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095. 집착의 행방(1)
베히모스를 쓰러트리자 드라이그 고흐는 순순히 물러났다.
아서와의 대화를 엿들은 결과, 이대로 물러나 한숨 잔다던가.
센티넬이니 다시 깨어나면 그때는 정말 죽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며 미카엘의 탑 아래에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이동했다.
[업적 ‘신수를 죽인 자’를 습득하셨습니다.]
[강력한 센티넬을 쓰러트린 보상으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좋네.’
역시 미리 센티넬들을 죽여 ‘센티넬 사냥꾼’을 얻어둔 효과를 톡톡히 보는 기분이다.
센티넬 사냥꾼의 효과인 ‘모든 센티넬에게 30퍼센트 추가 피해’는 한 방 공격이 강할수록 얻는 이득이 크다.
신념의 응집으로 뻥튀기 된 데미지에 30퍼센트 데미지가 추가되니 아무리 베히모스라도 머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설마 이런 플레이어가 있었을 줄은 몰랐군요. 오늘 개안한 느낌입니다. 하하!”
지상에 내려서자 한 플레이어가 말을 걸어왔다.
다른 이들은 내 눈치를 살피느라 다가오지 못한 걸 보면 상당히 대범한 것 같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죠.”
“겸손하시군요. 아, 제 이름은 율리안입니다.”
“전 김세한입니다.”
“김세한……. 한국인이셨군요.”
“예, 뭐.”
율리안은 내 이름을 잠시 동안 되뇌었다.
아마 내 이름을 기억해 두려는 것 같았다.
‘이자도 여기 있었나.’
율리안은 나도 아는 자다.
독일 출신 플레이어로 다른 별의 신과 계약한 플레이어.
상당히 머리가 좋고, 개인 무력도 뛰어나다. 삼국지로 치면 주유와도 같은 이였다.
율리안은 내 얼굴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주변 시선 때문에 바로 이동할 생각이라서요.”
“아……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율리안은 영 아쉽다는 눈치였다.
아마 나와 끈틀 만들어두고 싶은 거겠지.
아무래도 이번 이벤트로 느낀 게 많았을 것이다.
이제 하나의 도시나 나라로 국한되지 않고, 전 서버가 하나로 연결되게 되리라 예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라도 뛰어난 플레이어를 알아두는 게 중요했다.
율리안도 필시 그것을 알고 있는 거겠지.
“어차피 나중에 기회가 오게 될 겁니다. 그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씩 웃는 율리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펼쳤다.
율리안과 내가 태연히 대화하고 있자, 궁금한지 스멀스멀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날아올랐다.
지금 붙잡혀 봐야 괜히 귀찮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나는 아서에게 쪽지를 보낸 뒤, 바로 장소를 이동했다.
장소는 바로 호수의 밑바닥, 모르간의 보금자리인 아발론이다.
밖에 돌아다녀 봐야 플레이어들이나 신들의 옵저버에 시달릴 게 분명했으므로 잠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신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이슈가 되고 있는 모양이고.
‘이쯤되면 GM이 한마디를 할 법도 한데…….’
예상외로 아키넨은 별말이 없었다.
계속 옆에서 지켜보기에 끼어들 생각인가 싶었는데, 그냥 가버렸다.
나로선 좋은 일이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GM마다 성격이 다른지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까마귀, 넌 다 해결됐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모르간의 공방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베히모스를 죽인 것치고는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GM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거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 좋은 거 아니야?”
“하지만 그게 이상해.”
원래 GM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쿨한 족속이 아니다.
자극적인 이벤트가 스무스하게 끝나버리면 퍼블리셔로부터 한 소리를 듣다보니 최대한 일이 꼬이게 만들곤 한다.
대표적으로 귀가 얇은 아카터스는 본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으면 플레이어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일을 벌인다.
“아서.”
나는 모르간의 말에 적당히 대답한 후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아서는 나보다 먼저 모르간의 공방에 와 있었다.
