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63화 (163/332)

# 163

163. 수라(修羅)(3)

중원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 동안 우리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활동해야만 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혈천신교의 눈에 띄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보니 최대한 물밑에서 움직여야만 했다.

다행히 백설이의 활약 덕에 큰 문제는 없었다.

중원은 마법이 그렇게 발전하지 않은 곳이었기에 백설이의 마법을 사용하면 모습을 감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40퍼센트.’

45퍼센트에서 5퍼센트가 더 먹혔다.

그래도 3달간 버틴 것치고는 잘 버틴 거다.

백설이가 큰 부상을 입은 무인들이나, 무공이 전폐되어 있던 고수들을 회복시킨 덕에 무림맹이나 마교도 어느 정도 힘을 회복했으니까.

‘그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란 말이지…….’

갑자기 반항이 거세진 무림에 혈천신교가 사태를 파악하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덕이다.

아무리 반쯤 무너진 무림이라고 해도 그 숫자가 숫자다보니 혈천신교도 무작정 힘으로 누를 수가 없었다.

본디 혈천신교의 힘은 십존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급속히 거대해진 혈천신교로선 자신들의 거대한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거는 대략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때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 있는 하얀 벽에는 작은 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벽에 비친 영상에는 여신과도 같은 복장을 한 린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니?”

「잠깐만요, 제가 하나하나 보여드릴게요.」

현재 린은 올림포스에 있었기에 헤르메스가 준 아이템을 통해 연락이 가능했다.

올림포스와 직통으로 연결시켜, 영상을 보여주는 장치인지라 나는 린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바로 혈천수라공을 내게 맞게 바꾸는 작업을 말이다.

“음, 저는 여기서 좀 더 마력, 아니 내공을 많이 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상에 비치는 움직임은 린의 움직임을 본 백설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설이는 태생이 기린이며, 심지어 린의 유전자를 촉매로 태어난 존재이기에 무공을 보는 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내공 더 넣으면 다음 초식에서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아.」

“아뇨, 조금은 딱딱해도 괜찮습니다. 도리어 이런 유연함은 혈천수라공에 맞지 않습니다.”

「뭐어?」

다만 문제는 둘의 재능이 워낙 뛰어난 탓에 사소한 부분으로도 쉽게 부딪친다는 점이다.

수련동에 들어온지 벌써 2주가 넘었지만 이런 부분은 내가 어떻게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냥 백설이의 이야기만 들을 걸 그랬나.’

무림의 명숙들을 어느 정도 치료한 뒤, 백설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슬슬 혈천신교에서도 백설이의 동향을 쫓는 터라 한동안 밖에 나가지 않는 편이 안전했으니까.

그래서 그동안 내가 익히고 있던 혈천수라공을 조금 손볼겸 린과 백설이를 연결시켜 준 건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자강두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

과연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기린인 백설이는 초식보다는 내공을 극도로 활용하려고 했으며, 반대로 린은 내공은 최소한으로 이용하며 효율적으로 초식을 사용하고자 했다.

둘 다 훌륭한 방법이다.

아마 혈마가 본다면 자신의 무공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며 껄껄 웃었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나도 저 둘 사이에 끼어들기 애매했다.

혈마의 심득은 가지고 있고 무공에 이해도도 제법 높다고 자신했지만 무공을 창조하고 개선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다.

‘단지…….’

나는 둘의 대화에서 하나의 문제점을 찾았다.

우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야기가 평행선을 이루니 한번 끼어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둘 다 별로예요.”

하지만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빠르게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지수, 너 언제 왔냐?”

“방금요.”

언제 왔는지 지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별로라고요? 지금 초식에서 이보다 나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천살성의 특성을 살리면서 활용하기엔 이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천살성치고는 너무 부드럽습니다.”

「뭐어?」

어린아이처럼, 아니 둘 다 어린아이지.

아무튼 티격태격 싸우는 둘의 모습에 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제가 세한 오빠에게 익혔던 혈천수라공보다 한 단계 발전된 형태고, 상대적으로 살기가 적어 세한오빠가 사용하기는 좋은 것 같아요.”

「그쵸? 언니?」

“처음에 별로라고 했던 걸 벌써 잊었습니까?”

「너 올림포스로 올래? 여기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

“린이 여기로 오는 게 빠를 겁니다. 저는 바쁜 몸이라서.”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백설이의 말에 린이 부르르 떠는 게 영상에 보였다.

