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040. 파멸의 첨병 (2)
「……」
궁기는 우리를 살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길게 찢어진 청색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
머리의 크기만 족히 5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검은 호랑이.
놀라운 점은 이게 아직 성체가 아니라는 거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걸.’
좀 더 찾는데 고생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설마 친히 마중을 나올 줄이야.
‘저쪽이로군.’
부서진 건물의 아래에 깊은 지하가 보였다.
이렇게 거대한 호랑이가 숨어 있을 정도면, 아래에는 던전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단순한 건물의 지하로는 이 거대한 괴수가 몸을 숨길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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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4 : 파멸의 첨병
혼자서는 감히 대항할 수 있는 재해가 당신의 앞에 다가왔다.
모두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아야만 한다.
난이도 C 제한시간 도시가 모두 파괴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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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퀘스트 내용도 떴다.
여태까지 본 퀘스트명 중에 가장 심플하고 비장하다.
레이드 보스가 그만큼 강한 존재라는 거지.
센티넬을 계속 상대했던 내 입장에서야 솔직히 김이 좀 빠지지만 말이다.
“네 번째 퀘스트가 떴는데요? 이거 우리 둘이 잡아야 되는 거예요?”
“설마, 아직 다른 사람들은 안 떴을 거다. 우리가 예상보다 녀석을 빨리 발견해 버린 탓에 우리에게만 먼저 퀘스트가 주어진 거야.”
“말하자면 선행학습 같은 거네요.”
“비슷하지.”
아무튼 이제 어쩐다.
녀석과 직접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마땅한 무기도 없다. 오면서 안전지대에서 구매한 창이나 검 정도가 전부다.
녀석이 별자리였다면 초월의 증명이라도 사용했겠지만, 녀석은 레이드 보스지 별자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쿨타임도 안 돌았지만.
‘파일 벙커라도 있었으면 한 방 먹여줬을 텐데.’
아쉬워해도 부서진 물건이 돌아오진 않는다.
나중에 시우에게 수리를 맡겨 둬야지.
“기회를 봐서 도망치자. 아니면 한번 싸워볼래?”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우선 정찰해서 녀석의 행동반경을 측정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르르르.」
우스운 점은 녀석도 우리를 가만히 보고만 있다는 점이다.
사흉이라는 겁나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길길이 날뛰며 덤벼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심히 얌전했다.
“어쩌면 한번 싸워 봐도 괜찮을지 몰라.”
“진심이에요?”
“저 녀석도 우리를 쉽게 봤으면 이미 덮쳤겠지. 아무리 활동시간이 안 됐다고 해도 공격을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아, 잠깐. 피 냄새가 나요.”
지수가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럴수록 눈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쟤 지금 다쳤어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당한 부상을 입은 게 분명해요.”
피 냄새가 난다는 말에 나도 숨을 깊이 들이쉬어 봤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얘는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단 말이야.
이것도 다 천살성의 효과인가? 하지만 천살성은 보급형이긴 해도 나도 얻었는데.
「크아아아앙!」
속닥속닥 잡담을 나누는 우리가 거슬렸는지 궁기가 포효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포효소리에 우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피해!”
궁기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앞발이 지면을 내리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변의 건물이 흔들렸다.
내가 있던 자리에 궁기의 발톱이 파고들었다.
단단한 아스팔트가 두부처럼 찢겨졌다.
‘상처가 난 곳이 허리구나.’
지수의 말이 옳았다.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빠지자, 무언가에 깊이 찔린 것 같은 상처가 들어났다.
마치 길다린 뿔에 찔린 것 같은…….
“뭐, 뿔?”
설마 이 녀석 벌써 마주친 건가?
「──!」
녀석은 우리가 공격을 피하자, 그대로 미련 없이 달려갔다.
건물을 몇 체나 무너트리며 달려가는 모습에 절로 기가 질릴 정도였다.
“가버렸네요.”
바짝 긴장하고 있던 지수로선 어이가 없는지 황당한 얼굴이었다.
만약 녀석의 상처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다.
‘분명, 뿔. 뿔에 찔린 상처였어.’
설마 아니겠지.
분명 내가 들은 정보는 좀 더 이후였다.
‘아니, 애초에 전생에 들은 정보가 오류였을지도 몰라.’
정확한 정보는 ‘레이드 보스 타이머’가 돌기도 전에 둘 중 하나가 죽었다는 말뿐이다.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솔직히 불확실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세 번째 퀘스트를 끝내자마자 바로 온 거고.
“젠장.”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달렸다.
