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053. 강자(2)
“귀찮게 됐군.”
결국 가면을 쓰고 만 자운의 모습에 세한은 혀를 찼다.
되도록 막고 싶었지만 린을 보호하는 게 먼저였다.
던진 단검에 맞고 가면을 떨어트렸다면 좋았을 텐데.
“저 정도면, 지금의 나와 능력치가 거의 비슷하겠어.”
기존보다 능력치가 거의 100퍼센트 이상 증가한 게 느껴졌다.
확실히 알려면 녀석의 능력치창을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전생에 봤던 비탄의 가면의 힘을 생각하면 대충 그 정도일 거다.
나는 우선 안고 피했던 린을 근처에 있는 건물 옆에 뉘였다.
그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가면을 쓴 자운과 싸우게 되면 린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건 힘들었다.
「큭, 크크. 이렇게 직접 조종하는 것도 제법 재밌구나.」
선착장 부근까지 이동하자 언제 왔는지 가면을 쓴 자운이 서있었다.
정확히는 자운을 조종하는 네비로스가.
마치 목각인형처럼 삐걱이는 자운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봐도 기분이 더러운 가면이야.’
가면에는 두 개의 긴 뿔이 솟아있고, 전체적으로 새하얀 색감의 가면이었다.
본인은 인간이 절규하는 모습을 본뜬 가면이라고 하지만, 세한이 보기에는 괴물의 면상을 박아둔 것 같았다.
「오, 우선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나는 악마서열 27위. 네비로스다.」
“그래.”
「……감상은 그것뿐인가?」
태연히 답하는 세한의 모습에 네비로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말해도 정말로 특별한 감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악마라면 저놈보다 더 대단한 놈도 마계에서 직접 봤으니까.
“어서 덤비기나 해라. 애가 비를 오래 맞으면 건강에 안 좋거든.”
나는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이젠 굳이 맨손으로 싸워줄 필요가 없었다.
「크, 크크. 정말로 건방진 놈이로구나. 카라스를 죽였다는 게 사실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지금 네놈에게서 느껴지는 힘으로는 별자리를 사냥할 수 없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을 내린 네비로스는 자운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분명 아까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그나마 가면이 미완성이라 다행이네.’
완성됐으면 최하급 별자리급의 힘 정도는 낼 수 있었을 거다.
내게는 초월의 증명이 있지만, 그건 단순히 ‘별자리급’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면 발동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상대가 별자리일 경우에만 발동할 수 있는 스킬이다.
드드득!
콘크리트로 된 지면을 자운, 아니 네비로스의 손톱이 파헤쳤다.
아까 전에 보이던 심플한 전투와는 전혀 달랐다.
본능에 내맞긴 악마의 전투. 압도적인 신체능력으로 상대를 찢어발기는 필살의 일격.
‘정말.’
상대하기 쉬운 움직임이다.
퍽! 퍽!
「크윽!」
세한의 검에 얻어맞은 네비로스가 휘청거렸다.
검에 베였지만 몸이 단단해진 탓에 마치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인간 주제에 제법 하는 구나!」
네비로스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확실히 한 방이라도 맞는다면 세한으로서도 위험할 정도로 강맹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네비로스는 무투파 악마가 아니다.
마법을 주무기로 삼으며, 그중에서도 정신계 마법이 특기인 악마.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니고 있으니, 인간따위는 벌레잡듯 죽일 수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리어.’
커다란 샌드백일 뿐.
퍽퍽퍽퍽!
「으허허헉!」
비속에서 먼지 나도록 맞는다는 게 이런 건가.
텅 빈 선착장에서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네비로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검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연신 허우적거리며 두들겨 맞았다.
“헛차!”
「크아악!」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스윙하자, 네비로스의 몸이 기억자로 꺾이며 날아갔다.
악마의 마력장이 없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반 토막이 났을 거다.
「이놈, 제, 제법 재주가 있다는 건 알겠다. 건방질 만도 하군.」
콘크리트로 된 벽을 부수며 처박힌 네비로스가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악마의 자존심이란 대단했다.
자운의 몸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기는 했지만, 저렇게 조종하려면 감각을 그대로 연결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지금 두들겨 맞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을 텐데도 웃을 수 있다니.
