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 집결(2)
“전군, 돌격!!”
엑스칼리버를 높이 든 아서가 큰소리로 외치자 한강 위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미궁의 입구에서 쏟아져나오는 미노타우르스들을 향해 달렸다.
「크, 크으으. 오히려 잘됐다. 플레이어가 늘어나 봐야 알데바란 님께 바칠 공물이 늘어났을 뿐이지!!」
한강둔치를 넘어 몰려드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미노타우르스킹이 거대한 도끼를 앞으로 뻗었다.
「모두 날뛰어라!」
쿵쿵쿵쿵!!
미노타우르스들이 저마다 큰 소리로 울며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육중한 몬스터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자, 대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폭발적인 돌진력을 지닌 미노타우르스들을 상대로 정면에서 싸운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플레이어들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서서 달려간 아서가 머리를 들이민 미노타우르스 워리어를 향해 엑스칼리버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위력이냐.」
엑스칼리버는 미노타우르스 워리어를 단 한 방에 두 조각으로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대지를 반으로 갈랐다.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뒤이어 달려들던 미노타우르스의 발까지 꼬였다.
신념의 응집과, 엑스칼리버의 힘이 합쳐진 아서의 공격은 한방한방이 상급 마법 이상의 폭발력을 자랑했다.
“음머, 음머어어!!”
“녀석들의 등을 노려라! 미노타우르스는 등의 거죽이 상대적으로 약해!!”
팬드래건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마수 사냥의 프로다.
이미 한번 몬스터에게 빼앗겼던 국토를 되찾은 이들이었다.
아무리 거대한 괴수라도 그들은 용맹하게 덤벼들었다. 미노타우르스 정도는 그들에게 문제도 아니었다.
“하아아압!!”
가장 큰 활약을 내보이는 건 단연 팬드래건 길드였지만, 창천 길드 역시 뒤지지 않았다.
창천 길드의 무인들이 보법을 사용하여 미노타우르스들의 머리를 넘나다니며 눈을 노리고 짱을 찔렀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육합대창의 명수인 샹관 유엔이었다.
거대한 도끼들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하며 미노타우르스 워리어의 눈에 창을 찔러넣는 모습은 경이적일 정도였다.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는 미궁이 있다면 무적. 계속 싸워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모르는 것이냐!!」
미노타우르스 킹은 쿵쿵 발을 구르며 미궁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미노타우르스들을 계속해서 보냈다. 지속적인 물량 공세에 플레이어들도 점차 밀리는 기색이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타올라라.”
천상환의 눈이 금색으로 물들며 손에 불타는 검이 잡혔다.
클라우 솔라스에서 붉은 열선이 뿜어져 나오며 달려오던 미노타우르스 수십 마리의 몸을 절단했다.
이수린의 마법이 비처럼 떨어졌고, 강준식의 불덩어리가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그리고 김태훈은 자신의 몸을 이용해 혹시 모를 위협을 확실히 가드했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아가트람의 길드원들이 앞서 싸우자 점차 미노타우르스들과 동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이시여.”
성녀 신유화가 천천히 양손을 모았다.
그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지면에 밝은 빛이 퍼져나가며 거대한 영역을 형성했다.
사제계열 스킬 중 최상위 스킬인 ‘성역’이다.
성역의 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지속적으로 체력이 회복되고 상처가 낫기 시작했다.
거기다 이아영이 브리싱가멘을 사용하여 남자 플레이어들에게 버프를 걸기 시작하자 균형이 무너지며 플레이어들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갔다.
그럼에도 미노타우르스 군대는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미노타우르스 킹의 말처럼 미궁에서 계속 미노타우르스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미궁이 있다면 무적이라고?”
세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전장을 휘저었다.
상공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통해 시야를 확장시키고 위험해 보이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허수공간을 열고 무기를 사출시켜 미노타우르스들을 공격을 방해했다.
확실히 현재 플레이어들이 미노타우르스들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킹의 말처럼 미궁이 남아 있는 한 미노타우르스들은 절멸시키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한지수.”
굳이 주변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라면 분명 계속 자신의 곁에 있었을 테니까.
“네.”
계속 곁에서 숨을 죽이고 쫓아다니던 지수가 뜨거운 눈으로 세한을 보았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한 마리의 짐승과 같이.
“밀어버려.”
지수의 머리가 미약하게 끄덕여졌다.
