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67화 (67/332)

# 67

067. 운명을 보는 소녀(1)

“심심하다.”

새하얀 백발에, 머리색과 어울리는 하얀 고딕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나이는 대략 10대 중후반 정도일까.

미성숙한 소녀의 외형을 하고 있어 귀엽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녀의 정체를 안다면 누구도 그리 말할 수 없으리라.

“계속 침대에 누워 있으니 심심해.”

침대 또한 소녀의 취향이 반영된 듯, 놀랍도록 호화로운 침대였다.

새하얀 프릴과 레이스가 거미줄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은 기괴함에 가까웠지만 함께 있는 남성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대련을 부탁해도 되겠나?”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그럼 심심하다고 말하지 말든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남성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온 말을 삼켰다.

새하얀 소녀와는 달리 남자는 검은 캐쥬얼 정장과 그에 어울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는 하얀 가면이었다.

마치 절규하는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것 같은 기괴한 가면.

남자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아자젤. 그렇다면 차라리 마계로 돌아가는 게 어떤가? 계속 그렇게 놀고만 있으면 악마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별로. 누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해?”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내가 나태해질 수 있는 건 강하기 때문이야, 버러지.”

아름다운 소녀의 외형을 지녔지만 그녀의 본질은 악마다.

그것도 단순한 악마가 아닌 마계 서열 3위의 강자.

7대 악마중 하나인 나태의 악마.

아자젤.

그것이 그녀의 정체였다.

사실 아자젤은 마계 서열 2위까지는 노려봄직했다.

1위와도 크게 차이 나지 않은 무력을 지녔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단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귀찮으니까.

“그런 게으름으로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지 모르겠군.”

“강하기 때문에 게으른 거야. 난 태어났을 때부터 강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수련이나 단련 같은 시시콜콜하고 귀찮은 짓을 한 적 없어. 그게 강자의 특권이지.”

오로지 재능.

그것만으로 강해진 악마.

그녀가 ‘나태’의 악마인 것도 그런 연유다.

다만, 그런 아자젤도 한 소녀에게는 관심이 가고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금발의 소녀.

그녀라면 어쩌면 자신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녀석이 악마가 되려고 한다면 나태의 자리는 반납해야 되나?’

사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악마가 될 일도 없어 보였고.

“……그럼 너는 대체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나는 네가 싫어하는 단련이나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는 하등한 플레이어일 뿐인데.”

“어머나. 신자운.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내가 말했지? 내가 널 선택한 건 재밌어 보였기 때문이야. 너의 노력이, 너의 기술이. 나와는 완전 반대처럼 보였거든.”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채워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된 신자운은 아자젤에게 장난감 상자와 같았다.

무엇을 해도 신기하고 굳이 저렇게 아등바등 강해질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악마로서 계약을 맺고, 굳이 현계라는 불편한 수단을 사용하며 곁에서 지켜보기로.

‘옵저버 같은 건 성가시고 말이야.’

역시 뭐든 직접 보는 게 최고다.

애초에 옵저버는 신들 전용이라 악마들은 계약자의 눈과 귀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기에 나태한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었다.

‘약한 몸이라는 것도 재밌고.’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평균적인 플레이어들보다도 약간 약하다.

제약은 언제든지 풀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마계로 강제송환 당할 테니 아자젤은 이대로 있기로 했다.

“근데 넌 뭘 위해 강해지는 거야? 그때 그 까마귀에게 복수하려고?”

“아니. 그건 이미 내가 졌다. 만난다면 다시 적으로서 싸우겠지만 굳이 찾아가서 복수할 생각은 없어.”

이런 건 또 묘하게 고지식하다.

자운은 휘두르던 주먹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니, 그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흑천회를 재건할 생각도 없었다.

악마와 다시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굳이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과 엮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런 세상이 되었으니 계속해서 강해지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을 할 뿐이다.

“흐음, 그래. 목적이 없단 말이지.”

아자젤은 그런 신자운을 보며 나른하게 말했다.

최근 움직임에 망설임이 있다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그렇다면 계약자로서 조금 도움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몇 달간 신자운을 곁에서 지켜본 결과, 그가 싫어하는 일이 뭔지 아자젤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아자젤은 힐끗, 창밖을 보았다.

“아, 나 편의점 좀 가고 싶은데.”

“편의점? 뭐 사 올 물건이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없고. 잠깐 좀 나가자.”

드물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아자젤의 모습에 자운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아자젤이 저렇게 먼저 움직일 때면 보통 성가신 일을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

대량의 몬스터와 다툰 적도 있었고, 다섯 번째 퀘스트에서는 용병으로 뛰던 길드가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에게 습격당한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그때 습격한 악마의 계약자들은 마계에서 아자젤에게 줘터진 경험이 있는 악마라고 한다.

아자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하얀 양산을 펴고는 하품을 했다.

“하암, 날씨 좋네.”

“어디로 가면 되지?”

“저쪽.”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가리킨 곳은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왜냐면 긴 도로만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으니까.

‘꽤 멀리 가야 할 것 같군.’

자운은 바이크를 꺼내 시동을 건 뒤, 아자젤에게 눈짓했다.

