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 창천의 용(2)
중국 베이징.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가 거주하는 도시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덕분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길드는 베이징에 상당수 존재한다.
당장 10위 내에 존재하는 길드 중 세 곳이 베이징 소속.
걔 중에 가장 순위가 높은 길드는 랭킹 3위의 ‘창천’ 길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아서가 1위를 탈환하겠지만.’
길드를 만든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의 ‘팬드래건’ 길드는 9위에 위치해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지만, 영국 플레이어 대부분이 속한 길드치고는 아쉬운 면이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백설이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를 지나쳐가는 몇몇 플레이어들은 백설이의 이마에 있는 뿔을 보곤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몇몇은 백설이를 무척 탐내는 눈으로 보고 있어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치안이 개판이군.’
하이에나들처럼 우리 주위를 맴도는 플레이어들을 보면 황당할 지경이다.
자칫했다간 아이템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되리라.
그나마 1회차에서 내가 보았던 베이징보단 낫다.
그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터라 이보다 배는 막장이었었지.
“근데 우리 어디서 자?”
“호텔.”
“호텔? 지금 운영하는 장소가 있어?”
민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다른 서버로 이동이 가능해지며 숙박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각 도시마다 몇몇 건물이 숙박 장소로 지정되며, 다른 서버에서 온 플레이어들은 그곳에 포인트를 내고 숙박이 가능하다.
참고로 기존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사용이 불가하며, 오직 다른 서버에서 온 플레이어만 가능한 시스템이다.
“루크 씨. 장소를 알려드릴 테니 먼저 가서 짐을 풀고 있어주세요. 전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 나중에 합류하겠습니다.”
“알겠네. 어디 갈 건지 물어도 괜찮겠나?”
“별 건 아닙니다. 물건을 파는 시장 같은 곳이죠.”
루크는 내 설명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경험이 많은 루크로선 이 도시의 어둠을 대략 눈치 챈 모양이다.
반면 민아의 얼굴은 단번에 화색이 되었다.
“아, 진짜? 그럼 오늘은 할 일없는 거지? 나 짐 풀고 관광한다?”
“그래.”
“아싸!”
베이징에서 여자애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민아니 흔쾌히 승낙했다.
아무리 베이징이라도 민아에게 해코지를 할 만한 플레이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저는 같이 갈래요.”
지수가 냉큼 내 옆에 붙었다.
혼자 다른 곳 가있으라고 해도 따라올 기세인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수는 상관없겠지.’
아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곳은 중국의 어둠을 나타낸 장소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서울의 어둠은 주로 외각이나 사람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있었지만, 베이징은 반대다.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대놓고 존재했다.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창천 길드의 건물, 그 지하가 바로 그 입구였다.
“어서 오십시오! 혼자 오셨습니까?”
“두 명.”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옆에 있는 지수를 가리켰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자는 지수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떻다.
“아주 미인이시군요.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지만 이렇게 미인이신 분은 처음 봅니다.”
“그래서 들어가도 되나?”
“예, 물론입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흔쾌히 답했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치고는 딱히 경계를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곳에서 사고를 치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이곳을 운영하는 게 바로 그 창천이었다.
세계 랭킹 3위 길드가 운영하는 장소를 건드릴 간 큰 놈이 어디에 있겠는가.
남자는 우리를 눈으로 훑었다.
그 시선에는 우리를 얕보는 기색이 분명 담겨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정중한 중국어가 귓가에 들렸지만, 나와 지수의 귀에는 자동적으로 번역이 되었다.
플레이어의 능력은 참 편리하다.
이렇게 번역이 되는 걸 보면 입구를 지키던 남자도 플레이어였던 거겠지.
“길드 건물 아래에 이런 거대한 시설을 만들다니 놀랍네요.”
“사람을 갈아 넣는다면 뭐든 가능해.”
나는 그걸 군대에서 배웠다.
어떻게든 하면 결국 되는 법이다.
“근데 이 아래에 정말 물건을 파는 곳이 있어요?”
“물건만 팔겠냐? 다른 것도 팔지.”
“다른 거?”
나는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력을 차단당한 채, 미스릴로 이루어진 사슬에 묶여 이동 중인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플레이어들을 거래하는 건가요?”
“신의 아바타만 아니면 거리낄 게 없지.”
서울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지금 베이징에서 인권이란 개만도 못하다.
이곳에서 인권은 오직 강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거니까.
“오늘 경매에 올라오는 물건들이 장난이 아니라던데? 아, 뭘 사야 할지 벌써 고민이네.”
“아이템도 아이템이지만 괜찮은 플레이어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게, 여성 플레이어라거나. 여성 플레이어가 좀 귀해야 말이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숙덕거리며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의 말이 들리자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는 정말 상식을 초월한 장소거든. 아마 내려가면 더 놀랄 거다.”
“오빠는 여기를 어떻게……, 아.”
녀석은 말하던 걸 멈추고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분명 1회차의 일을 생각한 거겠지.
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는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그렇군요. 그럼 이곳에 온 것도 이유가 있겠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해서 이곳은 최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때려 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베이징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암묵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을 나 혼자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것을 바꾸기 위해선 위에가 바뀌지 않으면 답이 없다.
‘우선 오늘은 한번 둘러보는 정도에서 멈추자.’
1회차에 오기는 했지만 내가 왔던 건 한참 후다.
기억과 다른 점이 있는지 잘 살펴봐야만 했다.
지하 1층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고, 2층이 바로 경매장이었다.
그리고 3층, 4층으로 내려가면 더욱 위험한 장소가 있었다.
