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 질투의 악마(2)
──까아악!!
거대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올림포스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날개가 얼마나 거대한지 올림포스의 창공을 뒤덮을 정도였다.
본래 까마귀자리였던 카라스조차 이렇게 거대하지 않았다.
“환상, 이로군.”
그래봤자 환상일 뿐이다.
아마 거대한 까마귀 안에 숨어서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제법 머리를 썼다만 그뿐이다.”
환상채로 날려주지.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분조차 오래 막아주시진 못할 거다.
단번에 끝장을 내고 돌아간다.
아이를 찾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애초에 그분이 원하는 건 린 테일러의 목숨이니 상관없었다.
“통째로 날려주지.”
네비로스는 양팔을 위로 올렸다.
손끝에는 작은 점과 같은 구체가 생기더니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작은 공처럼 되었고, 이내는 거대한 구체가 되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응?”
그때였다.
거대한 까마귀의 머리가 자신을 내려다본 건.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에 네비로스의 모습이 비쳤다.
까아악!
날개를 활짝 펼친 까마귀는 네비로스를 향해 날카로운 부리를 내리찍었다.
허나 네비로스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차피 환상. 물리력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오히려 녀석의 내부에 파고들어 이 구체를 폭파시킨다면 환상채로 녀석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올림포스의 일부가 부서지겠지만, 그건 그분이 알아서 처리해 주실 터.
“어리석은 놈, 죽어…….”
콰직.
“어?”
거대한 부리가 네비로스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네비로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부리로 내리찍는 동시에 몸에 공격을 가한 건가?
네비로스는 오만하지만 머리가 나쁜 악마는 아니다.
바로 답을 내렸지만, 그조차 이상했다.
‘녀석의 공격이 내 몸을 파고들 수 있을 리가.’
까마귀의 격은 중위급으로 확실히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플레이어.
능력치는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네비로스의 몸은 온갖 보호마법으로 떡칠되어 있어 까마귀의 공격 정도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아야 했다.
‘지금 플레이어의 능력치 한계는 기껏해야 C나 B일 텐데?’
그래, 분명 그래야만 했다.
“크, 크아아악!!”
까마귀의 부리가 수직으로 움직였다.
어깨에 파고든 부리가 네비로스의 몸을 꿰뚫었고, 가공할 압력이 네비로스의 몸을 아래로 추락시켰다.
콰콰쾅!!
네비로스의 몸이 부리에 찍혀 올림포스 산의 중턱에 처박혔다.
“이 자식, 제법이지만…….”
충격에 기껏 모으던 마력 구체가 망가졌다.
네비로스는 흩어진 마력들을 구체화시켜 작은 탄환으로 만들어 까마귀의 전신으로 방사했다.
쉬쉬쉭!!
검은 가시는 까마귀의 전신을 꿰뚫었다.
당연히, 피해는 없었다.
‘역시 환상이다. 환상일 텐데.’
까마귀의 앞발이 움직였다.
쿠웅!
“크어억!”
진짜 거대한 까마귀에게 밟힌 것처럼 네비로스의 몸이 땅속으로 꺼졌다.
인간이 이렇게 무거울 리가 없었다. 이건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진짜 중량으로 누르는 게 분명했다.
‘환상? 환상이 아닌가?’
네비로스는 전신의 마력을 폭발시켜 까마귀의 다리를 밀어냈다.
그 충격으로 산사태가 일어나듯, 올림포스의 일부가 날아갔지만 이제 주변을 살필 정신은 없었다.
그대로 몸을 공중으로 띄워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막대한 마력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퍼억!!
당연히 그것을 지켜볼 까마귀가 아니었다.
거대한 날개가 네비로스의 몸을 후려치자, 속절없이 재차 산에 처박혔다.
‘뭐냐.’
그 위로 까마귀의 부리가 떨어졌다.
마치 모이를 먹은 새처럼.
‘뭐냐고…….’
콰쾅! 콰쾅! 콰쾅!!
네비로스의 몸이 찢어지고, 올림포스 산에 파묻혔다.
더 이상 저항할 힘도 없었다.
