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 지하 투기장(1)
메리수라는 건 소설에서 쓰이는 말 중 하나다.
본래는 팬픽에서 시작된 말이었지만, 요즘은 흔히 쓰이는 말 중에 하나가 되었다.
메리수가 무엇이냐.
간단히 설명하면 편의주의적인 캐릭터다.
표현되는 형태는 다양하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렇다. 기존의 인물들을 쩌리로 만들며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보통 메리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메리수라는 단어는 보통 그런 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 린은 그것을 특성으로 지녔지.’
특성을 지금 개화했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그 특성이 없더라도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다.
이미 특성을 개화했을 수도 있고, 아직 개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린이 스스로의 의지로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는 점.
여태 가랑비에 옷 젖듯 봐온 수많은 경험들이 조금씩 린의 몸에 녹아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너, 너 대체 뭐야. 지금 대체 어떻게 내 혈권을 사용한 거지?! 분명 사술이다, 말도 안 된다고!!”
“혈권이요?”
뒤틀린 오른팔을 감싸며 오우양 민이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린이었다.
“그,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조금 이상해 보여서 고친 거뿐이에요.”
“뭐?”
오우양 민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린이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린은 진심이다. 린은 그냥 오우양 민의 공격이 이상해 보였을 뿐이다.
‘스킬을 보고 그 자리에서 익히며, 거기에 개선방향까지 나온다라…….’
재능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 없는 영역이다.
뭐, 오우양 민의 혈권이 대단치 않았다는 것도 이유이긴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악마적인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
투기장 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보면 공포를 느낀다.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싸움을 즐기며, 플레이어를 노예로 부리는 이들이라고 해도 공포는 느낀다.
설마 그것을 고작 열세 살짜리 어린애에게 느끼리라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
“노, 놀랍습니다. 설마 저 어린 소녀가 혈권 오우양 민을 쓰러트릴 줄이야…….”
사회자조차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을 심호흡을 한 뒤, 주변을 훑으며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저 아이, 이름이 뭐지?”
애초에 패배하리라 생각했기에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회자에게 친절히 답해줬다.
“린 테일러.”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관객들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을 것이다.
“예, 옙. 그렇군요, 린 테일러! 저 어린 플레이어에게 도전할 자가 있습니까?!”
사회자가 애써 기운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도전자가 없으면 현재 걸린 돈은 온전히 린이 가져가게 된다.
거기에 린에게 걸린 비율은 무려 8:2
‘좋구나.’
나는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리 포인트를 걸어둔 탓에 내게 돌아올 포인트는 무려 4만 포인트.
린은 현재 꽤 지친 상대였지만 지금 보여준 린의 모습 때문에 어떤 플레이어도 쉽사리 덤비지 못했다.
“도전자가 없으므로, 오늘 걸린 상금은 모두 이 작은 소녀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투기장을 방문한 첫날, 린은 투기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이름을 똑똑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
***
통 아오리엔(童奥炼)은 기자다.
플레이어이지만 전직 기자 출신인 그는 다양한 정보를 모아 기사를 내고는 했다.
신문사나 방송국도 차차 회복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통 아오리엔은 조금이라도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특종을 찾아다녔다.
그중 지하 투기장은 좋은 먹이였다.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이 모여드는 장소.
투기장은 다른 곳도 많았지만 가장 큰 곳은 단연 창천 길드의 투기장이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끔찍한 장소.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중국 최대의 길드라고 할 수 있는 창천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이미 무의미해진 정부?
차라리 다른 길드가 연합해서 덤비는 편이 현실성이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통 아오리엔은 지하 투기장에 숨어들어 눈을 부릅뜨고 돌아다녔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요즘 투기장에 괴물들이 너무 많다니까.”
“맞아, 그 눈이 안 보이는 사내도 그렇고, 양키놈도 강하지.”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중 통 아오리엔의 귀를 잡아끈 건 ‘괴물’이라는 단어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들 중에서는 그와 비슷한 말이 많았다. 기자로서의 본능이 ‘괴물’의 정체를 알아야만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통 아오리엔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다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런 곳일수록 어수룩하거나 평범한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험상궂은 사내가 알기 쉬웠다.
“저기 뭐 좀 묻겠습니다.”
“뉘슈?”
