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051. 계약자 신자운(3)
덜컹.
부서진 탁자에 몸을 기댔다.
‘능력치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위험했을지도.’
신자운은 쓰러져있는 금발의 남자를 보았다. 주먹을 정확히 관자놀이에 명중시켜 기절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건 자신이 그보다 기본적인 속도가 더 빨랐던 덕분이다.
이전에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플레이어와는 움직임이 달랐다.
“후우.”
바닥에는 민아와 루크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손을 뻗는다면 이제 목숨을 끊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 아빠!”
이제 막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루크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덕분에 자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오래전 일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성가시게.’
아이를 죽이는 건 껄끄럽다.
거기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그 부모를 죽이는 것도 껄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형님의 복수를 위해선 똑같이 갚아줄 수밖에 없었다.
「호오, 이건 또 재밌는 게 있네.」
“갑자기 뭐냐.”
우선 울고 있는 린을 기절시키려던 신자운은 갑자기 들려온 네비로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치밀었다. 네비로스의 목소리는 간드러지는 구석이 있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소름이 돋았다.
「이 아이, 죽이지 마라.」
“어째서?”
애초부터 아이는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네비로스의 말은 의외였다.
아이의 슬픔과 절망을 가장 좋아하는 변태 새끼가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굉장한 잠재력을 지녔어. 이 순도 높은 마력……. 분명 좋은 재료가 될 거야.」
좋은 재료라.
결코 좋은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이곳에서 죽여주는 게 나을 정도로.
“……알겠다.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상관없다.」
자운은 먼저 쓰러져 있는 민아에게 다가갔다.
신기한 능력을 사용하던 플레이어였고, 싸움에도 능숙했지만 자신에게 너무 쉽게 접근을 허용했다.
그저 상대가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잠든 것 같은 평온한 민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운은 좀 망설였다.
어쨌든 민아도 아직 10대의 고등학생이니까.
“쯧.”
결국 자운은 짧게 혀를 차며 민아에게 뻗던 손을 치웠다.
이래서 이상한 마음이 생기기 전에 한 번에 죽였어야 했는데.
“꼬마.”
“흑, 흑, 히끅! 네, 네?”
“따라와라.”
“네?”
갑작스런 자운의 말에 린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네 아비와 이 여자를 죽게 하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제, 제가 따라가면 살려주실 건가요?”
“그래.”
본래는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나, 하필 어린애만 둘에, 다른 한 명은 그 부모일 줄은 몰랐다.
‘하, 젠장.’
욕설이 치밀어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까마귀 놈이 습격할 수 없는 상황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죽이지는 못해도 인질만으로 충분히 녀석을 도발할 수 있으리라.
자운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아, 알겠어요.”
“그래? 그럼…….”
자운은 손을 들고 린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바닥에 쓰러진 린을 자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이 녀석, 방금 내가 손을 내리치는 걸 본 건가?’
궤적에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민아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운의 공격을 확실히 본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힘에 가감을 했다고 해도, 어린애가 볼 만큼 느리지는 않았다.
“얘는 대체.”
네비로스가 관심을 보일 때부터 이상했지만, 아무래도 보통 어린애는 아닌 것 같았다.
후두둑.
기절한 린을 한손으로 대충 들고 밖으로 나가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워낙 비가 많이 내리는 터라, 자운은 자신의 허리춤에 들려있는 린이 신경 쓰였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아까 린이 울면서 루크를 감싸던 모습에서 어린시절의 환영을 본 탓이다.
자운은 눈가를 적당히 손가락으로 누른 뒤, 오토바이에 발을 걸쳤다.
쉬익!
“……?!”
그때, 빗속을 뚫고 한줄기 바람소리가 들렸다.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이 아닌, 무언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소리.
솔직히 반쯤은 우연이었다. 자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고, 그 앞으로 무언가가 날아가 벽에 박혔다.
“손도끼?”
벽에 박힌 손도끼에는 몬스터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냥하는데 사용했던 것 같았다.
“설마 피할 줄이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도로의 건너편에 자신과 같은 새까만 원피스를 잡은 여성이 서있었다.
처음에는 악마의 계약자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뭐냐, 저건.’
인간인가?
그조차도 불확실한 여성이었다.
비를 맞으며 처연히 서 있는 모습은 무섭도록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비인간적이었다.
저것과 싸워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너도…….”
이 안에 있는 녀석들과 같은 편인가? 라고 질문하려는 순간.
그보다 빠르게 여성의 발이 움직였다.
마치 쏘아진 탄환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속도였다.
‘속도는 나보다 빨라!’
자욱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시뻘건 안광이 빛났다.
여성의 움직임에 따라 붉은 실선이 길게 그어지며 자운의 목을 향해 손을 뻗어졌다.
마치 머리를 그대로 잡아 뽑아버릴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뿌드득!
자운은 여성의 손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속도는 상대가 더 빨랐지만, 움직임은 막무가내에 가까웠다.
부웅!
“큭?!”
분명 여자의 손은 방금 자운이 후려친 공격으로 부러졌다. 그런데 전혀 궤도가 수정되지 않았다.
부러진 손을 그대로, 힘의 가감하나 없이 자운의 목을 향해 휘두른 거다.
그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소름 돋았다.
마치 고통을 못 느끼는 인간처럼 움직이는 여성의 행동에.
“당신, 동작이 이상하네요.”
근데 여성은 도리어 자신을 이상하다고 말했다.
“무슨 말이지?”
“분명 맞을 거 같은데, 뱀처럼 이렇게 움직여서…….”
“그건 위빙이라는 거다.”
“권투의?”
“비슷하지.”