‘힘들 때 웃을 수 있는 자가 일류라더니.’
세한은 역시 악마 서열 27위는 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끄응!」
하지만 웃은 건 웃은 거고 아픈 건 아픈 거다.
신음을 흘리며 콘크리트 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네비로스는 어쩐지 한쪽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뭐냐. 왜 안 움직이지?’
비탄의 가면을 통해 자운의 몸을 조종하는 건 일시적인 빙의와 비슷하다.
매개체를 통해 악마의 힘을 끌어와 몸을 다룬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악마의 힘에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며, 악마가 몸을 되돌려 주기 전까지는 결코 되찾을 수 없었다.
그게 보통일 터다.
‘어, 어? 뭐냐, 전혀 안 움직여.’
처음엔 왼팔뿐이었다.
그다음은 오른팔.
다음은 다리.
다음은 몸.
이윽고 네비로스가 조종할 수 있는 부분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뭐냐, 대체 뭐냐!’
악마의 가면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어지간히도 두들겨 맞은 모양이군.”
자운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신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네놈, 대체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네가 두들겨 맞은 덕에 정신이 들었다.”
정확히는 네비로스가 두들겨 맞다가 잠시 의식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본인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찰나였지만, 자운은 그 짧은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흥, 소용없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으니 다시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지.」
비탄의 가면에서 재차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뒤덮는 것보다 자운의 행동이 빨랐다.
쿠웅!
그대로 무릎을 꿇고 지면에 머리를 처박은 것이다.
얼마나 강하게 박았는지, 세한이 서 있는 곳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저 녀석, 설마 의식을 되찾은 건가?”
악마의 정신지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세한도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네비로스다.
네비로스의 정신마법은 비슷한 순위의 악마들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런 정신마법을 파훼하는 건 세한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의지력.
초월적일 정도로 단단한 정신이 필요했다.
“신기한 놈이네.”
세한은 피식 웃으며, 저 남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공격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지켜보기로 했다.
전생에서도 단 한 번도 못봤던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쿵.
쿵.
쿵.
자운의 머리가 연신 지면에 격돌했다.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 쩍쩍 갈라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그런다고 가면이 갈라질 것……」
쿵!
쩌적.
「……같으냐?」
갈라졌다.
자운의 머리에서 악마의 계약자 특유의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가면도 분명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악마의 유물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악마와 최소 동급의 신위를 가진 존재나 악마 당사자. 그리고 그 계약자뿐.’
계약자라고 해도 악마의 유물을 부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면 계약자는 어디까지나 악마에게 종속된 존재니까.
하지만 자운은 지금 그것을 해냈다.
쿵!
콰지직!
「비탄의 가면이이이이!!」
비탄의 가면은 네비로스가 전력을 다해 만든 최상급의 유물이었다.
상위 악마들의 유물에도 꿇리지 않은 자신이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계약자가 악마의 유물을 부순다는 건 계약 파기를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패배하면 버리려고 했던 주제에, 우습군.”
자운은 비명처럼 외치는 네비로스를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버려주지.”
「너……!!」
어차피 천우가 아니었다면 네비로스와 계약할 생각도 없었다.
자운은 오른손으로 가면을 잡았다. 그리곤 온 힘을 향해 잡아당겼다.
콰직, 콰지직!
“크아악!!”
자운은 반쯤 부서진 가면을 잡고 얼굴에서 뜯어냈다.
완전히 가면을 벗을 수는 없었지만, 부서진 반쪽은 바닥으로 떼어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혼탁했던 정신이 말끔해졌다.
네비로스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직 얼굴에는 비탄의 가면의 반쪽이 붙어있었지만, 그 때문인지 일어설 수 있었다.
부서진 가면이 자운의 감정을 흡수하며 그것을 마력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자운은 여태 공격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세한에게 말했다.
“별로.”
물론 세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진귀한 광경을 봤다는 느낌이었다.
“너는 이제 악마의 계약자도 아닐 텐데. 그런데도 나와 싸우려는 거냐?”
“너와 싸우는 건 악마 때문이 아니다.”
끝까지 형님의 복수라는 건가.
흑천회의 보스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부하 하나는 잘 둔 것 같았다.
‘어차피 앞으로 한 번…….’
자운은 이미 만신창이다.
