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 정의의 태동(1)
“오빠? 세한 오빠?”
민아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세한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이제 곧 엄청난 놈이 이 세계에 나타날지 모르는데 세한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번에는 딱히 이번 일을 위해 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왜냐면 빛에 휩싸였을 때는 세한도 놀란 얼굴이었으니까.
“언니, 와요.”
린이 민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엇이 온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민아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퀘스트에 언급한 존재인 황도 12궁의 제 2궁.
알데바란이 이 세계에 강림하는 것이다.
“모두 미궁에서 떨어져서 한강으로 뛰어들어!!”
하늘을 보던 모르간 르 페이가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조금의 의심도 가지지 않은 채 한강을 향해 달렸다.
갑자기 무릎을 꿇은 미노타우르스를 죽이던 루크와 창우도.
그리고 워리어의 목을 친 샹관 유엔과 아서 역시 자신의 길드를 이끌고 한강으로 뛰었다.
민아 역시 린과 백설이의 손을 양손에 쥐고 한강의 물로 뛰어들었다.
“──이곳은 요정 여왕의 가호를 받을지니.”
모든 플레이어가 한강으로 뛰어들자 모르간이 작은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플레이어가 뛰어든 한강 전체가 푸르른 장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며 둥근 돔의 형태로 전신을 감쌌다.
“저거…….”
린과 백설이의 손을 꾹 잡고 민아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만이 아니다.
아마 모든 플레이어들은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빛의 꼬리가 길게 늘어지며, 황금색으로 빛나는 별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
굉음, 이라고 밖에 설멸할 수 없는 소음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어두운 도심이 낮이 되며 미궁이 있던 장소에 별이 떨어졌다.
안전지대를 제외한 서울 도심의 절반이 단번에 증발했고, 대지는 뒤집혔으며 모르간이 수호하지 못한 한강의 물은 죄다 증발했다.
“언니.”
린이 덜덜 떨며 민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민아는 그런 린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어린 아이인 백설이와 린의 손을 꾹 잡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민아는 나름 수라장을 해쳐왔다고 생각했다.
오르가나 철웅, 별자리인 카라스와 안타레스, 그리고 마마잭.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경험하지 못할 상대를 민아는 언제나 세한과 함께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그래서 내심 알데바란도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이미 그녀가 만났던 별자리 중에는 같은 황도 12궁인 안타레스도 있었으니까.
“이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하지만 이건 아니다.
플레이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흔히 센티넬이 ‘그런 설정’으로 만들어진 몬스터지만 그런 것과는 격이, 급이 달랐다.
이건 신이다.
필멸의 존재가 닿을 수 없는 한없이 높은 벽 위에 서 있는.
인식과 상식을 벗어난 초월자.
쿠쿵, 쿠쿠쿵.
마치 왕관처럼 길게 휘어진 뿔을 지닌 미노타우르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덩치는 족히 10미터가 넘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미노타우르스는 마치 귀여운 인형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가 바로 황도 12궁 중 제 2궁.
금우궁을 지배하는 자.
「나는 미궁왕 알데바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불멸에 한없이 가까운 그가.
「그대들의 아홉 번째 시련이로다.」
서울에 강림했다.
***
“뭐, 이 새끼?”
아카터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세한을 보았다.
진작 겁을 상실한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명색의 GM이 아닌가?
플레이어라면 모아를 조아리고 바닥을 기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하하! 너는 지금 스스로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아카터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네모난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에는 현재 알데바란이 강림한 서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보이나?”
알데바란은 플레이어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떤 무기도 없었고, 살의조차도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전부 너 하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아카터스는 이죽이며 세한을 비웃었다.
“적당히 나댔어야지. 다른 놈들처럼 얌전히 포인트나 모으고 신들에게 재롱이나 떨었으면 얼마나 좋아.”
만약 그랬다면 아카터스는 평화롭게 한국 서버를 운영했을 것이다.
다른 서버의 운영자들처럼 과금을 유도하여 신들의 포인트를 쪽쪽 빨아먹으며 개미와 같은 플레이어들을 죽이며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도리어 게임을 너무 쉽게 만들어 버렸어. 그러면 안 되지. 그럼 신들이 포인트를 지르지 않잖아. 거기다 이제는 전 서버를 상대로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올리려고 했다며?”
아카터스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재차 깨달았다.
영국의 팬드래건은 물론, 중국의 창천을 뒤에서 움직이며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 세한을 보며 내버려 두면 정말 게임의 벨런스에 문제가 생기리라 판단했다.
게임이 쉬우면 재미가 없다.
무너진 벨런스가 수요를 만드는 법.
아카터스는 그렇게 여태 그렇게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게임을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에게 세한이라는 걸림돌은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우선……, 네가 그토록 지키려던 서울의 플레이어부터 죄다 몰살시켜주지. 네놈의 길드가 제법 뛰어난 녀석들을 모은 건 안다만 그래 봤자야.”
아카터스는 화면을 지극히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다 팬드래건과 창천까지 한 번에 불러줘서 정말 고맙다. 내 서버는 아니지만 그쪽도 게임의 운영에 거슬리는 녀석들인 건 확실하거든.”
그는 이제 세한이 절망하리라 생각했다.
확실히 세한은 대단한 플레이어는 맞았다. 자신을 이렇게 나서게 만든 플레이어는 긴 GM 생활 중 세한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아무래 대단해봐야 개인에 불과했다.
이렇게 GM의 권한으로 소환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 이제 상황이 좀 파악되나?”
그게, 플레이어의 한계니까.
“…….”
세한은 그런 아카터스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았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고 건성으로 앉아있었다.
마치 지금 아카터스가 하는 말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이제 할 말은 다 했냐?”
“……뭐?”
