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41화 (41/332)

# 41

041. 정점(頂點) (1)

“이 사람은 찾으면 연락 달라고 했으면서 왜 답변도 없어?”

민아는 쪽지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제 보낸 쪽지에 선명히 찍혀 있는 ‘읽음’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기껏 신림까지 가서 찾았는데 감사의 인사 한 줄이 없다니.

“언니, 왜 그래요?”

“별거 아냐.”

옷깃을 잡아당기며 묻는 린의 말에 민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짜증난 대상은 세한이지 린이 아니었으니까.

“고민이야…….”

“아저씨는 또 뭐가요?”

“뭔가 그럴싸한 기술명이 안 떠올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한없이 진지한 루크의 말에 민아는 그저 황당했다.

스킬을 쓸 때 스킬명을 말하는 것도 거부감이 들건만, 따로 기술명까지 정하려 들다니.

“아빠! 그만 좀 해! 대체 그런 걸 왜 하는 거야!”

“왜냐면, 멋있으니까.”

“하나도 안 멋있어!”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는 민아의 말에 루크가 조금이지만 풀이 죽었다.

“여신님은 좋아하셨다만…….”

“여신?”

이건 또 의외의 말인지라 민아가 황급히 되물었다.

“아, 네. 놀랍게도 아빠는 신의 아바타거든요. 여신님이랑 죽이 잘 맞는 거 같아요.”

투덜거리는 린의 말에 민아는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놀란 건 루크가 신의 아바타라서가 아니다.

‘여신’이라고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거다.

‘신들은 자기 정체를 숨기지 않나?’

보통은 대화도 하지 않으며 만약 메시지를 보내도 자신의 게임 속 닉네임으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이 남신인지 여신인지. 혹은 어떤 계통의 신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민아는 자신 정도면 신과 꽤 친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간간히 옵저버를 통해 교류하기도 했고, 메시지를 통해 꽤 친근감을 표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걸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여신님이 말하셨다. ‘영웅’이라면 자신만의 심볼을 지녀야 한다고. 고로 멋진 기술명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예를 들어 슈퍼 히어로 영화를 봐라. 다들 멋진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그건 영화나 만화잖아.”

루크는 미국에 있을 시절 슈퍼히어로 영화나 만화를 즐겨보고는 했다.

그들의 정의감에 공감했고, 그랬기에 군대에 입대하여 활동한 전적도 있었다.

한국에 오게 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린 테일러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부끄러운 아버지예요.”

“재밌으니 괜찮잖아.”

확실히 괴짜인 건 맞지만, 차라리 저런 건 긍정적이고 나쁘지 않다.

조금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적당히 흘려 넘기면 그만이다.

“그보다 신림에서 등장할 레이드 보스를 잡으려고?”

“네. 퀘스트는 깨야 되니까요, 솔직히 무섭지만…….”

이제 겨우 13살이라고 했던가.

충분히 무서워할 만도 했다. 민아는 지금까지 많은 플레이어들을 보았지만, 가장 어린 건 단연 린이었다.

‘나도 꽤 어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중3인 시우도 봤고, 이제는 초등학생인 린을 보니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대체 플레이어들을 정하는 기준이란 무엇일까.

민아는 문득 작은 의문이 들었다.

띠링!

“어, 쪽지 왔다.”

비어 있던 쪽지함에 한 개의 쪽지가 날아왔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어디야.」

“뭐야, 이게.”

기껏 온 쪽지라는 게 겨우 이거라니.

물론 민아도 간결하게 보내긴 했지만, 그거야 더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빠는 적어도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라도 덧붙여야 되는 거 아냐?’

입이 부루퉁 내밀며 민아는 답장을 보낼지 고민했다.

말하자면 조금 삐진 거다.

‘에이, 여기서 안 보내봐야 괜히 속 좁은 사람 같잖아.’

괜히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애처럼 보일 수도 있고.

