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057. 던전 점령전(2)
‘꿈의 마녀.’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신들이 쪽지를 보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게 간단했으면 어릿광대도 나에게 심심할 때마다 쪽지를 보냈을 거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신이 플레이어에게 쪽지를 보낼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최대 10회.
10회를 소모하면 한 달을 기다려야 다시 쪽지를 보내는 게 가능하다.
신들의 말은 하나의 계시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의 아바타에게도 쉽게 쓰기가 힘든데, 다른 플레이어에게는 보통 보내지 않는다.
그만큼 신이 쪽지를 보낸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전생에도 쪽지를 받은 적은 없었는데.’
그냥 바로 아바타가 될 것인지 요청을 했을 뿐이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나는 천천히 쪽지를 열었다.
쪽지에는 고작 다섯 글자만이 적혀있었다.
「너는 누구지?」
생각보다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여태 내가 해왔던 일에 놀라는 신은 있어도 정체를 의심하는 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띠링.
읽고서 답변을 하지 않자, 새로운 쪽지가 날아왔다.
「답변하기 싫은 건가?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드는구나.」
나는 이번에도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는 계속해서 쪽지를 보냈다.
10회 제한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신들은 그대가 누군가의 아바타라 생각하지.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인간의 힘이야. 멋져. 박수라도 치고 싶을 정도야.」
「어떤가, 나의 것이 되는 건.」
「나는 그대를 이 게임의 승자로 만들어줄 수 있도다.」
전생에 받았던 쪽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혹여나 1회차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반응으로 보아 아닌 것 같았다.
이 마녀를 비롯한 그 족속들이 1회 차의 기억을 지니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천만 다행이었다. 그들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렇게만 적어서 답장을 보냈다.
이건 과거의 나와의 결별을 뜻하기도 한다.
내게 있어 마녀는 애증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녀 덕에 내가 최후까지 승리할 수 있었지만.
배드엔딩에 도달한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꼭 녀석의 잘못만은 아니지.’
마녀는 나를 단순한 아바타가 아닌, 자신의 대리자로 삼으려했다.
만약 내가 그것을 승낙했다면 미래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문’을 열 수 없을뿐더러 그녀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이 이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함부로 대리자가 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내가 위로 갈 수 있는 길은 막혀 버렸고.
초상의 영역에 발을 디딘 이가 없었던 이 세계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대의 의견을 존중하마. 하지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해지면 연락해도 좋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마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추가적인 쪽지는 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쪽지함을 껐다.
“잠은 다 잤군.”
설령 잠이 든다고 해도,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
“에휴.”
민아는 건물 위에 앉아 지도와 해당 지점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아직 던전은 생기지 않았지만, 새까만 반점이 아스팔트 도로 한가운데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던전이 생기기 전에 나타나는 징조이며, 세간에서는 저걸 ‘게이트’라고 부른다.
던전 레이스가 시작되며 게이트의 위치는 가장 핫한 정보 중 하나였다.
게이트의 위치를 파악해 길드에 판매하는 자들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이번 점령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이민아.」
“부려먹기는 겁나 부려먹어 진짜.”
그만큼 보상을 주기는 하지만, 어쩔 때는 좀 너무하다 싶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민아가 커버해야 할 범위가 다른 길드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넓었다.
강남 일대와 강서, 강북 일부를 민아가 돌아다니면서 던전을 차지해야만 했으니까.
까악, 까악.
잘 보면 주변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보였다.
저 중에 분명 세한의 까마귀도 있을 거다.
“곧 던전이 생긴다! 모두 준비해!”
건물 아래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 던전은 세한이 말하길 꽤나 중요한 던전이었다.
아래에 모여든 유저들은 모르겠지만, 이번 던전의 위치는 지도상 백양궁에서 가장 빛나는 별.
하말의 위치에 생긴 던전이기 때문.
간단히 말해 10점짜리 던전이다.
“이런 중요한 던전에 덜렁 나 혼자 보내고.”
그 정도로 자신을 신뢰하는 건가?
솔직히 자기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믿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변신.’
