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 올림포스(1)
초상계 퍼블리셔.
최근 게임 하나를 플레이어에게 강탈당한 탓에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게임 하나가 가져다주는 이익은 상당하다.
거기다 해당 게임의 배경이 되는 행성의 출신 신들이 매출을 상당수 올려주는 편인데, 지구의 신들은 전 우주를 뒤져도 그 수가 많으며 격이 높은 신들이 많았다.
퍼블리셔로서도 상당히 기대하고 있던 게임인지라 게임을 빼앗긴 건 뼈아픈 실책이었다.
몇몇 티탄들은 지구에게 간섭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지만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콜라보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너는 보고만 있을 건가?”
옥좌에 앉아 다른 티탄들을 굽어보던 이미르의 옆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는 네놈은 영 좀이 쑤시는 모양이야. 내가 당장이라도 날뛰어주기를 바라는 거겠지.”
“비약이 심하군.”
“비약?”
이미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우같은 인상을 한 남자가 있었다.
“니알라토텝. 그냥 용건을 말해라. 뭘 하고 싶은 거지?”
“이런, 왕의 심기를 거스른 건가. 하긴, 플레이어에게 별 하나를 빼앗겼으니 속이 뒤틀릴 만도 하지. 그럼 왜 가만히 보고만 있나? 당장 군세를 이끌고 쳐들어가면 될 것을.”
“고작 별 하나를 얻기 위해서 시스템을 거스를 생각은 없다.”
“하기야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니 티탄들로선 곤란한 일이겠어.”
우주에서 순환되는 엔트로피. 그것을 수치화하여 기적의 개념을 부여한 것이 포인트다.
시스템을 그것을 이용해 지정된 별에 게임을 시작하고, 엔딩을 볼 때까지 진행시킨다. 신격에게 모여드는 포인트를 자연스럽게 소모하고 우주로 순환시킬 수 있도록.
엔딩이 나게 되면 해당 별은 시스템의 관리를 받으나, 특별한 간섭은 받지 않는다.
“물론, 내버려 둘 생각도 없다. 김세한…… 이라고 했나. 그놈은 분명 내가 콜라보를 이용해 간섭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에 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고작 플레이어가 그런 것을 알까?”
“이드라가 알려줬을 수도 있지. 그보다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다면 플레이어가 게임을 탈취할 수 있을 리가 없잖나. 놈은 알고 있다. 이 우주의 법칙, 그리고…….”
이미르는 씨익 웃었다.
“나를.”
아카터스를 죽인 건 자신에게 향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GM을 죽인 것에 모자라 퍼블리셔와 정면에서 싸우려는 인간.
솔직히 이미르는 그것에 전혀 노여워하지 않았다.
조금의 분노도 없었다. 그저, 흥미로울 뿐이다.
태초의 거인으로서 오랜 시간 시스템의 수족으로서 살았다. 절대자로서 긴 시간 군림하며 게임을 운영해 왔지만 솔직히 무료했다.
적이란 존재가 딱히 없으니까.
신들과 다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신들은 그런 열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임을 즐기며 포인트를 낭비하는 게 전부인 놈들이었다.
이미르를 적대하는 자는 이미 우주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둔 게 많지. 거기다 니알라토텝, 그대도 관심이 있지 않나.”
“흐음?”
“이드라와 마찬가지로 네놈은 지금도 지구에 접속할 수 있다. 거기에 원래부터 게임을 즐겼으니 아바타도 남아 있겠지.”
답지 않게 조용히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이미르는 알고 있었다.
녀석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기어오는 혼돈이여.”
니알라토텝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나는 인간을 사랑하기에 많은 이들이 알아줬으면 할 뿐이다. 어차피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태평양 안에 가라앉은 그것은 떠오르겠지.”
미세하게 떠진 눈에는 고요한 광기가 잠들어 있었다.
이미르는 옥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김세한, 너는 너무 많은 관심을 끈 모양이로구나.’
자신에 이어, 눈앞에 있는 아우터갓까지.
하기야 저놈은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어도 일을 벌일 놈이었지만 시일이 당겨졌다고 할 수 있다.
“부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미르는 턱을 괴고 하나의 커뮤니티창을 띄웠다.
화면에는 곧 다시 오픈하게 될 ‘지구’에 대한 영상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이미르는 옅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오픈은 이제 3일 정도 남았다.
