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052. 강자(1)
인천부두.
본래라면 바다에 여러 척의 선박이 있었어야 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근방의 몬스터들은 모두 척결된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린을 적당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에 둔 후, 자운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네비로스의 말로는 조직을 습격했던 까마귀놈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자신이 납치한 이 꼬마도 그렇고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나마 외국인 남자만은 평범한 편이었다.
기술은 뛰어났지만, 플레이어의 수준은 한참 미달이었니까.
그에 반해 고등학생 소녀는 이상한 능력을 사용했고, 이 여자아이는 악마조차 눈독들이게 만들 만한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했던 검은 옷의 여성은…….
‘최소 그 정도는 되리라 생각해야겠어.’
네비로스가 자신보다 까마귀가 강할 거라고 했던 것도 납득이 갔다.
마지막에 오토바이를 쫓아오던 여성은 모든 능력치가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싸웠다면 졌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까마귀놈이 그 여성과 동등한 수준이라면 자신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러니 가면을 쓰라고 했을 텐데?」
“고민 중이다.”
「고민할 필요가 있나? 그것이 없다면 너는 그저 죽을 뿐이다. 다른 쓰레기들처럼 말이지.」
네비로스는 자운을 향해 마음껏 비웃었다.
「내가 지금 네놈을 도와준다고 착각하지 마라. 간만에 발견한 말을 쉽게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만약 네가 쓰레기처럼 패배한다면, 너와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
“알고 있다.”
네비로스는 그런 놈이니까.
녀석은 다른 악마나 신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마치 자신이 대단히 우수하다고 어필하고 싶은 것처럼, 계약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대신 그만큼 확실하게 도움을 주긴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천우는 흑천회를 만들지도 못했을 테니.
“어차피 곧 녀석이 올 거다. 가면은 우선 한번 붙어보고 생각하면 돼.”
「쯧, 약해빠진 놈 같으니라고.」
네비로스는 신자운이 왜 가면을 쓰는 걸 거부하는지 알고 있었다.
악마의 유물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인간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면, 단순한 계약자가 아닌 네비로스의 꼭두각시가 될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 아이의 생명을 흡수해 에너지를 모은 가면을 착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였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까마귀가 습격할 것을 대비해, 린의 목에 작은 단검을 들이댄 채였다.
허튼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놈이다.」
까악, 까악.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있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평범한 까마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쏟아지는 비속에서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검은 외투에, 검은 바지. 상당히 어두운 인상.
얼핏 보면 악마의 계약자로 보였다.
외모만 보면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이어를 외모로 구분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네가, 까마귀인가?”
“까마귀? 그래, 내가 까마귀이긴 하지.”
세한은 자신을 경계하는 자운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까마귀 자리 카라스를 욕하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젠 자신이 까마귀라고 불리고 있었다.
‘린은…… 무사한 것 같군.’
혹여나 세한이 습격할까 봐 칼을 들이댄 채였지만 살기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운을 유심히 살폈다.
악마의 계약자 특유의 검은 눈동자와, 머리칼.
매서운 눈매와 그에 어울리는 샤프한 외모였다.
그리고 흐트러진 검은 정장과 와이셔츠.
가슴팍에는 옅은 상처가 있었다.
커뮤니티를 통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지수로부터 입은 상처겠지.
세한은 자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어디서 본 얼굴이네?’
전생의 플레이어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아는 얼굴인 건 분명했다.
‘아.’
한참을 고민하던 세한은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이종격투기였던가? 그런 경기에서 봤던 것 같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선수가 꽤 눈에 띄어서 기억에 남는 얼굴이었다.
‘과연, 격투기 선수란 말이지.’
그런 사람이 왜 흑천회에 속해있는지 의문이다.
갑자기 몬스터가 강해지는 경우는 시스템이나 GM의 개입이 있었던 거지만 자운은 아니었다. 없는 플레이어를 만들거나 조종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인물이 대체 왜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왜 그 아이를 납치한 거지?”
