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078. 역주행의 마법(1)
“……왜 온 거지?”
“그냥 내가 만들어 준 것들로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거든.”
이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연기로 뒤덮인 도시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아직 수습되지 않은 민간인의 시체들.
그리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
지옥과 같은 광경 속에서도 이민아는 그저 웃었다.
“보니까 이제 알겠네. 근데 이렇게 해서 가능한 거야?”
“게임이니까.”
“게임이니까, 라.”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덮치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다.
이민아의 손에서 연결된 투명한 은사가 그들의 몸을 묶어 거미줄처럼 공중에 매달았다.
단검을 주로 사용하는 이민아지만 그녀는 나처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는 플레이어였다.
다양한 스킬을 사용하는 만큼 그녀의 전투법은 무척 다채로웠다.
“나도 본래 이 퀘스트를 참여해야 했을 플레이어니까 도와줄게. 여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어?”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응,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신경 쓰는 건.”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좌우로 손을 펼쳤다.
“이 퀘스트의 결말이지.”
그녀의 넓은 소매 속에서 단검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개의 단검이 달려들던 플레이어의 어깨나 복부에 사정없이 박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야.”
“걱정 마. 당신이 사용하는 단검이랑 똑같으니까. 그보다 당신은…….”
이민아는 손가락을 들어 조금 먼 장소를 가리켰다.
“저쪽을 해결하는 게 먼저잖아?”
“…….”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 있는 건 바로 아가트람의 길드장인 천상환.
하얀 광체가 번쩍이는 걸 보면 상당히 열이 받은 모양이다.
“되도록 이쪽으로 오지 않게 해줘. 올 것 같으면 난 도망친다?”
“그래.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과 민간인은…….”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저기에 있는 것과 싸우러 가라.
이민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세한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다.
이쪽을 민아가 맡아준다면 더 이상 거리낄 건 없었다.
“그럼 부탁하지.”
그녀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남은 플레이어들은 상당한 강자들이었지만 이민아 정도는 아니다.
거기다 작정하고 기습을 가하는 이민아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었다.
더불어 이번 일을 대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단검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대략 짐작했으니까.
아가트람 길드 간부 중에 남은 건 이제 단둘.
천상환만 쓰러트린다면 린 테일러 하나뿐이다.
‘이제 이 퀘스트의 끝이 보이는군.’
몽상의 던전이 만들어낸 이 퀘스트의 끝이.
세한은 느릿하게 무릎을 굽힌 후 크게 뛰어올랐다.
이쪽으로 친히 오고 있는 아가트람의 길드장을 향해서.
***
아가트람의 길드장 천상환.
그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상주의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며 모두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인간.
나쁜 건 아니다.
그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반드시 한쪽이 무너져야 끝나는 퀘스트에서 그는 그저 유유부단한 지휘관일 뿐이다.
어떤 대책도 내놓은 것 없이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가 이런 결과가 나와 버렸다.
‘내가 먼저 나섰더라면.’
그는 머리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책임을 통감했다.
너무 여유를 부렸다.
언제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10만의 민간인뿐 아니라 플레이어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길드원들의 말을 애써 외면하며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도달한 결과가 이거다.
설마 이런 식으로 무차별 테러를 가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만약 다른 플레이어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막았으리라.
그에겐 이 격리구역 전체를 통찰하는 눈이 있었으니 수상한 자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제거할 수 있었다.
근데 눈치채지 못했다.
왜 알지 못했나.
답은 간단하다. 상대인 김세한이 그의 눈을 완벽히 피해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천상환의 신은 신들의 왕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신의 아바타인 천상환은 어떤 플레이어보다 강했다.
그런 자신의 눈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신이 있나?
설령 동급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을 거다.
그가 숨긴 건 본인만이 아니다.
도시 전역에 설치된 폭탄이나 다양한 함정들도 모두 숨겼다.
대체 어떤 전승 스킬을 가졌기에 그런 것이 가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김세하아아안!!”
천상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옷의 남자를 보며 울부짖었다.
반드시 저자만큼은 죽이고 말리라.
