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 메리수(2)
경매장에 출품한 물건들은 시우가 만든 양산형 장비다.
특별한 스킬이 붙어 있는 장비는 아니었으나 미스릴과 에스더의 합금은 현재 세계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당연히 경매장 관리인의 입은 헤벌쭉 벌어졌고 내게 연신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그 정도의 물건들이라면 수수료만 챙겨도 확실히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테니까.
최저 2만 포인트.
비싸면 최대 그 두 배까지도 판매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으니.
“정말 지하에 이런 곳이 있군.”
루크가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현재 디어사이드 길드원들은 모두 어제 나와 지수가 왔던 투기장에 도착해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창우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들에 감탄했고, 린이나 백설이는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물론 민아는 거의 땡깡수준으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돌아갈래! 왜 기껏 중국에 와서 이런 곳에 있어야 되는 거야!”
“투기장만큼 플레이어들과 제대로 싸워볼 장소는 많지 않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돈을 딸 수 있다.
최근 이래저래 포인트를 많이 쓴 터라 포인트를 상당량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시우의 물건을 판 돈은 온전히 나에게만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지만, 이건 다르지.
“오늘의 일정은 간단합니다. 자, 그럼 각자 투기장에서 싸우고 포인트를 벌고 오죠.”
“꼭 해야 되는 건가?”
“정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린과 백설이는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할 겁니다.”
“끄응.”
루크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앓는 신음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상당한 실력의 플레이어였지만, 포인트로 강해진 몸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본래 상당히 단련되어 있던 탓에, 도리어 급격히 강해진 신체를 따라가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감각을 익히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오빠, 그럼 저는 어떡해요? 저도 싸워요?”
“넌 안 돼. 가서 민아가 딴 짓 하나 안하나 감시 좀 해라.”
“저도 포인트 많이 벌 수 있는데요…….”
“알아.”
지수는 영 아쉬운 눈치였다.
포인트를 벌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게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아쉬운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수가 출전했다가 실수로 힘 조절을 못하면 사람의 머리가 레고처럼 뽑혀버릴 텐데.
아무리 여기가 막장이라지만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지옥일지도 모르는 장소지만, 천살성인 지수에게 이곳은 단순한 놀이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부탁해.”
“네, 절대 딴 짓 못하게 할게요.”
부탁한다는 말에 지수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민아를 향해 달려갔다.
‘지수라면 민아가 변신해서 도망치려고 해도 잘 잡겠지.’
나는 심심한 위로를 민아에게 보냈다.
변신능력이나 연금술은 일취월장하고 있었지만, 아무리봐도 1회차의 민아에 비하면 전투능력이 부족했다.
내가 너무 편안 환경을 제공한 탓에 실력이 늘지 않은 거겠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독하게 굴릴 필요가 있었다.
“저기 세한.”
그때 백설이가 내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린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백설이의 얼굴은 한층 창백했다.
“왜?”
“주변에서 저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뿔을 고아먹으면 좋을 것 같다느니 하는데요.”
“얘들이 원래 그래.”
“원래 그렇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너무 무서운데…….”
책상다리 빼고는 다 먹는다는 말이 나오는 중국인들이다.
평범한 플레이어도 납치해가는 상황에서 뿔이 달린 수상한 어린애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걱정 마라. 네가 훨씬 강하니까. 그걸 보여주면 저 녀석들도 더 이상 네게 그런 시선을 보내지 못할 거다.”
“……네. 힘내겠습니다. 저는 성수 기린이니까요.”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백설이가 대견해서 머리를 두드려줬다.
린과 백설이는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오늘은 날이군요! 오우양 민(欧阳闵). 누가 그의 연승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젠 익숙해진 사회자의 목소리가 투기장에 가까워질수록 울려 퍼졌다.
“우와, 피. 피가.”
린이 경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우양 민과 싸운 상대는 피떡이 되어 기절해 있었다.
정말 겨우 숨만 붙어있는 수준이다.
“저도 저런 사람과 싸워야 하나요? 정말 제가 이길 수 있어요?”
