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094. 베히모스(3)
대기를 찢는 포효가 글라스톤베리 전역에 울려 퍼졌다.
베히모스에게 고통이란 낯선 감각이었다.
두터운 가죽은 어떤 방어구보다 든든했으며, 그 뼈는 어떤 금속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그런 베히모스가 지금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목을 파고든 거대한 검에 가죽이 찢고 뼈에 박혔다.
워낙 두터운 골격을 지닌 탓에 그대로 베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베히모스가 날뛰기 시작하자 푸른 들판이 뭉개지며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세한은 날뛰는 베히모스의 등에서 떨어져 하늘에서 날아올랐다.
등에는 궁기의 날개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혹시 몰라 만들어 뒀던 걸 이렇게 빨리 쓸 줄이야.”
베히모스의 목에 박힌 대검을 바라보며 세한은 중얼거렸다.
날의 길이만 3미터가 넘어가는 무기다.
인간이 아닌 거대한 몬스터에게 피해를 주긴 무기로, 상당량의 에스더와 미스릴, 그리고 겨우 구한 만년한철이 함유된 무기였다.
등급도 무려 A급 장비.
세한이 지닌 무기 중에선 파일 벙커와 함께 가장 급수가 높은 무기였다.
“아서, 녀석의 다리를 공격해서 최대한 움직임을 저지해 줘!”
“전부터 어러운 부탁만 하는군,”
베히모스의 머리위를 날아가는 세한을 보며 아서가 투덜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한은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만을 했다.
파티를 해달라거나, 엑스칼리버를 뽑으라거나.
가족을 잊으라거나.
결과적으로 모두 세한이 말한 대로 되었다.
하지만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
「그르르르.」
거대한 괴수의 얼굴이 보였다.
크기만 보자면 레이드 보스와 다를 것 없다.
족히 머리의 크기만 10미터에 가까운 베히모스의 거체.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다.
베히모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지며 최종적으로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해진다.
아서는 손에 쥔 엑스칼리버를 꽉 쥐었다.
방금 전 베었던 베히모스의 다리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치유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상처를 입히면 되는 법.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그의 ‘파티’가 되며 언제나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가족의 환영도 보이지 않았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지금은 슬퍼할 틈이 없었다.
웅웅웅.
엑스칼리버에 마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본디 아서는 제대로 된 무기를 지니지 못했다.
왜냐면 그의 스킬을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검이란 소모품이었다.
한번 사용하면 부서지는 소모품.
하지만 엑스칼리버는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낼 수 있었다.
“크으윽!”
강력한 마력의 집중에 팔이 떨렸다.
그럼에도 아서는 정면의 베히모스를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움직이려는 녀석을 향해 달렸다.
아서가 지닌 스킬은 ‘신념의 응집’.
S등급 스킬이며 등급에 맞게 강력한 스킬이다.
마력이나 힘과 같은 에너지를 응축시켜 위력을 강화시킬 수 있고 그 위력은 일격에 베히모스의 다리를 찢어발길 정도로 강력하다.
콰아아아아앙!!
검격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일격이 펼쳐졌다.
이번엔 베히모스의 한쪽 다리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통째로 뜯겨 나갔다.
그럼에도 베히모스는 전진했다.
이제 막 재생한 다리를 내딛으며 앞으로 달렸다.
그것을 본 율리안이 외쳤다.
“모두 보고만 있을 겁니까?! 저게 날뛰기 전에 모두 공격하세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도 각 서버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들.
베히모스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지금이 바로 적기임을 깨닫고 초원을 질주했다.
한 명 한 명이 이름난 신의 아바타.
혹은 악마의 계약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베히모스를 향해 자신의 능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센티넬 살해자 에릭이나, 붉은 열선을 긋는 천상환의 모습이 보였고, 각종 마법을 사용하는 이수린도 있었다.
각 서버에서도 이름난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가해지니 아서를 향해 돌진하던 베히모스의 몸은 플레이어들의 무수한 공격에 점차 밀려났다.
튼튼한 가죽도 조금씩 상처를 입고 있으며 균형을 잡기 힘들어했다.
뭣보다 그 틈을 노린 아서의 공격이 재차 가해졌다.