아자젤은 양산을 쓴 채로 바이크의 뒷자석에 탔다.

“양산은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찮아.”

“공기의 저항이…….”

“괜찮다니까.”

막무가내인 그녀의 말에 자운은 한숨을 쉬며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양산이 뒤로 날아가 버려도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정말로 안 날아가네.’

상당히 밟은 것 같은데도 아자젤은 태연했다.

마치 공주님이 말을 타는 것처럼 우아하게 바이크에 앉은 아자젤은 자운이 바이크를 어떻게 몰건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런 걸보면 확실히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되었다.

“멈춰.”

긴 도로를 지나 건물들이 들어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자젤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좋겠어.”

“특별히 네가 좋아할 만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버러지 주제에 말이 많구나.”

자운은 그런 아자젤의 말에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 제멋대로인 악마는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

“그럼 이곳에서 뭘 할 생각이지?”

“명상.”

잠시 이곳에 잠자코 있고 싶다는 뜻이다.

짤막하게 대답하고 인형처럼 오도카니 서 있는 아자젤의 모습에 자운은 근처 건물의 벽에 기댔다.

‘공단인가.’

몬스터가 한번 휩쓸고 간 탓인지 공장들은 제 기능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공단의 모습을 보며 자운은 담배의 불을 붙였다.

운동을 하며 끊었던 담배지만 플레이어가 된 이후 다시 피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는 담배를 얼마든지 피어도 전혀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략 30분.

줄담배를 피우고 있던 자운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여자아이다.

대략 10대 초반의 소녀가 공장 건물 사이로 달리는 게 보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아이가 있지?’

근처에는 주택가도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미 흑천회에서 비슷한 일을 했던 자운으로선 저 여자아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기분이 더럽군.’

자신은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아이와 관련된 범죄만큼은 잠자코 있기 힘들었다.

이전에 비탄의 가면 때도 그랬다.

첩자가 있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납치하던 녀석들을 죽인 적도 있었다.

물론 의심받을까 봐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자운이 선택한 건 한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로 만드는 아이템을 사용해 아이들을 죽음으로 위장시켰다.

네비로스가 할 수 없도록 최대한 은밀하게.

그렇게 시체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었지만 그 아이들이 잘 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뭐해? 가봐.”

망설이는 자운을 향해 조용히 서있던 아자젤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 거렸다.

“저대로 둘 거야? 저 꼬맹이, 이대로 두면 죽을 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단 안에서 뜀박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엔 아이의 것이 아닌 성인 남성이 것이다.

욕설과 고함이 섞인 소리를 들은 자운의 얼굴이 굳었다.

“요즘 악마는 아이를 구하기도 하나?”

“그러지 말란 법이라도 있어?”

태연히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자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답변해 줄 리가 없지.’

어쨌든, 지금은 아자젤의 의도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녀의 말처럼 아이가 좋지 않은 꼴을 당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하아, 하아.”

소녀는 있는 힘껏 달렸다.

간신히 얻은 기회다. 이번에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분명 자신은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미래가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미래가 흐릿하게 변했다.

분명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는 미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달 전을 기점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미래가 변동됐으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본래라면 없어야 할 존재가 이번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거다.

자신의 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했다.

“저기다! 저 계집애 당장 잡아!”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가까워졌다.

소녀는 있는 힘껏 다리에 힘을 주고 공장 건물 사이의 골목을 돌아 몸을 꺾었다.

“꺅!”

그리고 무언가에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아픈 코를 매만지며 자신이 부딪친 게 뭔지 확인한 순간 소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난 죽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검은 눈. 얼굴에 착용한 가면은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디로 봐도 악마의 계약자였다.

지금 자신을 쫓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과는 겪이 다른 존재.

“사, 살려…….”

“오! 드디어 잡았구만!”

오들오들 떨며 소녀가 말하는 순간, 다른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색 옷을 입은 악마의 하수인들.

자운이 소녀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걸음걸이가 지극히 느긋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자운의 머리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왜 남색 옷을 입고 있지?’

보통 검은 옷을 입지 않았나?

악마와 계약된 계약자나 하수인이나 보통은 검은 옷을 입었다.

악마는 어두운 색감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얀 옷을 선호하는 아자젤 같은 경우도 희소하지만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검은색을 선호했다.

“잠깐, 누구야? 이거 악마의 계약자잖아?”

“새로 길드에 온 계약자 아니야?”

처음 자운을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사내들이었지만, 자운의 모습을 확인하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외견은 확실히 악마의 계약자였지만 같은 편이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도리어 이쪽 업계끼리도 살벌하게 다투다보니 적인 경우도 많았다.

“설마, 이 계집애를 납치할 생각인 거냐?! 그걸 가만히……!”

퍼걱!

버럭 소리를 지르던 남자의 머리가 터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사람의 잔해에 소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끄럽다.”

자운은 천천히 쓰러지는 악마의 하수인을 보며 담뱃갑에서 마지막 남은 돗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긴 말은 하지 않아.”

자운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빛을 빨아드리는 검은색 눈동자의 모습에 사내들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모두 죽어라.”

시끄럽던 공단이 조용해진 건 고작 5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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