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081. 역주행의 마법(4)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왜냐면 빛이 사라졌던 린 테일러의 눈에서 선명한 푸른빛이 맴돌기 시작했으니까.
“으윽!”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야 단검에 찔렸으니 당연했다. 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수많은 옵저버들이 지켜봤다.
방금 전에 분명 죽었던 소녀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비단 린만이 아니었다.
민아가 마지막 한 명까지 쓰러트렸던 격리구역의 플레이어들.
그리고 세한이 퍼트린 독무에 쓰러졌던 민간인들도 눈을 떴다.
10만의 민간인과 천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
세한의 손에 쓰러졌던 이들이 눈을 떴다.
“이, 이게 대체.”
린도 그 사실을 느꼈다.
격리구역에서 살아나는 생명의 기척을.
“어떤 아이템이 있어.”
그런 그녀의 궁금증에 답해주듯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쓰러진 세한의 가슴에 약을 바르고 있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상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붉은 피가 묻어 있는 세한의 가슴을 검지로 쓸었다.
“연기를 맡은 인간을 가사 상태로 만드는 물건이지. 몬스터에게도 통해서, 게임 초창기에는 이용하는 이들이 간혹 있었어. 물론 이런 트랩류 아이템은 아는 사람만 아는 물건이었지.”
이민아도 알고는 있었던 아이템이다.
하지만 직접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면 일정수준 이상의 플레이어나 몬스터에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서히 잊히고 사장된 아이템이었다.
세한도 그것을 떠올린 건 악마의 계약자, 신자운과 싸우게 되었던 때였다.
흑천회의 지하, 아이들이 죽었던 장소에서 발견된 구슬.
당시 아이들은 구슬에서 나온 연기로 숨이 멎어있었다.
가사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신기한 점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슬픔을 빨아먹어야 할 비탄의 가면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아이템으로 빠진 가사 상태는 사망 판정이 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한은 거기서 생각했다.
이걸 이용하면 플레이어가 죽어야만 하는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번의 실험을 걸친 결과 세한은 자신이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이 아이템으로 가사 상태에 빠지면 일시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게 된다.
시스템이 그렇게 인지하는 것이다.
퀘스트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도 시스템이니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강한 플레이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많은 민간인에게 사용하기엔 구슬의 위력이 심히 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세한은 구슬을 개량하고자 이민아의 도움을 받았다.
이민아는 뛰어난 마법사이며, 어떤 플레이어보다 대단한 연금술사.
어떤 플레이어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수많은 재료를 가지고 있던 세한은 민아에게 부탁하여 구슬을 개량한다. 연기가 더 많이 확산될 수 있도록 개량한 설치형 폭탄과, 구슬의 연기를 액체로 만들어 농도를 올린 가사의 물약을.
송시우에게 부탁하여 단검에 특수한 장치를 마련하여 물약을 손잡이 안에 넣었다.
찌르는 순간 플레이어의 내부로 물약이 들어갈 수 있도록.
약한 플레이어는 폭탄으로 충분히 가능했지만 아가트람의 길드원 같은 최상위 플레이어들은 단검을 이용해 직접 찌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템이라 이드라의 스킬로 변질할 수도 없고 자칫 먼저 사용해서 상대가 조심하게 되면 힘들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고된 작업이었다.
사실 보통이라면 불가능했을 방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민간인이나 플레이어들이 격리구역이라는 밀폐 공간 내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연기의 확산을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세한은 식수에도 이 약을 타두었다.
플레이어들의 이동경로나 대기 위치도 대부분 알고 있던 터라 대부분은 그걸로 정리할 수 있었다.
폭탄으로 처리하지 못한 소수의 플레이어들은 직접 처리했으며, 미처 쓰러트리지 못한 이들은 민아가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민간인과 플레이어를 가사 상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그랬다면 차라리 저희에게 말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았나요?”
“그럴 수도 있긴 했지. 그럼 퀘스트는 딱 해결되고 끝났을 거야. 하지만.”
이민아는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가 바란 건, 그냥 퀘스트를 끝내는 게 아니었나 봐.”
수없이 많은 옵저버들이 하늘에 있었다.
처음 이 게임이 오픈했을 때 몰려들었던 광경처럼 많은 옵저버들이 하늘에 있었다.
신들은 지금 보고 있었다.
하나의 퀘스트가 끝났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방식이 놀라웠던 것이다.
거기다 린과 세한의 싸움도 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기엔 충분했다.
영웅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신을 매료시키는 단어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제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네요.”
린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세한이 루크의 죽음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린다고 느꼈다.
희생 없이는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마지막까지 갈 수 있겠지.
그러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독이 그를 기다리리라,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번 일이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서 그에게 트라우마가 된다면, 그가 방식을 바꾸지 않을까 생각했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며 게임을 공략하게 되길 그렇게 바랐다.
그러나 달랐다.
그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린은 정신을 잃은 세한은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처럼, 다른 플레이어들도 기쁨의 환호를 질렸다.
퀘스트가 클리어 됐다는 것에, 그리고 신들이 다시 자신을 찾았다는 것에.
그런 그들을 이민아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아, 뭔가 감상적이게 되는 것 같아. 그렇지?”
이민아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한 옵저버를 보았다.
1년 만에 만나는 자신의 신.
“어릿광대, 아니…….”
어쩌면 자신도 너무 먼 곳에서 사태를 관망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번 세한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다시 게임에 참여하고 싶어졌다.
“로키.”
그녀의 신과 함께.
***
“마치 하나의 희극과 같구나.”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이드라는 옵저버와 플레이어들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죽지 않았고, 신들이 돌아왔다.
망해가던 게임은 살아날 것이며 전과는 다른 엔딩이 그들을 기다리게 되겠지.
