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 수라(修羅)(4)
무림맹의 본산은 하남에 있었다.
혈천신교의 싸움으로 반쯤 무너져가던 무림맹이었지만, 최근 나타난 ‘신녀’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혈천신교의 견제가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터라 그 사실은 되도록 쉬쉬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말이다.
무림맹의 건물 내에선 한 무인이 같은 장소를 맴돌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를 본 다른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궁 형, 왜 그리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고 있소.”
“아, 혁이로군. 언제 왔나?”
“방금 왔소이다. 회담이 코앞이라 긴장한 것이요? 아니면…….”
남궁천오에게 말을 건 이는 제갈혁이었다.
천하오대세가에서 그나마 무사한 가문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장남이었고, 무림맹의 차기 군사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혹시 혈교의 새로운 소교주 때문이 아니요?”
“……흡!”
“크크크. 역시 그럴 줄 알았소이다.”
혁은 천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최근 무림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라면 바로 혈교의 소교주였다.
“두 달 전에 갑자기 나타난 혈교의 소교주. 그때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 남궁 형이었으니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테지.”
“끙.”
“들은 바로는 경국지색이라 불리며, 무림제일미라 칭해질 만큼 아름답던데 그게 사실이요?”
무림맹이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건 혈교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였지만, 혈천신교라는 공공의 적 앞에서는 힘을 하나로 모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이빨을 드러낸다는 건 공멸을 뜻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무림맹에 직접 찾아온 혈교의 소교주는 등장은 큰 화제가 되었다.
혈마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한 혈교에서 갑자기 소교주가 등장할 줄이야.
더군다나 대단한 고수에, 미녀라고 하니 화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내 생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았어.”
“네 명의 봉황과 비교하면 어떻소?”
“여러 의미로 비교도 되지 않네.”
남궁천오는 허언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성에게 무심한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무래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온다고 했으니 꼭 봐야겠구려.”
제갈 혁은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소교주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고수가 뚝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혹시나 혈천신교에서 연막을 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의문인 점이 하나 있어.”
“의문?”
“그래, 그때 분명 내가 만났던 건 혈교의 소교주…… 그러니까 한 소저 말고도 남성이 하나 더 있었지. 근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더군.”
“그렇게 남궁 형이 말하는 거보니 그도 상당한 고수였던 모양이요?”
“그건 모르겠네. 그가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
당시 흑혈대와 싸웠던 건 소교주였지만, 그녀를 지켜보던 남성 역시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한 소저는 그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단 말이지.’
그녀가 소교주라면,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혈마뿐이다.
하지만 남궁천오는 혈마가 죽은 사실을 그날 확인했으니 그 남자는 혈마일 리가 없었다.
당시 대충 둘러댔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그는 소교주를 이렇게 불렀다.
“그는 한 소저를 자신의 사매라고 칭했네.”
“사매요? 그럼 그가 소교주의 사형이라는 뜻입니까?”
“그래.”
제갈혁은 남궁천오가 왜 의문을 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형이 있었음에도 그가 소교주가 된 것이 아니라, 사매인 한 소저가 소교주가 되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둥둥둥!
그때 마친 건물 밖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오늘 오기로 한 혈교의 인물들이 도착했다는 뜻이다.
“딱 맞춰 왔구려. 남궁 형도 가시겠소?”
“바로 가지.”
천오는 무복을 정돈하고 밖으로 나갔다.
무림맹의 입구에는 붉은 무복을 입은 수십의 인원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앞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혈교의 소교주는 소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아니, 도리어 소문이 못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 달 만이요, 소교주.”
그런 소교주를 맞은 건 현 무림맹의 맹주인 검선 남궁천악이었다.
남궁 천오의 조부인 그는 무너져 가는 무림맹을 이끌고 혈천신교에 대항한 인물이었다.
무공도 강고했지만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정치 수완을 가진 자였다.
“그러네요.”
외모만큼이나 청아한 목소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조금의 위축도 없는 담대함이 과연 혈교의 소교주다웠다.