우선 할 수 있는 정비는 끝났고, 유엔에게도 좋은 답변이 돌아왔다.
아마 3일 후면 ‘아레나’를 개방할 수 있겠지.
되도록 더 시간을 끌며 정돈할 부분이 많았지만, 포인트도 부족했고 메인 퀘스트도 진행해야만 했다.
퍼블리셔의 권한으로 어느 정도는 메인 퀘스트의 기간을 조절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너무 오랫동안 미루는 건 불가능했다.
신들의 지원이 없다고 해서 기존에 아바타였던 이들이 전승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추후 생길 일을 생각하면 신들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했다.
‘어떤 게 좋으려나…….’
상태창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게임 운영도 운영이지만 내 스펙도 올릴 필요가 있었다.
능력치는 최대치로 맞춰뒀으니 문제될 게 없었지만 1회차에서 전승 스킬을 어떤 것으로 할지가 고민이었다.
‘초자각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아니면 S급 아이템을 계승해?’
1회차의 나는 특출한 스킬을 그리 많이 지니고 있지 않았다.
프라가라흐에 초월의 증명이면 이미 뽕을 뽑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괜찮은 스킬들도 몇 개 있었지만 당장 땡기는 건…….
“이게 좋겠어.”
나는 한 스킬을 선택해서 스킬창에 등록했다.
[‘뼈를 깎는 단련’ 스킬을 계승합니다.]
수수한 이름을 지녔지만, 효과는 상당히 쓸 만한 스킬이다.
1회차의 내가 자주 애용했던 것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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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깎는 단련(A)
사용 시 지정된 스킬 하나를 제외한 모든 스킬이 사용 불가 상태가 된다.
지정된 스킬이 성장형일 경우 스킬의 성장 속도가 10배 빨라진다.
사용 시, 일주일 간 해제 불가.
사용 후, 일주일 후에 다시 사용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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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범제를 천재로 만들어주는 스킬이다.
다만 패널티가 상당히 큰데, 다른 스킬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일주일간 한 스킬만 폐관수련한다는 느낌으로 써야한다. 다만 일주일간은 내 마음대로 해제할 수도 없기에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무려 A급 스킬인 이유는 성장형 스킬을 올리는데 이만한 스킬이 없기 때문.
거기다 ‘무공’과 관련된 스킬일 경우, 해당 무공에 관련된 모든 스킬이나 초식에도 적용되어 이만 한 스킬이 없다. 1회차에 백금 등급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스킬이었는데, 뒤쳐져 있던 나를 위로 끌어올려 준 스킬 중 하나였다.
2회차에는 마땅히 쓸 일이 없었지만, 우선 익혀둬서 나쁠 건 없었다.
“좋아. 그럼 이제.”
“꺄아아악!!”
건물을 가득 울리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덕분에 기분 좋게 상태창을 확인하던 나는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디어사이드 건물은 안전지대로 지정되어 있어 누구도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만약 적대의사를 보이면 이전의 마마잭처럼 건물에서 튀어나온 무수한 무기에 갈려죽게 된다.
황급히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가자, 바닥에 주저앉아 창백하게 질린 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누가 습격이라도 해왔어?”
“아, 아니. 그게…… 저거, 저거 뭐야?”
민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의 끝은 식기대로 향해있었다.
“Tekeli-li.”
불쾌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외형만 보더라도 혐오감이 흘러넘치는 괴물이 촉수를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한층 괴상했던 건 촉수에 들려있는 게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찻주전자였다는 점이다.
“Tekeli-li, Tekeli-li~.”
마치 기분 좋게 콧노래라도 부르는 모양새다.
민아는 혐오감에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쇼거스.”
“Tekeli-li?”
새까만 형태의 슬라임에 무수한 촉수가 달리고, 대여섯 개의 눈알이 달린 괴생명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중얼거린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여섯 개나 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스믈스믈 다가왔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Tekeli-li.”
“주는 거냐?”
“Tekeli-li. Tekeli-li.”
“고, 고맙다.”
녀석은 차 한 잔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향긋한 차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차를 우려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민아가 뜨악한 얼굴로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 오빠. 아는 괴, 아니 생명체야?”
“쇼거스. 아우터갓이나 그레이트 올드원의 시종과 같은 녀석들이지.”
