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 혈교(血敎)(2)
귀주에 있는 가장 깊은 산속.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은 장소에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이 있었다.
이곳이야 말로 혈교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혈천궁,
아마 산 깊은 곳에 이런 성이 있으리라고는 무림인이 아니고서야 알지 못하리라.
“이런 진법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지수는 이곳으로 걸어오며 주위를 감싸고 있던 진법에 내심 감탄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대단한 수준이지.’
모르간이 만들었던 진법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신화시대의 마녀와 비교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다. 인간이 만든 진법 중에서는 이보다 뛰어난 진법을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내게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진법은 결국 사람을 눈을 속이는 환상을 만드는 것이니 내게 통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다만 이상하네요.”
지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요. 저희가 억지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텐데 말이죠.”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혈교의 영역에 들어온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어떤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최소 정찰을 하는 교인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나는 내 앞에 있는 거대한 문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손으로 밀었다.
문의 크기와 무게는 어마어마했지만 내가 밀자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어떤 놈이 감히 혈교의 문을 여느냐!”
그제야 반응이 되돌아왔다.
여럿의 발소리가 들리며 문을 연 우리를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상당한 고수인 건 분명했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선명한 긴장이 느껴졌다.
“네놈들은 누구냐. 또 무림맹에서 온 건가? 말했을 텐데 지금 우리는 무림맹을 도울 생각이 없다고!”
“혈마가 죽었기 때문인가?”
“…….”
“제대로 된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말이야.”
그들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혈교에는 현재 차기 교주가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방진 놈! 무림맹에서 온 것 같아 얌전히 있었더니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내가 아는 혈교라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검을 들고 덤볐을 것이다. 허리에 찬 그건 장식이냐?”
“이, 이 새끼!!”
결국 내 도발에 참지 못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검을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가히 번개와도 같았다.
붉은 기운이 어린 양팔은 그가 장법을 무기로 삼는 무인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우광! 그만두게!!”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우광이라 불린 남자의 손은 나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이 내 가슴팍에 닿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닿기 전, 손목이 누군가에게 잡혔으니까.
“내 장법을 막았다고?!”
단순히 막은 것도 아니라 손목을 잡아챘다.
이건 몇 수 위의 실력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우광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사람을 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지수가 있었다.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제법 흥미로워하는 모습이었던 지수의 얼굴은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있었다. 까맣던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며 천천히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지수의 눈동자를 우광 역시 똑똑히 보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우광은 크게 당황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수는 그가 물러서자 손목을 천천히 놨다. 다시 덤벼들지 않은 건 나와 혈마의 관계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를 향해 나는 피식 웃었다.
“뭐가?”
“지금 그 눈…… 혈천신공을 익혔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잘 아네.”
그의 말에 입구에서 우리를 막아선 무인들도 크게 술렁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혈교의 인물이다. 그들이 혈천신공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방금 지수의 몸에서 운용되던 내공은 혈천신공의 그것과 분명 동일했을 터다.
“혈마 진천웅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건방진 어조였지만 차마 그들은 내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혈천신공을 익혔다는 것은 차기 혈교의 주인뿐이었으니까.
예외가 있다면 진천백이었지만, 그는 타인에게 혈천신공을 전수해 줄 성격이 아니었다.
“……따라오시오.”
우광은 굳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방금 그가 보인 모습이라면 이미 나를 씹어먹을 기세로 덤벼도 이상하지 않았으련만 고분고분하게 말을 따랐다.
이것이 혈교에서 혈천신공이 지니는 위치였다.
***
겉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던 혈천궁이었지만 본당으로 들어가게 되지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거의 절반은 날아갔는데?’
무너진 건물이나 기둥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기다 남아 있는 붉은 혈흔들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 오며 보였던 교인들 중에 부상자도 많았으니, 아마 혈교 전력의 절반 정도가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곳이요.”
우광이 비서처럼 만들어진 석문을 옆으로 밀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넓은 공동의 한가운데로 가자, 그제야 나와 지수의 눈에 거대한 석관이 눈에 들어왔다.
“교주님은 이곳에 있소.”
석관의 위에는 한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대략 서른이 넘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젊었지만 혈마가 분명했다.
‘정말이었구나.’
정말로, 죽었구나.
가슴팍의 상처는 얼핏 보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로 보였다.
파리한 안색과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신체는 그가 이미 죽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당신은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
무림을 구하고, 초월자의 길에 들어설 운명이었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여 신위를 얻어 초상의 영역에 도달했을 혈마가 이곳에 죽어 있었다.
「나는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지. 만약 너에게도 나와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면 너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혈천신공을 사용할 수도 없는 내게 무공을 전수해 주며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알려준 것을 온전히 사용할 수도 없었을 텐데 그는 그것을 나무란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기회란 찾아온다. 분명 너에게도 그것이 몇 번이나 왔을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1회차의 내게도 분명 기회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잡지 못했다.
「허나,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지. 적어도 앞으로는 기회를 놓치지 마라.」
붉은 혈포를 펄럭이던 그의 모습과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의 말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교주가 죽을 때 뭔가 한 말은 없었나?”
“없었소.”
우광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지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지만 크게 웃으셨었지. 죽어가는 순간에도 말이요.”
“……웃었다?”
“그렇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혈마는 자신이 죽는 순간에 어째서 웃었던 걸까?
나는 죽은 혈마를 보다가 문득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나는 죽은 혈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폈다. 물론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런 내 행동에 크게 경악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네놈 교주의 몸을 욕보일 셈이냐!”