“으아아아아!!”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빈손이었던 그에게 시뻘겋게 불타는 검이 손에 쥐어졌다.
그건 단순한 아이템이나 장비가 아니었다.
검 자체가 전승 스킬.
바로 클리브 솔리스(Claimhb Solais).
스킬의 효과는, 모든 개념을 불태울 수 있는 초고열의 열선을 발산하는 것.
저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 ‘신의 무구’의 형태를 빌려온 매개체일 뿐이다.
붉은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가로로 크게 휘둘러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흥분해서 주변이 보이지도 않는 건가?”
그 광경에 세한은 혀를 내둘렀다.
열선이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사정없이 불타 사라졌다.
언제봐도 가공할 위력이다.
‘정확한 스킬의 효과는 여전히 모르겠다만.’
저건 강준식에게 했던 것처럼 단순히 공기를 차단하거나 마력을 차단하는 것으로 막을 수 없다.
차단하는 순간 열선에 찢겨질 테니까.
저건 단순한 불이 아니다.
신의 불로서 ‘태운다.’라는 개념을 지닌 하나의 권능이다.
불태울 수 없는 것까지 태우는 신의 힘.
바로, 켈트 신화의 왕. 누아다 아케트라브의 전승 스킬이다.
수많은 전승 스킬 중에서도 공격력만 따지면 최강급 스킬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세한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너의 실수는 너무 자신의 힘을 믿었다는 거다.”
“아니, 내 실수는 너무 자비로웠다는 거다. 처음부터 나섰어야만 했어.”
열선을 피한 세한을 향해 천상환이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민수호에 비해선 부족했지만 어마어마한 속도인 건 분명했다.
‘우선 이곳에선 최대한 떨어지는 게 좋겠지.’
격리구역에 남은 플레이어나 민간인들은 이민아가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자신은 최대한 천상환을 유도시켜 격리구역을 최대한 벗어나는 게 좋았다.
싸우기도 그 편이 쉽고.
두 개의 격리구역 사이에는 황폐화된 평야가 있었다.
거기라면 천상환이 날뛰더라도 큰 상관이 없으리라.
“나를 유인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처럼 특별한 약점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어떤 함정을 준비했다고 해도 소용없다.”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천상환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한은 그런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아닌데?”
“뭐?”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너는 딱히 준비한 거 없다.”
격리구역을 한참 벗어난 평야에 내려선 세한은 열선이 지나가 타버린 외투를 벗어서 던졌다.
은신 스킬에 보정을 해주는 외투였지만 이젠 필요 없었다.
“하, 헛소리를. 그럼 네가 나를 혼자서 이길 수 있다는 거냐? 비열한 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네놈이?”
“어.”
“……미친 놈.”
천상환의 예상보다 세한이 강한 건 사실이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모든 능력치가 천상환이 월등히 높았다.
분명 그도 꽤 강한 신의 아바타인 것 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로서의 재능.
지금 당장 천상환의 공격에 전혀 대응을 못하는 것만 봐도 격차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세한은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전력을 기울여야 가능했다.
“어디 보자…….”
세한은 힐끗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옵저버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천상환을 지켜보는 신의 옵저버.
다른 하나는 바로 세한의 신 이드라의 옵저버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미 쪽지를 통해 이드라의 답변은 들은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것뿐.
“확실히 나는 너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긴 하지.”
세한은 말했다.
“지닌 바 재능도, 전승 스킬도 너처럼 화려한 건 없어. 죄다 수수할 뿐이야.”
이드라의 옵저버가 부르르 떨렸지만 어쩔 수 없다.
녀석이 지닌 전승 스킬 중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으니까.
“근데 딱 하나, 내가 너보다 나은 게 있어.”
“비열함? 아니 허세인가?”
“물론 그런 것도 있지.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거든”
세한은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새빨간 노을로 물든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그건 직접 경험해 보는 게 빠를 거다.”
전생의 자신은 차마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천상환과 정면으로 싸운다는 건 나에게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투기술은 전생의 이때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그것만으로 천상환을 이길 수는 없다.
