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62화 (162/332)

# 162

162. 수라(修羅)(2)

기본적으로 펫인 백설이는 내가 원한다면 어디서든 소환이 가능하다.

단지 아직 어리다보니 되도록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 백설이를 부르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뿌, 뿔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백설이를 본 우광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야 하얀 머리칼에 이마에는 긴 뿔이 자라난 소녀는 처음 봤을 테니까.

“이 아이는 인간이 아니라 기린(麒麟)이다.”

“기린……? 제가 아는 그 기린이 맞습니까?”

“그래.”

이런 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다.

나는 어벙하게 서있는 백설이를 불렀다.

“백설아. 저기 보이는 애 치료 가능하냐?”

“예? 아, 네. 가능합니다. 근데 여기는…….”

“중원이야. 지구는 아니지. 너한테는 이쪽 공기가 더 맞잖아?”

“그……렇긴 합니다.”

여전히 백설이는 상당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이곳으로 불려왔으니 꽤나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부상자는 어디에 있지?”

“이, 이쪽입니다.”

우광은 힐끔힐끔 백설이를 보며 우리를 안내했다.

다친 무인들은 병동과 같은 장소에 몰아두고, 지속적으로 치료 중인 것 같았다.

‘상황이 심각하긴 하네.’

건물이 상당히 컸는데, 그 안을 부상자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처도 제각각이었지만 대체로 심각한 사람들이 많아, 이대로 두면 상당수가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어때, 치료할 수 있겠어?”

“네. 최근에 신유화 님에게 배운 것도 있는 터라 문제없습니다.”

성녀 신유화에게 배웠다면 확실할 것이다.

‘백설이도 재능충이니까.’

무안단물이나 마찬가지인 린의 유전자를 촉매로 태어난 기린.

마법에 한해서는 린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습득력을 자랑했다.

신유화는 물론이고 모르간에게서 배운 기술도 많은 터라, 중원에서 백설이를 능가하는 마법사는 없을 것이다.

“치유의 바람.”

백설이의 뿔이 하얗게 빛났다.

그러자 앓는 신음소리만 들리던 병동 내부에 옅은 바람이 불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무수히 작은 입자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며 병동에 있는 사람들의 몸을 훑었고, 그럴 때마다 고통에 찬 비명이나 신음이 점점 사라져갔다.

찢어졌던 피부가 아물고, 부러진 뼈가 맞춰졌으며 피를 타고 흐르던 독이 해독되었다.

더불어 병동에 가득 차있던 온갖 더러움과 병균이 창밖으로 쓸려나갔다.

“이,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인가.”

치료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병동에 있는 무인들이 치료되고 있었다.

무인뿐이 아니라 병동 내부까지 깔끔하게 청소되고 있었다.

“아마 하루 안에 모든 치료가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힘들진 않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저는 기린이니까요.”

무뚝뚝하게 대답한 백설이였지만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 꽤나 뿌듯한 것 같았다.

‘실전은 사실상 거의 처음이긴 하지.’

린이 최근 상당한 활약을 한 탓인지 백설이도 내심 뭔가를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 정말로 성수인 겁니까?”

순식간에 달라진 병동의 모습에 우광이 더듬더듬 말했다.

이미 처음 보여주었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성수 기린이 맞다. 그러니 그에 준한 대우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맡겨두십시오, 소교주님.”

“소교주 아니라니까.”

아무튼 방금 백설이가 보여준 광경 때문인지 주변에서 나를 보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혈천수라공을 가지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무인이었다고 치면, 이제는 마치 구세주라도 보는 시선이다.

“우선 지금은 혈교의 힘을 회복하는 게 먼저다.”

“……혈천신교와 싸우실 겁니까?”

“왜 당연한 걸 묻지? 너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아, 아닙니다!”

우광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혈천신교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았다.

‘확실히 일존이라는 녀석은 보통 놈이 아니었어.’

녀석 하나라면 나와 지수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지만, 거기에 다른 아홉 명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거기다 진천백이 일존 이상의 강자라면 혈교 혼자서 혈천신교에 싸움을 거는 건 자살행위다.

‘그렇다면…….’

