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092. 베히모스(1)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거슬리게.”
이아영은 크리스보다 더 오만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아영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아항.”
그녀 역시 비슷한 스킬은 지닌 터라 플레이어들의 상태가 이상한 이유를 대충 이해한 모양이다.
반면 크리스는 그런 이아영의 시선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뭐야, 이 여자들은? 까마귀, 당신의 동료야?”
“아니.”
저 여자들이 내 동료일 리가 없나.
그나마 신유화는 아주 잠깐 동료였던 적이 전생에 있었지만 이아영은 절대 아니었다.
“뭐, 까마귀? 그럼 네가 그 디어사이드의 까마귀라고!?”
크리스의 말을 들은 이아영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까마귀, 까마귀, 중얼거리던 그녀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너지! 네가 그때 던전레이스에서 우리 방해했던 게 너희지?!”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아영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던전 레이스 당시 우리가 포인트를 가장 많이 번 장소는 피안화 길드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민아가 돌아다니며 던전을 폐쇄하고 죄다 먹어버린 탓에 피안화는 길드 규모에 비해선 별 볼일 없는 성과를 내고 던전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박성혁이 그랬단 말이야!”
제네시스의 길드장 박성혁의 이름이 나오니 나도 할 말이 없어졌다.
이 녀석, 결국 나중에 다른 길드에게 이야기하긴 한 모양이군.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난감했다.
솔직히 크리스 쪽보다 이쪽이 곤란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나 크리스는 이벤트가 끝나면 만날 일도 없지만 이아영은 아니었으니까.
“뭐야, 짜증나게. 까마귀는 지금 나랑 대화하고 있었어. 못생긴 게 꽥꽥거리지 좀 마.”
자신에게 쏠려 있던 관심에게 이아영에게 넘어가는 걸 느꼈는지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아영을 도발하며 말했지만 이아영은 정말 같잖은 걸 본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인형 놀이나 하는 계집애가 말이 많구나.”
이아영은 내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목에 손을 댔다.
그리고는 엄지로 선을 그리듯 자신의 목과 쇄골을 훑었다.
“브리싱가멘(Brísingamen).”
그건 이아영이 가진 전승 스킬의 이름.
그 스킬의 효과는 지극히 간단하다.
남성에 한한 절대명령권.
크리스의 것과 비슷하지만 위력은 더 강하다.
왜냐면 ‘남성’으로 한정되며 횟수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저항하기 힘들다.
나조차 브리싱가멘 스킬을 받으면 저항하느라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정신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뇌의 명령을 차단하고 강제로 육체에 명령을 내리는 것에 가까우니까.
전생의 양자택일 퀘스트 당시 이아영이 살아 있었다면 게임의 판도가 달라졌을 거라 추측할 정도의 사기 스킬이 브리싱가멘이다.
“저 계집애를 버리고 이쪽으로 와라.”
턱을 치켜들며 말하는 이아영의 말에 크리스의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탁했던 플레이어들의 눈에 빛이 돌아오며 이아영 쪽으로 이동했다.
크리스의 매혹을 명령으로 덮어씌운 탓에 매혹스킬이 풀려 버린 것이다.
“어? 이제 몸이 제대로 움직여.”
“방금 전에 매혹되지 않았었나?”
갑자기 스킬이 해제되자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리며 멍하니 있는 크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괘, 괜찮아. 나에겐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이 많이 남아 있지.”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여성 플레이어들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상태이상 스킬에 걸린 거였군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신유화가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크리스의 몸을 스치고 뒤에 서 있던 여성 플레이어들의 몸으로 흡수됐다. 그러자 굳어 있던 여성 플레이어들의 몸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내 스킬이 다 풀려 버리잖아!”
바람이 스칠 때마다 플레이어들에게 걸려있던 매혹 스킬이 하나씩 풀렸다.
덕분에 크리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매혹 스킬을 사용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든 상태이상 스킬은 신유화의 손을 피할 수 없었다.
성녀라는 이름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다만 이아영의 브리싱가멘은 발동 시 저항을 못 했다면 해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한 매혹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계속 걸어봤자 헛수고예요.”
“이, 이이이!”
“어머, 말을 해야죠. 웃기는 사람이네.”
난데없이 등장한 두 사람 때문에 상황이 이상해지자 크리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물론 이아영은 코웃음쳤고, 신유화는 맑은 얼굴로 비웃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솔직히 크리스는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아무튼.”
나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악마의 계약자는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겠지.”
뭔가 내가 한 일은 없지만 얼굴이 창백해진 크리스를 보니 제법 봐줄 만했다.
이아영과 신유화도 별 감흥 없는 눈치였다. 애초에 악마의 계약자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는 없다.
“자, 잠깐만.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뭘 했다고 무승부야.”
크리스는 주춤거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매혹 스킬이 몸에 닿기 무섭게 허공에서 부스러지듯 흩어졌다.
정신약체 내성 스킬을 무려 S급까지 올린 내게는 봄바람보다도 가벼운 공격이었다.
“그러길래 왜 이상한 짓을 해. 얌전히 있으면 건드릴 생각도 없었는데.”
“아.”
푹.
피육을 찢는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다.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보는 크리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의 눈에서 점차 빛이 사라졌다.
털썩.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녀석이 처량하게 바닥에 쓰러진 걸 보니 씁쓸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려두기도 어려웠다. 크리스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왔다고 했으니 살려두면 분명 다시 덤벼올 게 분명했다.
