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 메리수(1)
“그건 들어왔나?”
“예, 여기 있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의 말에 대략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거대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상자를 끙끙거리며 들고 왔다.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는 그 광경을 보며 물었다.
“물건이 생각보다 큰 것이냐?”
“아닙니다. 이렇게 봉인을 하지 않으면 검에서 나오는 살기에 숨을 쉬기도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과연, SS랭크 무기답군.”
검은 흑발은 하나로 길게 묶은 남성은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상자는 묵철로 만들어져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력과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지만, 본질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덜컹.
“윽!”
푸른 무복의 사내가 상자를 열자 숨 막히는 살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상자를 들고 왔던 사내 중 몇몇은 벌게진 눈으로 상자 안에 있는 ‘검’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푸른 무복의 사내는 그런 사내들을 보며 웃었다.
“가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 아닙…….”
“괜찮다. 한번 쥐어보는 정도야 상관없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자. 얼마든지 쥐어봐라.”
푸른 무복의 사내의 말에 상자를 들고 온 사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상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켜! 저건 내 거야!”
“저거만 얻으면, 저 검만 있다면!”
상자를 들고 왔던 평범한 사람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악귀처럼, 동료를 마치 원수처럼 공격하며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싸웠다.
“허억, 헉.”
시체가 되어버린 다섯 명의 동료들을 일견한 사내는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상자 안에는 새까만 검신을 지닌 기괴한 형태의 검이 들어 있었다.
검이라기 보단 마치 뒤틀린 나뭇가지 같다.
콱.
“오, 오오오!”
그것을 손에 쥐자 사이한 기운이 파고들며 사내의 팔을 변색시켰다.
사내의 좌우의 눈동자가 따로따로 움직이며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신체 또한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대, 대단해. 이 힘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참살검의 숙주가 된 사내는 푸른 무복의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웨이 롱화, 네놈을 죽여주마!”
“건방진 놈!!”
사내가 덤벼들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은 허공을 갈랐고 검은 정장의 남자는 단번에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피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하하! 약해. 약해! 나는 이제 최강이다!”
“과연 참살검의 능력은 대단하군.”
푸른 무복의 청년, 웨이 롱화는 그런 광경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자신의 신이 말한 것처럼 참살검의 힘은 가공할 정도다.
이것을 통제할 방법만 찾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런 검에게 휘둘려 강한 힘을 얻어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크하하하! 단번에 두 조각으로 만들어 주…….”
퍼걱!
사내의 머리가 순식간에 터졌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은 부르르 떨더니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덜그럭.
바닥에 떨어진 참살검이 데굴데굴 굴러 웨이 롱화의 발치로 굴러왔다.
숙주가 죽자 참살검은 웨이 롱화를 유혹해가 위해 아까처럼 사이한 기운을 내뿜었지만 웨이 롱화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덜컹.
웨이 롱화의 손짓에 따라 공중에 떠오른 참살검은 본래 들어있던 케이스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아무리 나라도 손에 쥐면 위험하겠어.”
솔직히 조금 아찔하긴 했다.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자신이라도 유혹당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이 중국에서 용은 하나만이 남게 되겠지.
참살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말일 뿐이었다.
***
“창천 길드의 지하에 투기장이 있단 말이지?”
“예, 그리고 경매장도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늦은 밤이 돼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아와 두 아이들은 이미 잠든 지 오래였고, 창우와 루크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 경매장과 투기장이 자네의 목적인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좀 다르다?”
“루크 씨는 아마 제가 경매장이나 투기장을 없애리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그런 비인간적인 장소를 그대로 두실 생각입니까?”
창우가 당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대로 둘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건 제가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곳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직접 움직여야 될 일이죠.”
“창천 길드를 말하는 거군.”
“예.”
지수는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투기장은 없어져도 상관없지만 경매장은 아니거든요. 조금만 손을 댄다면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용?”
“예. 이제 서버간 이동이 가능해졌고, 전서버의 물건들이 유통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을 팔고 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겠죠.”
루크의 머리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한 것이리라.
“경매장을 차지할 생각이군.”
“차지한다…… 라는 말과는 좀 다릅니다. 알다시피 경매장을 직접 관리할 시간은 없거든요. 단지 그에 준하는 권리만 얻으면 됩니다.”
시우가 만드는 물건은 던전에서 드랍 되는 아이템에 결코 꿇리지 않는다.
네임드 보스의 아이템보단 떨어지겠지만, 준종결급 아이템까지는 가능하다.
나는 그것들을 여태 한국에 조금씩 유통시켰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된 거래 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혼자 움직여 봐야 한계가 있었다.
‘전 세계 유저들의 수준을 높이는 건 장비만 한 게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바란 건 바로 이 경매장이다.
시우가 만든 아이템을 전 세계로 유통시킬 장소.
그리고 그 경매장을 지배하는 건 바로 창천이었다.
내가 웨이 롱화와 접촉하려했던 것도 그런 이유.
하지만 샹관 유엔과 만나며 사정이 좀 달라졌다.
웨이 롱화는 우수한 인물이었지만 속이 검은 자였다.
그래서 어떻게 족쇄를 채울까 고민하던 찰나에 샹관 유엔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참살검과도 깊이 엮여 있는 인물.
잘만하면 일이 더욱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우선은 당장 터질 사건부터 해결해야 하겠지만.’
나는 당시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베이징에서 터졌단 대참사.
당시 경매장에 참여했던 중국의 유력 플레이어들이 죄다 쓸려나간 사건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는 모두 죽었기에 제대로 된 사건의 정황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다인슬라이프가 경매에 올라오는 건 일주일 후.’
그때 유엔은 다인슬라이프를 쥐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시간은 있었다.
