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063. 영웅의 심장(2)
던전의 안은 상당히 깊었지만 이미 까마귀로 한번 본 터라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몬스터가 나와도 애초에 전력을 과분할 정도로 들고 온 터라 눈을 한 번 깜박이면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가장 활약하는 건 단연 창우였다.
본래부터 뛰어났던 검 기술이 최근 능력치가 올라가며 빠른 속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른 능력치는 아직 지수보다 크게 뒤떨어졌지만, 민첩만큼은 천살성을 발동하지 않은 지수와 비슷했다.
덕분에 몬스터가 등장하면 검광이 한번 번쩍이고 모두 시체로 변하는 게 예사였다.
“창우 오빠는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야?”
“내가 쩔을 좀 해줬지.”
“쩔? 뭐야. 나도 그런 거 해줘.”
“넌 안 돼.”
애초에 아바타는 파티원 등록이 불가능하다.
지수나 창우처럼 특정 신의 아바타로 선택되지 않은 인물만이 파티원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씨잉.”
“대신 따로 생각해 둔 건 있어.”
“진짜?! 뭔데, 뭔데?”
“돌아가서 이야기해 주마.”
민아는 자신도 창우가 받은 쩔과 같은 걸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인지, 방독면 아래로도 알 수 있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내 생각을 알았다면 절대 저런 미소를 짓지 못했을 거다.
‘지수랑 붙여줘야지.’
재능도 있고 능력치도 우수한 민아는 지수만 한 선생님이 없었다.
지수랑 일주일에 3번만 대련하면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리라.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아무튼 던전에 조금씩 깊이 내려갈수록 나는 목뒤에 찌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별’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 왔다.”
“여긴 공간이 넓군요.”
창우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모습만 보면 마치 눈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은 심안을 통해 단순히 눈으로만 볼 수 없는 정보들까지 인지하고 있으리라.
분명 별의 기운까지도.
나 역시 창우로부터 공유된 심안 덕에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저거로군.’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던전의 끝자락.
거대한 홀이었다.
이번에 생기는 던전들의 특징이 이런 거대한 홀의 중앙에 각인석이 놓여 있었는데, 이 던전도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모습이 달랐다면 사람들도 경계를 했을 터다.
하지만 완벽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었겠지.
창우의 심안처럼 특별한 감지능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뒤로 물러서세요. 그리고 방독면에 틈이 있는지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한번 경고를 한 뒤에, 홀의 중앙에 다가갔다.
은빛으로 빛나는 둥근 원석.
이게 전갈의 알이다.
각인석으로 위장하고 있는 둥근 알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 오른팔에는 어느 세 커다란 건틀릿이 장착되어 있었다.
두터운 파일벙커가 매달린 건틀릿.
그것을 알을 향해 겨냥하고, 사출시켰다.
콰앙!!
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울렸다.
알은 단번에 부서졌고, 그 파편이 허공을 날았다.
“뭐야, 이게 끝?”
너무나 쉽게 파괴된 알의 모습에 민아가 허망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전조였다.
그저 ‘알’이라는 위장막을 부쉈을 뿐이다.
별의 힘이란 단순히 외형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까.
쿠쿵.
그다지 크지 않은 부서진 알의 모습.
그곳에서 커다란 공간의 뒤틀림이 나타났다.
단순히 인간의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며 그곳에서 거대한 전갈의 눈이 보였다.
천갈궁, 안타레스의 아이.
분명히 별의 힘을 간직한 괴물이 홀의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대략 10미터에 가까우며 두꺼운 껍질과 뿌연 독무가 뿜어져 나왔다.
방금 전만해도 맑은 공기로 가득 차 있던 홀이 보라색 독무로 뒤덮이는 데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것 때문이지.’
전생에 서울의 인간들이 쓸려나갔던 원인.
바로 이 독무에 있었다.
단순한 인간의 방독면으로는 막을 수 없는 독무는 등장하는 것만으로 플레이어들을 죽였고, 일반인들은 전갈이 나타난 도시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전갈 본인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지만, 이 독무로 사망자가 끝없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제네시스의 박성혁은 서울에 존재하는 플레이어 중 원거리에 능한 플레이어들을 모아 결사대를 꾸렸고, 간신히 토벌에 성공한다.