고민하던 민아는 결국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적어서 보냈다.

보낸 쪽지는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양심이 있으면 적어도 이번에는 제대로 답장을 하겠지.”

팔짱을 끼고 쪽지함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기를 10분, 20분이 지났지만 쪽지함은 텅 빈 그대로였다.

“와, 진짜 너무해.”

내가 무슨 자기 심부름꾼인가?

“뭐가 너무한데.”

“쪽지 답장을 안 보내잖……아?”

언제 왔는지 세한이 서 있었다.

그것도 자기 바로 옆에.

“뭐, 뭐야? 대체 오빠 언제 왔어? 대전에 간다며.”

“대전에서 방금 막 올라왔다.”

세한의 전신은 땀투성이였다.

일반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치를 지닌 세한이 저렇게 땀을 흘릴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빨리 달려왔다는 말인가.

“안 본 사이 많이 친해졌네요?”

“어, 언니도 왔구나?”

“네. 간만이내요.”

온 건 세한만이 아니었다.

지수 또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언니는 좀 어려운데.’

전에는 관심도 없다는 시선이었는데, 지금은 묘하게 자신을 관찰하고 있어 더 오싹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에 봤던 살벌한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점일까.

“근데 둘 다 검은 옷 진짜 좋아한다.”

세한은 검은 외투에 검은 바지였고, 지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본다면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할 만한 복장이다.

“검은 옷은 때가 안타잖아.”

“맞아요. 검은 옷은 피가 튀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아서 편해요.”

뭔가 비슷하면서 다른 이유였다.

어떠냐면 후자 쪽은 들었을 때 조금 오싹하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지수도 그 말을 하고 조금 아차 싶었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몬스터랑 싸우면 피가 많이 튀니까요.”

“하긴 그렇지.”

‘좀 다른 거 같은데.’

진지한 얼굴로 납득하는 세한에게 민아는 한마디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둘 다 민아 양과 아는 사이입니까?”

세 명의 대화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루크가 끼어들었다.

세한은 갑자기 끼어들은 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아, 예. 루크 씨.”

“오, 이름을 알고 계셨던 건가요?”

“네, 쪽지로 들었습니다. 전 김세한이라고 하고, 이쪽은 한지수입니다.”

세한은 간단히 자신과 지수를 소개했다.

물론, 쪽지에 이름 따위를 적은 적 없던 민아는 또 이 사람 말을 지어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거 같은데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이름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근데 아무래도 루크는 세한을 만나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혹시 린과 아는 사이인가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한테 뭘 제대로 설명해 준 적이 있어야지.’

자신이 그렇게 못미더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민아.”

“왜, 또 뭐 시킬 거라도 있으셔?”

“그게 아니라 고맙다는 의미에서 선물을 좀 주려고.”

세한은 인벤토리에서 큼지막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미스릴 광석이다. 먹으면 도움이 좀 될 거다.”

“미, 미스릴?”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거람.

민아는 냉큼 주머니를 받아들고 열어보았다.

시린 은빛을 발하는 금속이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딱 판타지에서나 나올 색감을 지닌 금속이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마력으로 현대의 금속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저번에 ‘불가사리’ 스킬을 얻었던 민아로선 이거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고, 고마워.”

“됐어. 오히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칭찬을 하는데다 귀한 미스릴까지 건네주니 가슴이 찡해졌다.

“……그보다 어서 알을 깨워야 하지 않아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지수가 들고 있던 부화기를 내밀었다.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알의 수명은 실시간으로 줄어가고 있었다.

“그래야지. 음, 저기 그러니까, 린 테일러 양?”

“네, 네?”

세한의 말에 루크의 뒤에 숨어 지켜보던 린이 크게 움찔했다.

“지금 이 부화기 안에는 성수의 알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우기 위해선 테일러 양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 도움이요?”

