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039. 파멸의 첨병(1)
레이드 보스는 단순한 보스나, 센티넬과는 다르다.
일반 보스처럼 세력을 구성하지 않지만, 훨씬 강하다.
센티넬보다는 약하지만, 피해 규모는 센티넬보다 크고 활동범위도 넓었다.
대충 보통 보스가 스무 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덤벼서 잡을 수 있다면, 레이드 보스는 백 명에 가까운 숫자가 필요했다.
뭣보다 레이드 보스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센티넬로 진화하게 된다.
무서운 점은 일정구역 내에서 못 움직이는 센티넬과 달리 제한이 없다는 것.
사실상 퇴치하지 못한 레이드 보스는 ‘재해’나 마찬가지다.
전생에 센티넬 못지않게 인류를 죽인 몬스터가 레이드 보스들이었으니 말 다했지.
“332시간 27분…….”
맵에 표시된 시간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었지만 그럴 수 없다.
대전에 있는 레이드 보스는 둘이지만 며칠 내에 한 마리가 죽게 되니까.
플레이어가 아닌, 같은 레이드 보스에 의해서.
‘녀석들의 본거지가 아마 둔산이었나.’
아직 맵에 표시된 시간은 한참 남아 있었지만, 늘 그렇듯 페이크다.
이미 레이드 보스들은 각 지역에 등장한 지 오래이며 숨을 죽이고 있다.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데 남은 시간이 332시간이라는 거지.
애초에 알림이 떴을 때도 ‘이제부터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된다.’라고 언급했으니 당연하잖아.
“오빠!”
역에서 나오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역 2층에서 빠른 속도로 뛰어내려오는 여성이 보였다.
새까만 원피스와 그에 어울리는 까만 앵클부츠를 신은 지수다.
“어, 뭐야. 너 언제 왔냐?”
“너무하네요. 같은 기차타고 왔거든요?”
지수는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째려보았다.
같은 기차라고? 왜 난 몰랐지.
그보다 내가 그 기차에 탄 건 어떻게 안 거야.
“같은 파티원의 위치는 알 수 있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맞아, 그런 기능이 있었지.”
하도 안 써서 까먹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맵’ 덕에 파티원의 위치까지 표시되고 있었다.
여태 지수가 근처에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근데 너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부모님을 만날 생각이었거든요.”
담담한 지수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오빠가 생각하시는 거랑 달라요.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살아계시거든요.”
“……그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위로를 해줘야 되나 고민이 됐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만나주시지 않았어요.”
“왜?”
“저도 몰라요. 위치를 물어도 알려주시지 않더라고요.”
지수는 연신 툴툴 거리며 바닥의 돌을 툭, 발로 건드렸다.
“아무튼.”
지수는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왜 대전에 온 거예요? 갑자기 오빠가 대전행 기차를 타서 놓칠 뻔했다고요.”
“계속 확인하고 있었어?”
“네. 계속.”
“그럼 좀 빨리 오지 그랬어? 그럼 나도 한결 편했을 텐데.”
지수가 있었다면 까마귀랑 싸울 때도 한결 쉬웠을 거다.
“원래는 바로 오고 싶었는데, 오는 도중에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해서, 그거 서둘러 끝내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어디서?”
“강서구에 갔는데 갑자기 퀘스트가 발생했어요.”
그쪽이면 아마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걸 막는 디펜스 퀘스트였을 거다.
플레이어간의 협동이 필요한 퀘스트지만…….
“거기 이상한 놈들 많지 않았냐?”
“네. 있었어요. 지금은 없지만.”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다.
내 시선을 받은 지수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강서구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파벌과 세력이 여럿 존재했다.
전생에는 그 세력들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하려다 문제가 생겨 대량의 사망자가 나왔다.
‘지수가 엮이며 뭔가가 달라진 건가?’
아무래도 나중에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뭐, 내가 대전에 온 건 알다시피 대전에 있는 레이드 보스를 잡기 위해서야.”
