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082. 악마를 찾는 자(1)
내가 스킬을 확인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몽상의 던전에서 나와 길드에 돌아온 이후, 몰려온 피로에 바로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야 확인하게 된 건데…….
“이게 뭐야.”
능력치 창에 익숙한 스킬이 있었다.
새롭게 익힌 스킬이지만 익숙한 스킬이다.
‘명확한 스킬명도 없이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스킬을 익혔을 줄은 몰랐다.
왜냐면 지금 내가 새롭게 익힌 스킬은 일반적으로는 절대 익힐 수 없는 스킬이었으니까.
“허수공간이라니.”
그것은 내가 전생에 지니고 있었던 스킬이다.
그리고 몽상의 던전에서도 방금 잘 사용하고 온 스킬이다.
이드라의 전승 스킬 「허수공간」.
간단히 설명하자면 허공에 공간을 여는 스킬이다.
일시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공간을 만들어 여는 것이라고 할까.
다만 이 허수공간을 내 인벤토리와 연결시켜서 사용한다거나, 상대방의 원거리 공격을 허수 공간을 열어 막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응용이 가능하다.
몽상의 던전에서는 제법 화려하게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리자의 강신 스킬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본질은 전에 말했듯 굉장히 수수한 능력이지.
그저 허공에 공간을 열고 닫을 뿐인 능력이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스킬이긴 하다만.’
웬만한 원거리 공격은 전부 막아낼 수 있는데다 변칙적인 응용이 가능한 스킬이니까.
만약 생명체의 몸 일부에 공간을 열고 닫을 수만 있었다면 사기 스킬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생명체나 일정 이상의 질량을 가진 물질이 입구에 있으면 애초에 열리지 않거나 닫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왜 내게 이 스킬이 생긴 거지?
몽상의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전승 스킬을 던전 보상으로 얻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신의 상징이자 권위와도 같은 힘을 던전 보상으로 뿌려뒀을 리가 있나.
거기다 신경 쓰이는 건 허수공간만이 아니다.
대리자(였던 것)라는 업적도 신경 쓰인다.
이거 분명 이드라와 관련이 있는 거 같은데.
‘……직접 물어봐야 하나?’
쪽지를 보낸다면 바로 말을 걸 수는 있다.
하지만 영 꺼려졌다.
몽상의 던전에서야 한낱 꿈이니까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현실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으음.”
나는 쪽지창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굳이 먼저 연락을 할 필요는 없겠지.
본인의 전승 스킬을 내가 가지게 됐다는 걸 녀석이 모를 리 없다.
필요하다면 먼저 그쪽에서 연락을 해올 것이다.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허수공간은 그걸 감안할 정도의 스킬이니까.’
내가 2회차를 시작하고 가장 아쉬웠던 스킬 중 하나가 허수공간이다.
변질 스킬이나 환상 조작 스킬도 좋은 스킬인 건 분명했지만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던 건 허수공간 스킬이었다.
“우와, 이거 뭐야. 새로운 스킬?”
수련장에서 허수공간 스킬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언제 왔는지 민아가 말을 걸었다.
몽상의 던전에서 봤던 미래의 이민아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인지라 조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몽상의 던전의 이민아가 약간 시니컬한 성격이라면 이민아는 딱 또래 여고생 같은 모습이니까. 뭐, 본인의 말에 따르면 본래는 이런 밝은 성격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솔직히 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1회차나 2회차나 내가 본 이민아는 대체로 이런 성격이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게임이 시작되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우와, 우와 거리는 민아의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내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민아가 시선을 돌렸다.
“응? 뭐야?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다. 근데 너도 어디 가냐?”
“응. 잠깐 산책 좀 하고 오려고.”
간단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지만 민아는 늘 그렇듯 교복차림이었다.
평소라면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춰 입으라고 해줬겠지만 사정을 알고 나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산책이라는 게 친구를 찾는 거였군.’
그간 별 신경 쓰지 않았던 민아의 행동이 그런 속내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말을 해봐야 좋을 거 없지.
“그래, 괜히 이상한 녀석들이랑은 엮이지 말고.”
“걱정 마셔. 내 성격 알잖아? 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튄다니까?”