동공이 새빨갛게 물들고 전신에 새빨간 선이 마치 문신처럼 퍼져나갔다.
버서크가 발동하며, 전신에 무리가 가기 시작하고 빠르게 뛰기 심장에서 혈액이 전신을 펌핑시켰다.
──쿵.
발을 내딛자 지면이 거미줄처럼 부서졌다.
성녀 신유화의 버프까지 받은 지수의 신체능력은 현재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한계 수치를 아득히 넘었다.
「마, 막아라!」
흉성의 학살자를 든 지수가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마치 폭주한 기관차처럼 방어조차 하지 않으며 오로지 다리만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미노타우르스들이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도리어 열차에 치인 인간처럼 사지가 분해되며 한줌의 핏덩이가 되어버렸다.
이래서야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
미궁의 출구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미노타우르스 킹은 코앞까지 다가온 지수의 모습에 자신의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가 도끼를 지면을 내리찍기도 전에 지수는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마치 미노타우르스 킹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그가 부수라고 한 것은 미궁이었으니까.
콰콰콰쾅!!
「뭐, 뭣이?!」
달려간 지수가 흉성의 학살자를 들고 벽을 후려치자 미궁의 벽이 허물어졌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부수는 것과 같았다.
여태까지 플레이어들을 막아선 통곡의 벽이라기엔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현재 이 세계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의 실력으로는 미궁을 결코 부술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을 지나쳐간 여성은 미궁을 마치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도 엄청났다.
거대한 둔기를 들고 두어 번 내려치면 벽이 하나 사라졌다.
미궁이 부서지면 미노타우르스도 더 이상 태어나지 못하니 킹으로선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노타우르스들은 전선을 유지하고 워리어들은 저 여자를 막아라!!」
앞에서 밀고 들어오는 플레이어들도 문제였지만 미궁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그것은 미궁 앞을 사내 때문에 불가능했다.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 세한은, 지수를 향해 달려가는 미노타우르스들을 앞질러 입구를 막아섰다.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가 보던가.”
「오만한 놈! 혼자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분명 저자가 군대를 이끌고 상황을 반전시킨 인물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이야기였다.
알데바란의 가호를 받은 미노타우르스 워리어들을 홀로 막는다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핑──.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미노타우르스 킹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옆으로 젖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미노타우르스 킹의 머리를 꿰뚫었을 것이다.
쿵, 쿠쿵.
하지만 다른 미노타우르스 워리어들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고꾸라졌다.
1초도 안 되어 미노타우르스 최강의 전사들이 시체로 변한 것이다.
“말했잖아.”
세한의 주위로 한 자루의 검이 그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비검 프라가라흐.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가 보라니까?”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웃는 그에게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으니까.
***
“와, 이거 이기나? 정말 이기나?”
민아는 덤벼드는 미노타루스의 목에 칼날로 변한 손을 찔러 넣은 뒤, 뽑으며 빙그르르 착지했다.
지수가 미궁을 밀어버리기 시작하며 보충되는 미노타우르스의 숫자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미노타우르스 워리어들은 세한에게 몰려들어 어떻게든 미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터라 상대적으로 이쪽의 상황은 편해졌다.
남은 미노타우르스와 워리어들이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성녀 신유화와 이아영이 치유와 버프를 반복해서 주는 덕에 제대로 한 명을 죽이는 것도 힘들었다.
이젠 불리한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근데 쟤네 언제 실력이 저렇게 늘었데?’
눈에 들어온 건 백설이와 린이었다.
두 소녀는 둘이서 미노타우르스를 능숙하게 사냥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민아보다 능숙했다.
어린 두 소녀가 죽인 미노타우르스의 숫자는 배태랑 플레이어들이 죽인 미노타우르스의 숫자에 뒤지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인 루크의 입장에선 린이 얌전히 숨어 있기를 바랐지만, 린이 스스로 싸우기를 바란 탓에 애간장을 녹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곧 끝날 것 같은걸.’
미궁의 벽이 허물어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남은 미노타우르스의 수가 상당하여 전투는 지속되고 있었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 새벽이 되면 대충 끝나지 않을까.
“보름달이네.”
민아는 무심코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았다.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세계가 게임이 되어버린 이후 좋아진 점이라면 하늘의 별이 잘 보인다는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
민아는 현재 상황을 잊고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
“……어라?”
그러다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별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단순한 별이 아닌 천체(天體)가.