“허허, 회합은 앞으로 3일 후에 열리니. 그동안 맹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오.”
“네.”
지극히 단답이라 건방져 보일 만도 했건만 누구하나 나서는 인물이 없었다.
그녀의 무심한 눈이 주변을 훑자 가슴을 움켜쥐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품은 자가 없었으면 좋겠군.”
“남궁 형,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을 마음에 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소?”
“으음, 이미 임자가 있는 여인이라 그러네.”
“그게 정말이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한 소저의 곁에는 사형이라 자칭한 남성이 하나 있었다고. 한 소저는 대부분 관심이 없는 눈으로 보지만 그만은 달랐지.”
“으음.”
제갈혁은 혈교의 소교주에 대한 정보를 할 줄 추가했다.
해당 남성에 대해선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소교주가 마음을 품은 인물일 줄이야.
‘그가 핵심인지도 모르겠어.’
정작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답답할 지경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신녀’를 데리고 다니는 남성이 남궁천오가 말하던 자와 흡사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끄응, 머리가 아프군.’
하나부터 열까지 이쪽이 약자인데다 정보도 없으니 제갈혁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일밖에 없었다.
물론 대비한다고 해서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빨리 돌아가고 싶다.’
지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방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그냥 회합이고 뭐고 빨리 처리하면 되지 왜 3일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회합이고 뭐고 세한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가 부탁한 일이었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까마귀다.’
창밖으로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저건 분명 세한이 이곳을 감시하기 위해 보내둔 까마귀인 게 분명했다.
‘이제 두 달째……. 아슬아슬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세한의 혈천수라공은 두 달째에 접어들자 8성의 성취를 이루었다.
경악할 정도의 속도였지만 이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혈마의 심득, 그리고 옆에서 지수와 린, 그리고 백설이의 도움.
그리고 세한 본인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뿐, 혈마의 초식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형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한 본인도 이번 일로 처음 알았을 정도였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린과 백설이는 아이들이라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혹시’라는 걸 지수는 언제나 염두하고 있었다.
‘둘 다 지금이면 이길 수 있어.’
문제는 린이 다 성장한 이후다.
알데바란과 싸우던 모습을 보면 미래의 지수가 린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미래의 린은 분명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왜지?’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로 미래의 자신을 불러올까 생각해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미래의 자신이라면 답을 알려줄 수 있을까?
똑똑.
“누구?”
“30분 후 연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알겠어요.”
혈교의 무인이 짤막하게 전달하는 말에 지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귀찮지만 소교주의 일은 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세한에게 할 말이 늘어나지.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분명 세한이 칭찬해 줄 거다.
지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아무래도 정말인 모양이군. 무림맹과 혈교가 회합을 가질 모양이야.”
“우리만 가도 되겠소? 다른 십존에게 이야기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하는데.”
두 명의 남성이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 무림맹을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무복과, 청색 무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강대한 기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다 일존이 움직이면? 우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할 테지. 먼저 일을 처리하고 말하는 편이 이득이다.”
“무림맹에는 검선이 있소.”
“검선뿐이지. 그리고 혈교의 소교주라는 애송이. 비밀리에 회합을 진행한 탓에 대단한 고수들은 부르지 않은 모양이더군. 몇몇 후지기수와 무림맹주 정도만 조심하면 된다.”
이곳에는 십존 중에서도 둘이 있었다.
오존(五尊) 상관후.
칠존(七尊) 마태수.
둘이 이끄는 무인들과 함께 무림맹을 습격한다면 맹주와 소교주를 죽이는 건 간단했다.
“그렇다면 지존도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일존은 무리지만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은 자신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진천백이 십존과의 싸움을 막은 터라 그로선 이런 기회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역사에서는 내가 그놈들보다 저평가 받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다르다.’
강한 힘,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지존과 그를 진인으로 삼은 신이라면 분명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경지로 인도할 것이다.
“마침 연회가 열리는 모양이니 바로 가면 되겠어.”
“그럼 맹주만 죽이고 나오도록 하는 거요.”
