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 핏빛하늘을 가르다(1)
“흥, 별꼴이야.”
한 여인이 심통이 난 어조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가요, 팽 소저.”
“저거 보세요. 누가 보면 아주 정파의 명문 여식으로 알겠어.”
남궁소연은 팽가연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혈교의 소교주라는 신분 때문에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무인이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여색을 밝혀서야 쓰겠어요?”
“오늘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후기지수이니까요.”
문파의 장로급 인물들이나 이름난 고수가 움직이면 혈교의 귀에 들어갈게 분명한 터라 최대한 젊은 고수들로 무림맹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인물 중 이름난 고수라고 해봐야 무림맹에서 거주하는 3호법과 무림맹주뿐이었다.
“근데 정말 예쁘긴 해요. 솔직히 말하면 질투가 날 정도로.”
팽가연의 말에 남궁소연은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둘 모두 오룡사봉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지만 혈교의 소교주를 보고 그 생각이 깨져버렸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생길 수 있을까요. 피부에 잡티 하나 없는 거봐요. 분명 무공은 전혀 못할 거예요.”
“팽 소저, 그건 아니에요. 직접 봤는걸요.”
남궁소연의 말에 팽가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적당히 비방의 말을 지껄여 봤을 뿐이다.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남궁소연이 야속했지만 그녀의 성격을 아는 팽가연으로선 그저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불공평해. 대체 어떻게 저 나이에 그렇게 강해진 거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십 대 초반이라고 하던가.
중원의 여인으로선 제법 나이가 있다고 할 수 있었지만, 무림의 여인으로선 택도 없이 젊은 나이였다.
심지어 여인의 몸으로 혈교의 소교주라니.
그를 따르는 무인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것이 팽가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응? 어라? 이, 이쪽으로 와요!”
반쯤 지수를 노려보던 팽가연은 갑자기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남궁소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남자들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다가온 지수는 남궁소연과 팽가연의 사이에 뻔뻔하게 앉았다.
“안녕하세요.”
“아, 네. 소교주님. 안녕하세요.”
“그때 봤던 것처럼 편하게 한 소저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제가 어찌…….”
지수의 눈이 점차 찌푸려졌다.
혈교의 소교주이다보니 소연으로선 존대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더 중요했다.
“알겠어요, 한 소저.”
“좋아요.”
지수는 소연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팽가연의 앞에 있던 고기를 집어먹었다.
고기를 빼앗긴 충격에 울컥했던 팽가연은 애써 참으며 지수에게 물었다.
“여, 여긴 왜 왔어요?”
“성가셔서요.”
아무래도 자신을 보는 시선에 이골이 났던 모양이다.
“……그뿐이에요?”
“아뇨.”
지수는 젓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한국에서 보던 젓가락과 달리 중원의 젓가락은 무척이나 길었다.
“느낌.”
“느낌?”
“네. 그냥 그거예요.”
무슨 뜻일까.
남궁소연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지만 마땅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팽가연은 어지간히도 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비쭉 내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기분이 나쁘니 다른 곳에 앉으라는 태도였다.
천하오대세가 중 하나인 팽가의 금지옥엽인 그녀이니 웬만한 이라면 양보하고 물러섰을 거다.
하지만 지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돌멩이를 신경 쓸 만큼 그녀는 관찰력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남궁소연을 신경 쓴 건 자신을 세한의 ‘사매’라고 불러줬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매라는 호칭은 지수가 세한에게 받은 호칭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였다.
“저기, 한 소저. 제가 잠시 팽 소저를 다른 곳에 데리고…….”
남궁소연은 혹여나 팽 가연이 사고를 칠까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수의 손이 움직였다.
손에 쥐고 있던 길쭉한 젓가락을 위로 집어던진 것이다.
핑!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며 나무로 된 무림맹의 천장을 꿰뚫었다.
“……갑자기 왜?”
그런 그녀의 행동에 주변의 시선이 지수에게 쏠렸고, 가까이에 있던 팽가연과 남궁소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늘에서 떨어진 시체로 알 수 있었다.
콰쾅!!
“꺄아악!!”
젓가락에 머리가 꿰뚫린 시체가 떨어지며 길쭉한 식탁을 반으로 쪼갰다.
그것을 코앞에서 본 팽가연이 비명을 지른 건 당연지사였다.
“습격이다!”
연회에 참여하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무인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시체에 대해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팽가연만 빼고.
“누, 누구라도 갑자기 하늘에서 시체가 떨어지면 놀라요! 전 바로 앞에 있었다고요!”