콰쾅!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결국 베히모스의 몸이 꺾였다.
두 개의 앞발을 모두 크게 상처 입은 베히모스는 이제 분노가 담긴 포효가 아닌 고통에 의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베히모스는 죽지 않았다.
도리어 상처입은 베히모스의 몸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처 입던 공격도 점차 먹히지 않았다.
플레이어들도 그것을 알았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이 괴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믿었으니까.
‘저놈은 처음에 공격한 뒤로 뭐하고 있는 거야?’
플레이어들은 하늘에 떠서 현 상황을 방관 중인 세한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처음에 일격을 가한 후, 그는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지만 하늘에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한은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거 생각보다 컨트롤이 어려운데.’
세한은 아서와 파티 계약을 맺으며 스킬을 교환했다.
당연히 얻은 스킬은 신념의 응집.
정신약체 내성 S급과 교환하여 받아낼 수있었다.
아서에게 필요한 건 온전한 정신이었고, 세한은 가진 무기를 보다 강화시킬 만한 스킬이 필요했으니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고도의 집중력과 마력 컨트롤이 필요하다는 것.
아서는 이것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지만 이제 처음 사용해 보는 세한으로선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이드라의 스킬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마력 운용에 자신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하루종일 스킬을 사용해도 마력만 낭비하는 꼴이 되었으리라.
웅웅웅.
무기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에 세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그럼 이제…….’
세한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까마귀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지만, 이젠 육안으로도 보였다.
이쪽으로 날아오는 붉은 용이.
“잠깐, 저거 드래곤 아냐?”
그것을 본 건 비단 세한만이 아니었다.
베히모스와 싸우던 플레이어 중에서도 하늘에서 날아오는 용을 본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베히모스에 이어 용까지 들이닥치자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나도 버거운데 둘이나!’
심지어 드래곤은 GM이 결코 덤빌 생각도 말라던 몬스터가 아닌가.
눈앞의 베히모스보다도 강한 힘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것을 본 세한은 마법의 단어를 외쳤다.
“아서!”
“……설마 저것도 내가 막아야 하나?”
“사기 템을 들었으면, 든 값을 해야지.”
세한의 말에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거체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베히모스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한층 거대해지고, 한층 강해졌다.
이번에는 엑스칼리버로 공격한다고 해도 방금 전 같은 큰 상처를 주기 힘들 것이다.
“도리어 두 마리가 동시에 덤벼서 다행이군.”
누가 듣는다면 미친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세한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저것이 아서왕의 전설에서 등장하는 적룡이라면.’
만약 저 적룡이 모르간 르 페이와 마찬가지로 신화시절부터 이곳에 남아있던 용이라면, 아서를 죽일 수 없다고.
도리어, 가장 강한 우군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크오오오오!!」
용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아래에서 거체를 움직이던 베히모스조차 움찔할 정도의 포효였다.
플레이어들 중 몇몇은 그 포효를 듣는 것만으로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였다.
이 장소에서 도망칠지 말지 망설이는 플레이어들 속에서 아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지상에 내려선 적룡을 향해서.
처음에는 울부짖으며 다가오는 아서를 향해 물어뜯으려던 적룡이었지만 뭔가를 느꼈는지 거대한 입을 다물었다. 높이 들고 있던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아서를 붉은 눈으로 응시했다.
용은 잠시간 아서를 바라보았다.
베히모스를 공격하는 플레이어들도 그런 용과 아서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용이 아서를 한입에 삼켜 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용의 행동은 달랐다.
「놀랍군.」
용이 말했다.
방금 전의 울음소리와는 다른 인간의 음성이었다.
정확히는 인간의 음성을 흉내 내어 의사를 전달하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설마 그 검을 든 자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거 센티넬로서 일하기는 글렀는지도 모르겠어.」
마치 이미 한번 본적이 있다는 것 같은 말에 아서는 얼굴을 굳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진짜 적룡이었다.
다만 놀란 점은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센티넬이라는 몬스터로 분류되어 지성이 없는 존재라 생각했었다.
단지 엑스칼리버에 반응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말을 걸어올 줄이야.
머뭇거리던 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설의 적룡이 어째서 한낱 센티넬이 된 거지?”
