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074. 양자택일(2)
“어떡합니까?”
한 플레이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몰래 기습을 가하려던 것이 그만 들키고 말았다.
거기서 바로 몸을 뺐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상대의 저항이 약했다.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을 쫓으며 흥을 내버린 탓에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다.
“저게 김태훈…….”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
흔히 아바타를 부를 때 세간의 사람들은 그리 말한다.
그건 거짓이 아니다. 아바타란 신의 축복을 받았고 그것을 받지 못한 플레이어는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괜히 NPC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김태훈은 그런 아바타 중에서도 특별했다.
신과의 상성이 잘 맞았기에 강력한 전승스킬을 받았고, 그건 평범한 플레이어는 감히 상대할 수도 없는 무적에 가까운 스킬이었다.
아가트람의 간부들이 특히 그런 면이 강했지만, 김태훈은 개중에도 특별했다.
“딱 10분의 유예를 주지. 그 안에 결정해라. 나는 벌써 두 번의 경고를 줬고, 이번이 마지막이다.”
김태훈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의 뒤에 서있는 상대 세력의 플레이어들이 비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 같은 자식들.’
어쩐지 순순히 물러서더라니.
처음 자신들과 마주쳤을 때부터 바로 아가트람의 간부에게 보고한 것이 분명했다.
멍청한 건 자신들이긴 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대장! 저 망할 놈들의 면상을 보고 이대로 물러서실 겁니까?!”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김태훈이랑 싸우려고?”
“그럼 넌 자존심도 없냐? 저 비웃는 놈들을 보고도 그냥 꽁지 빠지게 도망칠 생각이냐!”
플레이어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덕분에 기습 별동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최명석은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김태훈의 모습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최명석은 그걸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혹시 지금 뭔가 싸울 수 없는 이유가 있나?’
김태훈은 강력한 플레이어였지만 위명과 달리 자주 볼 기회가 없었다.
먼저 싸움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명석은 김태훈에게 뭔가 단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강한 플레이어가 자신들에게 세 번의 경고를 준 것도 이상했다.
‘한번 개겨봐?’
도박이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도박에 승리한다면 퀘스트 기여도가 왕창 상승할 게 분명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잠적을 타버린 자신의 신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
신에게 연락이 끊긴 아바타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크게 다른 점도 없었다.
그렇기에 최명석은 공에 목말라 있는 상태였다.
별동대를 꾸려 기습을 하자고 주장했던 것도 다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제네시스의 길드장인 박성혁도 이대로 있다간 불리한 건 자신들이었기에 최명석의 말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설마 제대로 된 공을 세우기도 전에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가트람 정도 되는 길드의 간부가 초장부터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서 네놈의 목을 가져가주지!”
호기롭게 외치는 명석의 말에 플레이어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게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김태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주변의 플레이어들을 뒤로 물렀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한다.”
“괘, 괜찮겠습니까?”
“지금 말대답하는 거냐?”
“아닙니다!”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김태훈의 모습에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김태훈은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냐면 그는 지금 심기가 몹시 불편했으니까.
‘멍청한 놈들.’
물러가라고 했을 때 물러났으면 얼마나 좋아.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놈들이다.
자신이 편하게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저 멍청한 새끼!”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덤비다니. 최명석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손짓하며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멍청한 판단을 하기는 했지만 최명석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플레이어다.
거기에 아바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김태훈에게 아주 약간 꿇릴 뿐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보통 소문이란 과장되는 법이니까.
“죽어라아아아아!!”
최명석의 검에서 기다란 마력줄기가 솟아났다.
검사가 지닐 수 있는 최상위 스킬 중 하나인 오러소드다.
오러소드의 위력은 오리하르콘에도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
평범한 플레이어 따위는 일격에 반으로 갈라서 죽일 수 있는 강력한 스킬이었다.
‘멍청한 놈. 막을 생각도 없나? 아니 내가 너무 빨랐던 건지도 모르지!’
순식간에 접근한 최명석은 오러소드를 휘둘러 녀석의 어깻죽지를 향해 내리찍었다.
최명석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러소드가 김태훈의 어깨에 격돌하는 순간 그대로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카앙!
“카앙?”
마력으로 된 오러소드가 튕겨지다니.
강력한 반탄력에 최명석의 손이 저릿해졌다.
“제대로 명중했는데…….”
분명 어깻죽지에 정확히 명중했다.
근데 조금의 생체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러소드를 맨몸으로 맞고 멀쩡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존재하나?
존재한다.
왜냐면 지금 최명석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당황하는 최명석을 김태훈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발두르라고 아나?”
“바, 발두르?”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는 신이다.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인 오딘의 둘째 아들이자 빛의 신.
두말할 것도 없는 최상위 신이다.
‘설마 김태훈의 신이…….’
어떤 스킬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떤 신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바타가 계약한 신의 이름은 약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자신을 선택한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지금 김태훈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의미는 간단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그는 만물에게 사랑받는 신이었다. 세상에 어떤 물건도 그를 해할 수 없었지.”
천천히 김태훈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이는 손의 궤적을 최명석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주먹을 쥐고 최명석의 가슴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정말로 가볍게.
“나도 마찬가지다.”
콰아앙!!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리며 최명석의 몸이 달려오던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날아갔다.
수십 미터를 날아간 최명석의 몸은 지면에 처박혀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구덩이에 처박힌 최명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신의 뼈가 부러져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본 플레이어들은 전율했다.
