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 중원(中原)(2)
덜컹!
음식을 기다리고 있으니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객잔의 입구에는 한 명의 남성과 여성이 비틀거리며 객잔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허리에 찬 검이나 고급스런 옷감으로 만들어진 무복은 귀한 집 자제로 보였지만 피로한 안색과 잔 상처가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후우.”
옅은 한숨을 쉬며 남성은 객잔 내부를 둘러보다가 시선을 딱 멈췄다.
그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얌전한 얼굴로 청아홍을 홀짝이고 있던 지수를.
“맙소사.”
나직한 감탄사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성도 이쪽으로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성은 얼굴을 붉히며 작게 헛기침을 하곤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저, 괜찮다면 합석해도 되겠소?”
“?”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인지 대놓고 지수에게만 말을 거는 모습이 우스웠다.
지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객잔에는 자리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다.
지수의 입장에서는 왜 합석을 제안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거겠지.
“싫어요.”
물론 지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단번에 거절을 표했다.
덕분에 남자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고 옆의 여성은 크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간단히 거절당한 건 오랜만이네요.”
“흠흠.”
설마 거절당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남성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법 반듯하게 생기긴 했네.’
나름 얼굴에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꽤 잘생긴 얼굴인 건 확실했지만 최근 온갖 신들을 접하며 미남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거기다 굳이 신까지 갈 것도 없이 신자운이 이 남자보다 훨씬 나았다.
“지, 지금 행색이 좀 추레하다만 우리는 남궁세가의 자제요.”
“설마 집안을 내세우며 협박하는 건가요?”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성은 홧김에 되는대로 지껄였던 모양인지 크게 당황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어디로 봐도 지수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저만 있는 게 아닐 텐데요. 왜 저에게만 묻나요?”
“아.”
남자의 눈이 뒤늦게 내게 향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크게 당황하며 허리를 숙였다.
“미, 미안하오.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는 처음 본 탓에 나도 모르게 그만…….”
“굳이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평소라면 반말을 했겠지만, 상대가 남궁세가인데다 이렇게 하는 편이 그들에게 한층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협은 대인이시구려.”
아니나 다를까 내 대답에 남자는 한층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남자의 대응이 의외였다. 남궁세가라면 중원에서도 알아주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가문의 자제가 이렇게 간단히 사과의 말을 건네며 허리를 숙일 줄이야.
지수의 말에 크게 노여워하며 덤비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냥 지수의 외모에 눈이 멀었던 모양이다.
“저도 함께 사과드릴게요.”
옆의 여성 역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뒤, 남자의 옷깃을 잡고 잡아끌었다.
더 이상 합석을 제안하지 말고 다른 곳에 앉자는 뜻이다.
남성은 영 아쉬운 눈치였지만 천천히 발을 돌렸다.
“합석하고 싶으시다면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저, 정말이오?”
“예, 먼 곳에서 와서 근처의 사정을 물어볼 사람도 필요했거든요.”
“먼 곳? 확실히 이 근방에서 볼 수 있는 외모나 복장은 아니로군.”
남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힐끗 지수를 본 뒤에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지수는 자리에 앉는 남성과 여성의 모습에 눈을 살며시 찡그렸다.
아마 내가 왜 그들과 함께 합석하기로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쳐야 쓰나.’
중원에는 천하오대세가 라고 불리는 명가가 존재한다.
남궁세가.
제갈세가.
사천당가.
모용세가.
하북팽가.
이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건 남궁세가였다.
그런 이들이 혈교가 있는 귀주에 있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그 행색도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객잔에 들어와 유심히 주변을 살피던 것만 봐도 긴장이 서려 있었으니까.
다만 지수를 보자마자 긴장이 깨진 게 문제지.
아무튼 현재 무림의 정세를 묻기엔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거기다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옵저버로 보아 흔치않은 플레이어고 말이야.’
중원에서는 진인(眞人)이라 부른다.
특성상 동양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과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타 차원의 신도 많으니 ‘동양풍’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 미안하오.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남궁세가의 남궁천오요.”
“저는 남궁소연이에요.”
