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 재오픈을 위한 준비(1)
어느덧 하늘이 밝아지며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황금색 입자가 떠오르는 태양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끝났……나?”
민아는 손바닥을 펼쳐, 황금색 빛을 손에 쥐었다.
빛은 민아의 손에 닿자 부스러져 사라졌다.
“네, 알데바란의 신격이 완전히 소실됐습니다.”
백설이 역시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린의 눈에는 그것이 더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하늘을 가르며 나아간 참격에 사라지는 알데바란의 신격.
그것을 바라보는 린의 모습을.
백설이는 린의 피를 촉매로 태어난 기린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린의 힘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감추고 있는 린의 감정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긴장, 일까요.’
저렇게 강한 힘을 지닌 린이 긴장이라니.
백설이로선 의아할 따름이다.
“대체 저 아이는 뭐지?”
“같은 플레이어가 맞는 거야?”
알데바란이 완전히 소멸되고 퀘스트 클리어창이 뜨자 그제야 사람들은 하나둘 린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날고 긴다는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서 싸워도 알데바란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 린이라는 소녀는 단독으로 알데바란을 단순히 쓰러트린 것도 아니라 말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거기다 마지막에 보여준 참격의 위력은…….
꿀꺽.
그것이 자신들에게 향한다면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사라지리라.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한 씨의 안배라면 그러려니 해야겠네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정신을 차린 유엔과 아서는 서로의 길드를 통솔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미 세한을 가까이서 겪어본 둘이니 다른 플레이어 비하면 받아들이는 게 빨랐다.
“휴우,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람.”
“호수의 마녀라고 했나? 그쪽도 신격을 얻어두는 게 좋을 거야. 단순히 오래 살아온 생물이라는 것만으로는 한계라는 게 있거든.”
“……충고 고맙네.”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하는 아자젤의 충고에 모르간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확실히 저 린이라는 소녀가 아니었다면 알데바란에게 크게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법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지식을 지닌 모르간이었지만, 신격이 없다보니 낼 수 있는 출력이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신격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모르간을 보며 아자젤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과연 린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기대이상이었다.
저 상태로 마계에서 자신과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순수한 재능만 따지자면 린 쪽이 약간 더 우위인 건 맞았지만 살아온 세월이 달랐다.
‘비슷……하려나? 음, 잘 모르겠네.’
애초에 아자젤은 그런 걸 구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싸워서 이기거나 지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둘 중 하나로만 구분한다.
그렇게 린을 보던 아자젤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끼곤 설핏 웃었다.
“우리 계약자는 또 왜 그런 심통이 났어?”
“……나도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넌 뭘 배우고 자시고 그냥 끽이야. 다른 애들 당하는 것도 못 봤나? 하긴,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하니까 버러지인 거지.”
깔깔 웃으면서 말하는 아자젤의 독설에 신자운은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다.
아서나, 샹관 유엔은 신자운과 크게 실력차이가 나지 않는 플레이어였다.
아가트람의 멤버는 말할 것도 없고, 디어사이드의 길드원들도 알데바란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다.
‘아직 부족하군.’
하지만 알데바란이 보여준 무력과 정신은 신자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을 눈앞에서 갈취당하고 부정당하면서도 웃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도리어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던 린보다도 신자운은 알데바란을 닮기를 바랐다.
인류를 위협하던 적에게 보내기엔 우스운 감정이지만, 이것도 이쪽이 승리자의 입장이기 때문이겠지.
‘흐음.’
신자운이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그의 뒤에 있는 한 소녀도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번에도 엔딩에 변동은 없네.’
미래를 볼 수 있는 소녀, 민수아는 심각한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그때 이후로,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마마잭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잠시 엔딩이 불투명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변동된 미래는 지수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미래뿐이었다.
엔딩은 여전히 ‘광기의 마왕’ 그대로.
이번 퀘스트에서 등장한 ‘미래의 린’이라는 존재로 인하여 무언가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알데바란에게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건 바뀌었지만, 역시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광기의 마왕…….’
수아는 하나의 플레이어를 바라보았다.
저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홀로 동떨어진 장소에서 고독하게 앉아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퀘스트를 클리어했다는 기쁨 같은 건 보이지 않았고, 간혹 린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수아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엔딩에 어떤 역할을 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엔딩에서 보였으니까.’
처음 봤을 때는 다른 악마들에게 시선이 가서 몰랐지만, 분명히 있었다.
악마들 사이에 있었던 한 명의 여성이.
그녀는 분명 한지수였다.
***
지수는 알데바란을 쓰러트린 린을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언제나 세한의 곁에 있었던 지수였기에, 린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알았다.
누구보다도 위대한 재능. 세한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겠지.
알데바란이라는 쓰러트릴 수 없는 적을 이기기 위해, 세한은 린의 미래를 불러왔다.
결국 그건 린을 미래의 희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는 자신에게 줬겠지.
하지만 세한이 선택한 건 린이었다. 그건 분명 1회차의 기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수보단 린을 더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이 지수는 너무나도 분했다.
가슴속이 뜨거워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파…….’
지수는 가슴을 꾹 눌렀다.
세한은 지수에게 참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지수의 특성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언제나 착한 아이로 있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선은 확실히 지켰다.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했지만, 그래도 세한을 구속하거나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처음은 자신이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되지 못한 스스로가 바보 같고 분하기도 했다.
“…….”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던 지수는, 린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지?’
그러고 보면 아까 전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눈으로 지수를 보았던 린이다. 지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조용히 서있던 린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한 걸음씩 지수를 향해서 걸어왔다.
“이, 이쪽으로 온다!”
