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090. 호수의 마을(2)
전설 속 검의 대명사라고 하면 누구나 그 이름을 말할 것이다.
바로 엑스칼리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유명한 검 중 하나다.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선정의 검.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하나의 아이템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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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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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을 지닌 주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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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능력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아마 검을 소유한 주인만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
전생에 보았던 아서의 힘을 생각하면 이것보다 좋은 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서는 진정한 의미로 템빨의 극한이었으니까.
‘혹시 나는 사용할 수 없나?’
슬쩍 모르간을 보니 마음대로 해보라는 눈치다.
분명 이 검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겠지.
어쩐지 조금 오기가 생겨서 검의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위로 당겼다.
“윽!”
암석에 박힌 검은 뽑히지 않았다.
대신 암석과 함께 아주아주 조금 공중으로 들어 올렸을 뿐이다.
내가 만약 근력이 A나 S정도가 된다면 휘두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봐야 암석이 박힌 몽둥이일 뿐이다.
이대로는 도무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파일 벙커로 암석을 두드려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전설의 검일지는 몰라도 검이 꽂혀 있는 암석은 전설의 암석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모르간이 말했다.
“그 암석은 검과 내구도가 같으니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정말 전설의 암석이었나.
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암석을 바라보자 모르간은 그저 피식 웃었다.
“검의 힘이 암석에 깃들어 있어서 그럴 뿐이야. 아무튼 검은 못 뽑겠지? 그럼 다른 거 가지고 싶은 건 없니?”
“아니, 그래도 난 이 검을 가져가지.”
“무슨 수로? 암석과 함께 가져가려고 해도 바닥에서 안 떨어질걸?”
“알고 있다.”
굳이 검을 들고 옮길 필요는 없지.
“흐읍!!”
나는 재차 온힘을 다해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
아까처럼 암석이 대략 몇 미리정도 바닥에서 떨어졌다.
“내참 그렇게 들고 가봐야 무슨 소용이…….”
비웃으며 말하던 모르간의 얼굴이 굳었다.
왜냐면 내가 들어 올린 암석과 바닥의 틈에 새까만 공간이 열렸기 때문이다.
바로 전승스킬 허수공간이다.
“후!”
내가 검을 들고 있던 손을 놓자 암석에 박힌 엑스칼리버가 통째로 허수공간으로 사라졌다.
이번 이벤트에서 얻은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지만 허수공간을 통해서라면 가능했다.
그야 이드라는 외우주의 신이니까 시스템의 영향을 덜 받는 거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VPN으로 우회해서 인벤토리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맙소사.”
설마 이런 식으로 가져갈 줄은 몰랐는지 모르간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검은 잘 받아가지.”
“아니, 잠깐. 그게 아니, 뭐라 해야 되나.”
여태 여유로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한 말도 물릴 수는 없으니 심히 난감해 보였다.
분명 내가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거겠지.
이곳에는 많은 보물이 있었지만 단연 최고의 물건은 엑스칼리버였다.
그것도 아서왕의 전설과 연관이 깊은 모르간이니 더더욱 특별한 무기였겠지.
“저기, 내가 다른 좋은 걸 많이 줄게, 응?”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이 검이 마음에 들거든.”
발을 동동 구르며 난감해하는 모르간의 모습은 전설 속 마녀라기엔 우스웠다.
아까 나를 보며 비웃던 모습이 짜증나서 놔두고 있었지만 계속 그럴 필요는 없겠지.
아발론 밖으로 나갈 수는 없겠지만, 모르간은 신화 속 마녀다.
친분을 만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 검의 주인에게 직접 가져다 줄 테니.”
“……뭐야, 당신. 그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다? 멀린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다 아는 법이 있지.”
“말투가 꼭 짜증나는 멀린 같네. 인상도 더러운 게 똑같아!”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꼽자면 한손에 꼽히는 멀린과 같은 취급을 당한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부터 느꼈지만 내 인상이 그렇게 더럽나. 그냥 조금 눈매가 사나운 정도 아냐?
“그럼 이렇게 하지. 앞으로 2주 안에 주인을 찾지 못한다면 이 검을 돌려주지.”
“어, 정말? 그럼 멀린 같다고 한 건 취소해 줄게.”
찌푸려졌던 모르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분명 내가 절대 못 찾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 긴 시간 동안 계속 주인을 찾았던 모르간이지만 끝내 아서왕 이후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했으니까.
“대신 그때 다른 보답을 요구해도 괜찮나?”
“만약 찾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후한 보상을 해줄 테니 걱정 마. 호수의 귀부인으로서 약속해.”
“좋다.”
추가적인 약속도 받아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아서를 찾는 일뿐이다.
“그리고 2주간 이 마을에서 머물고 싶은데 괜찮은가?”
“얼마든지. 그 정도는 상관없어.”
“고맙군.”
“대신 나 이 아이를 빌려도 될까? 이상한 짓은 안 할게.”
모르간의 갑작스런 말에 보물들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구경하던 백설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 저 말입니까?”
“그래, 동양의 신수는 그다지 볼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이 기회에 이것저것 알아두고 싶어서.”
“그게, 전 기린이 아니라 기린아라…….”
언제나 스스로를 기린이라 자칭하던 백설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했다.
정말로 마녀란 존재가 무서운 모양이다.
“걱정 마, 절대로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게.”
“알겠다. 대신 백설이에게 마법 같은 것도 알려줬으면 하는군.”
“좋아.”
우리의 거래는 간단히 성립됐다.
“세한…….”
백설이가 팔려가는 소의 눈망울로 나를 올려보는 터라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이 편이 백설이에게도 나았다.