방금 전, 궁기가 튀어나왔던 건물의 지하다.
“세한 오빠?”
갑자기 내가 달려가자, 지수가 급히 따라왔다.
의문이 가득담긴 눈에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궁기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던전인 건 분명했다.
레이드 보스는 이곳에서 던전을 형성하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고 있었던 거다.
다만, 그 레이드 보스는 궁기가 아니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가 그 증거였다.
궁기의 흉험한 분위기와 달리, 이곳의 몬스터들은 맑고 깨끗했다.
분명 이곳에 있는 레이드 보스의 영향을 받은 걸 거다.
우리는 아래로, 아래로 달려갔다.
던전의 최심부, 그곳에 도달한 순간 욕설이 치밀어 올라왔다.
“염병…….”
거대한 시체가 있었다.
아까 보았던 궁기와 엇비슷할 정도로 커다란 존재.
검은 털을 가지고, 말과 비슷한 형상을 하였으나 머리에 길쭉한 뿔을 지닌.
길조를 상징하는 일각(一角)의 성수(聖獸)
기린[麒麟]의 시체였다.
***
기린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숭상을 받았던 성수다.
본래 기린은 어떤 존재라도 감히 해하지 않기에 레이드 보스로는 도저히 써먹을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건 아마, 타락한 기린이었겠지.
오염됐고 노쇠한, 그럼에도 본래의 신성함을 간직한 마수.
“기린이라면 하얀 털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나요?”
“본래는 하얀 털이었을 거야.”
검은 털이라는 것 자체가 올바른 기린이 아니라는 증거다.
천천히 기린의 시체로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궁기에게 당한 흔적이 전신에 여실이 남겨져 있었다.
‘뿔도 없어.’
정확히는 반으로 뚝 부러져있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잠깐, 설마…….”
아까 보았던 궁기의 상처.
그곳에 부러진 뿔이 박혀있었던 건가?
뿔은 기린이 가진 힘의 근원이다. 노쇠하고 타락한 기린이라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게 궁기의 몸에 박혀 있는 상태라면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단순히 상처를 헤집는 걸로 끝난다면 좋겠지만, 만약에 궁기가 뿔의 힘을 흡수한다면 끔찍한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전생에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번엔 내가 대전에 있다.
즉 시스템이나 운영자가 관여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는 거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궁기의 행적을 찾아, 기린을 죽이는 걸 막을 생각이었는데.
“하, 이거 망했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답한 한숨을 토하자, 지수가 슬며시 물었다.
“오빠는 기린이 목적이었어요?”
“맞아, 정확히는 기린의 뿔이 필요했지.”
상서로운 힘을 간직한 기린의 뿔이 필요했다.
만약 이것을 지금 구하지 못하면 ‘그곳’에 한참이나 지나야 들어갈 수 있다.
영물이나 성수가 있는 장소에 갈 수 있는 건 몇 개의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 해야 되니까.
‘이제 어쩐다냐.’
만약을 위한 보험으로 그것은 반드시 빠르게 얻어둬야만 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기린의 뿔이 없다면, ‘그것’을 얻기 위한 장소로 갈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 여기 안을 둘러보는 게 좋지 않아요? 던전이라면 뭔가 보상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별로 급이 높은 던전이 아니야. 기린의 뿔을 대체할 만한 게 나올 리 없잖아.”
“그래도, 혹시 라는 게 있으니…….”
그런 형편 좋은 물건이 던전 보상으로 나올 리가 있나.
‘후우, 그래. 보상이라도 챙겨가자.’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레이드 보스가 보금자리로 삼던 던전이니 뭔가 특별한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역시나 그럼 그렇지.”
당연히 특별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얻은 물건은 상당량의 미스릴 광석뿐.
오리하르콘을 제외하면 가장 단단하고 뛰어난 금속이긴 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애매하게 좋아서 짜증만 치밀어 오를 뿐이다.
“오빠.”
“왜.”
지수도 뭔가를 챙겨왔는지 품에 뭔가를 안고 있었다.
“저 알 같은 거 주웠는데요.”
“알?”
“네.”
“던전에 무슨 알이 있다고.”
“있잖아요, 여기.”
지수는 안고 있던 알을 내 앞에 쭉 내밀었다.
정말로 알이었다.
옅은 금빛이 흘러나오는 신비한 알.
가느다란 고동이 알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
뭐야, 이거.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지나치게 놀란 탓에, 전신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이, 이거 어디서 났어?”
“저쪽에 있었어요.”
지수가 가리킨 곳은 쓰러진 기린이 시체였다.