더불어 루크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거, 잡을 수 있는 거 맞지?”
카라스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민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잡을 수 있냐고?”
“응.”
“껌이지.”
안타레스의 아이라 ‘별자리’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초월의 증명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독무만 막을 수 있다면 센티넬보다 약한 녀석이었으니까.
“얘 잡고 하나 더 잡아야 되니 적응해라.”
“……말은 쉽지.”
민아는 투덜거렸지만 겁을 먹지는 않았다.
거기다 지수나 창우의 경우엔 걱정할 필요도 없지.
도리어 지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럼 이제 사냥을 시작…….”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시야의 구석에서 뭔가가 깜박거렸다.
누군가가 쪽지를 보냈다는 뜻이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지금 내게 쪽지를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마녀’에게서도 저번에 쪽지가 온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고, 제네시스도 내게 특별히 용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딸칵.
조심스럽게 쪽지를 열자 발신자의 이름이 표시됐다.
발신자는 루크였다.
그리고 쪽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황급히 까마귀 한 마리를 열여덟 번째 던전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열여덟 번째 던전 내부.
아웃라이징 길드원 열 명과 강태성은 별 탈 없이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다.
혹시나 강한 몬스터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인지 등장 몬스터는 다른 던전과 다를 것 없었다.
대신 얻을 수 있는 소재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기, 길드장님. 이거 중급 마석입니다.”
“맙소사. 지금까지 최하급, 하급만 얻을 수 있었는데 중급 마석을 떨어트리는 몬스터라니.”
마석은 장비의 제조에 들어가는 희소품 중 하나였다.
장비 안에 강한 마력을 집어넣을 수 있어 다양한 스킬이나 효과를 붙이는데 필요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우수한 마석일수록 더 좋은 능력을 장비에 부여할 수 있으니 마석의 등급은 그 가치와 직결되었다.
“특별한 광맥은 없지만 중급 마석을 이렇게 얻는다면 큰 이득이로군.”
“에, 이걸로 장비를 만든다면 다른 길드를 압도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길드원의 말에 강태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던전에 들어오길 잘했다.
어차피 3대 길드가 약조한 내용은 던전을 각인시키지 않는 거지, 그 안에 있는 자원을 캐지 말라는 건 아니었다.
괘씸한 제네시스 놈들이 먼저 그것을 이용해 던전 하나를 공략하지 않았던가.
들리는 소문으론 그곳에서 미스릴 광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강태성으로선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고, 이번 일을 벌인 것도 그런 연유였다.
“거의 끝가지 다 온 거 같습니다.”
“그래? 아쉽군. 어차피 던전 내에 있는 몬스터는 다시 생성이 될 테니…….”
“아, 그건 각인시킨 던전에 한해서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인 전에는 던전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자원이나 몬스터가 회복되지 않는다더군요.”
“아, 맞아. 현민이가 그런 말을 했었지.”
강태성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말한 현민이라는 이는 아웃라이징 길드의 부길드장인 주현민이었다.
‘그렇다면…….’
강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거대한 홀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일이군.’
이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루크의 표정이 깊어졌다.
여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 전에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고 쪽지를 보내왔었지만, 이제는 당장 던전에서 나오라는 쪽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곳은 위험합니다. 루크여, 어서 밖으로 나오도록 하세요.」
루크를 아바타로 삼은 여신은 이렇게까지 다급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는 루크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있었다.
평소의 여신이라면 그들을 구하라고 종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위험하니 도망치라 권하고 있었다.
루크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여신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남을 것인지.
‘설령 남는다고 해도…….’
과연 자신이 도움이 되기는 할까?
저 아웃라이징의 길드장은 루크보다도 확실히 강했다.
만약 그가 위험에 처할 일이 생긴다면 루크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이곳에 나가 세한이라는 자의 말을 따르세요. 그라면 분명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여신의 판단은 분명 옳았다.
세한이라면 뭔가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지.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신님.”
낮게 웃으면서 루크가 이야기하자 하나의 옵저버가 루크의 머리위에서 나타났다.
여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여신의 옵저버였다.