“아마.”
“아마라고 답하시면 어떡해요!”
린이 빽 소리를 지르자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제 유엔을 쓰러트렸던 나를 알아보고 놀라는 이들도 있었고, 어린애 둘이 투기장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린은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오오, 어제 잠룡을 쓰러트린 까마귀가 있습니다! 오늘은 혈권 오우양 민을 사냥하러 온 걸까요!”
사회자 역시 우리를 발견한 모양인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철창 안에 있던 오우양 민이 나를 긴장한 기색으로 보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오늘 나는 싸울 생각없거든.
“린, 얼굴 그만가리고 손 좀 들어봐.”
“네? 손이요? 왜요?”
내 말에 린은 별 생각없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덕분에 우리를 주목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건 연신 시끄럽게 떠들던 사회자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오우양 민에게 도전할 생각으로 손을 든 걸까요? 이런 소녀가 높이 손을 들었습니다!”
“네?”
사회자의 말에 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달라는 눈치다.
“여기서 손을 들면 보통 도전자로 취급되거든.”
“저, 그럼 도전자가 된 건가요?”
“그럼 셈이지.”
린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역시 실수였나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도전하시겠습니까. 말겠습니까.”
보통이라면 실수로 손을 들었어도 참여를 시켰겠지만, 그래도 어린애라고 한번 봐준 모양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도덕심은 있는 모양이군.”
“세한은 최소한의 도덕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난 린을 믿으니까.”
“저도 믿지만……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린이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정말 싸우냐는 눈치다.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백설이는 싸울 테니까.”
“…….”
내 말에 백설이는 대번에 침울해졌다.
린과 달리 펫으로 취급받는 백설이는 내 말을 결코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럼…… 저, 저도 하겠어요. 할게요!”
“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만 싸워도…….”
“아니에요. 세한 오빠가 저를 데려온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겠죠.”
아아, 우정이란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백설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린은 강하게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열두 살의 어린애치곤 굉장히 대범한 모습이었다.
“아~~. 이거 거절하는 편이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오우양 민! 그의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돈을 걸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더한 술렁임이 느껴졌다.
“미친 거 아냐? 저런 어린애를 오우양 민과 싸우게 하다니.”
“백 퍼센트 죽겠지. 저 남자가 이상한 취향을 가졌구만. 어린애가 두들겨 맞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어제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때는 그렇게 안 봤는데, 쯧쯧.”
투기장에서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싸움을 즐기는 이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다른 투기장을 구경하던 이들도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돈이 걸린 비율은 어제와 같이 8 대 2.
린에게 걸린 비율이 무려 2나 되는 건 목숨을 건 소녀에게 주는 소소한 위로금이었을 거다.
“꼬마, 도망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괘, 괜찮아요.”
오우양 민이 린을 보며 사납게 말했다.
린의 가녀린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하, 시발. 애를 죽이는 건 찜찜한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왼팔을 들어올렸다.
“특별히 한 팔만 가지고 상대해 주지. 너는 무기든 뭐든 꺼내서 덤벼봐라. 조금은 놀아주마.”
“무, 무기요?”
린은 마땅히 지닌 무기가 없었다.
당황한 린이 내게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싸우라는 뜻이었다.
“저, 저도 맨손이에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뭐? 저거 진짜 미친 놈이구만.”
오우양 민이 시선이 내게 쏘아졌다.
어디로 봐도 나를 죽일 놈의 개새끼로 보는 눈이다.
방금 사람을 때려서 반쯤 죽인 놈에게 저런 시선을 받다니.
“시간이 됐습니다. 그럼 혈권 오우양 민을 상대로 저 작은 소녀가 어떤 분전을 보여줄 것인지!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시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오우양 민의 발이 움직였다.
어린아이이니 선공을 양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옳지, 잘한다!’
물론 바라던 바였다.
도리어 린의 선공을 바라며 가만히 서 있는 편이 난감했다.
그러면 린이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공격이 되면 다르다.