“시체 아래에 옅은 맥박이 들렸어요. 그래서 파보니까 이런 게 나오더라고요.”
“와.”
죽은 기린의 시체 아래를 볼 생각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아래 묻혀 있는 알의 맥박을 느꼈다는 게 더 놀랍다.
뭐,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이것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고맙다.”
“네?”
“정말로 고마워.”
“아, 아니요, 뭘요. 오빠가 이렇게 저한테 고마워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지수가 배시시 웃었다.
지금만큼은 천사의 미소가 따로 없었다.
왜냐면 지수가 들고 있는 알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바로 기린의 알.
오히려 기린의 뿔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
기린의 알, 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열매다.
이곳을 어미 기린이 오랫동안 품으면 그 안에서 새로운 기린이 태어나게 된다.
수컷이면 기(麒), 암컷이면 린(麟).
그것을 총칭하는 이름인 기린.
“그럼 몬스터의 알이라는 거잖아요.”
“기린은 본래 몬스터가 아니야. 성수지.”
인간에게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적은 아니었다.
“그럼 이걸 이제 어떡하려고요? 부화시키려면 결국 어미 기린이 필요한 거잖아요. 이거 맥박도 점점 약해지는데요.”
“알아.”
전생에는 아마 새로운 기린이 탄생하지 못했을 거다.
그 땅속에 묻혀 조용히 생을 마감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게는 DLC 상점이 있었으니까.
‘이것도 구매하고. 저것도 구매하고……. 아, 이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조금이라도 필요해 보이는 것이라면 바로 구매버튼을 눌렀다.
포인트는 넘치도록 있었다.
그토록 많이 썼지만, 얻은 것도 많아서 처음이랑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이 정도면 됐나.”
“이런 건 또 어디서 났데요.”
“그야 샀…… 이 아니라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지.”
“이런 걸요?”
지수가 들어 올린 건 팻용 기저귀였다.
“원래 퀘스트 보상은 뭐가 나올지 모르는 법이지.”
“저는 이런 퀘스트 보상을 받으면 죽고 싶을 텐데, 오빠는 용케 살아 있네요.”
지수는 심히 감탄한 것 같았다.
‘음, 조금 많이 사긴 한 것 같군.’
기린의 알을 얻었다는 생각에 조금 충동구매를 해버렸다.
[성수를 깨워보자! 최고급 부화기]
[건강한 팻을 위한 최고급 영양 드링크]
[팻을 위한 최고급 기저귀.]
[멋진 성수를 위한 최고급……]
등등, 대략 열 가지가 넘는 물건들이 내 앞에 널려 있었다.
여기가 밀폐된 방이라 다행이지,
옵저버들이 이 물건들을 봤다면 확실히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이걸로 기린의 알을 부활시키는 거예요?”
“당연하지.”
커다란 구멍 안에 기린의 알을 넣고 뚜껑을 닿았다.
그러자 부화기에서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촉매제로 플레이어의 피를 넣어주세요. 촉매가 된 피는 부화한 성수나, 영물 등 각종 팻의 재능과 능력치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상치 못한 알림이다.
이거 피를 넣은 사람이 팻의 주인이 되는 건가?
설명서를 급히 읽어보자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능력치나 재능에만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이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나는 별생각 없이 내 피를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내 피를 넣기엔 좀 아깝지 않나?
내 재능은 나쁘지는 않지만 솔직히 크게 대단할 건 없었다.
‘차라리 지수의 피가 나을지도 몰라.’
지수의 재능은 진짜다.
능력치가 올라가는 속도고 그렇고, 스킬을 익히는 속도도 평범한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분명 천재인 건 확실했다.
‘그렇지. 시작부터 스킬도 천살성을…….’
아, 천살성이 걸리네.
기린이 천살성 가지고 태어나는 건 조금.
‘그럼 따로 누가 있나.’
부화기에 넣어두긴 했지만 알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대략 이틀 정도? 그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를 찾기는 힘들었다.
‘민아? 음, 민아가 괜찮을 것 같네.’
재능도 있고 능력치도 우수했다.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건 양육으로 어떻게든 될 거다. 그렇게 결정하며 쪽지함을 열었다.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 된 기능 중 하나였는데, 다른 플레이어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이다.
“어라.”
쪽지함을 열자, 이미 온 쪽지가 하나 있었다.
마침 또 민아에게서 온 쪽지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는걸.’
쪽지를 열자 그곳에는 딱 네 글자만 적혀있었다.
「찾았어요.」
라는 간결한 말.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튀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