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 중원(中原)(1)
혈마 진천웅.
그는 호쾌한 성격의 사내였다. 콜라보 퀘스트로 인해 우리의 적이 되어 등장했던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와 싸웠던 이들은 나 말고도 많았다.
나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던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퀘스트가 끝난 이후에도 지구에 눌러앉았고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루크가 내게 싸우는 법을 알려준 선생님이었다면, 혈마는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인물이었다.
초월자.
신의 선택을 받지 않은 인간만이 스스로 신격을 얻고, 초상계의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다고 말해준 것도 그였다.
뭐, 린과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건 린이 특별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혈마의 말을 기억하여 2회차에서는 어떤 신도 선택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배웠지.’
그가 알려준 것에는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혈교의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인 혈천수라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내게 아낌없이 심득을 전달했고, 나는 그의 가르침 덕에 무공에 대한 대처법을 익힐 수 있었다.
애초에 혈천수라공은 천살성이 없던 내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그것을 알려주고, 이곳에 마음에 드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전수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혈마는 기분파였고, 나쁘게 생각하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후회하는 일이 딱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형인 진천백을 죽인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형님은 혈교의 교주가 되실 몸이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어.」
진천백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무인이었고, 만약 혈마만 아니면 무난하게 교주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문제는 혈마 진천웅의 재능이 밝혀지며 시작된다.
진천웅이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전대 교주는 본디 차기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혈천수라공을 진천웅에게 알려준다.
당연히 소교주의 자리에 있던 진천백의 입장으로선 황당할 뿐이었고 크게 분노하게 된다.
나쁘지 않았던 형제 사이도 멀어졌고, 소교주의 자리마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진천백은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년 후, 전대 교주는 진천웅과 진천백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둘이 싸워 이긴 자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주겠다.」
당연히 진천백은 반박했지만 전대 교주는 듣지 않았다.
결국 진천백과 진천웅은 차기 교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천웅이 승리하여 새로운 소교주가 된다.
자기보다 몇 년이나 늦게 무공을 시작한 동생에게 처참하게 졌다는 것과, 더 이상 소교주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한 진천백은 그 자리에서 바로 혈교를 박차고 나가게 된다.
「그때 형님을 붙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렸지. 그저 소교주가 되었다는 것과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에 만족했어. 형님에 대한 걱정도 한참 후에나 생각했다. 참 개자식 아니냐?」
물론, 진천백은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전 무림을 피바람으로 뒤덮고, 혈마의 가장 강대한 적수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끝내 혈마는 진천백을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얻게 된다.
「형님은 끝까지 나를 증오하셨다. 죽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못하셨지. 나는 아직도 그 눈이 떠오른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나를 애잔한 눈으로 보았다.
어쩌면 그는 내게서 자신의 형의 모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형을.
“그런데 진천백이 살아 있다고?
아직 진천백이 죽기 전의 시기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말이 안 됐다.
아무리 지구가 진도가 빠르다고 해도 혈마가 진천백을 죽인 건 그가 젊었을 적의 일이다.
시간으로 치면 지금부터 계산해도 족히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민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선 길드로 돌아와 이드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드라의 입장에서도 중원에서 무인들이 넘어오는 건 상당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퀘스트가 발령된 상태였다면 문제없겠지만, 퀘스트가 없음에도 그들이 넘어오는 건 다른 문제라서 말이다.”
“차단할 수는 없어?”
“본래 열리기로 했던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이니 조금 힘들다. 아마 그쪽에서 어떠한 조작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역시 다른 무언가가 개입됐다.
그것도 시스템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월자가.
시스템을 그런 식으로 조작할 수 있는 건 몇 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는 눈앞에 있는 이드라와 같은 케이스.
이 우주에 속하지 않은 신이라면 얼추 가능하다.
“……어쩌면 녀석일지도 모르겠군.”
“녀석?”
“이전에 니알라토텝이 그대에게 관심을 보였도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외우주의 신격들은 대부분 관여되고 싶지 않은 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니알라토텝은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다른 외신들은 인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이드라와 니알라토텝만은 인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정반대의 이유를 지니고 있단 말이지.’
이드라는 순수한 호감에서 발생한 선의지만, 니알라토텝에게 인간은 재미난 장난감에 불과했다.
“확실해?”
“그건 잘 모르겠구나.”
눈가를 찌푸리는 이드라의 모습으로 보아 단순한 추측인 모양이다.
이번만큼은 이드라의 추측이 잘못되기를 바라야겠군.
“아무튼 그럼 나도 저쪽에 한번 다녀와야겠어.”
“지금 바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정체와 의도도 명확하지 않으니 한번 보고 올 필요가 있었다.
“혼자서는 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잠깐 보기만하고 올 거야. 게이트를 넘어 다니는데 횟수 제한 같은 건 없잖아?”
“특별히 없긴 하다. 단지 시간의 개념이 조금 다를 뿐이지.”
“시간의 개념?”
그건 혈마로부터 이야기 듣지 못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이쪽의 하루가 중원에서는 열흘이다. 대략 열 배의 차이가 있는 셈이지.”
“모든 차원은 똑같은 시간대로 움직이는 것 아니었어?”
“꼭 그런 건 아니다. 간혹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장소가 있다.”
내가 넘어갔던 차원은 그런 괴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중원은 다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혈마는 거의 중원으로 치면 10년 정도 이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혈마는 알았을까?’
초월자에 가까웠던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저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거겠지.
“아무튼 그럼 이쪽에는 큰 문제없네. 도리어 잘됐어. 지금 바로 게이트를 여는 게 가능해?”
“음, 그건 어렵지 않군. 저쪽에서 먼저 게이트를 열었던 덕에 이쪽은 그것을 이용하면 간단하다.”