커뮤니티에서 한창 역주행중인 게임 순위를 확인한 이드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결과를 만들었지만 결국 한낱 꿈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리 필사적으로 했어야 했더냐?”
이걸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었으니 분명 몽상의 던전은 만족했을 것이다.
세한이 눈을 떴을 때는 분명 몽상의 던전 밖에 있겠지.
던전의 보상인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도 분명 얻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이겠지.
그는 이런 대단한 결과를 만들고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 거다.
이런 대단한 업적.
감히 누가 할 수 있을까.
한번 신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게임을 되살렸다.
수많은 이가 죽었어야 할 퀘스트를 누구도 죽이지 않고 클리어했다.
어느 쪽이나 굉장했다.
허나 그런 굉장함은 해변의 모래성처럼 부스러져 파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시스템마저 조롱한 그의 업적이.
“과연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라는 건가. 대단하구나, 나의 아바타는 말이야.”
강신 스킬을 사용한 탓에 이드라는 세한의 기억을 읽었다.
그가 어째서 미래를 아는지, 그럼에도 몽상의 던전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인지.
“……싱글 플레이어라.”
그것도 2회차.
재미난 말이다.
이번 일로 세한이 자신을 다시 보게 된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계약을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래선 ‘문’을 열 수 없으니까.
열쇠는 린 테일러겠지.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세한은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플레이어답게 세한은 많은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하나 세한이 모르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자여. 열쇠는 두 개가 필요하다.”
준비된 열쇠는 하나.
하지만 필요한 건 두 개다.
어차피 그라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
모든 걸 아는 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드라는 싱긋 웃으며 눈을 감고 있는 세한을 바라보았다.
영웅이 된 세한은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여 안전한 장소로 이동되고 있었다.
“몽상의 던전은, 나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야.”
한낱 기억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렇게 완벽히 복사하다니.
환상에 불과하니 보통이라면 상관없을 테지.
그러나 이드라는 꿈과 환상을 다루는 신이었다.
몽상(夢想). 그건 이드라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다 세한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이란, 불합리한 법이라고.”
이 모든 일을 기억하는 건 결국 세한 한 명이 될 것이다.
원하는 보상을 그가 얻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가 만족한다 해도.
이드라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런 훌륭한 결과를 만든 계약자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또한 이번 퀘스트에 열심히 노력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이런 멋진 기억을 잊고 싶지 않은 건 이드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딱.
이드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이 한 인간의 몽상을 장식하는 마지막 소리였다.
***
“끙…….”
세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눈을 가늘게 뜨자 겨우겨우 내부가 보였다.
“아, 그렇군. 돌아온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되니 씁쓸했다.
능력치가 낮아진 것도 확연히 느껴졌다.
아마 지금 이곳은 던전의 안.
몽상이 사라진 던전이란 결국 이런 거겠지.
“사실 본다면 그 이후를 보고 싶었는데.”
분명 신들은 게임에 다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와 그리고 린 테일러를 통해서.
이후에는 전과는 다른 전개가 흘러가게 됐겠지.
아카터스에 대한 대비도 수월하게 이루어질 테고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이젠 아무래도 좋나.”
세한은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작은 모래시계였다.
황금으로 빛나는 모래가 들어있는 시계.
화려한 장식으로 양각된 이것이 S랭크 아이템인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다.
단 한 번. 한 인간의 미래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는 물건.
당연히 사용한 당사자의 시간밖에 불러오지 못한다.
간단히 설명해서 시계를 사용한 사람이 나라면 나의 미래밖에 가져오지 못한다.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이것이 현재 내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백설이나 지수는 아마 돌아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문을 여는 순간, 귓가에 이상한 알림이 들렸다.
[업적. ‘대리자(였던 것)’을 달성하셨습니다.]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누군가의 개입으로 대단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대리자였던 것은 또 뭔데?
그거 그냥 몽상의 던전에 있었던 환상에 불과한 거 아니야?
‘그리고 대단한 보상?’
이어진 문장을 보면 스킬을 습득한 것 같다.
보통 스킬명이 표시가 되어야 정상인데 뭔가 이상했다.
어째 뭔가 얼렁뚱땅 일이 진행된 것 같은…….
“세한 오빠, 문을 열고 뭐하세요?”
“어?”
“왜 나오다가 마는지 궁금해서요.”
문을 열자 보이는 장소는 몽상의 던전의 입구였다.
당연히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던 지수와 백설이는 그곳에 서 있었다.
“한참 기다리지 않았어?”
적어도 내가 던전에서 체감한 시간은 꽤 길었다.
지수는 내 질문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백설이를 바라보았다.
백설이 역시 지수의 시선에 흠칫 놀랐지만 차분하게 답했다.
“정확히 일곱 시간 22분이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엄청 짧네.”
현실과 몽상의 던전의 시간은 다르다더니 진짜인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일곱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하니 조금 미안했다.
“그럼 돌아가서 쉬자.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아니에요.”
무슨 스킬을 익혔는지 궁금했지만 그건 돌아가서 차분히 봐도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은 던전 내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감정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세계는 확실히 새로운 미래로 이끌었지만 그곳에는 지수가 없었다.
게임이 시작할 때 죽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도 충분히 바꿀 수 있어.’
나는 그걸 몽상의 던전에서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발은 씁쓸한 마음과는 달리 제법 가벼웠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미처 알지 못했다.
느릿하게 뒤에서 따라오는 지수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로 작은 모래시계를.
***
“흐음.”
몽상의 던전을 나가는 세 명의 일행을 한 여성이 지켜보고 있었다.
금발에 금안.
검고 붉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
그녀는 앞서 가는 세 명.
그중에서도 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상의 던전에서의 일 때문에 씁쓸함이 엿보였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이 썩 대견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마치 깜짝 상자를 선물한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즐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