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091. 호수의 마을(3)
대충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그는 아직 길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당신의 발과 정신을 고쳐줄 수 있음에도?”
“그건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야.”
그런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환상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서의 눈동자가 커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답변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존중해. 그러니 환상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을 봐줬으면 좋겠어.”
“나를 도와준 건 고맙지만, 거기까지 해줬으면 하는군.”
딱딱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돌릴까. 혹시 아서왕은 좋아하나?”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냥 이곳은 아서왕의 전설이 숨 쉬는 글라스톤베리잖아. 주제로 삼기 딱 좋지 않겠어?”
가볍게 말하는 내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아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좋아하긴 했지. 나 말고 내 아들이.”
“그렇군. 유감이야.”
“이곳도 나중에 꼭 와보자고 했던 곳이다. 일이 바빠서 함께 오지는 못했다만…….”
결국 이렇게 혼자서 오게 되는군. 아서는 그렇게 말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드라이그 고흐.”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아서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웨일즈의 수호룡이로군.”
“잘 아네.”
“아들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곤 했으니까.”
쓰게 웃는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그런 그의 모습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럼 만나러 가볼까?”
“누구를?”
“방금 말했잖아.”
바로 드라이그 고흐.
적룡을.
***
글라스톤베리 토르의 언덕 정상.
그곳에는 하나의 탑이 있다.
관광명소로 유명한 미카엘 탑이다.
이전이라면 평범한 관광요소였을지 몰라도 이 세계가 게임으로 변화하며 이곳도 변했다.
아까 GM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곳에는 센티넬이 하나 있으며, 드래곤이라고.
그게 바로 지금 우리의 앞에 있는 드라이그 고흐다.
“오, 맙소사.”
미카엘 탑에는 이전에는 없던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굴을 따라 내려가는 것처럼 한참을 가자, 거대한 공동이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거체를 눕히고 잠들어 있는 붉은 용.
아서왕 신화에서 등장하는 웨일즈의 수호룡이 이곳에 있었다.
“어때?”
“……아들이 보면 좋아했겠어.”
“영웅의 이름을 지닌 것 치고는 소박한 감상이야.”
아서왕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아서였으니까.
아서도 그 말을 이해했기에 그저 쓰게 웃었다.
“아들도 언제나 놀렸지. 아빠는 아서왕이랑은 전혀 다르다고.”
용맹한 기사의 대명사 아서왕의 이름을 지녔다기엔 아서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소시민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사람.
그런 그가 이렇게 망가진 것도 가족을 사랑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아서, 당신은 영웅이 될 수 있어.”
“근거 없는 소리야. 어떻게 나 같은 게…….”
쿵!
허공에 검은 공간이 열리며 검이 떨어졌다.
두터운 비석에 박혀있는 검이 아서의 동공에 가득 들어왔다.
“근거는 만들면 되지.”
“…….”
바위에 박힌 검.
아서왕의 전설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특히 아서는 모를 리가 없겠지. 플레이어이기에 무기로부터 느껴지는 격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검이 바로 진짜 엑스칼리버라는 걸.
“이걸 당신이 뽑는다면 영웅이 될 근거로 충분하지 않나?”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말하지 않았나? 난 당신과 파티를 맺고 싶다고 했을 텐데.”
아서는 그럼에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당신이 보는 환상이 뭔지 난 알아.”
“……뭐?”
나는 전생의 아서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걸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가 말하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과거형이었으니까.
“이 게임이 시작되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중에 당신과도 같은 사람들을 많이 봤지.”
“…….”
“죽은 가족의 환상을 보는 사람들.”
가까운 예로 시우가 있다.
시우는 아서처럼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뒀으면 충분히 그렇게 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당신은 검을 뽑아야 해. 뭣보다 난 당신이 필요하거든.”
“내가 필요하다? 나 같은 게?”
“나 같은 게가 아니야. 당신이기 때문에 필요한 거야.”
아서의 눈이 흔들렸다.
잠시 나를 보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아들을 잊고 싶지 않아.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계속 보고 싶어.”
“이해해. 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이야. 당신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지.”
“나는…….”
“만약 그 환상이 당신이 진짜 가족이었다면 지금의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걸? 분명 똑바로 살라고 말했을 거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말했을 거야.”
감았던 아서의 눈이 떠졌다.
그는 내가 꺼낸 엑스칼리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걸 손에 쥐었다.
“나는.”
아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
그리곤 눈이 풀리며 등이 굽어지고 의식이 혼탁해졌다.
하필 지금 인격이 변해 버린 것이다.
“타이밍 한번 죽이는군.”
거의 다 된 것 같았는데 하필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도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야 말로 검을 뽑고 나와 파티를 해주지 않을까.
아서의 성격상 검만 뽑고 튈 것 같지는 않고.
애초에 그런 인간이면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엑스칼리버의 주인이라는 건 신뢰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럼 장소를 옮겨서 아서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볼…….”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뭐야?”
왜냐면 까마귀의 시야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
“까마귀는 언제 오려나.”
은발의 여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주위에는 플레이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적대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동료들을 본래 상대로 돌려놔라!”
“싫어.”
“크리스 브라이트!”
그건 은발의 여성의 이름이었다.
또한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름이었다.
크리스 브라이트. 마계의 7대 악마 중 하나 마라 파피야스의 계약자.
악마의 계약자임에도 검은 머리가 아닌 은발 머리를 지닌 변종.
그녀의 머리색은 마라 파피야스와 같다.
저 매혹적인 은색이야말로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다.
“까마귀를 찾기엔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악마님이 말했는 걸. 걱정마 죽이지는 않아. 적어도 나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면 그녀의 주위에는 상당수 플레이어들이 그녀를 지키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 정신 차려!”