그렇게 말한 민아는 내 반응이 조금 이상했는지 나를 빤히 보았다.
“근데 오빠, 오늘따라 반응이 뭔가 이상하네. 하긴 어제 던전 다녀오고서부터 그렇긴 했지. 그 던전이 꽤 힘들었나 봐?”
“조금 힘들긴 했다. 넌 절대 가지 마라.”
“어차피 얻는 아이템도 별거 아니던데 뭘. 난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아.”
민아는 그렇게 말한 후, 빙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 그렇듯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된 거 민아의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몰랐다면 상관없겠지만 민아의 사정을 안 이상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단순히 오지랖이 아니라, 이러다 미래의 이민아처럼 천안으로 떠나버리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의 이민아에서 알 수 있듯, 민아는 탑 플레이어 중에서도 중요한 존재다.
마법도 수준급이고 연금술은 물론 신에게서 받은 다양한 전승 스킬을 지녔다.
유틸 능력만 치면 어떤 플레이어도 따라오기 힘들겠지.
그런 녀석이 친구의 죽음에 실의에 빠져 잠적해 버리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여태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악마와 관련이 있다고 했었지.’
흑천회가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내가 흑천회를 제외한 다른 악마 관련 조직을 거의 모른다는 점이다.
악마 관련 조직은 민수호를 비롯한 아가트람 길드원들이 처리해 버린 터라 내가 나설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더 씬과 엮인 경우가 많았지.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까마귀들의 숫자를 늘려야겠어.”
정보가 없다면 모으면 그만이다.
***
지수는 세한의 방 앞을 서성이다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파티원의 위치를 알 수 있음에도 지수는 굳이 세한의 방을 찾아오곤 했다.
“세한 오빠.”
세한의 방을 두드려봤지만 역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하아.”
그의 말로는 다음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바쁘다고 했지만 지수로서는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급박했던 게임 초기가 그리웠다.
적어도 그때는 자신과 세한밖에 없었으니까.
어느 정도 게임이 궤도에 오르며 잠시 휴식기에 들어선 것이었지만 지수는 이런 휴식기가 오히려 불편했다.
“뭔가 할 거 없나…….”
린이나 백설이랑 놀아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지 그 두 명은 자신이 다가가면 오들오들 떨었기 때문에 놀아준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지수는 뾰루퉁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몽상의 던전에서 조금 부탁을 한 적이 있지만 특별히 협박을 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지수는 부탁만 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지.’
과연 세한의 말대로 몽상의 던전은 여태까지의 던전과는 다른 장소였다.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재연한 장소.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갔었다.
아마 자신의 트라우마를 구체화한 것 같은 악몽 같던 기억.
왜 그것이 던전으로 형상화한 것일까.
애초에 던전은 맞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간 던전 안에 있으면서 깨달았다.
아, 이 던전은 과거에 자신이 후회했던 일을 바로잡아야 하는 구나.
그걸 깨달으니 답은 간단했다.
거부감이 있었지만 시원함도 있었다.
끝내 끝까지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던전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한 모양인지 퀘스트는 클리어 되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나왔을 때는 손에 모래시계가 쥐어져 있었다.
미래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다는 모래시계가.
‘세한 오빠가 알면 화낼까?’
이 모래시계를 얻은 건 반쯤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왜냐면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한지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 것인가.
지수는 최근 자신이 점차 평범함과는 동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세한의 말처럼 ‘천살성’의 영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점점 흘러나오고 있었을 뿐이다.
지수는 그것을 굳이 참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참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을 잡아줄 상대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다만 궁금했다.
만약 이것을 자신에게 사용한다면 10년 후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미래에는 평범한 한지수로 돌아가 있을까?
아니면…….
“모르겠다.”
지수는 눈을 감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다른 길드원들과 달리 딱히 할 일이 없는 지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 던전 레이스에서 재미난 정보를 들었었다.
그믐달의 조직원들을 죽이던 도중이었던가.
‘암천’ 길드에서 온 악마의 계약자냐고 그랬었지.
나중에 찾아보고 안 사실이지만 암천 길드는 강북 쪽에서 한창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길드라는 모양이다.