마법으로 공격해 봤자 거대한 까마귀의 몸을 통과할 뿐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저쪽이 공격하는 건 일방적으로 맞아야만 했다.
아무리 네비로스라도 이 상황이 되면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악마 서열 27위인 내가…….’
까마귀의 부리가 네비로스의 심장을 향해 떨어졌다.
그것을 그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까악!
하지만 통증은 오지 않았다.
네비로스를 가로막은 등이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네비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지 않으려 했다만…….”
보라색 머리칼에, 자줏빛 눈동자.
매끄러운 미형의 미남자가 네비로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갑작스런 남자의 등장에 까마귀는 날아오르며 네비로스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영리하군. 물러나는 건가.”
“아, 아바돈 님.”
네비로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살려주리라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저, 저 같은 것을 구하기 위해 몸소 오시다니.”
“구해?”
아바돈이라 불린 자는 네비로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성가셔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예?”
네비로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서걱!
감격한 얼굴 그대로 머리가 잘려나가 바닥에 굴렀으니까.
“냉정하군.”
“난 귀찮은 건 질색이라서 말이야.”
아바돈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까마귀가 있던 장소에는 검은 날개를 펼친 세한이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기괴한 검이 들려있었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검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SS급 아이템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라…….”
아바돈은 중얼거리며, 세한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비어있는 손에 안겨있는 린 테일러도.
“기왕 온 김에 처리해 두는 게 좋겠어.”
“……!”
세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했다.
하지만 이미 상대는 코앞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군.”
“컥!”
아바돈은 세한의 목을 잡아채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리석어. 알았다면 도망을 쳤어야지.”
“……후.”
목이 잡힌 상황에서도 세한은 웃었다.
의아함이 깃드는 아바돈의 눈을 보며 세한은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콰아앙!!
아바돈의 몸이 튕겨져 날아갔다.
세한의 목을 잡아듣기 전에,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 손을 풀어내며 후려친 것이다.
그 속도는 가히 신속(神速)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알았나?”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세한은 지끈거리는 목을 만지며 말했다.
“제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듣는 신이라고.”
“맞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지. 역시 대단하네.”
“올림포스의 보안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건 톡톡히 받아낼 겁니다.”
“그거 겁나는 걸.”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산 중턱에 있는 아바돈을 보았다.
그는 헤르메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은 건 질색이다만…….”
“앞으로 더 귀찮아질 걸?”
“아니, 그럴 일은 없다.”
아바돈이 그렇게 말하자, 녀석의 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뿌옇게 흐려지는 모습에 헤르케스가 눈을 부릅떴다.
“뭐?”
헤르메스는 다리가 공중을 박차며 찰나의 순간에 아바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뭐야? 내 눈을 피해서 도망가다니.”
“그야, 그렇겠죠. 애초에 실체가 아니었으니까요.”
“뭐?”
헤르메스가 세한을 보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신인 내가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 악마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태의 악마에게 들었으니까요.”
그제야 가볍던 헤르메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마계의 7대 악마 중 하나인 아자젤이었으니까.
“녀석은 아바돈.”
세한은 방금 전까지 아바돈이 서있던 장소를 보며 말했다.
“마계의 7대 죄악 중 하나, ‘질투’를 담당하는 악마입니다.”
***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아직도 지끈거리는 목을 만지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헤르메스가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역시 조금 무모했던 모양이다.
“네비로스를 죽이러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덕분에 귀찮게 됐다.
내가 네비로스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 친히 죽이러 온 걸 테지.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 밝혀지면 성가시니까.
“아버지가 부르신다.”
“어제 일과 관련된 겁니까?”
“뭐,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제 올림포스에서 있었던 일은 12신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다.
다만 나서지 않고 지켜본 건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기 위함이었으리라.
‘내가 이래서 신이 싫어.’
처음 네비로스가 습격했을 때는 몰랐겠지만 탑이 폭파된 시점에선 알았을 거다.
아바돈도 내가 탑을 폭파시킬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근데 어떻게 한 거야?”
“뭐 말입니까?”
“까마귀.”
