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59. 혈교(血敎)(1)
피바람이 불었다.
지수는 자신의 몸을 공격한 칼날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았다.
녀석이 보는 건 무기가 아닌 그것을 쥔 자들이었다.
손을 뻗어 미처 칼을 회수하지 못한 두 명의 흑혈대원의 팔을 잡아당기자 마치 어린아이의 팔을 비튼 것처럼 그들의 몸이 순식간에 당겨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
우드드득!!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객잔 내부에 울려 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팔을 비틀고 부러트려 흑혈대원을 바닥에 쓰러트린 지수는 그대로 흑혈대원의 목을 밟아서 꺾어 버렸다.
순식간에 혈천신교의 정예인 흑혈대원 두 명의 목숨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밥먹는 곳이라 지수가 좀 신경을 쓰나 보네.’
지수는 상대가 적이라 판단되면 결코 봐주는 법이 없었다.
사지를 찢고 머리를 맨손으로 뽑아버리는 건 보통이었다.
무난하게(?) 팔을 꺾고 목을 부러트린 건 뒤에 보고 있는 남궁천오나 남궁소연이 보고 있다는 것과, 밥을 먹는 장소인 객잔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심리일 것이다.
덕분에 흑혈대원들은 지수의 행동에 공포를 느끼기보단 분노를 느낀 모양이다.
“저런 기습하나 피하지 못하다니 멍청한 놈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모두 덤비지 않고!”
남은 여덟의 흑혈대원과 대장도 동시에 덤벼들었다.
그들의 합격은 설령 절정에 이른 고수라도 목숨을 잃을 만큼 매서웠다.
문제는 지수는 다수를 상대할수록 유리해지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바로, 천살성을.
칼날이 미세하게 베고 지나갔던 상처에서 피가 흐르며 지수의 능력치가 한층 상승했다.
지수는 무릎을 가볍게 굽힌 후, 앞으로 달렸다.
혈천신공을 익힌 지수는 혈천신공의 무공인 혈천신보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단순히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미친!”
콰아앙!!
마치 포탄처럼 정면으로 달린 지수의 행동에 검을 휘두르던 흑혈대원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검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걱!
칼날은 지수의 몸을 일제히 베고 지나갔지만 깊은 상처를 주지 못했다.
정면에서 검을 휘두른 대장의 공격조차 지수의 어깻죽지에 아주 약간 박혀 있을 뿐이었다.
“커어어억!!”
당연히 공격으로 지수를 쓰러트리지 못한 대장의 가슴팍은 휑하니 지수에게 노출되었고, 지수는 그것을 그대로 몸으로 들이받았다.
특별한 초식도, 공격도 아니었다.
그냥 달려가서 박았다.
쾅! 쾅쾅쾅쾅!!
객잔의 벽을 부수며 날아간 대장은 몇 개의 두꺼운 나무를 꺾었고, 커다란 바위에 뭉개진 찰흙처럼 처참히 처박혔다.
사지가 분해된 건 물론, 몸에서 뿜어져 나온 혈액이 바위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흑혈대의 대장이라 불리던 존재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곤죽이 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본교에 알려라!”
대장이 죽자 흑혈대의 판단은 180도로 바뀌었다.
지수에게 당장 덤비기보단 바로 몸을 빼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덞 명이나 되는 흑혈대원이 순식간에 객잔으로 빠져나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들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지만, 문제는 이미 늦었다는 점이다.
‘객잔 밖으로 도망친 건 실수야.’
지수의 붉은 눈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어졌다.
저들이 어디로 도망친 건지 확인한 것이다.
객잔 밖으로 나가면 굳이 지수가 주변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즉,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이건 대체…….”
도망친 흑혈대원을 쫓아 지수가 객잔 밖으로 나가자마자 얼어붙어 있던 천오의 입이 더듬거리며 열렸다.
남궁소연은 바닥에 목뼈가 부러져 차갑게 식은 흑혈대원의 시체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한 소저가 이렇게 고수였나요?”
“자기 몸을 지킬 정도는 되죠.”