린이 움직이자 술렁이는 플레이어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태 달관한 얼굴로 서 있던 그녀가 어째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저벅.
린은 지수의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언제나 내려다보던 린이었지만, 지금은 눈높이가 같았다.
그것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지수는 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안녕하세요, 지수 언니.”
“……예, 안녕하세요. 린.”
지수는 반말을 해야 되나 고민했지만, 평소처럼 존대를 하기로 했다.
애초에 지수는 타인에게 쉽사리 말을 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언니를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오랜만?”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는 10년 후의 린 테일러였다.
지금의 린과는 기억자체가 달랐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의 시간을 겪은 이후의 린은 이 시대의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세한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수아를 보았다.
아마 그녀는 이 세계의 엔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광기의 마왕.’
린은 그 엔딩을 보았다.
“이 세계의 끝도 그다지 좋지는 않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언니는 알 거예요. 아저씨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언니라면 엔딩을요.”
알고 있다.
세한의 기억을 공유하며 1회차의 엔딩을 본 지수였다.
미약하게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린이 말을 이었다.
“트루엔딩, 광기의 마왕. 그것이 지금의 엔딩이죠.”
듣기만 해도 흉흉한 이름이다.
결코 세한이 바라는 엔딩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미리 말하자면 전 제 말에 확신이 없어요. 이미 제 세계는 엇나가 버렸으니 이 세계도 같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아요.”
지금의 그녀가 어렸을 적, 그때도 알데바란은 강림했고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물리쳤다.
그때의 린도 지수에게 뭔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도 같은 결말은 맞이하리라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자신은 그때의 ‘린’이 했던 말을 알고 있었으니 다른 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 답인지는 모르고,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지만 확정된 미래에 변수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가 분기점.’
만약 이 답이 아니라면 이 시대의 린이 자란 후, 다시 분기점으로 갔을 때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2회차라는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이 진 엔딩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오직 린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통해 만들어진 30분이라는 시간의 틈.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언니. 열쇠는 두 개예요.”
“네?”
“아저씨한테 그렇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린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그녀를 자극 할 수도 있어서 ‘이전의 린’은 하지 않았던 말이다.
“가끔은 나쁜 아이가 되셔야 해요.”
“……!”
예상외의 말에 지수는 린을 노려보았다.
그건 지수의 특성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한의 말을 꼭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세요.”
손바닥을 펼치며 마력을 움직였다.
금색의 마력의 흔들리며 작은 모래시계의 형태를 취했다.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다.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언니가 말했으니까.”
“…….”
대체 미래의 린이 어디가지 정보를 알고 있는지 지수는 알기 힘들었다.
자신이 이정도로 린에게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한 건가?
“아, 시간이 됐나 봐요.”
린의 몸이 옅은 빛을 내며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10년 후의 시간으로 그녀가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 하나만 물을 게요.”
지수는 점차 뿌옇게 변해가는 린에게 다급히 물었다.
“린은 막지 못했던 건가요?”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것인가.
린은 싱긋 웃었다.
지수가 원하는 답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제가 아저씨를 이기지 못했으니까요.”
많은 것을 내포한 대답이다.
‘오빠와 적대관계라는 건가?’
복잡한 얼굴을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다만, 졌다는 말은 아니다.
무사한 그녀의 모습이 그 증거.
이기지 못했다는 건 현재 동수를 이루고 있다는 말일 확률이 높았다.
린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언니도.”
지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런 린만큼 자신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걸까?
“언니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요.”
린은 지수가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기를 바랐다.
타인을 사랑하는 건 좋지만, 아직 인형에 가까운 그녀가 좀 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순수한 재능을 따지자면 린을 넘어설 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한과 지수는 이길 수 없었다.
인간의 강함은 재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훨씬, 말이죠.”
그것이 ‘10년 후의 린’이 한 마지막 말이었다.
***
서울에 돌아오니, 마침 사라지는 린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마지막에 지수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인지 지수의 얼굴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끝난 거냐, 이드라?”
“그렇다. 이제 지구는 나의 것이다.”
마치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처럼 이드라는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하긴, 마치가 아니라 진짜로 세계의 지배자나 마찬가지지.
퍼블리셔가 가지던 시스템에 대한 간섭 권한을 가지고 왔으니까.
게임의 흐름은 시스템의 의지대로 진행되겠지만 적어도 운영이나 사소한 변경점은 얼마든지 건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개 같은 운영에 플레이어들이 죽어나갈 필요가 없어진 거지.
이제 조심할 건 시스템이 내리는 시련, 퀘스트를 계속해서 클리어나가는 것뿐이다.
메인 퀘스트는 시스템이 직접 판단해서 내리지만 운영의 권한으로 변경시키거나 조정할 수도 있다.
상당한 포인트가 드는 만큼 자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지.
“나의 신이여, 이제 무엇을 하겠느냐.”
“……이상하게 부르지 마라.”
“이상하다니? 나는 아바타다. 아바타가 자신의 신을 신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다니. 너무하지 않느냐.”
녀석은 아무래도 나를 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뭐라 반박을 할까, 생각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괜히 뭐라 해봐야 이드라는 옳다구나 놀리겠지.
‘그래도 순순히 아바타가 되어줬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만.’
호칭이야 나중에 차차 정리하면 된다.
1회차에 나의 신이었던 존재를 아바타로 삼다니,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가 싶기도 했다. 압도적으로 격이 높은 존재를 아바타로 삼은 경우는 없다보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도 없었다.
“우선…….”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의 일이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는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게임을 게임답게 만들어야겠지.”
그러기에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