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077. 아가트람(3)
‘내가 그때 녀석을 보내줘선 안 됐다.’
민수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세한에게 큰 악감정이 없었다.
왜냐면 그도 인류를 위해서 싸우는 한 명의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때 보내지 말고 끝을 냈어야 했다.
지금도 도시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연기에 죽어가고 있었다.
천상환이 그것을 수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미 무의미했다.
이미 도시 전체에 연기는 퍼져나갔고, 플레이어들이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심지어 일부 플레이어들도 쓰러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해독 스킬도 먹히지 않고 죽어버리는 연기를 사용한 김세한에 대한 분노가 가슴을 지배했다.
‘이수린까지.’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이수린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강력한 마법사인 그녀가 교전을 벌였다면 분명 큰 소란이 일어났을 텐데 그런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이수린도 폭탄에 당했거나, 세한의 암습에 쓰러졌다는 것.
거기까지 생각하자 민수호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여기서 저놈을 죽인다. 저 새끼를 내버려둬서는 안 돼!”
“동감한다.”
강준식과 민수호의 눈이 마주쳤다.
의견이 자주 갈리던 그지만 이번만큼은 완벽히 일치했다.
민수호의 신은 바로 여신 마하.
빠른 발을 가졌다는 전승처럼 민수호가 받은 스킬도 속도에 관한 스킬이었다.
그거에 대단한 효과가 붙은 건 아니다.
단순히 빠르게 달릴 수 있을 뿐이다.
단지,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뿐.
핑──
바람이 갈라지며 민수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화살처럼 날아간 민수호는 인벤토리에서 긴 창을 뽑았다.
정확히는 일반적인 창이 아니다.
기병용 창인 랜스다.
랜스를 앞세운 민수호는 건물 위를 건너뛰며 도망가는 세한의 등을 겨냥했다.
일점돌파.
민수호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며 주변의 풍경이 좁혀졌다.
음속을 넘어 초음속으로.
주변을 에워싸던 연기가 뒤로 밀려나며 민수호의 신형이 날았다.
콰과과과광!!
음속을 넘는 순간 일어나는 충격파가 일어나며 주변 건물의 유리창을 깨부쉈다.
유리창뿐이 아니라 건물조차 크게 흔들리며 일부는 부서져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역시 빠르군.”
정면에서 부딪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우선 바람을 막고, 허공에 환상을 만들었다.
그림자 질주가 있으면 편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전생의 세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도 전승 스킬이 존재했다.
허수의 공간을 다루거나, 환상을 조작하는 등, 어떠한 현상을 조작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꿈의 마녀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스킬들이라 할 수 있다.
“칫!”
순식간에 분열하며 흩어지는 세한의 모습에 민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건물 위에 나타난 수십 명의 세한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민수호는 순식간에 두 명의 세한을 꿰뚫었지만 모두 가짜였다.
“잔재주 따위를 부리다니!”
하나하나 일일이 공격해야 되는 민수호와 달리 강준식은 광역 섬멸에 특화된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신은 불의 신 아그니.
당연히 강준식이 지닌 전승 스킬은 무척이나 심플했다.
전 방위를 화염으로 뒤덮는 섬멸 스킬.
“뒤져, 새끼야!!”
그의 스킬은 주변에 끼치는 피해가 막대하다.
하지만 건물 위라면 거리낄 것 없이 사용할 수 없었다.
초열의 태양이 그의 손위로 떠오르는 순간, 그 바로 옆에서 새까만 공간이 열렸다.
“뭐?!”
“그런 걸 가만히 사용하게 둘 리가 없잖냐.”
세한은 순간적으로 강준식이 만들어낸 붉은 구체 투명한 막으로 감쌌다.
세한이 사용한 건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단순한 구형의 쉴드를 만드는 기초적인 마법일 뿐이다.
거기에 세한은 작은 요소를 가미했다.
마녀 이드라의 스킬은 마법의 변질도 가능했다.
물론 대단한 행위를 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조작’은 가능했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쉴드에 마법 저항 효과를 부여한 것처럼.
세한은 그걸 자신이 아닌 허공에 나타난 작은 태양을 가뒀다.
스킬로 발동한 불길은 인공적으로 생성된 것이지만 불이다.
불은 공기가 없으면 타오를 수 없다.
그건 스킬로 만들어진 불도 마찬가지다.
단지 다른 점은 마력을 지속적으로 연소시켜 공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마법 저항 효과를 지닌 쉴드로 감싼다면 외부의 마력을 차단하는 게 가능했다.
공기의 완벽한 차단.
거기에 지속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연결은 끊어버리면 불덩이는 스스로를 태울 수밖에 없다.
“이런 미친.”
쉴드에 가둬진 태양은 한 번의 반짝임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설마 이런 식으로 스킬을 원천 차단할 줄은 몰랐던 강준식은 식은땀을 흘렸다.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싶어도 자신의 태양을 만드는 것보다 쉴드를 발동시키는 속도가 빠르다.
소모되는 마력도 적었다.
‘좋아, 이대로…….’
세한은 그런 식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으며 두 명을 유도했다.
이전이라면 무리였겠지만 대규모 참사와 이수린의 죽음으로 눈이 뒤집힌 두 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승 스킬만 어떻게든 차단한다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쥐새끼 같은 놈.”
“피하기만 하는 것도 이제 끝이다.”
세한은 적당히 넓은 공터에 내려섰다.
이정도 넓이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천상환은…… 저쪽인가.’
민수호와 강준식을 믿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상황을 수습하기 바쁜 건지는 모른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세한은 자신의 좌우를 포위한 두 명을 번갈아가며 보며 말했다.