머릿속에 남궁천오가 떠올랐다.

현재 몇 남지 않은 무림의 기둥 중 하나, 남궁세가 출신의 무인.

대략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

“혈천수라공을 알려달라고요?”

지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옆에 쪼그려 앉아있던 백설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혈천수라공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는 있지.”

말 그대로 알고만 있을 뿐이다.

혈마의 심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혈천수라공 자체가 내게 그다지 맞지 않는 무공이었다.

“나는 천살성을 빌려왔을 뿐이니까.”

혈천수라공을 익힌다, 라는 최소 조건은 충족하지만 지수처럼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 건 무리였다.

“여태 익히지 않으셨으면서 갑자기 왜?”

“근접전을 좀 더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거든.”

원래는 지구로 돌아가 다른 인물들을 데리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브 퀘스트를 받고, 이곳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다른 터라 당장 돌아다니기가 어려워졌다.

잠깐 지구에 가더라도 이곳에서는 며칠이 흐를 테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이곳의 일은 온전히 이곳에 있는 지수와 백설이, 그리고 나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어쨌든 천살성을 공유받고 있으니 혈천수라공을 익힐 수 있겠지. 다만 내게 맞게 좀 더 개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요…….”

“너도 있고 백설이도 있잖아.”

그리고 혈마가 내게 언질을 준 것도 있었다.

무공이라는 건 정답이라는 게 없다고.

자신이 익힌 혈천수라공은 결국 혈마의 육신에 맞게 변화되고 맞춰진 것이다.

지수도 마찬가지.

그녀의 혈천수라공은 혈마의 것과 달라지고 있었다.

극성에 도달할수록 무인의 신체에 맞게 무공이 변화하는 것이다.

“백설이와 린은 보는 눈이 비슷하잖아?”

린은 상대의 무공을 한번 보면 바로 습득할 수 있다.

그것도 단순히 습득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부분은 고쳐 자신에 맞게 익힌다.

린이 할 수 있다면 백설이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린의 엄청난 습득력과 재능은 특성의 영향도 있지만.’

그렇지만 백설이는 기린.

선천적으로 오성과 타고난 천성이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존재이니 얼추 비슷한 것이 가능할 거다.

“해, 해보겠습니다. ……조금 자신은 없지만요.”

백설이가 작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하지만 지수는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금 위험할지도 몰라요.”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야.”

거기에 뼈를 깎는 단련을 사용한다.

스킬이 지속되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극도로 줄어들지만 혈천수라공을 단시일 내에 익히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뼈를 깎는 단련이 지속되는 동안 적용되는 건 천살성, 그리고 이드라의 전승 스킬 몇 개.’

우선 기존에 내가 익혔던 스킬은 전부 사용할 수없다.

심지어 아이템을 통해 적용된 스킬도 불가능하다. 대신 혈천수라공의 선행스킬인 천살성과 이드라로부터 받은 스킬 몇 가지는 사용이 가능했다.

물론, 이드라의 스킬도 상당히 제한되어 허수공간과 같은 엑티브 스킬은 사용할 수 없고, 환상이나 거짓을 꿰뚫어보는 눈 같이 패시브 스킬정도나 사용이 가능했다.

‘일주일이 지나면 언제든 해제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일주일 안에는 무슨 수를 써도 해제할 수 없는 양날의 검이다.

나로서도 이건 상당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당장 가장 빠르게 내가 스펙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혈천수라공을 익히는 것이었다.

혈마에게 들었던 것.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1회차에서 무공의 형(形)을 익혔던 건 이것이 유일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익혀둘걸.’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이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할지도 몰랐지만, 지구와 시간이 다르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좀 길게 있어도 지구에서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기본적으로 무공의 단련은 일주일 단위로 진행한다. 혈교에는 소교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수련동이 있어. 그곳에서 나와 지수, 그리고 백설이가 들어갈 거야.”

“일주일이 지나면요?”

“계속 이어서 하던지, 처리할 일이 있으면 잠시 나와야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군요.”

백설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석 달. 최대 반년은 예상한다.”

지구의 시간으로 치면 일주일이나 이주일 정도의 시간일 것이다.