“투기장에 처음 들어온 신입입니다. 혹시 주의할 점이 있나 싶어서 여쭤보려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여기서 그런 짓하면 뒤치기 당하기 딱 좋아.”
“예, 그런 거 같더군요. 하지만 워낙 인상이 좋아 보이셔서 말이죠.”
통 아오리엔의 말이 제법 기분이 좋았는지 남자는 씩 웃었다.
“흠흠, 내가 인상이 좋기는 하지. 그래서 주의할 점?”
“예.”
“간단해. 친근하게 다가오는 플레이어나, 괜히 뒤에 따라오는 플레이어들을 조심하슈.”
그건 이미 알고 있는 거다.
하지만 통 아오리엔은 기쁜 얼굴로 받아 적는 척했다.
사내는 신이 나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근 투기장에 들어온 녀석들이 있는데.”
“최근 투기장에 들어온 사람들이요?”
“그래. 그놈들이 좀 이상해. 한 놈은 눈이 안 보이는데 귀신같이 베고, 다른 놈은 금발의 양키인데 보통 놈이 아니야. 정신 차리면 다른 한쪽이 쓰러져 있다니까?”
통 아오리엔은 그 둘이 아까 대화에서 들었던 괴물이라고 판단했다.
“그 두 명이 요주의 인물이군요.”
“흠, 비슷해. 근데 그런 녀석들이 더 있어.”
“예?”
당연히 두 사람이 끝이리라 생각했던 통 아오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그중 두 명은 진국이지.”
“그게 누굽니까?”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철창이 하나 있었다.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빨라. 경고하자면 넋 놓지 마, 요즘 그걸 노리는 놈들이 기승이거든.”
“예,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통 아오리엔은 친절히 이야기해 준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소량의 포인트를 보답으로 줬다.
통 아오리엔은 사내가 말했던 철창으로 향했다.
투기장의 플레이어들을 긴장시킨 존재가 대체 누구인지 점점 더 궁금증이 부풀어 올랐다.
험상궂은 사내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필히 대단한 플레이어일 터.
‘어린애?’
철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통 아오리엔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철창 안에 기껏해야 열 살이 조금 넘는 아이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투기장이 반인륜적인 장소라고 할지라도 이건 심했다.
당장 아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통 아오리엔과 달리 주변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마치…….
‘……두려워하고 있어?’
소녀의 앞에는 신장이 190이 넘는 장신의 남자가 있었다.
누가 봐도 위기인 상황이었지만, 소녀의 얼굴을 태연했다.
도리어 눈앞의 남자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걸로 끝이다, ──청아검!!”
남자의 외침과 함께 손에 쥔 검에서 푸른 검기가 넘실거렸다.
통 아오리엔은 내심 감탄했다. 마력의 응집 속도나 그 질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분명 상당한 실력자다.
검이 움직이자 푸른 검기는 마치 맹수의 이빨처럼 소녀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통 아오리엔은 소녀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예상했다.
“헉!!”
하지만 이어진 광경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두어 번 깜박이더니 앙증맞은 손에 푸른빛이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은 방금 전 상대가 외쳤던 청아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정교했고 완성되어 있었다.
“포식자…….”
“미쳤어. 저것도 가져가 버린 건가?”
웅성이는 주변의 반응에 통 아오리엔은 눈앞의 광경이 일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즉석에서 스킬을 빼앗아 더 나은 방법으로 사용하다니.
괴물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확실히 큰 특종이었지만 통 아오리엔은 차마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필사적으로 익힌 스킬을 소녀에게 가볍게 빼앗기는 광경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험한 플레이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쉽군.’
철창은 수도 없이 많았다.
사람의 숫자도 바글바글해서 보통이라면 특정 플레이어를 찾는 게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 아오리엔은 알 수 있었다. ‘괴물’이라고 불리는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으니까.
바로 이곳처럼.
“더 없냐?”
검은 옷의 사내가 말했다.
그의 앞에는 처참하게 박살 나서 쓰러진 사내 세 명이 있었다.
“그럼 상금은 세 배지?”
건방진 말투였지만 구경하던 플레이어들은 차마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스킬을 빼앗아 버리는 10살의 소녀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오는 공포라면, 이 사내는 좀 더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검도, 창도, 그리고 맨손으로도 싸워줬는데 말이야. 참 별거 없네.”
