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42화 (42/332)

# 42

042. 정점(頂點) (2)

본래 내가 테일러 부녀를 만난 것도 이 시기였다.

신림에서 나올 레이드 보스를 잡기위해 홀로 돌아다니던 내게 루크가 말을 걸어줬다.

이 게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맺은 인연.

나는 그런 루크에게 많은 걸 배웠다.

전직 군인이었던 루크는 많은 전투기술과 생존기술을 알고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살아남는데 필요한 지식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신을 증오해요.」

나를 노려보던 새파란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배드 엔딩이 아닌 다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지.’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할 거다.

“와, 빛난다.”

은은한 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한 부화기의 모습에 린이 눈을 반짝였다.

이런 걸보면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다.

“아저씨, 이제 알이 부화하는 거예요?”

……아저씨라니.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나?”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 얘랑 10살 차이 아냐? 그런데 오빠는 무슨 오빠. 그냥 아저씨지. 아,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나도 아저씨라고 부를까?”

“하지 마.”

“왜~! 나랑도 네 살이나 차이 나잖아.”

민아는 문득 등에서 시선이 느꼈다.

슬쩍 뒤를 보면 지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딱히 특별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언니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뭔가 무섭단 말이야.’

민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흠, 물론 장난이야. 아무튼 오늘 여기에 온 건 그 알 때문인 거 같은데 이제 바로 대전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

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해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 돌아가 봤자 레이드 보스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아무리 궁기가 다쳤다고 해도, 레이드 보스다.

특별한 준비 없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아직 시간도 안 됐는데.”

“아니요. 저희는 이미 레이드 보스를 만나고 왔어요.”

“뭐어?”

민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지수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대체 어떻게 만난 거야?”

“그건…….”

나는 간단히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우연히 레이드 보스를 마주치게 되었고, 녀석이 튀어나온 장소에 들어가니 기린의 시체가 있었다. 이 알은 거기서 구한 물건이다, 라는 간결한 설명이었다.

기린의 뿔을 구하기 위해서 대전에 갔다거나 하는 내용은 어차피 설명해 봤자 긁어 부스럼만 만들뿐이었으니 생략했다.

“레이드 보스는 그렇게 크구나. 그냥 센티넬 정도로 생각했는데.”

“센티넬이 쎄기는 더 쎄다. 다만 레이드 보스는 방어력과 체력이 강해서 쉽게 안 죽는다는 정도?”

전에 말했지만 센티넬은 ‘얘한테는 깝치지 말고 피해가세요’라면 레이드 보스는 ‘다 함께 힘을 합치면 잡을 수는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행동범위가 센티넬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피해는 센티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야.”

“이해했어. 그럼 여기에도 어딘가에 레이드 보스가 숨어 있다는 거네?”

“그야 그렇겠지. 다만 굳이 먼저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왜? 서둘러 잡는 게 좋잖아?”

“플레이어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됐을 테니까.”

아직 세 번째 메인 퀘스트도 클리어하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전생을 생각하면 시간을 기다려 녀석이 나왔을 때 잡는 게 최선이었다.

‘반면 대전에 있는 레이드 보스는 변수가 있어.’

전생에도 궁기는 기린의 뿔에 찔렸던 것일까?

내가 대전으로 내려가는 시점에서 뭔가 변화가 있던 건 아닌가?

애초에 전생에 나는 대전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기습을 가했지. 지금 생각하면 흔적도 보란 듯이 있었다. 깃털과 발톱자국.

다른 곳에는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 그곳에만 나란히 있었다.

‘생각해 보면 기린과 교전하게 된 시기도 지나치게 빨라.’

당시엔 당황하여 깊이 생각할 수 없었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드 보스에 관한 공지가 뜬지 3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궁기가 기린의 영역을 침범한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기린이 만만한 상대도 아니고 타락한 성수인데.

깊은 상처를 입은 것부터가 궁기가 무리한 싸움을 벌였다는 증거.

‘역시 여러 가지 불확실한 점이 많아.’

그러니 무작정 내려가기보단 최대한 준비를 갖추고 가는 게 좋았다.