“……누가 뭐래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팽가연의 모습에 지수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내심 연회의 음식이 맛있었던지라 지수의 심기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요.”
“예?”
저마다 무기를 꺼내드는 무인들을 지수가 말렸다.
“소교주, 지금 녀석이 입고 있는 청색 무복은 십존 중 칠존의 수하인 풍아대의 복장이 확실하오.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 당할 거요.”
“주변에서 느껴진 건 하나였어요. 아마 정찰을 온 거겠죠.”
지수는 주변으로 기감을 확대시켰다.
풍아대의 대원이 당한 것을 깨달았는지 다수의 적의가 느껴졌다.
이 건물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단체로 움직이면 음식이 엉망이 될 거예요.”
“……예?”
“제가 처리하고 올 테니 기다려요.”
이곳에서 싸웠다가는 혹여나 이 음식들은 물론이고 음식들을 만든 요리사, 이곳에서는 숙수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몰랐다.
그건 지수에게 중대한 문제였다.
‘나중에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봐야 해.’
세한은 고기 요리를 좋아했다.
특히 방금 먹은 고기요리는 딱 세한의 취향이었다.
“다녀올게요. 남궁 소저. 혹여나 누가 따라오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 아니, 자, 잠깐만요!”
“아, 혹시 숙수들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세요.”
남궁소연이 말리는 것보다 빠르게 지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림맹의 외벽을 그대로 몸으로 들이받아 그대로 뚫고 사라졌다.
아마 저쪽 방향에 풍아대가 있는 모양이다.
‘근데 왜 숙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수의 말에 숙수가 무슨 은어인가 고민했을 정도였다.
“……당신들은 안 말려요?”
남궁소연은 느긋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는 혈교의 인물들, 그중 대표로 보이는 우광 장로에게 말을 걸었다.
우광 장로는 남궁소연의 말에 픽 웃으며 말했다.
“풍아대 정도라면 소교주님 혼자서 충분할 거요.”
다른 혈교의 인물도 공감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태연한 모습에 무림맹의 인물들은 갑작스런 습격에도 불구하고 병장기도 꺼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먼저 들어가기로 한 오존은 어디에 있는 거지?’
칠존, 마태수는 조용한 무림맹의 모습에 먼저 풍아대를 한 명 정찰을 위해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결국 이렇게 먼저 습격할 수밖에 없었다.
정찰로 보낸 풍아대의 기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 정찰이 들켰더라도 아직 대비는 하지 못했을 터.”
도리어 깔끔하게 죽인 일격에 저곳에 맹주가 있다는 걸 확신한 마태수는 풍아대와 함께 질풍처럼 달렸다.
어차피 관후의 성격상 피를 보지 않고 돌아갈 성격이 아니다.
자신이 느끼지 못했을 뿐 어디선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자!”
마태수가 이끄는 풍아대는 그 명칭처럼 혈천신교에서 가장 발이 빠른 부대였다.
신투만큼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발이 빠르고 바람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터라 어떤 임무든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부대였다.
수십의 풍아대가 한 몸이 되어 무림맹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달려왔다.
“미친놈인가?”
풍아대를 목격했으면서도 달려오다니.
마태수는 피식 웃으며 달렸다. 굳이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수십에 이르는 풍아대의 발에 밟혀 죽을 놈이었으니까.
콰아아앙!
“으아아악!!”
수십 명과 한 명이 충돌했다.
마태수의 옆을 스쳐지나간 무언가는 뒤에 달리던 풍아대를 말 그대로 몸으로 들이박았다.
무언가와 충돌된 풍아대원들은 말 그대로 곤죽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너무나 현실성이 없는 광경에 마태수조차 할 말을 잃었을 정도다.
“……어떻게 된 몸이냐.”
눈이 좋은 마태수는 충돌하는 순간을 보았다.
풍아대는 저마다 자랑하는 각법을 사용해 달려오는 인물을 발로 내리찍었다.
상대는 그것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다리를 찢어내고 정면으로 달린 것이다.
강철도 우그러트리는 각법에도 상대는 상처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방심했던 모양이군.”
마태수는 상대를 유심히 보았다.
풍아대와 충돌한 이는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설마, 혈교의 소교주?”
붉은 안광이 어둠속에서 빛났다.
저건 혈마의 독문무공인 혈천수라공이다. 혈교의 소교주인 게 분명했다.
“그래, 잘됐구나. 네년의 목도 내가 받아가마!”
맹주를 죽이는 것보다 먼저 소교주를 죽이는 편이 유리했다.
마태수는 이 행운에 기뻐하며 지수를 향해 덤벼들었다.