“헛소리. 혈교의 소교주까지 처리한다.”
그렇게 말한 오존, 관후는 들었던 혈교의 소교주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소교주의 미색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데. 제대로 즐길 수 있겠어.”
낄낄 거리며 웃은 관후는 태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갈 테니, 너는 저쪽으로 돌아 뒤에서 습격해라.”
“알겠소.”
아무리 설득해도 그가 들어먹을 기색이 보이지 않자, 마태수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내심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끄는 ‘풍아대(風牙隊)’와 함께 사라지는 태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관후는 슬슬 자신도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
“자, 우리도 이동해야 하니 움직이자!”
그가 이끄는 무인들은 태수의 풍아대처럼 특별한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관후와 마음이 맞는 무인들로 구성된 살육집단에 불과했다.
세간에는 그런 그들에게 광살자라고 부르며 비난했지만 관후의 입장에서는 칭찬에 불과했다.
“뭐야, 이놈들 왜 대답이 없어?”
기쁨의 외침이 들려오리라 생각했지만 숲은 기묘할 정도로 적막했다.
“뭐지?”
분명 이곳에 있었을 기척도 사라져 있었다.
십존인 그가 사람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불러도 대답하는 놈은 없을 거다.”
“……!”
관후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숲속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한쪽은 금색, 다른 한쪽은 적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새까만 무복을 입었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또렷하게 보는 것조차 힘드리라.
“네놈은 누구냐.”
“네 친구들 다 죽인 사람.”
도발하는 말이었지만 관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방진 놈이로군. 상당한 실력이지만 본좌에게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아나?”
“패악광마(敗惡狂魔).”
새까만 남성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너무 간단히 답을 말해서 도리어 관후가 할 말이 없어졌을 정도다.
“맞지? 한 50년쯤 전에 죽었다고 하던데.”
“……그걸 어떻게.”
“정보라는 게 원래 좀 중요하잖냐.”
무공을 익히고, 그리고 무림의 정보를 모으고.
세한의 지난 두 달은 바빠서 미칠 정도였다.
다행히 세한에게는 커뮤니티가 있었고, 십존에 대한 정보는 중원의 커뮤니티에 아주 세세하게 올라와 있었다.
“건방진 놈. 제법 실력이 있긴 한 모양이다만, 겨우 그뿐이지.”
“그야 이제 배우기 시작한 지 두 달 됐으니까.”
“뭐?”
두 달이라고?
관후는 세한의 수준을 가늠했다.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자였다.
흔히 말하는 무림 십대 고수도 가볍게 들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달 안에 이룰 수 있는 경지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중원에 존재하는 무림인들은 죄다 혀를 깨물고 자살해야 하리라.
“농이 지나치구나!”
“진짜인데,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세한의 손에 흉측한 형태의 검이 잡혔다.
마검 다인슬라이프.
그것은 사용자의 힘을 몇 배로 증폭시켜준다.
뼈를 깎는 단련을 사용한 탓에 대다수의 스킬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정신 약체 내성 스킬은 패시브 스킬인지라 제대로 발동하고 있었다.
“내가 말이야, 조금 실전 경험을 할 필요가 있거든.”
조금 있으면 혈천수라공 9성에 오른다.
어마어마한 속도였지만 아직 부족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혈천신교와 정면으로 붙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회합이 끝나면 혈천신교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한이 실전을 경험하기란 요원한 일이었으니 지금 이 상황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봐도 좋았다.
“네, 네놈은 누구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다인슬라이프는 마검이었기에 혈천수라공과 잘 맞았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살기에 관후는 몸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그건 세한이 자신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치 그의 모습이 ‘혈마’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수라(修羅).’
혈천신교에서는 혈마 진천웅을 그렇게 불렀다.
비록 그를 죽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다수의 십존이 지금 조용한 것도 진천웅을 죽이며 입은 피해를 전부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관후는 지금 세한에게서 그때 보았던 혈마의 모습을 보았다.
“죽을 각오로 덤벼라.”
세한의 한쪽 눈이 붉은색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그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