커뮤니티를 통해 시간을 대조해 보니 그 정도의 차이가 났다.

“근데 오빠.”

“엉?”

“왜 그렇게 해야 되나요? 그냥 돌아가도 상관없잖아요.”

지수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하기야 내가 위험을 떠안고 혈천신교와 싸울 필요는 없다.

중원에서 혈천신교를 박살 내는 것보단 지구에서 싸우는 편이 안전하니까.

“니알라토텝은 내가 그렇게 하리라 생각하겠지.”

그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중원이 망해도 내게 피해가 오는 일은 없었다.

진천백은 아마 니알라토텝의 대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에 본인의 능력을 백분 활용하여 강화시켰을 것이다.

원래부터 강한 녀석을 더더욱 강화시켰으니 현재의 나로선 이길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나로선 지구로 돌아가 싸울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니알라토텝도 내가 그렇게 하리라 추측했을 거다.

그럼 놈은 중원을 정복한 후, 지구로 와서 한바탕 난리를 피겠지.

그렇게 되면 일은 단순한 콜라보 퀘스트 정도가 아니라 크나큰 재해로 커지게 될 것이다.

콜라보 퀘스트가 미뤄진 것도 아마 그런 이유.

이 콜라보 퀘스트 자체가 니알라토텝이 자신의 재미를 위해 만든 게임판인 것이다.

온갖 치트를 다 쓰고 플레이하는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

“그러니 녀석에게 알려주려고.”

다 이긴 게임을 지는 게 얼마나 빡치는 일인지를.

***

「신선이 나타났다.」

그런 소문이 중원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어떤 병이라도 치유할 수 있는 신선.

혹은 선녀라는 설도 있었다.

혈천신교에게 큰 피해를 입은 가문이나, 문파를 돌아다니며 치유하곤 했는데, 어찌나 영험한지 무공이 전폐되어 있던 검왕의 단전도 모두 회복시켰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말도 안 돼지. 누가 단전을 치유해? 대라신선이 와도 무리야.”

“근데 진짜라던데. 검왕 어르신도 펄펄 날아다니시잖아.”

“그나저나 혈천신교가 조용하던데……. 나는 당장 다시 공격할 줄 알았더니만.”

“아무래도 신선의 위치를 찾는 모양이야. 근데 늘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못잡는다고 하더군.”

갑자기 나타나서 크게 다치거나, 혈천신교에게 당해 폐인이 되었던 무림의 명숙들도 하나둘 회복되었다.

혈천신교는 그들을 다시 쓰러트리기보단 그들을 치유하고 있는 ‘신선’이라는 자를 쫓았지만 늘 놓치든지 추격하던 자가 실종되고는 했다.

당연히 혈천신교의 교주인 진천백의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이냐.’

그 까마귀라는 자인가?

하지만 니알라토텝의 말로는 까마귀는 회복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

뭣보다 상대는 여자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까마귀는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

“너도 모르는 건가?”

“음, 전혀 모르겠군. 이세계로 넘어온 플레이어는 단 두 명뿐이다. 김세한과 한지수. 둘 다 남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

아무리 니알라토텝이라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신선, 혹은 선녀라는 자가 대체 어디서 솟아났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힘으로 시스템에 관여한 것뿐이지 이드라처럼 게임을 전체적으로 쥐락펴락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무림을 공격해도 그 신선인지 선녀인지 하는 놈을 잡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죽지만 않았으면 무조건 살릴 수 있다던가.

그정도면 의술이 아니라 선술이다.

아무리 혈천신교가 강해도 계속 상처가 회복되는 무림의 명사를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십존과 진천백의 힘으로 여태 이겨왔지만, 여전히 무림에는 많은 고수들이 있었으니까.

“젠장, 거의 다 왔는데!”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무림 정복이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물 때문에 앞으로 상당히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았다.

“침착하게 해라. 어차피 네가 이긴 싸움이다.”

“그래……. 알고 있다. 어차피 내가 이길 테지. 조금 시간이 걸릴 뿐.”

반년 안에 정복할 수 있던 것이 1년이나 2년으로 늘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크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진천백은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치며 웃었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혈마의 마지막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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