남성은 포권을 취하며 뒤늦게 자신을 소개했고, 그런 천오의 말에 여성 또한 소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김세한이라고 하며, 이쪽은 한지수라고 합니다.”
“김소협과 한소저였구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물론 나는 대충 소개했다.
포권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 처음에 자신들이 큰 무례를 범했기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확실히 첫 인상과 달리 나쁘지 않네.’
나는 반쯤 남은 청아홍을 들고 그들에게 한 잔씩 권했다.
“고맙소.”
연신 지수를 힐끔거리며 천오는 청아홍을 홀짝거렸다.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분위기도 상당히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알 수 있을까요? 거기다 왜 하필 귀주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천오의 여동생인 소연이었다.
그녀는 천오와 달리 나와 지수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간 일이 있어 먼 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스승에 스승님을 뵙고자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죠.”
“스승님이 귀주에 계시나요?”
“예.”
“혹시 존함을 들을 수…….”
“소연아.”
소연의 말을 천오가 엄한 어조로 막았다.
“마치 김 소협을 추궁하는 것 같아 거북하구나.”
“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뭔가 사정이 있으신 거겠죠.”
그건 그렇고 계속 소협 소리를 들으니 뭔가 어색하네.
현대에선 들을 수 없는 호칭이라 더더욱 그런 느낌이다.
“다만 저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도 괜찮소.”
“남궁세가는 제가 알기로 안휘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쩐 일로 귀주까지 오셨는지요.”
“크흠.”
천오는 내 질문에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그건…… 답할 수 없는 질문이오. 미안하오.”
“그렇군요. 곤란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 태도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귀주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하군.’
마침 우리가 온 타이밍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최근 수아가 십존에게 습격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이 계속해서 뭔가 움직이고 있다면 십존의 우두머리인 진천백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진천백은 혈교 출신이고.’
즉, 혈교와 관련된 일에 남궁세가 출신이 움직였다는 말이 된다.
엄연히 사파로 분류되는 혈교가 있는 곳에 정파인 남궁세가가 있다는 건 그들과 대립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저와 사매가 오랜 시간동안 깊은 산속에서 수련을 한 탓에 최근 소식에 뜸합니다.”
“그렇소? 확실히 두 분 모두 상당한 기도를 갖추고 있구려.”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십존이라는 이들을 아십니까?”
조금 직접적으로 묻자 천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십존을 모르오?”
“예, 오랜 시간동안 산속에 있다 보니…….”
“정말 깊은 산속이었나보오.”
“정말 정말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렇지 사매?”
“예, 정말 정말 깊은 곳이었어요.”
사매라는 호칭이 자신을 칭하는 걸 눈치챈 지수가 능숙하게 답했다.
그리곤 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작게 ‘사매…….’라고 중얼거리는 걸로 보아 사매라는 호칭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으음, 그렇다면 꼭 설명해 주는 게 좋겠군. 십존을 모르면 현 무림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요.”
“그 정도입니까?”
“그렇소. 그도 그럴 게 그들은…….”
덜컹!
천오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객잔의 문을 거칠게 열며 다섯 명의 흑의인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새까만 복장을 입은 그들의 팔에는 붉은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흐, 흑혈대!”
아무래도 상당히 유명한 이들인지 객잔의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나갔다.
심지어 막 우리 식탁으로 음식을 가져오던 점소이마저 음식을 내팽개치며 도망갔다.
“설마 벌써 이곳까지 쫓아오다니!”
천오는 흑의인들을 보고 깊게 탄식하며 매끄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소연도 마찬가지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얇은 검을 능숙한 모습으로 빼어들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 싶었는데 저들이었나.’
흑혈대라.
들어본 적이 있다. 혈천신교에서 뒤가 구린 일이라면 모든 처리하는 청소부.
무력 순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집요하고 어떤 비열한 수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탓에 악명이 높았다, 라고 혈마가 이야기해줬다.
나를 단련할 시절 혈마가 그들이 하던 행동을 내게 그대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보통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그냥 덤비는 게 속편하지.
“대범하군.”
흑혈대의 맨 앞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천호를 향해 말했다.
“남궁천오.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흑혈대가 추적술에 능하다지만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이야.”