얘네 둘 사이가 좋은 가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투기도 하는 구나.

“대단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한 오빠에겐 별로 맞지 않아요.”

「왜요?」

“지닌바 능력이 다르니까요.”

육체적인 능력에서 린은 인류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하다.

백설이의 경우엔 그보다 육체 능력이 떨어지지만 마력 운용은 린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

당연히 그것에 맞춰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둘의 대화에서 얻을 것이 있을까봐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도리어 이 점에서는 지수가 정확했다.

“세한 오빠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못해요. 그러니 전 여기서 이렇게 하는 거 좋을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방금 전 린이 했던 건 그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린이 했던 것과는 분명 뭔가가 달랐다.

「언니, 저는 조금…….」

“흠이 많아 보인다고요? 그게 맞아요.”

지수는 나를 돌아보았다.

“인간은 린처럼 완벽할 수 없어요. 린의 기술은 완벽하지만 도리어 그 점이 지나칠 정도에요. 세한 오빠의 골격이나, 마력운영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요. 따라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세한 오빠의 몸에는 완벽히 맞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나를 돌아보았다.

방금 자신이 했던 걸 그대로 따라해 보라는 뜻이다.

‘지수도 보통이 아니라니까.’

기존에 익혔던 걸 조금 다르게 사용할 뿐이라 나는 어렵지 않게 따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고 나니 몸이 한결 부드럽고, 혈천수라공에 담긴 살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을 죽이는 것에 특화된 혈천수라공에서 살기가 아닌, 뭔가 다른 느낌이 느껴졌다.

혹시 몰라 린이 했던 것도 따라해 봤지만 뭔가 요철이라도 걸린 것처럼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무공을 익히는 거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지수의 초식을 따라했던 탓인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지수의 초식이 몸에 맞네.”

「그, 그런 것 같네요.」

“저도 동감합니다.”

린과 백설이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그런 두 아이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모습이다.

“저는 둘보다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부족할지 모르나, 세한 오빠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으니까요.”

“하하…….”

그렇게 말한 지수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물론 나는 마른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고맙긴 한데 조금 무섭다.

「다, 다음에는 그것도 고려해야겠네요. 다음에 다시 보여드릴 테니 언니도 꼭 봐주세요.」

“저도 돕겠습니다.”

「좋아!」

방금 전까지 싸우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둘은 단번에 의기투합했다.

아무래도 방금 전 지수에게 패배 아닌 패배를 경험한 게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나야 둘이 노력해 주면 좋지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현재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어?”

“조금 있으면 모두가 무림맹에서 한번 회합을 가질 것 같아요.”

“사파 쪽도?”

“사파뿐이 아니라 마교와도 이야기가 끝났거든요.”

“빠르네.”

“그간 활동한 게 있으니까요.”

우리가 손댄 건 무림맹이 속한 정파뿐이 아니다.

사파, 그리고 마교와 북해빙궁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다만 아직 시간이 짧아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대략 한 달 정도 걸리겠군.”

“네. 오빠는 그때까지 하실 수 있어요?”

“해봐야지.”

대략 2주간 내 혈천수라공은 3성에 이르렀다.

대단한 성과처럼 보이지만 이미 혈마에게 얻은 심득과 어느 정도 형을 익혔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느리다.

거기에 나는 지금 스킬 ‘뼈를 깎는 단련’을 사용한 상태였다.

다른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패널티가 적용된 터라 수련동이 아닌 다른 곳에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외적인 일은 모두 지수가 처리하는 상태였다.

“미안, 조금 더 네가 해줘야 할 것 같아.”

“괜찮아요. 이것도 나름 재밌거든요. 다들 저를 무슨 경국지색처럼 취급해 줘서.”

확실히 이곳에서 지수는 가히 천하제일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미의 기준이 아무래도 지수에게 딱 들어맞는 모양이다.

긴 흑발에 새하얀 피부.

거기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인.

거기에 무공까지 동 나이 대에 상대가 없을 만큼 뛰어나니 무림에서 활동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별호가 떠돌 정도였다.

“그리고 오빠는 그 외에도 바쁜 게 많잖아요.”

무공을 익히는 것 외에도 까마귀로 정찰을 하여 중원의 상황을 파악하거나, 지구의 게임에 대한 정보도 지속적으로 이드라에게 전달 받고 있었다.