“저 경지를 그렇게 표현하시다니 당황스러울 뿐이네요.”
남궁소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방금 보았던 장면을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김 소협. 혹시 문파를 여쭤도 괜찮겠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혈교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현재로선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남궁천오는 차마 더 캐묻지 못했다.
무림에서 함부로 상대의 무공을 묻는 건 큰 실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수가 사정을 상당히 봐준 덕에 천오나 소연으로선 지수가 혈천신공을 익힌 무인이라고는 판단하지 못한 모양이다.
애초에 내공이나 초식을 사용한 것도 아니라 단순히 팔다리를 꺾고 몸으로 들이받아 죽인 거니 검과 창 같은 병기를 휘두른 것보단 평화적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지만.
“아무튼 대충 상황이 마무리 된 것 같으니 앉으시죠. 음식은 없지만 술은 아직 남았습니다.”
나는 청아홍이 들어 있는 병을 찰랑찰랑 흔들며 말했다.
“아직 듣고 싶은 게 많거든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내 모습에 천오와 소연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좋소.”
“오라버니!”
“소연아. 이 자들이 수상한 것은 분명하나 흑혈대원을 죽인 것으로 보아 혈천신교의 소속은 아닌 게 분명하다. 현 무림은 손을 가릴 처지가 아니야.”
“하지만 이들은 너무 수상해요.”
“그래도 우리의 목숨을 구해줬지.”
천오는 그렇게 말한 후, 내게 포권을 취했다.
“감사하오, 김 소협. 또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되었군. 어떤 것이든 묻게나. 내가 아는 것이라면 말해주겠네!”
그런 천오의 모습은 퍽 비장했다.
혹여나 적대하거나 도망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이 남궁천오라는 자는 생각이 열려있는 무인이었다.
“우선 아까 말씀하시던 십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내게 꽤나 행운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 혈천신교라는 이들이 나타났소.”
처음에는 그들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세외무림을 비롯해서 온갖 단체가 무림을 먹겠다고 덤빈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무림맹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거나, 혹은 천마신교나 사파와 힘싸움을 하여 대부분 괴멸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들에게는 십존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었다.
십존은 과거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의 혼을 불러와 부활시킨 존재들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거에 이름을 떨치던 명걸들은 지금 무림의 적이 되어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십존.
그 이름에 걸맞은 무위와 힘을 지닌 이들.
그리고 십존을 이끄는 진천백이라는 자는 감히 고금제일이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절대강자였다.
가장 먼저 사파가 삼켜졌으며, 천마신교의 절반이 궤멸되었다.
무림맹 역시 천하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나서 그들과 싸웠지만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도리어 중원의 절반 이상을 혈천신교가 지배하는 형태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무림은 전후무후한 위기에 봉착했고, 지금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소.”
“그렇다면 이곳에 온 이유는…….”
“귀주에 있다는 혈교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함이었소. 그들은 혈천신교와 적대했지만 먼저 나서는 일이 없었으니 그 힘이 온전히 남아 있으리가 생각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건.”
천오의 얼굴은 순식간에 침통해졌다.
그리곤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혈교에서 무림맹의 요청을 거절한 것입니까?”
“그건 아니오. 애초에 혈교가 무사하다고 판단한 건 우리의 착각이었던 게요.”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은 혈교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이지 않은가.
“혈교는 지금 제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 말은?”
“혈교를 이끄는 교주가 죽은 모양이에요.”
크게 심장이 뛰었다.
설마,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들으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교주의 이름이…… 혹시 진천웅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근데 김 소협은 그것을 어떻게 안거죠?”
남궁소연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의심하는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표정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천웅이 죽다니.’
혈마 진천웅은 내게 있어서 특별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스승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앞으로의 길을 제시해 준 자나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나는 벌떡 일어섰다.
워낙 거칠게 일어난 탓에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을 굴렀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여태 여러 가지 이유로 미래가 변한 적은 있었지만, 진천웅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도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회차에서 늘 느껴왔던 가까운 누군가가 죽는 고통
가슴 속 깊은 곳을 찌르는 것 같은 아찔한 통증이 몰려왔다.