아가트람 길드의 간부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직접 목도한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강한 정도가 아니다.
압도적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조금 멍청하긴 하지만 최명석은 그래도 자신들의 대장이었다.
아무나 대장을 시켜주는 게 아니다. 최명석도 엄연히 상위 플레이어였다.
그런 그를 주먹 한 방에 죽이다니.
별동대의 사기를 꺾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도망쳐야 해.”
이대로라면 모두 죽을 게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분열되어 있던 별동대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누가 보내준다고 했지? 나는 이미 세 번 경고를 했다. 물러서지 않은 건 너희들이지. 여기서 봐주는 건 자비로운 게 아니야. 단순한 호구일 뿐이다.”
당연히 그걸 두고 볼 김태훈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세 번의 경고를 한 시점에서 그들을 보내줄 생각은 지웠다.
자신의 신인 발두르도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비로운 신이었지만, 김태훈의 말처럼 호구는 아니었다.
콰아앙!!
“으아아아악! 도망, 도망쳐!”
포탄처럼 날아오는 김태훈의 모습에 별동대가 비명을 지르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김태훈의 속도는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빨랐으니까.
‘한 번에 쓸어버려 주지.’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강력한 마력이 모이는 걸 느끼며 그것을 해방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검은 옷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김태훈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김세한?”
콰콰콰쾅!!
포탄처럼 날아가며 휘두른 김태훈의 검을 그는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당황하던 이들은 김태훈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은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방금 최명석처럼 한 방에 죽으리라 생각했다.
“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뿌연 연기 아래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태훈과 세한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과 달리 세한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김태훈을 상대하고 있었다.
“넌 정면에서 싸우는 타입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정답이다. 그런데 그러면 저 머저리들이 다 죽을 거 같아서 말이야.”
세한은 훌쩍 뒤로 물러서며 여유롭게 말했다.
덕분에 혼란스러워진 건 김태훈이었다.
순수한 파워로 압도하지 못한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태훈보다 강력한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아가트람에도 있었지만 순수한 물리적인 힘은 자신이 최고였다.
‘무언가가 내 힘을 상쇄했다.’
워낙 빠르게 물러선 탓에 제대로 못 봤지만 부딪치는 순간 자신의 힘이 흩어지는 걸 분명히 느꼈다. 다만 그게 김세한이 가진 스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기 힘들었다.
궁금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세한은 설핏 웃었다.
“야. 김태훈.”
“뭐냐?”
“RPG 게임의 고질병이 뭔지 알아?”
“RPG 게임?”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갑자기 이 상황에서 RPG 게임이 왜 나오나 싶어 바라보자 세한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게임을 하다보면 말이야. 굳이 아껴 쓸 아이템이 아닌데도 굳이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공략대로 전부 준비해 가고선 뭔가 아까워서 사용하지 않는단 말이야.”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포션이나 소모품들.
클리어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지는 아이템들 임에도 어쩐지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생의 자신도 그랬다.
귀한 아이템이고, 한번 사용하고 나면 사라지는 탓에 최대한 사용을 아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자신은 너무 신중했다.
멍청할 정도로.
“넌 나한테 죽어도 못 이겨.”
“개소리.”
한번 공격을 막았을 뿐이다. 태훈은 재차 자세를 잡았다.
정보대로라면 김세한의 능력치는 자신보다 낮았다. 거기에 전승스킬까지 사용한 자신은 김세한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을 터였다.
띠링.
‘어?’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신에게서 온 쪽지다. 쪽지는 태훈이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눈앞에 펼쳐졌다.
‘어서 도망쳐라.’
태훈은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신이 물러서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지? 혼란스러워진 태훈의 발이 얼어붙었다.
신의 말대로 뒤로 빠져야 된다는 생각과 세한이 자신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이 섞여 움직이지 못했다.
그 틈을 세한은 비집고 들어왔다.
거리를 단번에 좁혀 손을 휘둘렀다.
김태훈은 세한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피하지 못했다.
스킬이 발동된 동안 태훈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다.
덕분에 맞으면서 싸우는 거에 익숙해졌다.
그 익숙함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컥?!”
가슴이 쩍 갈라졌다.
세한의 손이 휘둘러진 곳이 갈라지며 피분수가 뿜어졌다.
스킬은 분명 발동되고 있을 텐데?
김태훈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입는 상처였다.
발두르로부터 마지막 전승 스킬을 얻은 순간부터 한 번도 상처를 입은 적 없는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설마.’
김태훈은 떨리는 눈으로 세한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휘둘러진 세한의 손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워낙 크기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것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마치, 겨울의 눈처럼.
“눈치채도 늦었어.”
푸욱!!
쩍 갈라져 있는 태훈의 가슴팍에 작은 단도가 박혔다.
상처를 입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피를 뿜고 있는 상처부위는 평범한 단검으로도 충분했다.
설마 자신의 가슴에 이런 평범한 단검이 박힐 날이 올 줄이야.
거기다 단검이 박히기 무섭게 김태훈의 의식이 뿌옇게 흐려졌다.
‘독?’
갈라진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독 따위는 김태훈에게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지닌 모든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세한의 말에 김태훈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을 일어서려 했던 그였지만, 그것도 잠시 5분이 지나자 움직임이 멎었다.
‘이제야 첫 단추를 꿴 건가.’
완벽히 호흡이 끊어진 걸 확인한 세한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일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