딱 하나의 방법을 제외한다면.
“이드라.”
전생의 세한은 결코 하지 않으려고 했던 방법.
그러니 지금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왜냐면 환상이니까.
거기에 전생의 자신은 너무 많은 걸 두려워했다.
그리고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김세한! 너 지금 무슨 짓을……!”
새빨갛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밤이 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그림자였다.
신의 그림자.
별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마녀의 손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별 따위는 한손으로 쥐고 뭉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별을 둘러싼 반짝이는 금발이 보였다.
하늘을 가리는 검은 옷자락이 세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신의 존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게 대체…….”
천상환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을 연신 더듬었다.
놀란 건 그만이 아니었다. 지구에 살아남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구를 감싼 거대한 신의 모습을.
세한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지 놀란 이유가 다른 이들과 좀 달랐지만.
‘화려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이렇게까지 하나?’
아까 스킬이 수수한 것밖에 없다고 한 게 원인인 걸까?
조금 과하게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무리 망해가는 게임이라지만 신격을 이렇게 드러낸다면 상당한 클레임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아무리 외우주의 신인 이드라라고 해도 전부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하기야 뒷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지.’
이 세계가 계속될 일은 없다.
그러니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막 나가는 거다.
몽상의 던전에 의해 구축된 환상.
그것을 아는 이만이 가능한 행위였다.
「플레이어 김세한, 이 꿈의 마녀 이드라가 청하마.」
언젠가 아스트리아가 루크에게 했던 것처럼, 이드라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경악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나의 대리자가 되겠느냐?」
세상 모든 인간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가 세계를 울렸다.
그 말에 모든 플레이어가, 남아 있는 신들이 모두 경악했다.
신의 대리자란, 그만큼 희소한 존재였으니까.
“그 말에 응하도록 하지.”
전생에 한 번 거절했던 말.
뒷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세한도 마찬가지다.
다른 외우주의 신이 이 별을 관측할까 봐?
신의 대리자가 되어 생기는 문제?
아무래도 좋다.
[아우터 갓. 꿈의 마녀 이드라의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세한의 귀에 알림이 들렸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이제 막 이드라의 대리자가 되었을 뿐이다.
진짜는 대리자가 되었을 때 얻는 스킬이었다.
[강신(降神)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
강신(降神)(SS)
신의 힘을 일시적으로 몸에 담아 사용할 수 있다.
==
설명은 딱 한 줄.
다른 스킬과 다르게 정확한 수치의 설명도 없었다.
이 스킬의 위험성을 아는 세한으로선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함부로 사용하면 뒤진다고 적어는 놨어야지.’
설명처럼 간단히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함부로 사용했다간 신의 힘에 잡아먹혀 파멸한다.
아주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거나, 혹은 모든 걸 견뎌낼 수 있는 재능과 육체를 지니지 않는 한.
참고로 세한은 전자였다.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라는 건, 겉치레가 아니다.
세한은 심호흡을 한 뒤, 강신 스킬을 사용했다.
쿠웅!
“큭!”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전신에 충격이 달렸다.
강제적으로 신과 연결되며 의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을 모아 자신을 잡고 흐려지는 의식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신의 존재가 세한을 집어삼켰지만, 그럼에도 세한은 웃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하네.”
차라리, 이 세계에 홀로남아 구멍이 뚫린 하늘을 보던 때가 더 끔찍했다.
쿵!
세한은 발을 내딛었다.
지면이 움푹 파이며 대지가 부서졌다.
세한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천상환을 향해 달렸다.
“아무리 네놈이 대리자라고 해도……!”
천상환은 반사적으로 클리브 솔리스를 사용했지만 모든 걸 태우는 열선은, 세한의 앞에 나타난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이 세계가 아닌 꿈의 저편으로.
“헉!”
“내가 아까 말했지?”
세한의 손에는 언제 쥐어졌는지 작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겪어보면 안다고.”
천상환에겐 최상급의 방어구와 수많은 방어 스킬.
그리고 강력한 전승 스킬이 있었지만.
어떤 것도 세한의 단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