민아는 작은 벌레로 변신해서 사람들의 인파에 끼어들었다.
가장 앞에 서있던 남자, 아마 대장으로 추측되는 자의 등에 붙어 던전이 열리길 기다렸다.
쿠쿵, 쿠쿠쿵!
지반이 부서지며, 게이트가 열렸다.
도로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던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초현실적인 광경에 몇몇 플레이어들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모두 열 맞춰라! 후열은 뒤이어 올 길드들을 견제하고, 전열은 나를 따라 던전에 들어간다!”
“옛!”
대장의 말에 다른 길드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팔에 새겨진 인장은 피안화 길드의 마크였다.
“가자! 여신님을 위하여!”
“위하여!”
던전이 문이 열리기 무섭게 길드원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얼핏 광신적인 분위기까지 풍겨, 대장의 등에 매달려 있던 민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신이라니, 길드장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길드장을 선택한 신을 말하는 거야?’
보통이라면 후자겠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면 전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도 이제 움직여야겠어.’
민아는 천천히 대장의 등에서 떨어져 날아올랐다.
던전 안은 상당히 어두컴컴했다.
“모두, 조심.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던전과는 달라!”
‘네, 그럼 수고.’
피안화 길드원들이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던전을 공략하는동안 민아는 빠르게 던전을 내려갔다.
‘그냥 이대로 각인 장소까지 가도 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려가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던전에 깊이 들어왔다고 생각한 민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읏차.”
그리곤 주변에 몬스터가 있는지 한번 확인한 뒤, 인벤토리에서 동그란 폭탄을 꺼냈다.
세한이 자신에게 준, 점착 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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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착 폭탄
원격으로 조종해 폭파시킬 수 있는 폭탄. 몬스터나 플레이어에겐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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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사용해 본 물건이다.
설마 이걸 또 사용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재차 인벤토리를 열고 긴 원통을 꺼냈다. 길이는 대략 5미터 정도.
그걸 바닥에 가로로 내려놓은 뒤, 주변 벽에는 점착 폭탄을 붙였다.
“뻥이요.”
콰쾅!
점착폭탄이 일제히 터지며 던전 벽을 부쉈다. 거대한 돌 더미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길을 매몰시켰다. 그 두께는 족히 수 미터는 되고 던전을 구성하는 돌은 하나하나가 무거운 터라, 플레이어들이라도 쉽게 제거하기 힘들었다.
길을 막아버렸으니 민아는 던전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럴까봐 아래에 원통을 깔아둔 것이었으니.
5미터가 넘는 길이의 원통의 위로 돌이 깔려 있었지만 원통에는 작은 손상도 없었다.
작은 쥐가 드나들만한 구멍을 가진 원통은 무너진 돌벽 아래로 반대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민아만의 비상구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야비하기는 진짜 야비하다니깐.’
그리고 폭탄을 진짜 좋아한다.
대체 어디서 이런 폭탄을 구해오는 건지 민아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그럼 다시 쭉쭉 내려가 보실까.”
민아는 이번에 박쥐로 변해서 날아갔다.
중간중간 몬스터가 있었지만, 몬스터들은 굳이 박쥐를 신경 쓰지 않았다.
민아는 각인석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특별한 위험 없이 내려갔다.
세한은 굳이 민아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는 이런 점령전에서 치트키나 마찬가지였다.
“끝.”
그렇게 민아는 첫 번째 던전을 순조롭게 클리어했다.
***
“오늘은 운이 좋아.”
남자는 눈앞의 게이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침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근처에 게이트가 딱 생길 줄이야.
“만수 지부장님, 정말 오늘은 되는 날인가 봅니다.”
“킬킬, 그래. 지금 다른 길드 놈들이 서로 자존심 싸움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이익만 챙기면 되는 거야.”
게이트의 앞에는 대략 서른에 가까운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공통적으로 달 모양의 문신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어떤 길드를 상징하는 심볼이었다.
바로 그믐달.
현재 서울의 뒷세계를 제압한 길드였다.