“오빠?”
마침 객잔으로 돌아오던 지수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지수의 양손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 흑혈대라 불리던 이들은 지금쯤 모두 끔찍한 시체로 변했으리라.
“가자.”
“어디로요?”
“혈교로.”
한시라도 빨리 혈교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야만 했다.
“김 소협! 지금 혈교라 그랬소?!”
“설마 당신들은…….”
나와 지수의 대화를 들은 남궁 남매가 저마다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나와 지수가 혈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 추측한 거겠지.
평소라면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줬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맘이 들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될 겁니다.”
그들의 십존의 적으로 있는 이상, 나는 분명 다시 그들의 앞에 모습을 보이게 되리라.
아무래도 나는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
“흑혈대가 사라졌다고?”
“예, 귀주에서 남궁가의 자제를 뒤쫓던 4분대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멍청한 놈들. 고작 남궁세가의 자제조차 죽이지 못하다니.”
끌끌거리며 혀를 차는 남자의 말에 그 앞에 오체를 투지하고 있던 무인의 몸이 떨렸다.
만약 그가 분노하기라도 하면 자신의 목숨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흥, 혈교의 떨거지들에게 당한 건지도 모르지. 가봐라.”
“존명!”
남자의 말에 무인은 큰 소리로 외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흑혈대가 사라진 건 이전이라면 꽤 큰 사건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감히 자신을 위협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조금은 조사해 보는 것도 좋지 않나?”
“상관없다. 지금의 나를 감히 누가 죽인다는 거냐.”
남자는 자신 있게 웃었다.
검붉은 혈포가 그의 기세에 크게 펄럭이며 흔들렸다.
“혈신(血神) 진천백을 상대할 자가 이 무림에 있다고 보나?”
현 무림을 지배하는 십존,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혈천신교의 우두머리가 바로 그였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그런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새까만 정장에 마치 여우와도 같은 인상의 남자.
니알라토텝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그저 즐거웠다.
“혈마에게 벌벌 떨던 남자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인간이란 참 재밌어.”
“그 입을 닥쳐라!!”
진천백의 노기가 니알라토텝으 몸을 때렸다.
하지만 니알라토텝의 몸에는 어떤 피해도 없었다.
진천백은 그런 니알라토텝의 모습에 이를 뿌드득 갈았지만 차마 직접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저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칭찬하는 거다, 진천백. 나는 너에게 미래의 기억을 줬을 뿐이지. 그 기억을 토대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건 훌륭하지 않나. 과연 나의 사도가 될 만해.”
“…….”
“이드라가 왜 인간의 아바타가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확실히 이유가 있었어. 물론 나는 아직 그 녀석처럼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짝짝, 박수를 치며 니알라토텝은 등을 돌렸다.
자신은 적어도 경고를 해줬으니 앞으로는 진천백에게 달려 있었다.
니알라토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현 무림에서 진천백의 적수는 없었다.
‘무림’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존재라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흥.”
어둠속으로 사라진 니알라토텝을 보며 진천백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후에 네놈도 죽여주마.’
확실히 니알라토텝은 그에게 힘을 준 인물이었다.
외신의 힘으로 각성한 그의 육체는 본디 가지고 있던 재능을 아득히 넘어섰으며, 그가 가져온 미래 혈마에게 패배한 진천백의 기억은 그의 집념과 단련에 박차를 가했다.
혈마에게 죽었던 진천백의 힘을 오래 전에 뛰어넘은 건 물론 고금제일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자리에 오른 것이다.
‘니알라토텝이 부활시킨 십존과, 이 나의 힘이라면 중원을 정복하는 것도 시간문제.’
유일하게 자신이 두려워하던 혈마조차 이미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가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런데…….’
죽어가던 혈마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대체 왜 녀석은 자신의 손에 심장을 꿰뚫렸던 순간 웃었던 걸까.
대체 어째서.
물론, 진천백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