여전히 세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손에 깍지를 끼며 아카터스를 향해 말했다.
“상황파악이 되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아카터스.”
“넌 정말 미친 거냐? 하기야 이런 상황이 되면 미치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래, 어쩌면 미쳤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이미 몇십 년 전에.”
“몇십 년 전?”
아카터스는 그런 세한의 말에 눈을 찡그렸다.
게임이 시작된 건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혹시 이놈은 게임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미쳐 있었다는 건가?
“다 떠들었으면 화면이나 봐라. 대화는 그다음에 해도 괜찮으니까.”
“하, 그래. 같잖은 희망을 품은 모양이군, 네가 모아온 찌끄러기들이 알데바란을 이긴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화면에는 알데바란을 향해 앞으로 나서는 플레이어들이 몇몇이 보였다.
하나 같이 이름난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아카터스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네 놈의 헛된 희망이 부서지는 걸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겠군.”
어차피 조금 후면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상황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좆됐다는 걸.
울고 불며 공포와 겁에 질린 세한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카터스는 한없이 자비로워질 수 있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
알데바란은 천천히 손을 뻗어 플레이어들을 향해 천천히 휘둘렀다.
마치 손바람을 내는 것처럼 가벼운 행동.
마치 날아다니는 파리를 쳐내는 것과 같은 손놀림이었지만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땅이 갈라지고 모르간이 만든 결계를 단 한방에 분쇄시켜 버린 것이다.
별이 떨어진 충격에도 견디던 견고한 결계가 파스스 부서져 흩어졌다.
「이건 또 신기한 존재가 있군, 신화시대부터 살아온 요정이라니. 그대가 나의 상대인가?」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모르간은 지팡이를 들고 알데바란을 향해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내 사명은 이미 끝났거든. 살만큼 살았고, 검의 주인을 지키는 일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
「그거 즐거울 것 같구나.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괴로운 일이니까. 그대가 있다면 제법 즐길 수 있겠어.」
오만한 알데바란의 말에 모르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신화시대부터 살아온 그녀라도 신위를 지니지 못한 그녀는 알데바란과 큰 격차가 있었다.
지금만큼은 사라진 자신의 자매들처럼 신위를 얻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그럼 일을 하도록 해야겠군. 지금부터 재주껏 살아남아 보도록 하여라.」
알데바란은 한걸음, 한걸음 플레이어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흠, 하지만 그대들과 어울리기엔 내 몸은 너무 거대한 것 같구나.」
알데바란이 그렇게 말한 순간, 그의 몸이 단번에 줄어들며 인간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마에 돋아난 왕관과 같은 뿔이 아니라면 그가 미노타우르스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자, 오거라.”
방금 전까지 들리던 것과는 다른 인간의 음성이었다.
“하아아아!!”
가장 먼저 덤벼든 건 엑스칼리버의 주인, 아서였다.
그리고 그 뒤로 창천 길드의 수장인 샹관 유엔과 루크와 창우, 그리고 아가트람의 길드원이 뒤를 이었고, 신유화가 그들을 보조했다.
충동적으로 덤빈 건 아니었다.
‘어차피 평범한 플레이어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판단하에 서로 입을 맞춰 각 길드나 일정 수준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덤비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혹시 몰라.’
그것을 지켜보는 플레이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최상위에 위치한 그들이라면 아무리 강한 알데바란이라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 희망은 불과 5분도 지나기 전에 깨져버렸다.
“아니, 이거 너무 쌔잖아…….”
모르간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알데바란의 주위에는 방금 전까지 덤벼들던 플레이어들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만약 모르간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고 황급히 신유화가 치유마법을 걸지 않았다면 모두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아서도, 샹관 유엔도, 창우도 루크도.
아가트람도, 신유화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오직 모르간만이 분투하며 알데바란과 맞서고 있었다.
‘어떡해.’
민아는 차마 나서지 못한 채, 린과 백설이의 손을 꾹 잡았다.
과연 저 마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길지 않을 것이다.
“앗!”
모르간의 비명이 울렸다.
그건 알데바란의 공격에 의한 비명이라기보단, 그의 공격을 피하며 생긴 비명이었다.
모르간이 피한 알데바란의 공격이 한강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주먹을 뻗었을 뿐인 알데바란의 공격은, 거대한 마력덩어리가 되어 운석처럼 한강을 향해 떨어졌다.
‘위험……!“
민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경화시키며 린과 백설이를 껴안았다.
적어도 이 두 아이만을 지키기 위해서.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충격은 돌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플레이어들의 앞에 서있는 새하얀 드레스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 귀족 소녀.
현재 상황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마치 환상처럼 보였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지?“
하지만 처음으로 알데바란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녀는 황도 12궁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알데바란이라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이였다.
”나태의 악마, 아자젤.“
”어머나, 무서운 표정 짓지마. 나는 그냥 부탁을 받고 이곳에 왔을 뿐이야.“
”나태의 악마가 남의 부탁을 듣기도 한다는 말인가?“
”그야 경우에 따라 다르지. 난 나태의 악마치고는 부지런한지도 몰라.“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자신의 계약자에게 가볍게 윙크했다.
”걱정마, 내 부탁은 딱 10분만 여기에 서 있는 거야. 이후는 마음대로 해.“
”그렇다면 문제없지.“
설령 아자젤이 막으려 한다 해도 인간계에서는 온전한 힘을 내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다지 큰 의미가 담긴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런 아자젤과 알데바란의 대화를 다르게 받아들인 이가 하나 있었다.
왜냐면 아자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안배였다.
’……10분.‘
민아에게 안겨져 있는 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손에 쥔 작은 모래시계를 움켜쥐었다.
’오빠, 저는 정말로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런 린의 질문에 대답해줄 세한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