최근에는 악마의 존재를 알게 되어, 더더욱 세가 불어나고 있었다.
“야, 근처 통제하고. 누구 오는 놈 있으면 죽여.”
“3대 길드면 조금 상황이 복잡해질 텐데요?”
“상관없어, 임마. 이런 곳에 올 놈들이면 대부분 조무래기야.”
이곳은 던전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서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만수는 솔직히 자신에게 던전을 차지할 기회 따위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지부 앞에 게이트가 생길 줄이야.
“정말 오늘은 운이 좋아. 이대로라면 진급할 수 있을지도…….”
지금 그믐달에선 한창 악마와 관련된 것들이 이슈였다.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들을 선발해 악마와 계약을 맺거나, 혹은 하수인이 되고 있었다.
그믐달에는 신의 아바타인 플레이어도 상당수 있는 터라, 악마의 등장을 그리 반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바타가 아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악마의 등장을 무척 반길 수밖에 없었다.
만수도 그런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기왕 던전 하나 먹은 거, 다른 장소도 노려봐?’
만수는 자신이 제법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장소로 밀려난 건, 단순히 정치싸움에서 졌다는 생각이 컸다.
“어라, 여긴 사람이 없을 거라더니.”
속으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지부에 여성 플레이어가 있었나?’
그런 기억은 없다.
그믐달에도 여성 플레이어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본거지에 있었다.
“네년은 뭐냐? 어떻게 들어왔어?”
“아저씨, 말 좀 곱게 하세요. 전 그냥 들여보내 줘서 들어왔을 뿐이거든요?”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화가 난 듯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하지만 험상궂은 남자들만 보던 만수의 입장에선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야! 누가 들여보냈어? 여기 오는 녀석들은 다 죽이라고 했잖아!”
“아, 저, 접니다.”
“뭐?”
어리숙한 얼굴로 한 남성이 얼굴을 살며시 붉혔다.
“그게, 이렇게 예쁜데 그냥 죽이기는 아깝지 않습니까.”
“흐음.”
만수는 사내의 말에 여성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얼굴이 기똥차기는 했다. 연예인이 이렇게 예쁠까 싶을 정도로.
“확실히 아깝긴 하네. 오늘은 역시 운이 좋단 말이야.”
“헤헤, 지부장님이 한번 하시면 그다음에 저도…….”
“마, 헛물 들이키지 마라.”
만수는 껄껄 웃으며 여성을 돌아보았다.
여성의 눈가가 씰룩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긴, 아가씨를 나중에 귀여워해 주겠다는 말이지. 얘들아. 이년을 묶어 놔라. 꼴에 플레이어라 괜히 날뛰면 성가셔진다.”
“옙!”
만수의 말에 두 명의 남성이 나와 여성의 팔을 붙잡았다.
“응?”
그런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남자가 끙끙 거리며 팔을 잡아당기건 말건 여성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여성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만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만수의 목덜미를.
“아, 그러네요. 저 문신 어디서 봤던 거 같은데.”
“봐? 뭘 봐? 그리고 너희는 거기서 뭔 쌩쇼를 하고 있냐? 당장 안 끌고 가?”
“지, 지부장님. 그게……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뭔 개소리야?”
여성은 게이트 앞에 모여 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몸 어딘가에 문신을 하고 있었다. 달 모양의 문신.
그건 전에 한번 봤던 기억이 있었다.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습격했던 이들 중, 몇 명이 저런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 명.”
그렇게 말한 여성은 손가락을 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수를 세기 시작했다.
게이트 앞 공터에서 여성이 수를 세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태연한 모습에 만수는 절로 기가 찼다.
“이년 대체 뭐야?! 이걸 확…….”
한참 짜증을 부리던 만수는 말을 멈췄다.
뭔가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어.’
만수는 뒤늦게 여성의 얼굴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성이 세고 있던 숫자는,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의 수였다.
“서른네 명.”
여성은 마지막 한 명, 만수를 검지로 가리키며 웃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흑진주처럼 까맣던 눈동자가 어느 세 선명한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