환상에 불과한 까마귀로 어떻게 네비로스를 공격했냐는 뜻이다.
“비밀입니다.”
“대충 안에서 뭔 짓을 했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아마 중량의 재현 같은 걸 말하는 걸 테지.
답은 간단하다.
훈련용 팔찌를 이용한다면 무게를 조절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니까.
DLC 아이템이니 말할 수도 없지만.
거기에 초월의 증명을 비롯한 온갖 버프에, 다인슬라이프를 쥐면 네비로스의 몸을 찢어발기는 것도 가능했다.
그 외에 프라가라흐나 허수공간을 이용하면 환상을 진짜처럼 재현하는 건 간단한 일이다.
예전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환상을 만드는 것에 거의 제한이 없기에 충분했다.
“아,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봐. 안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네.”
어제 왔었던 거대한 홀의 입구에서 헤르메스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어제 나타났던 악마의 등장으로 꽤나 혼란스러운 신이 많은 모양이다.
그야 당연했다.
그냥 악마도 아니라 7대 악마가 제집 드나들 듯 올림포스에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잠깐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상위 이하의 신들은 돌려보내야겠네. 뭔 신이라는 애들이 이렇게 겁이 많아?”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간 헤르메스 탓에 나는 입구에서 덩그러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몇몇 신들이 홀에서 나오며 나를 힐끔거리며 보았다.
어제와 같은 경멸의 시선은 없었다.
아마 어제 있었던 네비로스와 나의 싸움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헤르메스가 옵저버나 마법을 사용해 녹화했을 테니 그것을 본 거겠지.
이들은 아바돈이 설치한 결계를 뚫고 상황을 알아챌 만큼 대단한 신들이 아니었다.
“얘, 얘.”
그때 누군가가 내 허리춤을 쿡쿡 찔렀다.
시선을 내리자 아파테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쫓겨난 겁니까?”
“아냐! 난 그냥 자발적으로 나왔을 뿐이라고.”
회의 같은 건 재미없으니까. 라고 말하며 아파테는 싱긋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준상위급 신이니 내가 싸우고 있는 걸 실시간으로 보긴 했겠지.
“너 제법이더라. 그렇게 쌔면 내 아바타를 괴롭힐 필요도 없잖아.”
“걔는 안 죽인 걸 고맙다고 생각하세요.”
“……너무하네.”
“그놈이 사람들 다 죽이려고 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아주 적당한 처벌이었어.”
마치 자기는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기만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린다.
애초에 말린다면 얼마든지 말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냥 재밌으니 내버려 둔 거겠지.
‘하여간…….’
아파테에게만 뭐라고 하기엔 신들이 다 이렇다.
전에 말했듯 아스트라이아를 빼면 다 그놈이 그놈이다.
그냥 지나친 짓만 안 하면 적당히 넘어갈 뿐이지.
내가 나중에 신들의 버릇을 고치긴 해야 할 텐데 말이야.
조질 놈은 좀 조지고.
“세한.”
어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달라고 귀찮게 구는 아파테를 무시하고 있자, 홀의 문이 열렸다.
헤르메스는 나를 보더니 살며시 손짓했다. 이제 들어오라는 뜻이다.
“어제 일은 보았다. 이거 미안하군.”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보다 한산한 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우스가 나를 보자마자 사과하는 걸보니 조금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악마 두 놈에게 죽을 뻔한 거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크, 크흠흠.”
애초에 올림포스에 악마가 둘이나 나타났다는 게 문제였다.
비꼬는 내 말에 제우스는 민망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스 대장이라는 놈이 뻔뻔하기 그지없다.
“알다시피 어제 일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많구나.”
제우스는 살짝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태의 악마로부터 아바돈이라는 악마의 이야기를 들었다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올림포스는 녀석이 누구인지 모르는 겁니까?”
“아 그게 좀……. 걔가 활동을 잘 안 하더라.”
근엄하게 말하던 제우스가 조금 쭈그러들며 말했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내가 린을 다른 데로 데려갈까 봐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린을 죽이자니, 이드라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밉보여서 다른 세력으로 가면 곤란해질 테니까.
아무튼 내게 나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