이번엔 내 선에서 끝났으니 다행이지만 내 주변 인물과 엮이게 되면 좀 더 일이 크게 될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가차 없네. 걔 그래도 얼굴은 봐줄 만하던데.”
“위험도에 얼굴은 상관없지.”
이아영의 말에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악마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죠.”
악마와 관련된 이를 그다지 없는 신유화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방금 자신을 조종해서 죽이려던 여자를 동정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7대 악마 중에 하나인 마라 파피야스의 계약자라기엔 너무나 조잡한 최후였다.
***
저벅.
잠시 후, 플레이어들이 떠나고 한 여성이 크리스의 시체가 있는 장소에 걸어왔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크리스의 시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린 은발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천천히 이마에 손가락을 대었다.
“흐악!”
그러자 죽어 있던 크리스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검에 찔려 관통되었던 가슴의 상처도 깔끔하게 나아있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으며 상처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 죽을 뻔했다.”
“이미 한번 죽었어. 언니.”
그렇게 말하는 여성은 크리스와 꼭 닮은 외모를 한 소녀였다.
“시리스. 고마워.”
“언니는 너무 잘 죽는단 말이야.”
“솔직히 한 번에 가능할 줄 알았는데…….”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여성, 시리스가 노려보았다.
“근데 나 아직 아무도 안 죽였는데 너무 가차 없이 찌른다.”
“악마의 계약자를 본 사람의 당연한 반응이지.”
“너무하네.”
투덜거리는 크리스의 모습에 시리스는 웃었다.
그 웃음은 크리스와 닮았지만 묘하게 달랐다.
그녀는 크리스의 쌍둥이 여동생인 시리스 브라이트.
마라 파피야스의 두 번째 계약자였다.
동일한 악마를 계약자로 삼은 쌍둥이 자매는 둘 중 한 명이 살아 있으면 다른 한쪽을 살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다. 즉, 둘을 동시에 죽이지 않으면 다른 한쪽이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니 덕에 그를 단순히 매혹 능력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
“어떡하지? 나 솔직히 이제 걔랑 엮이기 싫은데…….”
“그렇다고 GM이 부탁한 의뢰를 바로 포기하긴 그렇잖아.”
악마의 계약자는 악마의 말을 보통 거역할 수 없다.
온화한 어투를 사용하는 마라 파피야스지만 그는 그런 면에서 가차 없었다.
그가 GM을 돕기로 한 이상 두 자매는 어떻게 해서든 악마의 의도에 어울려 줘야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둘의 목숨은 없었다.
“그럼 어떡하지. 우린 딱히 전투능력도 없잖아.”
“괜찮아, 언니. 내가 봐둔 게 있어. 그걸로도 실패한다면 GM도 넘어갈 거야.”
왜냐면 GM이 우리에게 의뢰를 맡긴 건 ‘그걸’ 깨우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혹시 몰라 언니가 행동하는 걸 내버려두긴 했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은 그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냐.
답은 간단하다 이길 수 있는 걸 불러오면 된다.
마침 이곳에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두 마리나 있었다.
적룡, 드라이그 고흐와, 신화의 짐승. 베히모스가.
***
율리안 슈미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용이다…….”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독일 서버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무엇인지 율리안은 신에게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율리안의 신은 지구 출신의 신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 출신의 신이었던지라 지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았다.
「캬아아아아!!」
붉은용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워낙 강대한 존재이기에 플레이어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용에게 플레이어들은 벌레와 별다를 것 없었기에 아직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에 띄면 죽이겠지.’
저것이 만약 GM이 말했던 센티넬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센티넬은 발견한 플레이어를 죽이도록 만들어진 괴물이었으니.
“율리안! 율리안!”
“쉿! 조용히 해. 용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 그래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용이 문제가 아니라니. 율리안은 자신을 부른 플레이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용보다 중요한 게 있어? 자칫하면 우리 다 죽게 생겼어!”
“그, 그건 그렇지만 용만이 아니야.”
“뭐가?”
“센티넬이 용만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는 방금 전 자신이 녹화했던 영상이 하나 있었다.
“이걸 봐.”
남자는 율리안이 잘 볼 수 있도록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 영상을 보는 순간, 율리안의 얼굴은 한층 굳을 수밖에 없었다.
“센티넬이 하나 더 있다고?”
영상에 나온 괴물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분명 센티넬이었다.
저런 게 절대 평범한 몬스터일 리가 없으니까.
거대한 어금니와 세계를 짓밟아 부실 것 같은 거대한 다리.
그 괴물의 이름은 바로 베히모스였다.
***
까마귀의 눈으로 확인한 상황에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왜 얘네 둘이 다 깨어나?
요즘 일이 꼬인 적이 많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역대급이다.
일반적인 센티넬도 아니라 용과 베히모스가 동시에 활동을 시작하다니.
그나마 플레이어들의 대처가 빨라 공격당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두 마리를 피해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베히모스와 드라이그 고흐의 공세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기서 플레이어들이 다 죽어버리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각 서버에 주요인물들이 모인 이벤트에서 그들이 죽게 되면 미래는 배드엔딩 급행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여태까지 기껏 사람들을 구해온 게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내가 지금 용이나 베히모스 중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있나?”
굳이 둘 중에 가능한 것을 찾자면 베히모스다.
베히모스는 아직 완전히 성장한 상태가 아니었다.
베히모스의 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거대해지는 것.
저 크기는 아직 성장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잘하면 죽일 수 있긴 했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와준다는 전제하에.
‘하나, 방법이 있어.’
어쩌면 용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문제는 그것을 위해선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아서의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