여성은 흠, 하고 작은 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는 방금 전, 자운이 잡았던 자세와 무척이나 흡사했다.
부러진 손은 어느 새인가 이미 나아있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여성의 손이 자운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움직임은 어설프지만 방금 자신이 했던 공격을 흉내 내고 있었다.
자운이 보기에는 빈틈투성이의 어설픈 흉내일 뿐이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움직임이 변하고 있었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그리워졌다.
‘일격에, 쓰러트린다.’
그것으로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선은 떨쳐내야 했다.
계속 싸운다면 아마 이길 수야 있겠지만, 그전에 세한이 올 게 분명했다.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거기다 자체적인 회복능력을 가진 상대는 현재 자운에게 최악이었다.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하나, 둘.’
여성은 무조건 자신이 먼저 공격했다.
읽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반드시 죽일 수 있는 급소만을 노리니 도리어 알기 쉬웠다.
‘셋.’
여성의 발이 빗속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며 자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태까지 중에 가장 깔끔한 움직임이다.
가슴팍을 향해 뻗어오는 여성의 수도를 보며 자운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몸을 회전하며, 그대로 여성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카운터.
자운이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이었다.
콰아앙!
“꺅!”
발을 내딛은 아스팔트가 움푹 들어가며 부서졌다.
체중을 실은 자운의 일격이 여성의 얼굴에 때려 박혔다.
작은 비명을 지르며 여성의 몸이 붕 날아갔다.
쿵, 쿠당탕!
건너편으로 날아가 가로등을 찌그러트린 여성은, 근처 의류매장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위험했나.”
하얀 와이셔츠의 앞섬이 피로 물들어있었다.
피한다고 피한 것이었지만, 상대의 속도가 워낙 빠른 터라 완전히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후우.”
낮은 한숨을 쉰 자운은 다시 바이크에 발을 걸치고 앉았다.
부르릉!
그리고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핸들을 당겼다.
바이크의 바퀴가 회전하는 순간, 의류매장이 크게 들썩이며 여성이 튀어나왔다.
“미치겠네.”
백미러로 보이는 여성은 머리가 깨진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붉은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좌우를 둘러본 그녀는 바이크를 발견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백미러로 비치는 여성의 모습에 자운은 눈을 의심했다.
비바람을 뚫고 달리는 바이크와 거의 비등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자칫하면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대체 민첩이 어느 정도나 되는 거지?’
바이크의 계기판이 시속 80km를 넘겨가고 있었다.
그럼 저 여자도 최소 그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말이다.
방금 전에 싸움에서 보였던 움직임보다도 확연히 빨라졌다.
머리를 얻어맞아 뇌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도리어 더 빨라지다니.
‘이대로라면 잡힌다.’
이미 여성은 바로 뒤까지 쫒아왔다.
바이크의 속도를 더 올리려는 순간, 품속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아까 전, 네비로스가 자신에게 건네줬던 가면이다.
콰아앙!
가면에서 강력한 마력이 방출되며 달려오던 여성을 크게 날려버렸다.
멀리서 나동그라지는 여성을 본 자운은 바이크의 속도를 한층 올렸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이번에야 말로 쫒아오지 못하리라.
「특별히 도와줬다. 메인 요리를 망치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거 고맙군.”
자운은 네비로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
“신자운?”
나는 지수의 현재 위치를 추적하며 빠르게 달렸다.
분명 같이 있을 테니까.
‘대체 신자운이 누구야, 진짜.’
건물과 건물을 뛰어넘고, 도로 위를 달리며 계속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민아와 다른 사람들을 습격한 건 신자운이라는 녀석인 모양이다.
채팅방에 올라온 말로 보아 이미 민아와 루크는 당했고, 지수와도 교전했지만 성공적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린 테일러를 데리고.
‘네비로스가 요구한 건가?’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처음에 나는 내가 흑천회를 습격해서 복수를 위해 갔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채팅을 보면 죽일 여유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지만 린만을 납치했다.
‘하필 지수가 잠깐 없을 때 들이닥칠 줄이야.’
둘이 싸웠던 내용을 보니, 만약 지수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보아하니 지수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플레이어 같은데…….
‘그게 가능한가?’
생각해 보면 지수와 동등하게 싸웠다는 것부터가 놀라울 따름이다.
멀티 플레이 패키지를 통해, 지수는 내가 얻는 포인트의 일부를 가져가고 있었다.
거기에 본신의 재능도 어마어마해서 성장 속도가 타의추정을 불허했다.
나를 제외하면 솔직히 백병전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라고 봐도 좋았다.
그런 지수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플레이어라.
‘그런 녀석을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그 정도의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후에 흑천회가 활동할 때 분명 언급이 됐을 거다.
그런데 신자운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신자운은 흑천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미 죽었다는 거다.
‘그 정도의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는 놈은 별로 없을 텐데.’
적어도 한국에는 없다.
린 테일러는 그때 너무 어렸고 재능도 전혀 개화하지 않은 상태였다.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하필 건드려도 린 테일러를 건드리다니.
나는 까마귀의 눈을 띄우고 커뮤니티로 언급되는 신자운의 위치를 추적했다.
현재 녀석은 인천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것도 인천 부두 방향으로.
현재 인천부두는 근방이 초토화된 탓에 사람이 전혀 없는 장소였다.
싸움 장소로는 저기보다 좋은 곳을 찾기 힘들 거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그럼 나야 좋지.
혹여나 민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일이 생겼을까 봐 식겁했지만, 다행히 아무런 일이 없는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남은 건 린 테일러를 성공적으로 구출하는 것뿐.
‘잘하면 네비로스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다.
되도록 만나는 건 먼 훗날.
녀석의 목을 따러 갔을 때이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러긴 힘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