아마 쪽지를 보내기 전부터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 어려웠을 테니까.
“아직도 답이 안 나온 모양이네.”
“그렇지. 나란 놈은 그런 놈이니까. 이 검을 얻었다고 해서 없던 용맹이 생기지는 않는 법이야.”
엑스칼리버를 뽑은 그는 이제 영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름은 몰라도 ‘그 SS급 아이템 가진 놈?’이라는 수식어는 계속 그를 따라다닐 거다.
특히 영국 서버는 타 서버에 비해 약했으니 아서와 같은 플레이어가 필요하겠지.
전생의 아서는 그런 사실을 알았기에 국가 자체를 하나의 길드로 만들었다.
사실상 영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그래도 이번 이벤트가 끝나고 한번 생각해 봐.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당신은 전부터 나를 이상하게 신뢰하는걸.”
“난 감이 좋거든.”
씩 웃으며 말하자 아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차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아서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지는 않을 거다.
나는 그저 아서가 강해질 수 있는 길로 좀 더 빨리 인도해 줬을 뿐이다.
앞으로는 분명 그에 따른 시련도 뒤따라오겠지.
하지만 그것을 모두 극복했을 때, 아서는 전생보다 훨씬 강한 플레이어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만 한다.
내가 녀석을 파티원으로 삼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세한, 그래서 이벤트는 어떻게 됐나요?”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백설이는 센티넬을 잡은 것보다 이벤트의 진행이 더 궁금했던 모양이다. 백설이의 입장에선 이벤트가 끝나야 집에 들어가니 그럴 수밖에.
특히 얼굴이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모르간에게 마법을 배우는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결과야 사실상 이미 나온 상태지.”
나는 아서의 허리춤에 있는 엑스칼리버를 가리켰다.
저게 무려 100점짜리다.
저 점수를 채우려면 다른 서버 사람들이 이를 갈며 모아야 할리라.
물론 영국 서버의 플레이어들도 놀고 있을 리는 없으니 결과적으로 1등은 영국이 되는 셈이다.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뿐이 아니라 전 영국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당신에게 고마워 할 거야.”
“별로 감사받으려 한 짓은 아니니 됐어. 이 일로 영국, 나아가 유럽 쪽 플레이어들이 강해지는 계기가 된다면 그걸로 좋아.”
“가끔 당신은 이상하게 이타적이군.”
아서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물론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럼 나도 퀘스트의 마무리를 하러 가볼까.”
“세한,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이벤트에서 적당한 아이템이라도 구해볼까 생각하며 나가려는 순간, 백설이가 내 옷깃을 잡았다.
똘망똘망한 눈이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눈치다.
“그럴 순 없지.”
모르간의 말이 들리자 백설이의 몸이 붕 떠올랐다. 모르간이 깔깔 웃으며 자신의 곁으로 데려가버린 것이다.
“세, 세한!”
마치 마녀에게 잡혀가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뻗는 백설이였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모르간쯤 되는 대마녀에게 마법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까.
“다음에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으, 으으으~~!”
결국 백설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는 기간 동안 계속 모르간의 마법과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일주일 후.
이벤트 퀘스트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영국이 1위.
예상외였던 점은 2위가 한국이었다는 것이다.
***
“……실패했다고요?”
“그렇게 됐네.”
후, 하고 마라 파피야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카터스는 뭐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적룡에, 베히모스의 위치까지 알려줬는데 실패했어?’
더군다나 계약자의 힘도 통하지 않았다.
육체 능력이 강한 건 알았지만 정신 방어까지 대비를 해뒀을 줄이야.
후배인 아키넨 녀석이 실실 웃던 것이 걸리던 참이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마라 파피야스는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조금의 위협조차 되지 못했어.”
“…….”
“조금 놀라게 한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뿐이야. 그 플레이어는 이상할 정도로 강하더군.”
“즐거우신 얼굴이군요.”