네비로스가 세한에게 계속 두들겨 맞았고, 가면을 부수며 계약조차 파기 되었을 거다.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이 무슨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치는 아까 처음 보았던 그때로 되돌아왔다.
능력치는 그대로라도 네비로스로부터 받았던 스킬을 사라졌을 터.
평범한 플레이어로 되돌아온 탓에 회복도 더딘 것 같으니 자운이 공격할 수 있는 건 앞으로 기껏해야 한번 정도일 거다.
스으.
세한은 자세를 낮추고 자운을 응시했다.
자운 또한 세한을 바라보며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왼팔은 부러진 모양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탁!
먼저 달려든 건 세한이었다.
세한의 손에는 무기는 없었다. 아까 자운과 싸웠을 때처럼, 마지막만큼은 맨손으로 결착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한 놈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자운이 전투방식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오로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물.
악마의 힘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투기.
세한은 비틀거리며 서있는 자운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대로 가슴을 꿰뚫어 죽일 생각이었다.
‘보인다.’
세한의 주먹은 터무니없는 속도로 자운을 향해 다가왔지만.
자운은 또렷하게 보였다.
한계에 몰린 육체가 발한 기적과도 같이.
‘보인다.’
주먹을 말아 쥐고, 세한이 휘두른 주먹의 궤도와 함께 몸을 비틀며 전력을 다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카운터. 자운의 특기였다.
세한의 생각처럼 자운은 재능이 없었다. 재능이 있었다면 좀 더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운은 재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닌, 상대의 힘까지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극한까지 익힌 것이 지금의 카운터였다.
상대의 힘과, 자신의 합쳐 발하는 필살의 일격.
그리고 지금.
지금까지 중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카운터가 세한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이건……!’
세한 또한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운의 가슴에서 주먹이 미끄러지며, 그 힘을 역이용한 자운의 오른손이 세한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운의 무릎이 꺾였다.
여태까지 누적된 데미지에 그만 무릎이 접힌 것이다.
“……!!”
볼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간발의 차로 자운의 주먹이 세한의 볼을 스쳤다.
그건 플레이어와의 싸움에서 세한이 처음으로 입은 상처였다.
“운이 나빴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세한은 이제 완전히 비어버린 자운의 상체를 향해 재차 왼손을 내질렀다.
자운 역시 그것을 보았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뻗어오는 손을.
이번에는 카운터도,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자운은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콰아앙!!
전력을 다한 세한의 왼 주먹에 발을 내딛고 있던 콘크리트가 으깨져 나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비조차 충격파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운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리곤 먼 바다위로 떨어졌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의 위로.
“…….”
세한은 자신의 주먹을 빤히 바라보았다.
“운이 나쁘다는 건 취소다.”
후, 세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면, 마지막으로 가했던 일격에 손맛이 없었으니까.
***
자운이 정신을 차린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왜 살아 있지?
아직도 의식을 잃기 전에 보았던 모습이 눈에 선명하다.
자신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다가오던 세한의 왼손이.
“일어났네.”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고딕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양산을 쓴 소녀였다.
나이는 이제 막 십대 중반정도가 되었을까.
하얗고 긴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네비로스의 찌꺼기.”
빈정거리며 말하는 걸 보아, 입은 얼굴만큼 고운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자기가 살아 있나 궁금한 모양인데…….”
소녀는 사뿐사뿐 걸어와서 누워있는 자운을 보았다.
“내가 살렸어. 좀, 네가 흥미로웠거든.”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자운의 가슴을 사뿐히 짓밟으며 싱긋 웃었다.
“너는, 누구지?”
자운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 속에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나 알 수 있는 건 이 정체불명의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악마였다.
그것도 자운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대악마.
“찌꺼기 주제에 궁금한 게 많구나? 그래, 특별히 알려줄게.”
탁, 소리를 내며 양산을 접은 소녀는 자운의 얼굴 가까기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금색의 눈동자, 거기에 기이한 형태를 한 동공이 자운의 시야에 가득 담겼다.
“나는 아자젤.”
그 이름은 악마 서열 27위의 네비로스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거물이었다.
“나태의 악마다.”
마계를 지배하는 7대 악마중 하나.
마계의 대공이자 악마 서열 제 3위.
나태의 아자젤이 자운을 보며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