천오는 크게 탄식하며 얼굴을 굳혔다.
“미안하오, 소협. 우리 때부터 욕을 보게 되셨구려. 어서 피하시오.”
“피해? 미안하지만 이곳에 있는 놈들은 모두 죽는다. 방금 객잔을 나간 놈들까지 전부 다.”
“뭐라고?! 우리가 목표가 아니었나! 애꿎은 이들을 왜 죽이려는 것이냐!”
“혹시 모를 일을 위해서지.”
대단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냥 목격자는 죄다 죽인다는 거겠지.
“나와 소연이가 목숨을 걸겠소. 그 틈에 어서 도망가시오. 이들은 우리가 어떻게든 막겠소.”
“막아? 일개 후기지수 주제에 우리 흑혈대를 막는다고? 하하! 농이 지나치구나.”
“4룡을 우습게 보지마라!”
큰 소리로 외쳤지만 천오의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웠다.
소연 역시 죽음을 각오한 것 같았다.
“음? 호오.”
그때, 둘을 바라보던 흑혈대의 대장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작은 감탄사를 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성은 처음이군. 저건 죽이기 아까운데?”
옅은 음심이 담긴 말에 지수의 눈가가 씰룩였다.
방금 점소이가 음식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도망간 시점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흑혈대의 대장의 말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어차피 남자 놈들만 죽이면 충분하지, 계집들은 교로 끌고 가면 되겠어. 팔존님이 아주 좋아하시겠군.”
흑혈대 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뒤에 서있던 열 명의 흑혈대도 그의 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천오는 먼저 덤벼들기보단 우리를 지키듯 앞을 막아섰다.
“내가 공격하면 우측으로 뛰시오. 덤비는 놈들은 나와 소연이가 어떻게든 막겠소.”
그의 매끄러운 턱선으로 땀방울이 타고 흘러내렸다.
굳은 눈과 얼굴이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빠.”
탁.
지수가 손에 들고 있던 청아홍이 담겨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저 배가 고파요.”
검은 눈동자에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배가 고프니 저 놈들은 빨리 처리해도 되겠냐는 뜻이다.
물론, 전혀 상관없다.
“마음대로 해.”
“금방 끝낼게요. 오빠도 배고프죠?”
드르륵.
지수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난 지수의 모습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특히 천오와 소연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져서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소, 소저. 그렇게 시선을 끌면 좋지 않소, 우리가 공격하면…….”
“됐어요.”
지수는 앞을 가로막은 천오를 옆으로 가볍게 밀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어, 어어어?”
천오의 몸은 지수의 힘에 가볍게 밀려났다.
옆에서 보면 가녀린 여성이 밀친 것에 당황해서 물러난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천오는 나름 힘을 써서 지수를 막은 거였지만, 순수한 근력에 밀리고 만 것이다.
“흐음. 당돌한 계집애로군. 아, 혹시 얌전히 이쪽으로 올 생각이 들었나? 좋은 판단이야.”
“말이 참 많네요.”
“……뭐?”
“말이 많아요.”
지수의 눈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기세도 점차 흉포해졌다. 객잔 안이 살기로 가득 찬 건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뭐야?”
흑혈대의 대장도 크게 당황한 눈으로 지수를 보았다.
그제야 눈앞에 있는 지수가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모두 저년을 당장 죽여라!”
그의 판단은 지극히 빨랐다.
지수의 기세가 변하지 마자 흑혈대를 향해 바로 지시를 내린 것이다.
붉은 잔상이 남으며 그의 뒤에 서있던 세 명의 흑혈대원이 지수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들의 검에는 하나같이 날카로운 검기가 실려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족히 일류에 근접한 실력이었다.
지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굳이 피하지 않고 빤히 응시했다.
“한 소저!”
천호가 비명처럼 소리쳤지만 지수는 그것을 막지 않고 맨몸을 받아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정도 공격은 막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콱!
지수의 몸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지하철과 충돌해도 버틸 수 있다.
검기가 실린 칼날은 지수의 살갗을 아주 조금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헉!”
여태 감정하나 실리지 않았던 흑혈대원들의 입에서 당혹스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눈앞에 있는 여성이 사신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