그 길드장이 악마의 계약자라고 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지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내일 거기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서울 시 외각.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신장의 남자와, 부서진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는 기이한 남자였다.
작은 신장의 남자는 가면의 남자를 바라보며 연신 땀을 훔쳤다.
‘흑천회는 괴멸됐다고 하더니 살아 있었네.’
그의 이름은 송수근.
뒷세계의 정보망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자였다.
본래는 흑천회가 주 거래대상이었지만 흑천회가 사라진 이후에는 그믐달이나 암천과 같은 길드에게 정보를 팔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뜻밖의 인물이 바로 연락을 해왔다.
바로 눈앞의 신자운이다.
“근데, 암천 길드의 정보를 말입니까?”
“대단한 건 필요 없다, 위치만 알면 충분해.”
그의 말에 송수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신자운에 대한 정보는 뒷세계에서 꽤 가치가 있는 정보다.
‘설마 암천 길드를 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믐달 수준의 거대 길드는 아니어도 한창 세력이 늘어나고 있는 길드다.
신자운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어찌해 볼 수 있는 길드는 아니었다.
아무튼 행동파로 알려진 신자운이 위치를 묻고 있다는 건 암천 길드에 볼일이 있긴 하다는 거다.
송수근은 우선 위치를 말하기로 했다.
애초에 위치에 관한 정보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신자운이 살아있으며 암천 길드를 노린다는 게 훨씬 중요한 정보였다.
대략적인 위치를 말하자 자운의 머리가 끄덕여졌다.
“알겠다.”
“예, 그럼 저는…….”
“가도 좋다. 몇 포인트를 주면 되지?”
송수근은 얼마를 받아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값비싼 정보도 아니었고 괜히 높여 부르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 오히려 지금의 대화가 훨씬 값비싼 ‘정보’였다.
“천 포인트면 충분합니다.”
“싸군.”
“예. 그다지 대단한 정보는 아니라서…….”
자운은 손가락을 튕겨 송수근에게 포인트를 전달했다.
천 포인트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또 이용해 주십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외치며 허둥지둥 사리지는 송수근의 모습을 자운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왜 알고 있는 정보를 굳이 물어본 거야?”
언제 나타났는지 아자젤이 양산을 접으며 물었다.
“내가 찾고 있다는 걸 녀석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아하, 저 입 싼 인간이 암천인가 하는 애들에게 정보를 말할 테니까?”
“그래.”
자신이 찾아갔을 때 마침 박도영이 없다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곤란하다.
기왕 간 김에 싹 털어버리는 편이 마음에 편했다.
목적은 민수아의 오빠인 민수호를 구출하러 가는 것이지만, 단순히 구출만 했다가는 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나는 제법 이름값이 있거든.”
신자운은 뒷세계에서 상당히 네임벨류가 높았다.
악마의 계약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평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무력에 집착하는 박도영이라면 분명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네. 혼자서 다 상대할 수 있어?”
“네가 볼 때는 어떻지?”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운의 시선에 아자젤은 설핏 웃었다.
정말 귀염성이 없는 계약자다.
“하긴 괜한 걸 물었네.”
현재 신자운은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네비로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7대 악마 중 하나인 아자젤과 재계약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치가 낮아진 아자젤과 실전형식의 대련은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천재였다.
자운의 싸움을 지켜보며 한눈에 흠을 잡아줄 수준이 되었다.
‘내일 찾아가면 될 것 같군.’
송수근이라면 분명 지금 당장 암천 길드로 달려갈 것이다.
그럼 내일쯤 암천 길드에 가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지.
‘간만에 제대로 싸워볼 수 있겠어.’
자운은 세한과 싸운 이후, 제대로 된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와는 교전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냥일 뿐.
자운은 플레이어와 싸우는 쪽이 취향이었다.
그야 전직 격투기 선수이니 당연할 수밖에.
세한과의 전투는 자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지긴 했지만 또 그와 같은 강자와 싸워보고 싶었다.
무력으로 이름난 철마 박도영이라면 분명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터.
‘부디 기대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군.’
민수호를 구하는 것도 구하는 거였지만, 사실 자운은 그쪽에도 관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