린은 세한과 부화기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알은 부화시키는 거랑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이 가득 담겨있는 눈을 보며 세한은 뭐라 설명할지 고민했다.

‘다짜고짜 피를 달라고 하면 분명 의심하겠지.’

이곳에는 린만 있는 것도 아니라 루크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지만,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린의 피를 달라고 하면 분명 좋은 반응이 돌아오진 않을 거다.

세한은 적어도 테일러 부녀에게는 나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네, 별건 아니고 여기에 손을 올려주시면 됩니다.”

“소, 손을 말인가요?”

“네.”

상당히 뜬금없는 말에 린의 눈에 의심이 가득 담겼다.

하지만 세한의 얼굴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얼굴이었다.

……조금 인상이 나쁘긴 하지만.

“벼, 별일은 없는 거죠?”

“물론이죠.”

그래도 역시 좀 불안한지 린의 눈이 흘깃 루크를 향했다.

“하하! 나쁜 청년 같지는 않으니 한번 해보렴, 린.”

“네에.”

린은 천천히 손을 뻗어 부화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것을 인식한 부화기에서 작은 바늘이 튀어나와 린의 손가락을 가볍게 찔렀다.

쿡!

“아, 따가!”

린은 황급히 손을 떼며 울상을 지었다.

“히잉, 피나.”

“아마 부화기에 모난 부분에 긁힌 모양이네요.”

“뭔가 나와서 찌른 거 같은데…….”

“설마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세한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린의 핏방울을 흡수한 부화기는 조금 연한 금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미리 소리를 꺼둔 터라, 부화기에서 떠오르는 알림은 오직 세한만이 볼 수 있었다.

「촉매의 정보를 분석 중입니다.」

「촉매제를 성수 ‘기린의 열매’에 적용중입니다.」

「성공적으로 촉매제의 힘이 ‘기린의 열매’에 적용되었습니다.」

「부화에 필요한 영양분을 넣어주세요.」

성공이다.

세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영양제를 넣고 부화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며칠이나 걸리려나.’

다른 것도 아닌 기린이니 아무리 빨라도 열흘 이상은 걸린다.

그러니 세한은 그동안 네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오빠, 결국 이것 때문에 그리 급하게 온 거야?”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민아는 알기 힘들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민아는 슬쩍 린과 루크를 본 뒤에 작은 목소리로 세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수의 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것 때문에 이 두 사람을 찾으라고 한 거였어?”

“아, 그건 아니야.”

린의 피가 필요해진 건, 기린의 알을 얻고 난 이후다.

“그럼?”

“그건……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어.”

“뭐야, 궁금하게.”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야. 그동안 되도록 이 두 사람과 함께 다녀줬으면 해.”

진지한 얼굴로 세한이 부탁하자, 민아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어디에 얽매이는 건 질색이지만, 세한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만했다.

왜냐면 부탁하면 부탁한 만큼 보상을 두둑이 챙겨주니까.

“좋아. 알겠어. 대신 알지?”

“물론이지.”

민아의 성격은 아주 잘 알았다.

적당히 보상만 잘 챙겨주면 이보다 쓸 만한 녀석도 없었다.

‘그럼 이제 하나 남았군.’

세한은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이후, 보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시스템’이 관여할 시 자신만이 아닌 더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저번에는 센티넬이 하나 추가되고, 카라스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조금 더 강해진 정도였지만 다음번에는 더 심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예상보다 빨리 황도 12궁이 내려온다거나.

‘만약을 대비해야지.’

세한은 울상인 얼굴로 손에 뭍은 피를 닦고 있는 린을 보았다.

저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얼굴에 비해선 많이 어렸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점들이 많이 보였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알아볼수록 가슴이 쓰렸다.

전생에 나는 왜 이 아이의 힘을 좀 더 빠르게 알아보지 못했을까.

‘인류의 정점.’

신들조차도 경악한 최고, 최강의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

그것이 바로 린 테일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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