이번에도 시스템이 관여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또 다른 존재를 가정했다.

‘GM 아카터스.’

대한민국 서버를 관리하는 GM이자, 성가신 일을 가장 싫어하는 게으르고 잔인한 괴물이다.

***

“역시 그놈 보통 놈이 아니야.”

GM 아카터스는 서울로 가버린 두 명의 플레이어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레이드 보스가 냅다 기습을 가했는데 그걸 무사히 피할 줄이야.

그대로 전투를 유도해 볼까 싶었지만, 어쩐지 녀석의 여유로운 태도가 걸렸다.

궁기도 기린을 잡느라 만전의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보아하니 뭔가를 기린의 던전에서 얻어간 것 같은데.’

옵저버를 통해 본 영상을 떠올리면 분명 알이었다.

‘기린의 열매인가.’

그 노쇠한 기린이 죽기 전 자신의 아이를 남겨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카터스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기린의 열매를 부화시킬 수는 없겠지.”

성수의 열매를 무슨 수로 부화시킨다는 말인가?

열매가 부활하려면 대량의 에너지와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니 사실상 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며, 저 열매를 플레이어가 먹는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효능은 없었다.

그냥 빛 좋은 개살구지.

‘녀석이 뭔가를 하려는 거 같긴 한데.’

도중부터 옵저버를 피해 다니며 움직인 탓에 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딱!

짜증이 치민 아카터스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궁기의 모습이 보였다.

“아, 이놈 왜 이렇게 허약해?”

옆구리에 뿔 좀 찔렸다고 골골 거리다니.

애초에 기린을 잡도록 시켰던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카터스는 뻔뻔했다.

“어차피 뿔을 흡수하려면 몸 안에 집어넣었어야 했으니 됐지 뭐.”

몸에 박혀 있는 기린의 뿔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조금씩이지만 궁기의 몸에 흡수되고 있었다.

‘아바타도 아닌 놈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야?’

대체 카라스를 어떻게 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오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슬리는 것도 사실.

그러니 아카터스는 이번 메인 퀘스트에 살짝 손을 써뒀다.

세한이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을 때부터 레이드 보스의 강화를 꾀한 것이다.

‘마음 같아선 편하게 강화시키고 싶지만.’

센티넬이나 레이드 보스급이 되면 GM이라도 섣불리 강화를 시킬 수가 없다.

시스템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카터스는 궁기의 정신에 조금 손을 뎄다.

좀 더 포악하고 강함에 집착하도록.

원래부터 궁기는 흉포한 생물이기에 그 간단한 조작만으로 뜻대로 움직였다.

기린의 영토와 힘을 차지하기 위해 녀석의 보금자리로 쳐들어간 거다.

그동안 아카터스는 궁기의 깃털과 발톱자국을 적절히 배치한 후, 세한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첫 습격은 아쉽게도 실패했다.

기습도 실패한데다 궁기의 상처가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좀 더 도와줘야겠군.”

다친 상처를 치유하고 기린의 힘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도록.

이 정도면 시스템의 눈을 피하며 레이드 보스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잘하면 터무니없는 괴물이 될지도 모르겠어.’

대전 지역의 플레이어들이 막지 못하고 전멸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자신의 아바타가 죽은 신들이 노발대발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궁기를 강화시켰다는 건 모를 테니까.

“그럼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어.”

화면에 비친 궁기의 털색은 점차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타락한 기린의 털색과 같았다.

***

2주 후, 대전.

대전 시청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득실득실 모여 있었다.

레이드 보스 등장시간에 대비해서 플레이어들이 몰려든 것이다.

이미 근처는 인원이 통제되고 있었다.

“근데 군인과 경찰은 왜 온 거예요?”

이전에 왔을 때보다 확연히 많은 숫자의 군인과 경찰이 보였다.

심지어 탱크까지 보였다. 저건 어딜 봐도 레이드 보스를 상대로 싸우려는 태도다.

“저번에는 갑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지.”

“몬스터는 총화기는 안 통하지 않아요?”