“강한 플레이어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 좋은 자극이지. 후에 열릴 마계 무투회에선 어떤 모습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정도야.”
후후후, 거리며 웃는 마라 파피야스의 말에 아카터스는 속이 뒤집어졌다.
그의 말대로다.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일반적인 센티넬도 아닌 적룡과 베히모스를 풀어놨음에도.
‘적룡 이 새끼만 말을 들었다면.’
마라 파피야스의 말에 따르면 적룡이 베히모스를 역으로 공격하여 일이 이렇게 된 모양이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센티넬급 몬스터를 아카테스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튜토리얼처럼 센티넬의 타이틀을 단 정도의 몬스터는 만들 수 있어도, 적룡 정도 되는 몬스터는 GM의 권한으로 어찌하지 못한다.
‘시발.’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센티넬 같은 몬스터로 녀석을 죽이려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이번 일로 깨달았다.
궁기 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녀석은 몬스터의 공략법을 안다.
가장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며 이미 어떤 몬스터와 싸우더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대비해 뒀을 터.
“이대로는 안 돼. 그 새끼를 죽이려면 몬스터로는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아카터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
‘결국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어.’
지수는 뾰루퉁한 얼굴로 계속 맵을 바라봤다.
세한의 맵마커는 여전히 호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혹 움직이더라도 이쪽으로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너무해.’
이벤트가 완전히 종료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있었다.
설마 이벤트 기간 내내 얼굴 한번 보이지 않을 줄이야.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지만 적어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 해도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저벅.
세한의 맵 마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지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있는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다가오는 플레이어일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지수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니 꽃향기에 이끌린 나비처럼 플레이어들이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 한번 하지 않는 지수의 모습에 대부분 질려 떠났지만, 간혹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덤벼드는 이들도 있었다.
서울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검은색 긴 생머리의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서울의 상식이었다.
“아픈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리 가세요.”
현재 무척 기분이 안 좋은 지수는 미리 경고를 보냈다.
평소에 아예 무시를 하던 것에 비하면 제법 친절한 행동이었다.
저벅, 저벅.
그러나 상대는 도리어 지수를 향해 다가왔다.
지수의 말을 신경 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꼭 저런 사람이 있지.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는 직접 몸으로 알려주는 게 빨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지수는 몸을 굳혔다.
왜냐면 아는 얼굴 이었으니까.
“누나.”
바로 자신의 동생, 한현수.
훤칠한 신장에 세련된 얼굴.
자신의 동생이었지만 멋진 남자로 분류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가진 이였다.
지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설마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야, 누나.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어머니에게 듣기는 했지만 조금 걱정했거든.”
“……엄마와 함께 있어?”
“응.”
싱긋 웃는 그의 모습에 지수 역시 묘한 안도를 했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신 모양이다.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동생은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적어도 동생은 자신처럼 대하지는 않았으니까.
솔직히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동생을 보고 있으면 조금 불안했다.
자신의 마음속에 내제된 본성이 일렁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수는 최대한 동생을 똑바로 보지 않도록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자, 한지수.’
지수는 머릿속으로 세한을 떠올렸다.
적어도 어머니는 살아 있으며, 자신에겐 세한이 있었다.
그러니 괜찮다.
“그래서 무슨 일이니? 네가 나에게 왔다는 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지?”
“너무하네. 그냥 누나를 우연히 발견해서 왔을 수도 있잖아?”
“난 너의 누나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아.”
“후후.”
현수는 낮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누나는 여전히 신중하네. 언제나 그렇지. 누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살았어.”
“……다른 소리하지 말고.”
“매정하네. 특별히 대단한 건 아냐. 한번 서울에서 만나자는 거지.”
만나자는 말에 지수가 퍼뜩 시선을 올려 자신의 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동생의 목에 익숙한 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을 상징하는 마크.
지수가 수없이 죽인 그믐달 길드의 마크였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셋이서 식사라도 하자. 누나.”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물론 지수는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