그 사실을 알아챈 건 민아만이 아니었다.
별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미노타우르스들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왕이 지금 지상에 강림하려 한다는 것을.
「오오…….」
미노타우르스 킹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과 싸우던 미노타우르스들도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뭐야, 이놈들? 죽여달라는 건가?”
“갑자기 왜 이래?”
덕분에 플레이어들도 당황하며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덤벼들던 괴물들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니 이상한 게 당연했다.
심지어 그 상태에서 공격해도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오는 건가.”
미노타우르스 워리어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서며 세한 역시 하늘을 보았다.
천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별의 흐름이 달라지며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거대한 초월적인 존재가.
“……?”
플레이어들의 시선도 한둘씩 하늘을 향했다.
조금 실력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느낀 것이다.
“세한 오빠!”
민아가 황급히 세한에게 다가갔다.
감이 예민한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뭣보다 어릿광대의 반응이 이상했다.
언제나 유쾌하던 자신의 신이었지만 지금만큼 아니었다.
마치 어서 피하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지? 이제 우리 이긴 거 아냐?”
민아의 말에 세한은 머리를 흔들었다.
“퀘스트 내용을 잘 봐라. 9번째 퀘스트는 이런 소들과 싸우는 게 아니야.”
“……그럼?”
“퀘스트의 주역은 알데바란이지. 이제 5분 후면 녀석이 올 거다.”
12시 정각.
마지막 3일째 되는 날, 그가 이 세계에 강림하게 된다.
이 퀘스트가 1회차에서 등장한 건 지금보다 훨씬 후였다.
오로지 서울을 멸망시키기 위해 아카터스가 불렀던 녀석.
그래도 지금 상황은 괜찮다.
모르간을 통해 창천과 팬드래건을 이끌고 온 덕에 미노타우르스들로 의해 입는 피해는 막았다.
남은 건 이제 알데바란뿐이다.
띠링!
그렇게 알데바란이 강림하기를 기다리던 그때, 세한의 귓가에 알림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번 퀘스트와는 하등 관계하는 알람이었다.
[GM 아카터스의 요청으로 당신의 몸이 5초 후, GM에게 이동됩니다.]
바로 아카터스가 GM이 가진 권한 중 하나인 플레이어 소환.
“하.”
알람의 내용을 확인한 세한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겠다는 거냐.
번쩍!
“아저씨?”
번쩍이는 빛에 휩싸이는 세한을 봤는지 린이 쪼르르 달려왔다.
방금 전까지 미노타우르스와 싸우고 있었던 린의 손은 빨간 피로 물들어있었다.
1회차의 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몸을 숨기고 덜덜 떨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도 알지 못한 채, 세한은 그런 그녀를 안고 루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어린아이가 전투에 싸워야 했다는 점이 씁쓸했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불안으로 가득 찬 린의 눈을 보며 세한은 상냥하게 말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녀가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괜찮아.”
세한은 손을 뻗어 린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뭐든지?”
“그래, 뭐든지.”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그 말이 사실이냐는 것 같은 의문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세한은 그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이미, 린은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
“만나고 싶었다. 김세한.”
눈을 감았다가 뜨니 난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디를 봐도 오직 새하얄 뿐인 세계에는 오직 둥근 커다란 탁자와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반대편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존재는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녀석은 지금 나와 같은 크기로 변해 있었지만, 본래는 훨씬 거대한 덩치를 지닌 거인이었다.
오래전 수많은 신화에서 등장했던 신들의 숙적.
티탄.
시스템에서 탄생한 괴물.
그것이 녀석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너는 나를 모르겠지.”
아카터스는 탁자 위에 턱을 괴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놈의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 그리고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내가 녀석을 상당히 빡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1회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모습에 나는 무심코 웃었다.
“웃어? 아아, 그렇군. 넌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
“아카터스.”
녀석의 말을 끊자 놈의 얼굴에 옅은 노기가 띠었다.
감히 필멸자이며 한낱 플레이어에 불과한 내가 건방지게 나오니 그의 입장에서는 황당했으리라.
그는 엄연히 중하급 이상의 신위를 지닌 신급의 존재다.
이곳에서는 시스템의 영향도 받지 않아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아무리 강해져도 플레이어 따위가 비빌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지구에서 마마잭이나 카라스가 죽었던 건,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영향하에 있으며 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플레이어가 감당할 수 있도록 너프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만나고 싶었다,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