‘콜라보 퀘스트가 뒤로 밀린 만큼 다른 메인 퀘스트가 이어서 시작되려고 한다고 했지.’

아무리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지만, 저쪽의 시간이 아예 흐르지 않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위험한 건 똑같았다.

‘조금 있으면 태평양에서 그것이 떠오를 거야. 이번 일에 니알라토텝이 관여한 만큼 거기에도 뭔가 장치를 해뒀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의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르뤼에’가 떠오르기 전에 도착할 수 없을 테니까.

***

“소교주님!”

수련동을 나온 지수의 눈에 우광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우광의 곁에는 다른 혈교의 장로도 한 명 서 있었다.

우광이 흥분하면서 세한에게 달려들 당시 옆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던 다른 장로였다.

소교주라는 호칭은 여전히 어색하긴 했지만, 그대로 순응하기로 했다.

일을 처리할 때 소교주라는 칭호는 제법 강한 힘이 됐고, 무엇보다 세한이 직접 자신에게 준 호칭이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뭐죠?”

“무림맹에서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회합에 관한 일인 모양이군요.”

“예.”

우광은 지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었다.

세한이 신투와 싸우는 동안 지수에게 교육을 받았던 그는 그녀를 상당히 두려워했다.

‘마인이라는 건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지.’

흔히 마교나 혈교의 무인들을 칭할 때 마인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마(魔)에 몸담고 있는 인간이란 뜻이다.

특히 악마와 계약한 이들이 많은 마교에서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우광 역시 악마가 직접 계약을 제안할 정도의 고수였지만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어린나이에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를 이루신 건지…….’

신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인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악마와 계약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저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건 우광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가 우광을 비롯한 혈교의 장로들을 섬뜩하게 한 건 그 시선이었다.

“마치 타인을 무가치한 돌멩이로 보는…….”

“예?”

“헉!”

무심코 입 밖으로 속마음을 중얼거린 우광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옆에 서 있던 다른 장로도 당황한 눈치였다.

“우, 우광 이 사람이 요즘 피곤한 모양입니다.”

이름이 아마 비웅, 이라고 부르던가. 혈교에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장로다보니 우광을 감싸는 모습이 필사적이었다.

“돌멩이라…….”

지수는 방금 그가 한 말을 중얼거렸다.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우광의 말은 지극히 정확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 그렇습니까.”

비웅은 지수의 말에 내심 상처를 받은 눈치였다.

차기 소교주라 불리는 지수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 아무래도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지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옅은 한숨을 쉬었다.

소교주라는 직함은 마음에 들지만 타인의 위에 선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착한아이’ 특성을 가지고 있는 지수는 방금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을 대처할 말도 생각해 두었다.

“돌멩이라도 마음을 두지 않는 건 아니에요.”

“예?”

“상대를 어떻게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길가의 돌멩이에도 얼마든지 마음을 담고 사랑을 주는 건 불가능하지 않으니까요.”

“돌멩이에…….”

“마음을 담는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지구에는 돌을 애완동물이라고 키우던 사람도 봤다.

그게 진심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하고, 마음을 담으려는 행동이 중요한 거니까요.”

“……마음을 담는다.”

우광은 지수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수의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귀기마저 서린 것 같았다.

“응?”

그러더니 갑자기 바닥에 가부좌를 틀며 앉았다.

갑자기 운기를 시작하는 우광의 모습에 지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우광, 아니 심 장로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입니다. 허허. 역시 소교주님이군요. 그런 말로 깨달음을 주실 수 있다니. 저는 우매해서 뜻을 얻지 못한 게 아쉬울 뿐입니다.”

“…….”

비웅은 턱에 길게 늘어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가부좌를 튼 우광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실시간으로 경지가 발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친우가 늙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물론, 이런 비웅과 달리 지수는 황당할 뿐이었다.

‘내가 뭘 말했다고?’

그냥 되는대로 말했을 뿐이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대충 지어낸 말을 지껄였을 뿐인데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단다.

‘역시 무림인은 이해할 수가 없어.’

지구에서 온 지수로선 도무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깨달음이랍시고 말 몇 마디에 강해지다니.

지수의 입장에선 뛰어난 재능으로 뭐든 익히는 린보다 이쪽이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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