“다가오지 마세요.”
지수가 그들을 막았다.
공동 내부를 가득 채우는 지수의 살기에 혈교의 인물들은 차마 덤비지 못했다.
나는 힐끗 그쪽을 본 후, 신경을 껐다.
지금의 내 관심은 모두 혈마가 움켜쥐고 있는 손에 쏠려 있었다.
“하.”
나는 혈마의 손을 펴자 양 손바닥에는 각각 하나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왼손에는 혼(混). 오른손에는 오(烏).
“당신은 설마 본 건가?”
바로 미래를.
진천백과의 싸움에서 그는 무언가를 본 게 분명했다.
‘나를, 알고 있었구나.’
이것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까마귀 ‘오(烏)’자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 적혀 있는 혼(混)을 상징하는 존재는 하나.
기어오는 혼돈.
니알라토텝.
이번 사건은 녀석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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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 : 무림의 구원
혈마가 사라진 중원을 구하라.
진천백이 이끄는 혈천신교가 중원 전체를 차지하기 전에 구해야 한다.
남은 지역 : 45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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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가 발동했다.
기존의 퀘스트와 달리 기한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남은 지역이 표시되었다.
‘남궁천오의 말처럼 이미 중원의 절반 이상이 혈천신교에게 넘어간 상태야.’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단일 세력이 중원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십존이라는 이들은 과거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던 절대고수들이다.
그들을 상대로 혈천신교를 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뭣보다 진천백은 고금제일이라고 불러도 좋을 고수가 되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보다 강할 확률도 농후했다.
왜냐면 이 시기의 혈마도 준초월자에 근접한 상황이었으니까.
“이 새끼! 당장 교주님의 몸에서 손을 떼라!”
“왜?”
처음에 보았던 모습처럼 격하게 분노하는 우광을 향해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나는 혈마 진천웅의 제자다.”
나직한 어조로 말하자 방금 전까지 내게 향하던 수많은 살기가 크게 흔들렸다.
“미친놈. 교주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제자가 있다고 한 적이 없었다. 뭣보다 네놈들은 여태 어디 있었던 거지? 갑자기 나타난 주제에 자신이 교주의 제자라고?”
“제자는 나만이 아니야. 거기에 있는 건 내 사매니까. 그리고 사매야 말로 사부의 최고 걸작이지.”
진천웅은 내게 혈천신공을 전수했다.
그것을 내가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리라는 건 그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내게 전해준 건, 어쩌면 자신의 전인을 내가 찾으리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감이었는지, 혹은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한 정답이었다.
“다시 말하지. 나와 사매는 혈마 진천웅의 제자다.”
나는 무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런 나를 대신하여 지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영리한 지수라면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이곳에는, 쥐새끼가 하나 있었다.
“한지수.”
“알고 있어요.”
지수의 안광이 붉은빛으로 빛났다.
허공에 손을 뻗자, 길쭉한 손잡이가 지수의 손에 잡혔다.
그것을 잡아당기자 거대한 크기의 양손 둔기가 뽑혀 나왔다.
지수의 무기인 흉성의 학살자였다.
그것을 쥔 지수는 팔을 뒤로 젖힌 후 강하게 집어던졌다.
흉성의 학살자가 회전하며 공동의 천장에 있는 벽면을 강타했다.
콰과과광!!
“갑자기 무슨 짓을!”
지수가 냅다 무기를 던지니 혈교의 인물들은 크게 당혹한 기색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향해 던진 것도 아니라 천장을 향해 던졌으니 당연했다.
“어이쿠.”
하지만 이어서 나타난 인물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용하구만, 어떻게 안 거여?”
껄렁이는 말투로 사내 한 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 아는 법이 있지.”
나는 탐사 스킬과 사냥꾼의 감 스킬, 그리고 심안을 사용하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반면 지수는 단순히 감이다.
린이나 지수가 지닌 직감은 평범한 사람과 궤를 달리했다.
“시, 신투(神偸).”
우광이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는 사람인가?”
“십존 중에 하나다. 칠존, 신투 백영학.”
신투 백영학. 당연히 나는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칠존이라는 것으로 설명은 충분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잘 있게나.”
신투의 신형이 사라졌다.
시선을 올리자 이미 부서진 천장의 위로 날아올라 도망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공할 정도의 경신법이었다.
도망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혈교의 인물들은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쫓지 않는 건가?”
“신투의 경신법은 고금제일이요. 감히 누가 잡으려고 하겠소.”
애초에 이곳에 계속 숨어 있던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신투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그럼 내가 잡도록 하지.”
“제가 갈까요?”
“아니, 넌 여기에 있어. 내가 붙잡아서 데려올 테니까.”
지수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신투의 속도를 쫓는 건 아슬아슬했다.
거기다 직감만으로 쫓기엔 신투도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너는 이곳에서 기강이나 잡고 있어라.”
그렇게 말한 후, 방금 신투가 그랬던 것처럼 뚫린 구멍으로 뛰었다.
천장 밖으로 나가자 계곡 한가운데에 숨겨져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빨라봤자 다리로 뛰는 거지.”
내 등에서 날개가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림자에서 무수한 까마귀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아무리 잘 숨건, 혹은 얼마나 빠르건 내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촤아악!!
날개가 펄럭이며 내 몸이 하늘을 갈랐다. 그와 함께 그림자에서 나온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거미줄처럼 하늘에서 퍼져나가는 까마귀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곳 식으로 말하자면, 하늘에서 펼쳐진 천라지망이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