붉은 기운이 뭉치며 피와 같은 좌수가 린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숨골을 때려 단번에 기절시키기 위함이다.
“힉!”
린은 그것을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피했다.
붉은 실선이 린의 머리 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피했어?!”
“말도 안 돼!”
설마 오우양 민의 공격을 린이 피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전의 공격은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재빨랐다.
“운이 나쁜 녀석이구나. 방금 공격에 끝났다면 편해졌을 것을!”
어린아이가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오우양 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보다 한층 빨라진 붉은 주먹이 린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스르륵.
린의 눈이 크게 떠지며 왼팔로 오우양 민의 주먹의 옆면을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오른손바닥으로 그것을 가볍게 밀며 빙글 회전했다.
콰앙!!
분명히 직선으로 뻗어진 오우양 민의 주먹이 비틀리며 린의 옆으로 날아가 미스릴 철창을 두드렸다.
“노, 놀랍습니다! 소녀의 놀라운 실력! 고도의 무술이라도 익힌 걸까요? 아니면 특별한 스킬을 지닌 걸 까요!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웅성이던 주변이 단번에 고요해졌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사회자의 해설뿐이었다.
‘아직 어설퍼.’
분명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겠지.
린의 발놀림이나 움직임은 어설프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린의 푸른 눈동자가 움직이며 오우양 민의 상체와 하체를 훑었다.
그러자 어색했던 발놀림이 오우양 민의 그것과 같아졌다. 상체는 오우양 민의 주먹에 맞춰 완벽하게 휘어지며 공격을 피했다.
분명 지금 린의 귓가에는 새로운 스킬을 익혔다는 알림이 계속해서 들리고 있으리라.
스킬을 익히기 위한 조건?
그런 건 린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린은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오우양 민의 스킬을 그대로 습득하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건 이전에 싸웠던 것이 훨씬 급이 높은 마마잭이었기 때문이다.
린은 마마잭의 공격조차 피했다.
혈권 오우양 민?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별자리에 비하면 우스울 뿐이지.
이건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련도 아니다.
‘단순한 식사.’
오우양 민은 린에게 있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일 뿐.
그렇다고 지금 린이 여유로운 건아니다.
린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하고 막고 있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죽는다는 긴장감이 녀석의 초감각을 깨웠고, 일견으로 스킬을 습득하게 만들었다.
린은 그것이 가능한 재능을 지녔고, 그런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메리수.’
본래라면 한참 후에 개화하게 될 린의 특성.
희귀하게도 선천적으로 지닌 게 아닌 후천적으로 각성한 특성이다.
내가 그것을 알았던 건 린이 떠나고 난 이후.
하지만 너무 늦게 특성을 개방한 탓에 린은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말도, 말도 안 돼. 넌 괴물이냐? 아니면 마물이냐!”
오우양 민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며 전신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오른팔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 갔는지 이미 그는 양팔을 필사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그의 공격은 린의 머리카락 한 올도 스치지 못했다.
“이렇게 인가? 아, 이렇게 구나. 근데 왜 저렇게 움직이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내게는 린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린의 동공이 위로 아래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입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팔을 움직이고, 허리를 틀고. 이렇게, 이렇게…….”
린의 말이 빨라졌다. 신체의 움직임을 넘어 오우양 민이 움직이는 마력의 흐름마저 완벽히 파악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을 텐데.”
그것이 린의 마지막 말이었다.
달싹이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고, 다가오는 오우양 민의 주먹을 향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린의 능력치는 오우양 민보다 확실히 낮았기에 그건 바보 같은 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린의 주먹에 붉은 기운이 뭉치고,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응축되고 폭발했다.
분명 그것은 오우양 민이 도달하지 못한 혈권의 극의였으리라.
콰아앙!!
“아아악!!”
한줄기 비명이 울리며 누군가가 나가떨어졌다.
당연히 그것은 오우양 민이었다.
린은 바닥에 쓰러져 바르작거리는 오우양 민을 고요하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후식을 기다리는 손님과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