“내일은 다 같이 투기장에 가는 게 어떻습니까?”
“다 같이?”
“린과 백설이도 함께.”
“……오늘 그 꼴을 보이기 싫어 둘이 다녀온 게 아니었나?”
“예, 그런데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더군요.”
적어도 1회차에서 봤던 모습보다는 훨씬 순한 맛이었다.
“린과 백설이도 슬슬 실전이 필요하던 참이니까요.”
“실전은 이전에 마마잭과도 겪었내만…….”
“사람과의 싸움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루크가 끄응,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딸에 관련된 일만 나오면 약해지는 아버지다웠다.
하지만 플레이어간의 싸움을 익히기엔 투기장만 한 곳이 없었다.
“내 딸은 확실히 재능이 있다만…… 투기장이라는 곳에서 구르고 구른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는 장담을 못하겠군. 그런 건 차차 과정을 밟은 다음 최종적으로 할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요? 저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린에게는 과정이 무의미합니다.”
물론, 그건 린의 유전자를 받은 백설이도 마찬가지다.
그 둘은 결과만 주어져도 과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괴물들이다.
괜히, 인류의 정점이 아니었으니까.
***
리 지엔쥔(李建军)은 경매장이 열린 순간부터 계속 현장을 관리해 온 배태랑 플레이어였다.
언제나 현장에 나가 일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진상을 상대했고, 별 볼일 없는 경매물품은 눈앞에서 걷어차는 게 그의 일이었다.
‘또 같잖은 게 왔군.’
입구에서 걸어 들어오는 한 사내를 보며 리 지엔쥔은 눈살을 찌푸렸다.
딱 보기에도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 플레이어였다.
저런 플레이어가 가져오는 물건은 기껏해야 D급에서 E급 장비였다.
‘잠깐, 검은 옷?’
최근 투기장에서 샹관 유엔을 이겼다는 플레이어가 떠올랐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그리고 검은 외투를 입은 까마귀와 같은 플레이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눈앞의 사내는 무척 젊었고, 어디로 봐도 애송이였다.
강자의 품격이 보이지 않았다.
뭣보다 저 어두운 인상을 보라. 저런 자가 창천의 최고 후지기수라고 할 수 있는 샹관 유엔을 꺾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경매장에 물건을 출품하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지?”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눈이 좀 높습니다.”
리 지엔쥔의 말에 검은 사내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럼 안목을 기대해 봐도 좋겠군.”
‘허세를 부리기는.’
오만한 어조로 말하는 사내를 리 지엔쥔은 그대로 걷어차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명분이 부족했으므로 참았다.
정말 만에 하나 저 어두침침한 플레이어가 보물을 가져왔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어때?”
“……음.”
사내가 내민 건 한 자루의 창이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걸 보면 미스릴로 이루어진 창이겠지.
리 지엔쥔은 그것을 받아들고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미스릴 창은 제법 귀한 물건이지만, 이제 이런 평범한 미스릴 창은 경매에 출품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쓸 만한 물건이었기에 정중히 거절했지만 검은 사내의 입가는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평범? 하, 창천 길드 경매장의 관리인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물건을 볼 줄 몰라서야.”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말 그대로다. 이게 평범한 창이라고? 그렇다면 창천은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길드로군.”
사내는 창을 쥐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정도로 마력을 세밀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처음 봤기에 리 지엔쥔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스릴 창에 마력이 불어넣어지자 연한 금빛을 내며 부연 막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이건 평범한 미스릴이 아니다. 에스더라는 금속을 넣은 합금이지. 들어본 적 없나?”
에스더? 처음 들어보는 금속의 이름이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스릴 창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진짜였다.
집어넣은 마력의 수배로 부풀려진 힘이 느껴졌다.
저것을 휘두른다면 일반 미스릴 창을 휘두르는 것보다 몇 배는 강한 위력이 나오리라.
“제, 제가 한번 사용해 봐도 됩니까?”
“얼마든지.”
사내에게서 넘겨받은 미스릴 창을 쥐고 마력을 불어넣자, 방금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을 리 지엔쥔은 황홀한 눈으로 보았다.
‘대박이다!’
이정도면 최소 B급. 혹은 A급의 아이템일 터.
경매에 낸다면 족히 2만 포인트 이상을 받을 물건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게 드랍템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걸 제작하신 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우리 길드 소속의 대장장이야. 자세한 정보는 줄 수 없군.”
“길드 소속? 대체 어디 길드가 이런 대장장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까?”
길드 이름만 안다면 당장 제휴를 맺어 정기적으로 물품을 납품 받거나 창천으로 들여올 생각이었다.
에스더라는 금속은 모르겠지만, 이런 합금을 만들 정도의 대장장이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데려올 가치가 있었다.
“디어사이드라는 길드인데, 한국에 있다.”
“예?”
“그래서 이거 받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그냥 가져간다.”
미스릴 창을 인벤토리에 넣으려는 그의 모습에 리 지엔쥔은 황급히 말렸다.
“아닙니다! 무조건 받죠!”
“그래?”
사내는 씩 웃었다.
그리고는 리 지엔쥔에게 미스릴 창을 넘긴 후, 자신의 인벤토리에 손을 쑥 넣었다.
“그럼 이것들도 괜찮겠지?”
“!!”
인벤토리가 열리며 상당한 숫자의 검과 창이 우수수 떨어졌다.
대략 열 자루가 넘는 검과 창, 그리고 각종 둔기들이었다.
“서, 설마 이것들도 다 이 창이랑 똑같은 겁니까?”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리 지엔쥔의 모습에 사내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우선 오늘은 가볍게 맛만 보여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