개중에는 센티넬을 죽였다고 자랑하던 에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실력자도 조종당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를 섣불리 공격하기도 힘들었다.
멋대로 공격했다가는 그녀에게 조종당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반격을 당할 테니까.
‘개 같은 년.’
악마의 계약자 중에 크리스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다.
다른 악마의 계약자처럼 플레이어들에게 적대감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군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플레이어들을 노예처럼 부렸고, 관심이 꺼지면 원래대로 되돌리는 등 기분에 따른 편차가 심했다.
‘뭐 이런 개사기적인 스킬이.’
크리스가 악마로부터 받은 스킬은 극히 심플하다.
매혹. 상태이상 계열 능력이 그렇듯, 마력수치가 낮으면 저항할 수 있지만 그녀의 능력은 개중에서도 강렬했다.
그녀보다 마력이 높아도 방심하면 조종당할 수 있어 강력한 정신 내성 스킬을 지닐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정신 내성 스킬은 얻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그녀를 막을 만한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는 뭐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 원래는 그냥 찾아다니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찾겠더라.”
후후후, 거리며 웃은 크리스의 말에 플레이어들은 벙쪘다.
“고작 사람을 찾겠다고? 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
“까마귀야.”
까마귀? 그가 대체 누구지?
갑작스런 그녀의 지명에 플레이어들은 수군거렸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7대 악마의 계약자를 구경하다가 익숙한 이름에 경악했다.
“까마귀? 디어사이드 길드의 까마귀?”
“맞아.”
까마귀라는 말에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그가 누군지 중얼거렸다.
유명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에게 물어봤다.
“왔다.”
그때, 크리스가 씩 웃으며 말하며 허공을 응시했다.
“갑자기 오기는 누가…… 어?”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어디에서 이런 까마귀가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까마귀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까마귀들의 틈에서 거대한 검은 날개가 얼핏 보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웅!
“윽!”
갑작스런 돌풍에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었다.
까마귀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하나의 남자가.
***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왜 내 이름을 팔며 이런 짓을 벌이는지 물어도 되겠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까마귀라고 칭하지만 않았어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놓고 까마귀라고 칭하며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나로선 그 의도를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평범한 플레이어도 아니라 7대 악마의 계약자이니까.
“그야 당신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그러지.”
“볼일?”
“의뢰를 받았어. 당신을 죽이라는 의뢰.”
나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나를 죽이라는 의뢰 때문이 아니다.
그걸 대놓고 나에게 말하는 그녀의 자신감 때문이다.
‘와,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크리스 브라이트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악마의 계약자였지만 유일한 7대 악마의 계약자였기에 정보가 많았으니까.
그녀에 대해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지극히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빡대가리.
분명 내 실력에 대해 들었을 거다. 최근 같은 7대 악마인 아자젤과도 만났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나왔다는 건 단순히 오만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의아한 모양이네. 하기야 나는 너와 싸움이 안 되긴 해.”
“알고는 있는 모양이군.”
“응. 하지만 일일이 찾아다니긴 귀찮거든. 뭣보다…….”
크리스는 주변을 향해 살랑이며 손짓을 했다.
내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지만 그 손짓 한번에 주변에서 그녀를 향해 소리치던 플레이어들이 단번에 잠잠해졌다.
그들도 크리스의 ‘인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미친 스킬이긴 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매혹시켜 버리는 그녀의 스킬은 정신계열 스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기 스킬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정신 내성 스킬을 지닌 플레이어도 간간이 등장하여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강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들어보니 당신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다며?”
“……뭐?”
“되도록 사람을 구하는 방향으로 플레이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있잖아. 이 사람들은 어때?”
철컥.
크리스의 주변에는 족히 100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서버에서 손에 꼽히는 인재들이었다.
크리스의 매혹에 속수무책에 당했다지만 그건 단순히 정신내성 계열 스킬이 없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이 게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에릭이나 그의 길드원들이 그렇다.
“당신이 저항하면 모두 죽여 버릴 거야. 그러니 얌전히 있어. 정신 내성 스킬있지? 그것도 사용하지 말고. 그럼 적어도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게.”
“너.”
그제야 나는 크리스의 의도를 알 수있었다.
아마 마라 파피야스로부터 들은 거겠지.
내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는 걸.
‘그래도 나름 머리는 썼네. 자기 스킬이 잘 먹힐 만한 애들로만 모았어.’
이 스킬이 사기적인 건 맞지만 그만큼 사기 스킬을 가진 이들도 이곳에 많다.
그러니 비교적 건드려도 문제가 없을 이들에게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 한곳에 모은 거다.
그다음 모인 사람들에게 모조리 매혹을 걸고 나를 협박할 생각을 한 거다.
내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는 걸 알고.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조금’ 곤란할 뿐이다.
플레이어들을 구하고자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목숨을 내어줄 생각은 없지.
‘허수 공간을 뒤에 열어 기습을 해버릴까?’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되도록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울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단순히 쓰러트리는 건 지나치게 쉬웠다.
솔직히 지금 크리스의 말은 내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그만 좀 따라와요! 진짜 짜증나네!”
“내가 할 말이거든요? 그리고 그 아이템 내 거라고 했잖아!”
시끄러운 대화가 오가며 나와 크리스의 사이에 두 명의 여성이 걸어갔다.
주변의 상황은 보이지 않는지 둘이서 아득바득 우겨가며 싸우던 그녀들은 나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이 까만 녀석은.”
“그리고 여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죠? 좋은 아이템이라도 있나.”
그 둘은 피안화 이아영과 성녀 신유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