“역시 그랬군요.”
지수는 납득한 얼굴로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더 묻지는 않냐? 예를 들어 서울은 네 마리인데 왜 두 마리밖에 없는 대전에 왔다거나.”
“오빠가 언제 이해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확실히 할 말이 없다.
“성심당 때문에 왔다고 해도 별말 안 했을 거예요.”
얘는 나를 좋게 생각하는 건지 나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면 되요?”
“둔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 금방이었다.
버스는 아직 운행하지 않지만, 지하철과 기차는 게임의 요소로서 받아들여진 상태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동하면서 이야기해 줄게.”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다는 눈치였다.
***
대전 둔산.
본래면 상당한 번화가였을 거리였지만, 지금은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몬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군인과 경찰들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사회가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더니 정말이네요.”
“아무래도 오픈월드가 되었으니 무작정 퀘스트만 진행할 수는 없겠지.”
메인 퀘스트는 계속해서 주어지겠지만 이제 어느 정도는 텀을 둘 것이다.
각종 서브 퀘스트나 이벤트도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게임을 재밌게 하려면 들러리들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들도 생존할 만한 여건을 갖춰야했다.
“혹시 두 분은 플레이어이십니까?”
어느 쪽으로 가야되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군인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예. 맞습니다.”
“……! 아, 역시 그렇군요. 그럼 성함과 주민등록번호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현재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을 조사하라는 말이 나와서.”
경찰은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아마 윗선에서 이야기가 나온 거겠지.
겨우 한숨을 돌리자마자 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할 준비를 하는 거다.
‘멍청하긴.’
일반적인 플레이어야 순순히 응하겠지만, 꼭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다 억지로 통제할수록 플레이어들의 반발도 커질 거다.
그럼 그런 플레이어들을 누가 막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
이미 공권력은 플레이어들에게 무의미하다.
그걸 이번 레이드 보스에서 똑똑히 알게 될 거다.
연합한 플레이어들의 힘을.
“저, 저기요. 그냥 가지 마시고 성함과 주민등록 번호를……!”
나는 경찰을 가볍게 무시하며 걸었다.
어차피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가야 되기에 거침이 없었다.
“정지! 이곳은 통제구역입니다! 플레이어분들이라고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 서십시오!”
총구가 일제히 나를 향해 겨눠졌다.
총화기는 현재의 플레이어들에겐 꽤 유의미한 억지력이다.
현대의 병기다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과 달리, 플레이어들의 몸은 총알을 막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E(100)만 되더라도 총알은 플레이어들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의 나는 총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저기 보이는 건물로 뛰어.”
“네.”
나는 지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한 뒤, 천천히 다리에 힘을 넣었다.
무릎을 굽히고 용수철처럼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쿵!
옅은 진동이 울리며 내 몸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족히 수 미터를 공중으로 뛰어올라, 근처의 전봇대를 밟은 다음, 건물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허.”
총구를 겨누고 있던 군인들을 닭 쫓던 개처럼 도망가는 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포음은 들리지 않았다.
건물을 타고 도망치는 나와 지수에게 총격을 가해봐야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할 뿐이었으니까.
탁.
건물의 옥상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군인이나 경찰들의 수가 상당히 많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 보자…….’
일일이 찾아보기엔 길도 복잡하고 건물의 수도 많았다.
“여기 어디에 레이드 보스가 있다는 거예요?”
“기다려 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인지라 제대로 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까마귀의 눈.”
내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새까만 깃털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깃털들은 허공에서 뭉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우와. 이런 스킬은 또 언제 익혔어요?”
“얼마 안 됐어.”
솔직히 숫자를 더 늘리고 싶었지만,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섯 마리 정도가 한계였다.
우선 두 마리는 저쪽으로 보내고 나머지 세 마리는 남쪽과 동족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까마귀들은 내 통제에 따라 흩어졌다.