“오빠.”
지수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불렀다.
“왜?”
“저 사람들 우리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몇몇의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며 따라오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면 아닌 척 딴청을 피웠지만, 그들의 목표는 어디로 봐도 우리였다.
우리가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자, 대충 각이 섰는지 그들 중 하나가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이봐, 너 여기 처음이지?”
“아니.”
“아니긴 개뿔. 우리가 처음 보는 얼굴이구만.”
대략 다섯 명의 사내들이 우리를 막아서고 둘러쌌다.
근처에 걸어가던 플레이어들은 익숙한 광경인지 우리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 여자를 함부로 데려오면 안 돼요. 알겠어요?”
놈들의 시선이 지수에게로 향했다.
녀석들의 눈에는 음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지수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더불어 지수의 손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뒀다가는 눈앞의 남성들이 5초 안에 육편이 될 것 같았다.
“얌전히 물러나는 게 그쪽에게 좋을 거야.”
나는 친절하게 경고를 해주며 앞으로 나섰다.
내 목적은 이 아래에 있다. 이곳에서 살인은 일상다반사지만 지수가 일을 벌이면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거다.
“하하하, 뭐래 이 병신이! 지금 우리보고 하는 소리냐?”
“그냥 얌전히 네놈 애인이나 이리 넘겨! 그럼 적어도 몸은 성히 내보내줄 테니까.”
놈들은 아마 나와 지수가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보통 플레이어들은 다른 플레이어의 강함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데, 녀석들은 나와 지수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거겠지.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수준차가 너무 심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을 뿐이다.
“애인?”
점차 손에 힘이 들어가던 지수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보이나요?”
“어, 엉?”
방금 전까지 이 놈들을 어떻게 쳐죽일까 고민하던 지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한 애인이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한점의 공포 없이 앞으로 다가오는 지수의 모습에 당황한 건 도리어 남자들이었다.
“형님, 이 여자 조금 또라이 같은데요.”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지수를 보던 한 남자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이라 불린 남자 역시 그 말에 공감했는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반반한데 아쉽네, 쩝. 미친년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지.”
남자들은 예상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아무래도 지수에게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모양이다.
수준은 낮지만 적어도 눈치는 있는 녀석들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그랬는데,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네요.”
“……그러냐?”
“네.”
특별히 나설 것도 없이 일이 해결된 건 좋았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무튼 남자들이 물러나자 주변의 시선이 좀 달라졌다.
예상외로 놈들은 이 장소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놈들인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지하 3층까지 별다른 트러블 없이 내려갈 수 있었다.
***
“죽여! 내가 네놈한테 1만 포인트나 걸었다고!”
“뭐하는 거야! 스킬을 사용해야지!”
3층으로 내려가자 시끄러운 외침들이 들렸다.
2층인 경매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여긴…….”
지수의 눈동자가 조금씩 붉게 변했다.
3층에서 나는 짙은 혈향을 맡은 것이리라.
천살성인 그녀는 이곳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폭력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겠지.
“지하 투기장이지. 저기서 싸우는 건 창천에게 잡혀온 플레이어들도 있고, 포인트를 벌기 위해 직접 나선 이들도 있어.”
“너무하네요.”
“이곳에선 보통이야.”
창천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이 도시 전체가 그런 곳이다.
힘이 모든 걸 판단하는 장소. 투기장은 여기 말고 다른 곳도 많다. 단지 여기가 가장 큰 지하투기장일 뿐.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을 바꾸려면 결국 창천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빠, 찾으시는 사람 있어요?”
“어. 관계를 쌓아두면 좋은 사람이 있지.”
“남자에요, 여자에요?”
“그건.”
콰아아앙!!
벽을 때려 부수는 굉음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재빨리 소리가 들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기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철창에 한 플레이어가 충돌한 뒤 튕겨져 날아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지만 관중들은 그저 환호할 뿐이었다.
“역시 창천의 기대주! 어찌 이런 괴력을 낼 수 있단 말입니까아아!!”
사회자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역시 저곳이 분명했다. 녀석은 자신의 실력을 단련하기 위해 지하 투기장을 전전했다고 했다.
거기에 창천의 기대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녀석이라면 창천의 용, 웨이 롱화가 분명할 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마침 승리했는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드는 플레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승자! 잠룡, 샹관 유엔(上官媛)!!”
철창 안에는 내 예상과 달리 긴 흑발을 흘리며 도도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몸에 드러난 투기를 볼 때 상당한 실력을 지닌 플레이어인 건 분명했다.
문제는, 내가 찾던 웨이 롱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쟤는 또 누구야?’
적어도 1회차에는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분명 창천에서 용이라 이름 붙은 칭호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웨이 롱화 하나일 텐데?
“여자네요.”
차가운 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한층 붉게 변한 지수의 눈동자가 철창 안에서 웃고 있는 여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버려두면 미스릴 철창을 구부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였다.
“잠깐만, 내가 찾던 건 쟤가 아니야!”
“아, 그런가요?”
붉은 눈동자가 조금 연해졌다.
지수는 내심 안도한 눈치였다.
“그럼 누군가요? 보아하니 창천 길드 쪽 사람을 찾고 계신 거 같아서.”
“그건 맞는데 내가 찾는 건 웨이 롱화야.”
잠룡 샹관 유옌이라.
얼굴은 확실히 처음 봤지만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웨이 롱화가 했던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걸보면 분명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자운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강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 기억에 있다는 건 분명 어떤 연유로 사라진 중요 플레이어라는 거겠지.
‘또 다른 용이라.’
이게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현재의 나로선 알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