모르간은 정말로 나쁜 마녀가 아니었고 전설 속 마녀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밖에 따라다니는 편이 더 위험해. 그리고 마녀라지만 모르간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바로 올 테니까. 그리고 저녁이 되면 돌아올 거야.”
“알겠습니다.”
백설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이벤트에서 실전 훈련을 가지는 건 좋지만, 우선 모르간에게 얻을 건 최대한 얻은 후에 그러는 편이 나았다. 여러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백설이는 아직 미숙한 편이니까.
“그럼 사이좋게 지내라.”
고개를 끄덕이는 백설이와 웃는 낯으로 배웅하는 모르간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호수 밖으로 향했다.
이제 아서를 찾을 차례다.
***
“이 병신은 또 뭐야?”
한 플레이어가 절뚝절뚝 걸어가던 플레이어의 등을 발로 찼다.
막 아이템을 집어 들고 걸어가던 절름발이 플레이어는 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와, 영국 서버가 진짜 막장이긴 하네. 이런 놈이 순위권에 든 놈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플레이어는 프랑스 서버 소속의 플레이어였다.
이번 이벤트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서버였기 때문에 영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왜 저놈이 우리 서버 대표 중 하나인 거야?’
영국 소속의 플레이어는 숫자가 적었다.
탑 플레이어라고 최대한 박박 긁어모아 소환된 인원이 고작 50명 정도.
이벤트 장소가 영국 서버라는 점을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다.
지형적인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륙 출신보단 섬나라 출신 플레이어들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스테이지가 고립된 장소가 많아 그만큼 희생이 컸기 때문이다.
“흐, 흐으.”
쓰러진 플레이어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아이템을 주웠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웃던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야, 이 새끼 보래? 넌 자존심도 없냐?”
옆에서 계속해서 도발했지만 절름발이 플레이어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길을 갈 뿐이다.
마치 실성한 것처럼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프랑스 플레이어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진짜 짜증나게 하네.”
프랑스 플레이어 몇몇이 절름발이 플레이어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아이템을 뺐었다.
그다지 점수도 높지 않은 아이템들이다.
기껏해야 D급 아이템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프랑스 서버의 플레이어가 그를 건드린 건 아이템을 약탈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약한 자를 괴롭힐 때 얻는 저열한 쾌감을 얻기 위해서였을 뿐.
나름 강자라고 뽑혀온 놈이 절름발이 플레이어라는 건 우습지 않은가.
심지어 영국의 다른 플레이어들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섣불리 나서봐야 프랑스 플레이어들과 대립하게 되면 이번 이벤트에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었다.
제한 없는 약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잘못을 했지?”
바닥에 쓰러져 맞고 있던 플레이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반쯤 실성한 것처럼 중얼중얼 거리던 것과는 달리 덤덤한 눈으로 프랑스 플레이어들을 올려보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눈.
그를 발로 차고 깔아뭉개던 플레이어들조차 움찔할 만한 눈빛이었다.
“병신이 그럼 덤벼보든가. 절름발이 쓰레기 새끼가!”
욕설을 내뱉으며 한 프랑스 플레이어가 달려들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려있었다.
여태 주먹과 발로 공격하던 것과는 문제가 달랐기에 다른 프랑스 플레이어들조차 식겁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는 짓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았으니까.
“야, 잠……!”
잠깐 멈추라고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무수한 까마귀의 무리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보이는 까마귀의 무리가 이쪽으로 날아오자 플레이어들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몬스터인가?!”
“아니, 단순한 까마귀다.”
절름발이 플레이어에게 덤벼들던 플레이어도 갑작스런 사태에 발을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까마귀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씨,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죽여 버리면 되지!”
그들도 프랑스에서 날고 긴다는 플레이어들이다.
갑자기 까마귀가 나타났다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어느 한곳에서 갑자기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사람의 형태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뭉쳐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새까만 깃털이 흩날리며 그 안에서 한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내가 볼 일이 좀 있거든.”
까마귀를 연상하게 만드는 검은 머리칼과 복장.
그리고 느껴지는 강자의 기운에 플레이어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 꺼져라.”
남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몸이 일제히 튕겨져 날아갔다.
***
녀석들을 쓰러트리고 장소를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까 전의 장소에서 좀 떨어진 푸른 들판을 걷자, 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나를 도운 거냐.”
“그러는 당신은 왜 맞고만 있었던 거지?”
“……뭐?”
“당신이 그 멍청이들보다 강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절름발이지만 그는 강하다.
그야 당연하지.
당연하지.
왜냐면 이자가 바로 아서.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던 길드 펜드래건의 수장.
지금 최약의 서버라 불리는 영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을 한데로 모아 국가 자체를 하나의 길드화시킨 영웅 중의 영웅이다.
그런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게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2년 후.
2년이란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가 정신에 문제가 있고, 절름발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강해졌다는 건 필사적으로 싸워왔다는 이야기겠지.
그래서 세간에는 아서의 다른 인격을 완전히 번아웃한 아서의 모습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약해빠진 놈이야.”
아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 곳에서 힘자랑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그들의 말이 맞아. 난 가족들이 죽게 내버려둔 병신이니까.”
상당히 젊어 보이는 아서지만 나이는 서른에 가깝다.
그나마 루크보다는 젊지만 본래 아들도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세계가 게임이 되며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보다 당신의 용건을 묻고 싶어. 나와 굳이 대화를 한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래.”
어차피 말을 돌릴 필요는 없다.
나는 아서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나와 파티를 맺고 계약을 맺자고. 당연히 아서는 그런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계속되는 설명에 아서는 겨우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긴 플레이어마다 다양한 능력을 지녔으니 그런 것도 있을 법해.”
“그래서 대답은?”
그는 옅게 웃었다.
그리곤 굽은 등을 피고 단호하게 답했다.
“거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