“저는 약해빠진 놈인 건 분명합니다만, 민간인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루크는 군인이었다.
그가 군인이 된 건 특별히 애국심이 깊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어렸을 적부터 영웅이라는 존재를 동경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퍼 히어로 영화나 만화. 그곳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며 루크도 그런 이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었기에 그는 군인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한국으로 파견되긴 했지만 그는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휴전국인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아름다운 아내와 저보다 뛰어난 딸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상황이 바뀐 건 딸아이와 신림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로, 방패를 든 영웅이 활약하는 영화.
이런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화의 내용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 거대한 알림이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저들은 민간인이 아닙니다. 플레이어예요. 거기다 당신보다 강합니다. 아웃라이징의 길드마스터가 막을 수 없는 일을, 당신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민간인이었을 겁니다. 군인은 사명을 지니지만, 플레이어는 그런 사명을 가지지 않지요. 그러니 제게는 모두 구해야 할 민간인일 뿐입니다.”
여신의 옵저버가 루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 달마다 보낼 수 있는 메시지의 제한이 있으니 말을 아끼고자 행동으로 표현한 모양이다.
루크는 그런 옵저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이런 세계가 된 이후, 제가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옵저버는 그의 뜬금없는 말에 어깨를 두드리던 걸 멈췄다.
“여신님께서 저를 아바타로 선택하며, 저에게 영웅의 심장을 지닌 자라고 했을 때입니다.”
그는 군인이었고, 제법 뛰어난 전사였지만 플레이어로서는 아니었다.
다른 신들에게 모두 외면당했고, 그를 선택해 준 건 이 여신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루크를 자신이 아바타로 선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신화시대의 영웅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영웅의 심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런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다른 신과는 다른 정중한 어투였다.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메시지였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등을 돌려 도망친다면, 우습지 않습니까.”
루크는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 강태성은 각인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아마 이 던전을 아웃라이징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함이다.
3대 길드간의 약조가 있었지만, 설령 그것을 깨더라도 이 던전을 소유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이었겠지.
욕심은 눈을 흐리게 만든다.
지금 강태성이 그랬다.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여.”
강태성이 각인석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이변이 터져 나왔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차원이 부서지는 굉음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루크는 얼굴에 방독면을 착용한 뒤에 전력으로 달렸다.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드는 그 모습은 만용일지도 모른다.
허나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해낼 수있다면 다른 이들은 그걸 희생이라고 부르겠지.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지만 아스트라이아는 그런 인간의 아둔함을 사랑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그녀가 마지막까지 지상에 남아 있던 건, 그런 인간들 때문이었다.
「……훌륭합니다.」
짧지만 그것이 여신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루크는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세한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들은 조금이라도 이 홀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루크의 전력을 다한 외침에 열에 이르는 시선이 그에게 쏘아졌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보단 현재 상황에 대한 당혹감이 깊었다.
“저곳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는 깊은 독기를 품고 있습니다.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겁니다!”
“넌 뭐냐! 그걸 어떻게…….”
갑자기 등장한 루크의 모습에 달려들려던 강태성의 말이 멈췄다.
그 역시 그를 쫓아다니던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모양인지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그걸 왜 이제야……!”
이를 악물은 강태성은 자신의 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의 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스트라이아의 경우, 같은 ‘좌’에 위치한지라 인지하는 게 빨랐을 뿐이다.
아레스의 경우에는 격이 너무 높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경우다.
“이런 시발! 모두 도망쳐!”
강태성의 외침에 아웃라이징의 길드원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쿠쿵.
쿠구궁!
공간이 부서지고, 차원이 으깨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며 그것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전갈.
새하얀 껍질에 레이드 보스만큼이나 거대한 덩치를 지닌 전갈이 홀의 내부를 부수며 지상에 발을 디뎠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균열을 만들어 줄 줄이야.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인간이여.」
그것은 세한이 상대하던 것보다도 한층 컸다.
전체적인 크기는 15미터가 넘었으며, 껍질은 새하얗고 윤기가 흘렀다.
명백히 격이 달랐다.
왜냐면, 그가 바로 황도 12궁. 천갈궁의 수장, 안타레스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