“네놈이 얌전히 오게 하려면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운은 린의 목에 대었던 칼을 천천히 땠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군.”
“나를 노렸다는 건, 흑천회의 일 때문이냐?”
“당연한 말을.”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세한이 자운을 살피는 것처럼, 자운도 세한을 살피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만만해 보였다면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형님을 죽인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강하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올수록, 녀석이 강자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정면에서 흑천회 전부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없을 것만 같았다.
“너는 왜 흑천회를 노린 거지?”
세한과 흑천회는 여태 특별히 관련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자운이 알기로는.
“이전에 한번 내 동료들이 악마의 하수인들에게 습격 받았거든.”
“습격?”
“그래, 그래서 생각난 거지. 악마와 관련된 것들은 미리미리 싹을 잘라둬야겠다고 말이야.”
특히 흑천회는 가장 악랄한 집단 중 하나였다.
네비로스가 지배하는 세력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자운은 그런 세한의 말이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습격을 당해서 적의가 생긴 건 알겠지만, 그것만으로 흑천회 전체를 적으로 돌릴 줄이야.
하기야 충분한 힘을 가진 그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화풀이일 지도 모른다.
“그렇군.”
“그러는 너는 뭐라고 해야 되나, 보스의 복수? 그런 거지?”
“단순의 조직의 보스라서가 아니다.”
천우가 악마의 계약자이며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직 갚지 못한 빚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고 자세를 잡는 자운의 모습에 세한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깡패의 의리 같은 거려나.’
상당한 실력자라 호기심이 일기는 했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저 녀석 또한 네비로스의 계약자인 게 분명했다.
그러니, 살려둘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는 쓰지 않는 건가?”
“난 주먹으로 충분하다.”
과연 전직 격투기 선수답게 주 무기는 주먹이었다.
그렇다 해도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플레이어들의 신체는 분명 일반적인 인간보다 튼튼하긴 했지만, 금속보다 단단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새까맣게 물드는 녀석의 손을 본 세한은 생각을 달리했다.
‘신체 자체를 강화시키는 건가.’
악마의 힘인지, 아니면 본인이 가진 스킬인지는 모른다.
“맨손이라…….”
그거 좋지.
세한은 무기를 꺼내려던 손을 멈추고 마찬가지로 주먹을 쥐었다.
“무기 없이 싸워보는 건 오랜만이네.”
“…….”
긴장감 없이 말하는 세한을 자운은 침착하게 응시했다.
오만하다, 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남자가 아까 만났던 여성보다도 강하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그 여성도 무기를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맨손으로 자신을 압도했으니까.
“후회하지 마라.”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세한은 자운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고.
자운은 세한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서로의 목적은 거의 동일했다.
콰앙!
빗속을 뚫고 검은 바람이 격돌했다.
짙은 밤의 어둠속에서도 두 명은 서로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 순간, 왼손을 뻗어 자운의 옷깃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자운은 그것을 뱀처럼 몸을 휘며 피했다.
도리어 세한의 복부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지익─.
신발이 바닥에 미끄러지며 세한의 몸이 꺾였다.
자운의 왼손은 허공을 스쳤다.
큰 빈틈이 생긴 자운을 향해 수직으로 주먹을 내리찍었지만, 자운은 도리어 고개를 아래로 깊이 숙이며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자운의 발차기가 세한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세한은 그것을 오른팔을 들어 막아냈다.
“하…….”
세한은 어느새 크게 물러선 자운을 감탄한 눈으로 보았다.
‘역시 격투기 선수는 선수라는 건가?’
자랑은 아니지만 세한은 접근 전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압도하지 못했다.
진심을 다해 움직인 것도 아니었고, 자신보다는 분명 조금 아래였지만.
그렇다 해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무엇보다, 자운의 움직임은 세한에게 굉장히 익숙했다.
세한과 자운은 서로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재차 달려들었다.
서로의 주먹과 발차기가 빗속을 뚫고 오갔다.
