀습니다.”
“혈교라면 몰라도 다른 이들도 과연 올지 모르겠군.”
“글쎄요, 조금 생각이 있다면 오지 않을까요?”
애초에 정파인 무림맹과 사파가 손잡은 일은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했다.
말 그대로 무림의 미래가 오늘내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정말로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이전에는 혈천신교를 우습게 보다가 죄다 박살 나 버렸지만 겨우겨우 얻은 재도전의 기회를 날려먹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뭣보다 혈교가 뒤에서 조율을 한 덕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의 말이라면 몰라도 같은 사파출신인 혈교의 말이라면 들으리라 생각합니다.”
“혈교의 소교주가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하던가.
딱 그 짝이었다.
설마 혈교의 새로운 지도자가 그런 젊은 여인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단지…….”
“단지?”
“그녀의 사형이라는 자의 행방이 오리무중하다는 점이 의문입니다.”
“혈천신교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구나.”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건 최악.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이다.
그래도 제갈혁은 혈교를 아군이라 생각하고 움직였다.
남궁천오가 했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둘은 정파의 적은 아니라고.’
반드시 그 말이 맞아야만 했다.
제갈혁은 앞으로 있을 혈천신교의 전투를 대비하여 여러 마리의 전서구를 보냈다.
바야흐로, 무림의 명운을 건 전투가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
“선두는 내가 나서겠다.”
진천백의 말에 십존, 아니 이젠 팔존이 된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지존이 그리 말하는데 누가 감히 반발을 할 수 있을까.
“특히 건방진 혈교의 소교주는 내가 처리하마.”
상황이 꽤나 꼬인 상황이다보니 진천백의 심기도 상당히 꼬여 있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몇 달간 혈천신교는 상당히 지지부진했다.
그래도 큰 피해 없이 무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는데, 혈교의 소교주가 나타나며 상황이 이상해졌다.
‘까마귀.’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까마귀도 문제.
니알라토텝에게 녀석의 정보를 요구했지만, 그건 그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드라를 아바타로 심은 세한은 니알라토텝의 권능이 미치지 않았으며, 자신의 세계도 아닌 중원의 시스템을 멋대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십존을 되살린 것이 현재 니알라토텝이 할 수 있는 한계였다.
‘흥, 아무래도 좋다. 일존의 말로는 녀석의 무공은 보잘 것 없다고 했으니.’
조심해야 할 점은 녀석의 신인 이드라의 전승스킬이다.
허수공간을 여는 것.
놈은 허수공간을 통해 무수한 무기를 사출할 수 있었다.
거기에 신투의 말에 따르면 두 개의 신물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 정도야 상관없다.’
그가 허수공간을 가지고 있듯, 진천백도 니알라토텝으로 부터 얻은 전승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일존, 네가 맹주를 맡아라. 가능하겠지?”
“예.”
“시간은?”
“한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정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림맹주를 쓰러트리는 데 고작 한 시진이면 충분하다는 일존의 말에 진천백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른 십존도 강했지만, 일존은 그 격을 달리했다.
솔직히 니알라토텝으로부터 얻은 힘이 아니었다면 진천백도 일존을 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검(神劍), 일광(日光).’
아마 본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불렀고, 그도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의 검은 그 명칭처럼 태양의 빛과도 같았으니까.
“믿겠다. 무림맹주를 한 시진 안에 처리해라.”
“존명.”
먼저 몸을 돌려 사라지는 일광을 보며 진천백은 웃었다.
‘그래, 오히려 잘됐다. 하나하나 찾아가서 처리하는 것보단 이 기회에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게 좋겠어.’
이건 질 수 없는 싸움이다.
그건 이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는 니알라토텝도 동감했다.
“흐음.”
이제 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한번 지구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까마귀가 그대로 남은 건 상당히 의외였지만 겨우 그뿐이다.
녀석이 중원에 온 건 이제야 겨우 석 달이 조금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놈이 눈에 띄게 강해지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드라의 전승스킬만 억제한다면 김세한은 진천백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놈이 죽으면 이드라가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
니알라토텝은 인간이 흘리는 감정의 격류를 좋아했다.
특히 소중한 것을 빼앗겼을 때 흘러나오는 인간의 감정은 가히 최고였다.
인간에 물들고, 영락한 이드라도 과연 그것과 비슷한 감정을 내보일까?
아우터갓에게는 불필요한 감정이라는 걸 몸에 받아들인 이드라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니알라토텝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벌레를 짓이기는 것과는 다르다.
꿈과 환상을 다루던 마녀가, 우주를 아우르는 신의 눈물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감겨 있던 니알라토텝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인간이라면 눈이 존재했을 그곳에는 시커먼 어둠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
천하오대세가.
그리고 구파일방.
그들을 이끄는 무림맹의 맹주가 맨 앞에 서있었다.
그를 마주보고 선 인물은 총 세 명이었다.
세 개의 세력으로 구성된 사파를 이끄는 사흑련주.
무림의 한축을 담당하던 천마신교의 천마.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혈교의 소교주.
그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일 일이 앞으로 또 있을 것인가.
“이런 계집이 혈교의 소교주라니. 끌끌.”
검은 흑포를 입은 천마가 조용히 서 있는 지수를 보며 말했다.
무림맹주나 사흑련주. 그리고 천마의 사이에 끼어 있는 지수는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우선 나이만 보더라도 세 명은 노인이었으니 당연했다.