「그것이 시스템이 내게 준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플레이어가 되었듯, 나는 몬스터가, 그중에서도 센티넬이 되었다.」
세계의 변화는 인간에게만 닿아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얼마 남지 않은 신화의 생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거역할 수는 없는 건가? 적룡인 당신이라면…….”
「우주의 법칙을 아우르는 존재를 필멸자가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대나 나나 다르지 않다. 다만 나는 좀 더 오래살고 거대한 몸을 지니며, 강한 마력을 지닌 존재일 뿐.」
“그렇다면 몬스터가 되었다는 것도 이상해. 도리어 같은 플레이어가 되는 게 맞지 않나?”
「플레이어는 신을 닮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지. 자신과 닮았기에 ‘아바타’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용은 그렇게 말하곤 자신을 피해 플레이어들을 공격하는 베히모스를 응시했다.
또한 자신의 뒤에 있는 어떤 존재의 기척을 느꼈다. 검의 주인을 만난 기쁨도 잠시, 용은 천천히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검의 주인이여. 많은 것을 말해주고 싶지만 역할 상 그럴 수 없구나. 대신 신화의 맹약에 따라 지금 한 번은 도움을 주도록 하지.」
“잠깐, 좀 더 자세히 말을……!”
아서는 다급히 외치다가 문득 드라이그 고흐의 뒤편에 있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GM 아키넨을.
적룡은 그 사실을 알고, 최소한의 도움만을 준다 말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적룡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었다.
본래 센티넬은 눈에 보이는 플레이어를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센티넬에게 주어진 역할이니까.
하지만 신화시대의 맹약은 센티넬이 되기 전부터 적룡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시스템의 제약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
용은 포효하며 베히모스를 향해 덤벼들었다.
충분히 거대해진 베히모스였지만, 적룡은 그보다 더 컸다.
순수한 육체적인 능력만 보자면 본디 베히모스가 우위였지만, 아직 완전한 형태를 취하지 못한 베히모스였기에 적룡의 앞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괴수의 몸싸움에 플레이어들은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앞발로 베히모스의 가죽을 뚫고 거대한 거체를 완벽히 고정시킨 순간, 하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세한이 움직였다.
‘역시 용이라 눈치가 빠르군.’
충분히 목을 물어뜯어 죽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베히모스를 죽이는 걸 세한에게 양보했다는 의미다.
철컥.
세한은 파일벙커를 정면으로 향했다.
지금 세한의 팔에 장착된 파일벙커는 앞이 뭉툭했다.
여태 사용했던 끝이 뾰족한 파일벙커와는 그 형태부터 달랐다.
‘펑범한 파일벙커를 사용해 봤자 가죽도 뚫지 못할 테지.’
하지만 아서의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이미 상처가 나 있는 부위를 노린다면.
일격에 베히모스를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원래 이놈을 잡으려고 준비한 건 아니었지만…….”
목표는 맨 처음 베히모스의 목에 박아 넣었던 대검.
대검의 날 윗부분은 이런 때를 상정한 듯, 폭이 상당히 넓었다.
세한은 활강하며 대검을 향해 파일벙커를 조준했다.
이미 파일벙커에는 ‘신념의 응집’을 통해 모인 강대한 마력이 모여 있었다.
평소의 파일벙커보다 몇 배는 오랫동안 충전해야 되지만 위력도 몇 배는 불어났다.
그 위력은 베히모스의 목에 걸린 대검을 앞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적룡이라도 베히모스를 완벽히 붙잡아두는 건 그리 길지 않을 터.’
그러니까 기회는 단 한 번.
찰나에 가까운 시간을 노려 세한의 파일벙커가 쏘아졌다.
콰콰쾅!!
파일벙커에 얻어맞은 대검이 앞으로 밀려나며, 마치 기요틴처럼 수직으로 떨어졌다.
베히모스의 질긴 가죽도.
두터운 목표도.
강인한 근육도.
단번에 절단하며 대지에 대검이 쿵, 박혔다.
그리고 그 위로, 잘린 베히모스의 머리가 떨어지며 땅을 울렸다.
단 한 방.
시끄럽던 글라스톤베리의 들판이 조용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