“후우.”
세한은 내심 감탄했다.
신자운이라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천재’의 것이 아니었다.
주먹은 날카롭고, 몸의 움직임은 뱀처럼 휘어지며 세한을 압박했다.
이것은 재능이 만든 움직임이 아니다.
무수히 반복된 노력의 결정체.
그의 움직임은 정직했다. 상대보다 빠르게, 그저 피하고 때린다.
그 심플한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었다.
천재의 번뜩임이 보이지 않았다.
마친 세한, 자신처럼.
“큭!”
세한이 한층 더 속도를 높이자, 자운의 몸에 생체기가 나기 시작했다.
전투기술도 세한이 확실히 앞서고 있었고, 능력치 차이도 극심했기 때문이다.
자운의 전투기술이 떨어지기보단, 세한이 압도적이었을 뿐.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지녔더라도, 그는 엄연히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였다.
콰앙!
“커억!”
세한은 자운의 가슴을 후려친 주먹을 천천히 내렸다.
자운은 수십 미터를 날아가 컨테이너 박스를 반쯤 우그러트리며 처박혔다.
지수와 같은 회복 스킬을 다량 보유하지 않는 한,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대체 너와 같은 플레이어가 왜 악마와 계약했는지 모르겠어.”
“…….”
자운은 세한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을 내쉬자 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세한이 조금 더 위였다.
거기에 능력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처음에는 세한이 적당히 자운의 움직임에 맞춰줬을 뿐이다.
“너는 자존심도 강해 보이고, 그렇게 까지 악한 녀석은 아니야. 나쁜 새끼인 건 분명하지만.”
뭔가 모순된 것 같은 말이었지만, 세한은 개의치 않았다.
세한이 생각하기에 자운은 성정이 악한 건 아니었다.
단지 흑천회에 속해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쪽의 사정이었다.
어찌됐든 세한은 자운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너무, 강하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자운은 손으로 가슴팍을 만졌다.
단 일격으로 늑골이 몇 개가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면을 쓰라고 하지 않았나. 멍청한 새끼. 하등한 인간 놈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가면, 가면이라.
그것을 쓰면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자운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가면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에 들어간 아이들의 비탄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다.
세한의 말대로 자신은 나쁜 새끼이지만 악마의 가면에 손을 댈 정도는 아니었다.
「네놈이 싫다면 억지로 하는 수밖에.」
“……!”
일어나 자세를 잡으려던 자운의 몸이 굳었다.
입 밖으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신과 악마의 계약이 뭐가 다른지 아나? 신과 달리 우리는 강제할 수 있지.」
네비로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뻣뻣하게 굳은 자운의 손을 움직여, 녀석의 품속에 있던 가면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몇 개의 단검이 날아와 자운의 손에 명중했다.
「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세한이 던진 단검이다.
단검은 자운의 손을 꿰뚫지 못했다. 가면을 쥔 손에서 옅은 막이 생겨서 막아냈기 때문이다.
「지루한 싸움을 지켜보느라 힘들었다. 이제야 좀 즐길 수 있겠군.」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네비로스는 자신의 유물.
비탄의 가면의 힘을 믿었다.
악마서열 27위는 폼이 아니다. 그런 자신이 만들어낸 혼신의 역작이 비탄의 가면이다.
인간의 마이너스 감정을 흡수해 강대한 마력을 얻어내는 가면.
지금까지 모은 마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면 현재 존재하는 어떤 플레이어도 자운을 이길 수 없으리라.
“큭, 크아아!”
자운은 어떻게든 손에 쥔 가면을 쓰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약한 너를 위해서다. 네가 저놈을 압도했다면 굳이 이럴 필요도 없었잖아?」
네비로스는 좀 더 강하게 힘을 사용하여 자운의 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이윽고, 자운의 얼굴에 새하얗고, 기괴한 형상을 한 가면이 씌워졌다.
“──!!”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절규가 울리며.
백색 섬광이 인천 부두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