“많이 지쳐 보이는데?”
“후우, 후우. 개소리하지 마라. 네가 쓸데없이 쫄래쫄래 돌아다닌 탓에 아주 조금 피곤해졌을 뿐이다.”
한방한방의 화력이 강한 강준식은 딱 보기에도 지쳐 보였다.
그나마 민수호는 한결 나았지만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역시 상당히 체력을 소모한 거겠지.
반면 세한은 아직 괜찮았다.
애초에 최소한의 방법으로 피했던 거고 공격이라고 할 만한 건 거의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반격으로 효율적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그러냐. 어차피 이젠 피하지 않을 거다.”
“하! 그럼 얌전히 맞아서 죽겠다는 거냐?”
“설마.”
세한은 씩 웃으며 천천히 바닥에 손을 댔다.
“이제 피할 필요가 없을 뿐이야.”
“……뭔 개소리야?”
강준식은 세한의 말을 그저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민수호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수린의 사망으로 순간 이성을 잃었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침착한 성격이었다.
‘김세한은 자신이 확실한 상황이 아니라면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였다.
유리한 상황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자신이 확실히 이길 때에만 싸운다.
그것이 플레이어 김세한의 전투방식이었다.
세간에는 그런 그를 졸렬하다거나 비겁하다고 비웃는 자도 많았지만 세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달라진 건 지난 번 민수호와의 만남 이후다.
갑자기 모습을 감추더니 이렇게 혼자 상대 진영에 쳐들어왔다.
이전의 그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지금도 그렇다.
아가트람의 간부 둘을 상대로 태연히 서있는 것도 평소의 김세한이라면 결코 할 짓이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 느낌은 세한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는 순간 확실해졌다.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지만 그보다 세한이 빨랐다.
“이미 늦었어.”
쿵!
텅 빈 공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환상으로 조작된 장소였다.
공터는 맞았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았다.
최상급 마석이 32개가 공터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공터 전체에 강력한 중력 마법을 발생시켜 둘의 몸을 짓눌렀다.
당연히 내가 있는 장소는 예외다.
“너 이 새끼……! 마법은 못 쓰는 게 아니었나?!”
“내가 사용하는 건 아니지. 단순히 마법도구를 작동시켰을 뿐이야. 너희를 잡으려고 일찌감치 만들어 둔 거거든.”
“시발, 고작 이런 걸로 우리를 잡아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세한은 싱긋 웃으며 손을 댄 바닥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바닥이 순식간에 물렁해지며 둘의 몸이 점차 가라앉았다.
“늪이다.”
세한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중력에 눌린 채로 늪에 빠지게 되면 빠르게 달릴 수도, 불을 사용할 수도 없겠지.”
거기다 그뿐이 아니었다.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몸에 점차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몸을 마비시키는 독까지 늪에 풀어둔 것이다.
“비, 비열한 새끼.”
“비열하긴, 2대 1로 싸우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중력에 짓눌려, 늪에 점차 가라앉아가는 둘을 세한은 바라보았다.
늪에 빠진 몸은 빠르게 달릴 수도 없었고, 불길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강준식과 민수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무심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한을 보았다.
완벽한 자신들의 패배다.
몸을 마비시키는 독 때문인지, 아니면 늪에 빠진 탓에 호흡이 곤란해진 건지 둘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이제 둘에겐 어떤 방도도 없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둘이 중력 마법을 해제할 수 있을 턱도 없었고, 이곳에서 빠져나올 기술을 가졌을 리도 만무했다.
‘이래서 이수린을 가장 먼저 죽였구나.’
그녀라면 중력 마법을 해제할 수 있었으며 순간이동 스킬을 사용해 둘을 건져 올릴 수 있었을 테니까.
거기다 이수린의 죽음에 강준식과 민수호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애초에 놈의 손에 놀아났을 뿐이었나.’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건, 짧은 단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내드는 세한의 모습이었다.
***
가장 거슬리는 아가트람의 간부들을 처리한 세한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도시를 들쑤시며 플레이어들과 남은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민간인들은 연기만으로 충분했지만 플레이어들은 일일이 단검으로 찔러줘야만 했다.
“저기다!”
“쫓아!”
우르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쓰러트렸음에도 아직도 플레이어들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다 진짜 문제는 자신을 발견한 존재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거다.
‘천상환.’
전생에는 그와 죽어도 정면싸움을 피했다.
세한이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건 그가 계속된 싸움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암습을 가한 후, 집요하게 상처를 노려 그를 쓰러트렸다.
다른 아가트람의 멤버와는 달리 그에게는 뚜렷한 약점이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리며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조금 힘들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할 수는 있었다. 정 위험하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카앙!
반사적으로 단검을 휘둘러 뒤에서 다가온 사람을 향해 휘둘렀다.
‘막아?’
허리춤을 노리고 휘둘렀건만, 상대는 능숙하게 그것을 막았다.
남은 플레이어 중에 이정도의 실력자가 있었나?
겉모습만 보자면 평범한 인상의 플레이어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도 없는 걸보면 특별한 플레이어는 아니리라.
그러니 세한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몽상의 던전이 만든 히든 캐릭터나 시스템이 관여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었지만 세한은 여러 가지 수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그러나 이어진 플레이어의 말에 세한은 벙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번에 내가 했던 공격의 복수야?”
“……뭐?”
“나야 나.”
플레이어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한 여성으로 변했다.
검은 단발을 지닌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심심해서 도와주러 왔어. 놀랐지?”
어릿광대의 아바타이자, 탑 플레이어 중 하나.
천변(千變)이라 불리는 플레이어, 이민아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