마치 손가락을 움직이는 감각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까마귀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목표로 한 흔적만 찾는다면 충분했으니까.
“나도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오빠는 다르네요.”
“아직 멀었지.”
아직 까마귀 자리의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터라 내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간만에 지수의 능력치나 확인해 볼까?’
어차피 시간도 비는 터라 상관없을 것 같았다.
지수에게 그리 이야기하자, 지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거절이라는 말을 모르나.’
편하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럴 까봐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지수의 능력치를 보는 순간 싹 사라졌다.
“허.”
무심코 감탄이 흘러 나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왜요? 혹시 오빠 기준에 못 미치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지수가 슬쩍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놀란 건 기준에 못 미치는 게 아니라, 기준치를 너무 초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여태 뭘 한 거야?’
능력치가 나 정도는 아니어도 전체적으로 고르게 높았다. 대부분이 E랭크 50을 넘었고.
힘이나 민첩의 경우엔 E랭크 90이 넘었다.
한계치가 올라간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적이었다.
스킬도 어떠냐고 하면 하나같이 흉흉한 스킬이 즐비했다.
‘돌겠네. 혈천수라공이 왜 3성이야?’
이정도면 마성(魔性)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혈천수라공을 3성까지 익히게 되면 뭔가 전조가 보여야 할 텐데 지수의 얼굴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인체이해에, 급소타격을 익혔고, 거기에 재생은 C까지 올렸어?’
까마귀의 공격에 갈가리 찢겼던 내가 이제 E랭크가 됐는데 지수는 C랭크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뭐. 내가 재생 랭크를 못 올린 건 크게 다칠 일이 없어서라지만.’
그렇다 해도 C랭크까지 올린 건 심하게 빨랐다.
“야, 너.”
“왜요?”
평범하게 몬스터를 잡고, 메인 퀘스트를 깨는 것만으론 이렇게 강해지지 못한다.
재생을 C랭크까지 올렸다는 건 보통 몸을 억세게 굴렸다는 거나 마찬가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따끔.
“아야.”
까마귀에서 신호가 왔는지 목 뒤가 따끔거렸다.
“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지수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하기도 좀 그랬다.
……어쩔 수 없지.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신호가 왔어. 저쪽이야.”
“아하. 저는 또 뭔가 상처라도 입은 줄 알았잖아요.”
신호가 온 방향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기서 대략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골목의 뒤편.
주택가에 연결된 장소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하얀 깃털이랑 발톱자국이네요. 이 크기는 보통 몬스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레이드 보스의 흔적이지.”
“네? 레이드 보스가 벌써요? 타이머에 표시된 시간은 아직 멀었잖아요.”
“언제부터 타이머를 믿었다고 그래? 대부분은 눈속임이야, 그거.”
“그건 그렇긴 한데…….”
지수는 떨어진 깃털을 들어올렸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깃털 한 장이 지수의 몸통보다 컸다.
“커다란 날개와 발톱자국, 그럼 조류형과 야수형 몬스터겠네요.”
“아니, 이건 한 마리에서 나온 흔적이야.”
“네? 아무리 봐도 이건 새의 발톱 자국은 아닌데…… 응?”
그렇게 말하던 지수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몸을 긴장으로 굳히며 몸을 옆으로 미끄러트렸다.
콰아앙!
측면에 있던 건물을 부수며 거대한 동물의 앞발이 날아왔다.
발톱 하나하나가 성인의 남성보다 거대해서, 스치기라도 하면 몸이 갈기갈기 찢길 비주얼이었다.
쿠쿵. 쿠웅.
“……정말로, 한 마리였네요.”
무너져 내린 건물의 파편을 피하며 지수가 중얼거렸다.
정면에서 저런 걸 봐버리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녀석의 이름은 궁기[窮奇].”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를 가진 거대한 호랑이를 본다면.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사흉(四凶)이라 불리는 마물이다.”
「그르르.」
고요한 숨을 내쉬는 궁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