단순한 강함.
압도적 힘을 다루는 강자. 그래서 투기장에선 모두가 그를 이렇게 불렀다.
폭군.
그는 상대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으며 철저하게 밟아버렸다.
주변의 플레이어들을 도발하는 것처럼.
그래서 많은 플레이어들이 분개하며 덤벼들었지만 모두가 저 꼴이었다.
일 대 일은 물론, 일 대 다수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종이다.’
포식자라 불리는 10살의 소녀부터, 투기장의 폭군까지.
긁어모은 정보로 볼 때 중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플레이어라는 모양이다.
‘디어사이드.’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괴물이 중국에 들어와 버린 모양이다.
***
투기장에서 우리는 순조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린을 비롯한 다른 길드원들의 목적은 간단, 플레이어간의 실전을 쌓는 것이다.
알다시피 플레이어간의 치열한 싸움은 쉽사리 할 수 없다.
악마와 연관된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면.
그런 면에서 이 투기장은 정말 좋은 장소였다.
린은 하루에 최대 두 번만 싸우게 했고, 그건 백설이도 마찬가지였다.
‘린의 체력은 좀 더 보강해야겠어.’
하루에 두 번만 싸우게 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단순히 린의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야 압도적으로 린이 이긴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눈에는 아니었다.
린은 전혀 여유롭지 않았다. 특성을 각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이 사용하는 초감각으로 스킬을 익히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체력소모가 극심해서 장기전은 무리였다.
“넌 린에게 계속 치유마법을 사용해 줘.”
“알겠습니다.”
체력이 바닥나 헥헥 거리는 린은 백설이에게 맡겨두었다.
백설이는 좀 더 싸울 수 있었지만, 주변 중국인들이 백설이를 무슨 영물 보듯 보는 터라 혼자 내버려 두기가 어려웠다. 계속 린이랑 붙여두지 않았다면 내단을 노린 미친 중국인들이 덤벼들었겠지.
‘민아와 지수는…… 잘하고 있군.’
그쪽은 특별한 이슈는 없었지만 지수가 잘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몇 번 민아의 비명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이제 4일째.”
슬슬 반응이 올 때도 됐는데?
“뭐가 4일째죠?”
팔짱을 끼고 서있는데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상관 유엔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무슨 생각이라니?”
“일부로 투기장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도발하고 있잖아요. 마치 자기를 쓰러트려 보라는 것처럼.”
유엔의 어조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의외인 점은 그 걱정이 투기장이나 창천 길드가 아닌 내게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근데 아직 많이 부족하더라.”
유엔은 입을 떡 벌렸다.
“이곳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예요.”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유엔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상당히 자존심이 강했다.
그러니 매일 털려도 계속 덤비는 플레이어가 있는 거지.
“나는 투기장에 있는 이들을 얕보는 게 아니야. 단지 개선점을 생각했을 뿐이지.”
“개선점?”
“경매장도 경매장이지만, 투기장은 꽤 좋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해. 플레이어들의 실력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거든.”
사람들을 죽고 죽이는 걸 관람하며 돈을 거는 투기장은 당장 사라져야 할 곳은 맞다.
하지만 그냥 부숴 버리기엔 아까웠다.
‘잘만 이용한다면 괜찮은 물건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기 위해선 창천 길드의 지분을 차지해야만 했다.
“샹관 유엔.”
“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예?!”
유엔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내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얼굴을 부채질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낼 만한 말이었나?’
다행히 그녀의 기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게 심호흡을 하여 본래의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왔다.
“그런 질문을 한 이유는 뭐죠?”
“나는 네가 마음에 들거든.”
“제, 제가요?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을 더듬는 그녀에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역시 네가 좋을 것 같다.”
“그럼…….”
샹관 유엔이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 역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샹관 유엔이 바라는 것은 이미 일찌감치 파악해 둔 상태였다.
“창천 길드를 차지하는 데 힘을 보태주지.”
“……네?”
“응?”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예상한 반응과 다른걸. 설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가?
영특한 유엔이니 분명 내가 이런 제안을 해오리라 생각했을 줄 알았는데.
“아, 아아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유엔이 양손을 흔들며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