“아주 안 통하는 건 아니야. 지구에서 만든 무기들은 마력이 담겨져 있지 않아 피해가 미비할 뿐 충격은 어느 정도 들어가.”

그렇다 해도 레이드 보스 정도가 되면 대부분의 병기는 무의미하다.

핵미사일과 같은 핵병기라면 타격을 주긴 하겠지만, 그런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죽이지도 못할뿐더러, 도시만 파괴할 뿐이니까.

“아마 거리에서 돌아다니던 몬스터들을 상대로 시험해 봤던 거겠지.”

이전에 왔을 때 거리를 통제한 건 그런 연유였을 거다.

그 근방은 몬스터가 나타나는 장소였으니, 그곳에서 무기를 시험해 보고 이 정도면 먹힌다 싶었을 거다.

“그냥 플레이어들에게 맡겨두면 되지 않아요?”

“그럴수록 플레이어들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니까.”

권력의 근간이 되는 건 결국 무력이다.

슬슬 초인의 영역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을 거다.

“오픈 월드가 되며 간신히 되찾은 권력을 다시 잃기 싫은 거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군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비장했다.

플레이어들을 통해 오늘 레이드 보스가 등장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하아.”

지수는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잘못돼서 피해를 보는 건 명령한 사람이 아닌, 이곳에 있는 군인들이었으니까.

“우선 플레이어들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자.”

“네.”

괜히 군인들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저번에 마주쳤던 사람이라도 있으면 상당히 난감해질 게 분명했다.

“레이드 보스 같이 잡으실 분 구합니다! 여기 힐러 있어요, 힐러!”

“상처를 치유하는 스킬을 지니신 분 급구요. 오시면 포인트도 드립니다!”

어느 게임이나 그렇듯 힐러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특히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스킬은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플레이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생각해 보니 성녀와 미리 인맥을 터두는 것도 좋겠는데?’

전생에 ‘성녀’라고 불리던 플레이어는 혼자서 수 백, 수 천 명의 사람을 한 번에 치유할 수 있었다. 그 압도적인 힘에 신의 기적이라 믿으며 종교까지 생겼을 정도다.

‘아니, 아니다. 성녀는 조금…….’

성녀라는 호칭만 들으면 굉장히 자애롭고 희생적인 이미지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을 돕는 걸 좋아하고 천상 간호인인 건 맞지만 조금 문제가 있었다.

아니, 상당한 문제가.

“하도 주변에서 떠받든 탓이지.”

“네?”

“아무 것도 아냐.”

어차피 지금쯤이면 아직 제주도에 갇혀 있을 시기인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도 없네.

“저기 형씨.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파티하지 않을래?”

길을 걷다보면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죄송합니다. 따로 파티할 생각은 없어서.”

“하이고, 여자 앞에서 멋진 모습보이고 싶나본데. 그러다 죽어!”

파티라고 하지만 내가 지수와 맺고 있는 ‘파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이 말하는 파티란, 말 그대로 함께 사냥하는 그룹일 뿐이다.

그냥 게임 용어가 현실에 정착한 거라고 보면 된다.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하여간 저러다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몇몇 남자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냥 내가 아니라 지수에게 파티하자고 해라.’

대놓고 흑심이 담긴 눈으로 말하는데 누가 파티를 하고 싶겠냐?

나는 보지도 않고 지수에게 눈이 아주 박혀 있더만.

“정말 저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네요.”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지수의 얼굴이 더더욱 싸늘해졌다.

언뜻 보면 눈동자에 붉은 기운까지 비치고 있었다.

‘화났구나.’

가만히 두면 한바탕 싸움이라도 할 기세였다.

하긴 계속 그런 시선을 받았으니 기분이 나쁘겠지.

“어차피 레이드 보스가 나오면 저런 놈들이 먼저…….”

적당히 지수를 달래주기 위해 입을 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굳은 얼굴선에, 믿음직함과 간사함이 동시에 나타나는 신비한 얼굴.

목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링이 있었다.

그 링은 바로 내가 선물해 준 물건이었다.

“어? 저거 박동권 아냐?”

현균과 함께 있어야 할 녀석이 뜬금없이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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