다른 풍아대가 반응하는 것보다 빠르게 마태수가 대지를 박찼다.
콰아앙!!
과거, 질풍신각이라고 불렸던 그의 무공이 펼쳐지며 지수의 얼굴을 그대로 강타했다.
뿌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태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머리가 터지지 않은 건 의외였지만 목뼈가 부러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것이 마태수의 방심이었고, 치명적인 실수였다.
“……강하네요.”
“?!”
목이 뒤로 꺾여 등 뒤로 넘어간 인간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혹감에 황급히 다리를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발목은 지수의 손에 잡힌 후였다.
“당신은 저보다 빠른 거 같으니, 그냥 싸우면 조금 위험해서요.”
뚜득, 뚜두두둑.
부러진 목뼈가 맞춰지며 꺾였던 지수의 머리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붉은 눈동자가 마태수의 정면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말도 안 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부러진 목뼈를 단숨에 회복하다니. 이래서야 불사신이 아닌가.
“발버둥치지 마세요.”
“이이, 이익!”
다리를 빼려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속도에 치중한 무공인 만큼 마태수의 근력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아무리 절대강자라 불리는 십존이라도 약점은 있는 법이다.
“죽어, 죽어라!”
마태수는 허공을 밟고 다른 쪽 발로 지수의 몸을 두드렸다.
튼튼한 몸이었지만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골백번은 죽었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마태수는 운이 없었다.
상대가 천살성에 A랭크의 재생능력을 보유한 괴물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한 지수에게 타격계 기술은 무의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턱.
“당신은 몇 번째로 강한가요?”
반대편 다리도 지수에게 잡혔다.
양다리가 잡혀 추하게 거꾸로 들어 올려진 모양새가 되자 마태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왜 말을 안 해요? 거기서 십존? 인가 그렇게 부르잖아요, 당신은 몇 번째인가요?”
“네, 네년. 나는 칠존 마태수다. 질풍신각 마태수다!”
“아, 칠존이구나.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약하네요.”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마태수는 전신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이대로 몸에 선풍진기를 내뿜어 녀석의 팔을 갈가리 찢을 작정이었다.
“그럼 됐어요.”
지수의 양팔이 좌우로 움직였다.
마태수의 다리에서 나선으로 회전하는 내공이 몰아치며 지수의 살갗을 찢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 잠깐. 기다……!”
양다리를 잡고 좌우로 잡아당기는 지수의 행동에 마태수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마치 양다리를 밧줄에 묶고 소가 끌고 달리는 것처럼 다리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안 돼!!”
촤악!!
마태수의 비명과 함께 그의 신형이 반으로 찢어졌다.
최강의 고수라는 십존의 최후라기엔 너무나 처참한 최후였다.
“괴, 괴물.”
풍아대의 인물들은 그 광경을 보며 차마 도망치지 못했다.
자랑인 다리도 힘이 풀려 덜덜 떨렸다.
지수의 붉은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럼 뒤처리도 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지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를 보며 상큼하게 손을 흔들었다.
***
“지수도 끝난 것 같군.”
세한은 까마귀의 눈을 보며 풍아대를 처리하는 지수를 확인했다.
지수가 너무 쉽게 이겨서 그렇지 마태수는 굉장한 고수였다.
솔직히 세한으로선 자신이 상대한 상관후보다 마태수가 상대하기 힘들었다.
마태수는 극도의 기교파였고, 상관후는 그 별호처럼 패도적인 무공을 사용하는 자였다.
문제는 세한이 패도적인 무공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혈천수라공을 익혔다는 점이다.
“힘 대 힘의 싸움도 제법 재밌었어.”
아직도 팔이 얼얼했다.
린과 백설이, 그리고 지수의 충고로 완성된 세한의 혈천수라공은 혈마의 그것처럼 패도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직하고, 그리고 몇 배의 무거움이 있었다.
세한은 시체로 변한 상관후의 시체를 보았다.
그의 신체의 절반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처리한 건 두 명.”
여덟이 남았다.
하지만 하나하나 처리할 기회는 이제 없었다.
두 명의 십존이 죽었고, 무림맹과 혈교의 회합에 대한 소문도 전 무림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때부터는 속도의 싸움이다.
모든 무림인들이 힘을 합쳐 혈천신교와 전쟁을 벌이려 할 테고, 혈천신교는 그것을 막으려하겠지.
방금 싸움으로 혈천수라공의 9성에 오를 수 있었다.
놀라운 속도였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할 수 있겠지.”
세한은 뒤처리를 끝내고 무림맹으로 향하는 지수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가 정면 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