1회차에도 한번 본적이 있다.
니알라토텝이 엮인 일에 우연히 조금 관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쇼거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드라의 설명이 없었다면 바로 칼을 들고 베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 나도 주는 거야?”
“Tekeli-li.”
민아도 쇼거스가 내민 차를 조심조심 받아들었다.
맑은 찻물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녀석은 조심스럽게 혀를 찻물에 담갔다.
그리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차가 길드에 있었나?”
“Tekeli-li(뿌듯).”
“어쨌든 외신의 시종이니 가사일은 잘하겠지. 이드라도 아마 심부름 시킬 겸 불러온 것 같네.”
이전이라면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이드라는 내게 소속되어 있는 아바타니 오히려 이전보다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사용범위가 늘어났다.
외우주에서 시종을 불러오는 정도는 일도 아닐 터.
길드에서 가사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뭐, 솔직히 정감이 가는 비쥬얼은 아니지만 말이야.
내가 차를 다 마시길 기다리던 녀석은, 빈 찻잔을 내밀자 찻잔을 받아들며 다른 촉수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Tekeli-li.”
“오빠, 얘가 오빠한테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드라가 부른 거냐?”
“Tekeli-li.”
촉수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지?
‘혹시…….’
당장 이드라가 나를 부를 만한 일은 특별히 없었다.
유엔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을 받았고, 그 외 던전이나 게임 운영에 관련된 건 내가 관여할 게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생각나는 건 하나다.
“좋아, 안내해.”
“Tekeli-li.”
바로, 린과 관련된 일이다.
***
“올림포스에서 연락이 왔다.”
쇼거스의 안내에 따라 이드라의 방에 도착하기 무섭게 녀석은 그런 말을 해왔다.
“서버가 다운되어 있는데?”
“드림위치 계정으로 말이다.”
게임 서버가 다운되었어도 커뮤니티가 죽은 건 아니다.
커뮤니티는 시스템이 직접 관여하는 인트라넷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래도 그간 이야기가 많이 나온 모양이더군. 자세한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아 모른다만 요약하면 간단하다. 린을 데리고 초상계, 올림포스의 영역으로 오라는 게지.”
“예상했던 일이네.”
아스트라이아와 합신된 린이다.
사실상 반신이며 정의의 여신 자리를 계승해야 될지도 모를 존재다.
거기에 황도 12궁 중, 처녀궁에 속하기도 했다.
덤으로 리브라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 올림포스에서도 오랜 시간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알데바란 건도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더군.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린을 떠나서 이번에 그대가 벌인 일이 좀 놀랍더냐.”
“그럼 나와 린만 가면 되는 건가?”
“나도 가고 싶다만,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지구를 떠날 수 없어서 말이다.”
초상계, 올림포스의 영역이라.
1회차에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다.
아니, 애초에 나는 초상계 자체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내가 그곳에 대해 정보를 얻은 건 콜라보를 통해 만났던 초월자들을 통해서다.
열쇠에 관한 것도 말이야.
‘그러고 보니 열쇠가 두 개라고 했지.’
10년 후의 린이 지수에게 했던 말 중에는 그것도 있었다.
다른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열쇠가 두 개라는 것만은 확실히 말해주었다.
하나는 초상계에 있고,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또 오빠 혼자 가실 건가요?”
“아니, 린도 데리고…… 가 아니라 넌 언제 왔어?”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언제 왔는지 지수가 말을 걸었다.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게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는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대체 얘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냐는 거다.
“그대와 쭉 같이 있었다. 숨어 있었을 뿐이지.”
“과, 과연 그렇군.”
스토킹을 이용한 건가?
알데바란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지금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Tekeli-li.”
“귀여워라, 고마워요.”
“Tekeli-li!”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지수에게 쇼거스가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지수는 싱긋 웃으며 쇼거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두드렸다.
“……귀여워?”
“네, 꿈틀거리는 게 귀엽네요.”
“음, 그렇고말고. 우리 리리가 좀 귀엽긴 하다.”
리리라니. 설마 이 쇼거스한테 붙인 이름인 거냐.
이드라는 자신의 시종이 귀엽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수도 진심으로 저 쇼거스, 아니 리리가 귀여운 모양인지 촉수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밝게 웃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번만큼은 나도 지수를 이해해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