만족스런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잠깐 정보를 모으고 돌아와야겠어.’
그래야 이쪽에서 제대로 준비를 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저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그때, 옆에서 조용히 서있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정보만 모으고 올 건데?”
“상관없어요.”
지수는 내 옷깃을 잡고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최근 계속 내가 지수를 두고 돌아다닌 탓에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와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지수라면 상관없긴 하겠지.’
마침 혈천수라공을 익힌 장본인이니 만약의 일을 생각해서 데려가도 나쁠 건 없었다.
“좋아, 그럼 준비해.”
“이미 끝났어요.”
“……그래?”
만약 두고 가면 억지로 쫓아오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특별히 챙길 물건은 없었기에 지금 바로 다녀오면 될 것 같았다.
“이드라 부탁할게.”
“알겠다. 우선 그대들에게 서브 퀘스트를 부여할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통행증이지. 콜라보 퀘스트를 수행하는 플레이어로서 다녀오면 된다.”
“1회용은 아니지?”
“음, 한 번에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을 뿐, 이미 부여한 플레이어에게는 제약은 없도다.”
그거면 충분했다.
혹시나 한번 넘어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넘어가지 못하게 되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었으니까.
‘자, 한번 보자고.’
파천혈군 진천백이 어째서 살아 있는지.
그리고 중원의 상황이 현재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이쪽도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
게이트를 통과하자, 사방이 푸른 숲으로 이루어진 산속에 도착했다.
혹시나 마을에서 게이트를 열었다간 주변에서 귀신을 보듯 볼 게 분명했으니까.
“아우, 어지럽네요. 이거.”
“익숙해지면 괜찮아.”
나도 올림포스로 이동했을 때 꽤 어지러웠지만 자주 날아다니고 그러다 보니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지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머리를 휙휙 흔들며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근데 여기는 어디예요?”
“귀주.”
바로 혈교의 본거지가 있는 장소였다.
사천과 광서의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었고, 별다른 문파나 가문이 없던 장소였지만 그곳에 혈교가 들어서며 발전하게 된 곳이었다.
“본래 중원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던 지역 명이랑 비슷하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이 세계의 발전에 지구의 신들이 많이 관여를 했거든. 그들이 중원을 상당히 좋아해서 말이야.”
당연히 중국신화 출신의 신들이다.
중원은 그들의 영향을 상당히 많은 별이었다.
숲속에서 나온 우리는 바로 근처에 있는 마을로 이동했다.
하늘에 까마귀를 날리면 길을 잃지 않고 수월하게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마치 고대 중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인데.’
중원에 온 건 나도 처음인지라 상당히 신선한 기분이었다.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의 복식이나 건물 양식이 처음 보는 것이 많아 마치 관광이라도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지수는 얼굴을 미묘하게 찡그리고 있었다.
“왜?”
“주변에서 자꾸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서요. 혹시 복장이 잘못된 걸까요?”
지수는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것 같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처럼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건 복장이 이상하기보단 단순히 외모 때문인 것 같은데.’
지수는 소위 말하는 미녀다.
그것도 앞에 ‘엄청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미녀.
지구에 있을 때도 시선을 많이 모으긴 했지만 지수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낯선 장소에 오니 그런 시선들을 더욱 뚜렷하게 느끼게 된 거겠지.
‘뭣보다 여긴 빠꾸도 없이 그냥 대놓고 보고 있으니까.’
문화의 차이인지, 아니면 문명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시대상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를 지닌 지수는 그것만으로 시선을 끌었다.
당연히 옆에서 걷는 내게도 많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시기와 질투가 담겨있는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꼬우면 덤비든가.’
나는 그 시선들을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당연히 분개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실제로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우리가 검은 무복을 입은 전형적인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전부 유엔이 준비해 준 물건이다.
내가 보았던 혈마의 복식을 토대로 만든 물건이라 이곳에서도 큰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지수의 경우에는 옷이 정말 잘 어울렸다.
흔히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는 십전완미가 이런 모습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뭔가 어두침침한데.’
날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
다들 피폐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딸랑.
“어서옵…… 헉!”
근처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가자, 점소이 하나가 지수를 보고는 얼굴을 경직시켰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게 아주 노골적이었다.
‘여기 애들은 하나같이 리액션이 뚜렷하단 말이야.’
나중에 지수에게 면사라도 하나 씌워줘야 할 것 같았다.
“아, 죄, 죄송합니다요. 어어어떤 걸 시키시겠습니까?”
“이곳에서 가장 잘나가는 음식과 술을 부탁합니다.”
“예, 옙. 청아홍이라 불리는 술과 돼지볶음인데 괜찮으신지요?”
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가 힐끗 지수를 본 뒤에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점소이가 영 우스꽝스러웠는지 웬만한 일에는 무덤덤한 지수도 풋 웃었다.
“여기 사람들은 반응이 하나같이 과장된 거 같아요.”
“원래 이쪽 출신이 그런 경향이 강한 모양이야.”
생각해 보면 혈마도 이상한 별호를 지으면서 놀거나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것이 혈마의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이쪽이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지수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워진 건 점소이만이 아니었다.
이미 객잔에는 여럿의 손님이 있었고, 대부분이 지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미인이군. 정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야. 저런 미인을 본 게 얼마만인지…….”
“후우, 혈천신교에서 미인이란 미인은 다 잡아갔으니.”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남자들의 대화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혈천신교?’
혈교가 아니다.
혈천신교는 진천백이 만든 새로운 세력이었다.
물론 혈천신교는 혈마의 손에 멸망하게 된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하군.’
이 시점이면 이미 혈천신교는 무너지고 사라진 지 오래였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 혈천신교가 남아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됐어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