“…….”
천마의 도발에도 지수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도리어 지수의 옆에 있던 무림맹주가 앞으로 나서며 천마를 나무랐다.
“천마, 말씀이 심하시오. 이 자리를 만든 것이 혈교의 소교주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요?”
“알고 있지. 알고 있다마다. 그러니 더 부끄러운 거다.”
천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혈천신교에게서 이미 처참히 쓰러졌던 무인이었다.
만약 혈교의 도움이 없었다면 감히 이곳에 나올 수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천마를 도운 혈교를 이끄는 자가 이런 어린 여인이니 천마로선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근데 내공이 전폐됐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한 모양이오.”
“신녀가 치료해 줬다.”
“호오, 신녀?”
“머리가 길쭉한 뿔이 달렸으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네놈들은 만나지 못한 건가?”
천마의 말에 무림맹주와 사흑련주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애초에 그들은 천마처럼 무공이 전폐될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은 터라 신녀를 만날 일이 없었다.
“끙.”
천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괜히 진천백에게 박살 난 게 자신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신녀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무림맹주가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지만 아니면 어떤 상처도 낫게 할 수 있다는 신녀는 전설 속 대라신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있다면 현재 혈천신교에 비해 밀리고 있는 차이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으리라.
“백, 아니 신녀라면 올 거예요.”
“소교주?”
“사형이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까요.”
“사형?”
천마와 사흑련주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유일하게 남궁천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맹주만이 반응하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정말이요?”
“사실 이미 와 있어요. 모습을 숨기고 있을 뿐.”
“벌써 와 있다고?!”
세 명의 노인들이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신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법……이 아니라 주술로 몸을 숨기고 있으니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먼저 모습을 드러내면 표적이 될 테니 전투가 시작되면 움직인다고 했어요.”
“과연 그렇군.”
어떤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신녀는 혈천신교가 최우선적으로 죽여야 할 인물이었다.
모습을 드러냈다간 십존과 진천백이 죄다 신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수도 있었다.
“한결 다행이구려.”
무림맹주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남의 경계선에 있는 넓은 평야를 보았다.
곡식으로 가득 차 있는 푸른 들판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혈천신교의 무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진천백은 내가 상대하겠소.”
혈천신교의 무인의 숫자는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도리어 무림맹측에 모인 무인들의 수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십존이 있었고, 진천백이 있었다.
혈천신교의 선두에 서서 오만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진천백의 모습에 무림맹주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짐승과도 같은 자로다.’
원독에 들어차고 오로지 시뻘건 욕망만이 담겨져 있는 눈동자.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기다리고 있군.”
마치 먼저 덤벼보라는 얼굴이다.
어느 누가 무림을 상대로 저런 오만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비록 적이지만 진천백은 확실히 대단한 자였다.
“일존은 내가 맡도록 하겠네. 사흑련주는 무림의 정예들과 함께 다른 십존들을 상대해 주길 바라오.”
“내가 뒤처리 담당이로군.”
사흑련주는 쓸쓸한 어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림맹주나 천마에 비해 사흑련주의 무공은 한 단계 떨어졌다.
다른 십존들도 상대하기 벅찬 그가 일존과 진천백을 상대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혁아. 이렇게 하면 되겠느냐?”
“예. 하지만 많은 피가 흐를 것입니다.”
무림을 대표하는 두 명의 고수가 진천백과 일존을 상대한다지만 다른 십존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적었다. 사흑련주가 무림의 정예들을 이끌고 싸운다고 해도 공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거기다 문제는 맹주와 천마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질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림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맹주로서, 그리고 천마로서. 목숨을 걸어야만 할 때였다.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맹주의 말을 누군가가 정면에서 부정했다.
“……뭐?”
당황한 맹주가 제갈혁을 바라보자 제갈혁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 제가 한 대답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제가 했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오는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검은 무복을 입은, 어두운 인상의 남자.
“사형!”
예상외였던 건 여태 무심하던 소교주의 반응이었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싶었을 정도로 꽃과 같은 미소를 지르며 쪼르르 그에게 다가갔다.
여태 그들이 봤던 소교주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저자가 천오가 말하던 소교주의 사형이로구나.’
유심히 보았지만 그 수준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건 무공이 고강하기보단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힘을 가리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것처럼…….
“죄송한 말입니다만, 여기 계신 전부는 십존과 혈천신교의 무인들과 싸워주셨으면 합니다.”
“……뭐라?”
천마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사납게 나서려했지만 맹주는 그런 천마를 만류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젊은이는 결코 허언을 내뱉을 인상이 아니었다.
“허면, 진천백과 일존을 누가 상대한다는 말이요.”
“일존은 제 사매가 상대할 겁니다.”
“소교주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확실히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건 분명했지만 아직 어린 여인이다.
‘신검’으로 칭해지는 전설 속 고수를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그렇다면 진천백은 네놈이 상대하는 것이냐?”
세한의 말에 천마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 제가 상대합니다. 아니, 제가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구에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무공을 익혔던 것이다.
자신의 몸에 맞지 않았음에도 불과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자신의 몸에 맞게 변화시켜 익혔다.
그것은 평소처럼 효율을 따진 행동이 아니었다.
“제 스승의 복수를 위해서.”
세한이 원하는 건, 단지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