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017. 격의 차이(1)
주원은 현재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지난 일주일간 정상에 있는 보스를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략? 아니, 그건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체 그 괴물을 무슨 수로 잡는다는 말인가.
‘바질리스크.’
로메 타워 정상을 차지한 괴물.
눈을 감고, 거대한 거체를 지면에 누운 채 자신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오만한 존재.
‘도마뱀 주제에.’
녀석이 눈을 뜨면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빛을 쐰 존재는 돌이 되어버린다.
흔히 석화의 사안이라고 하지.
거기다 문제는 눈만이 아니다. 이쪽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강인한 비늘과,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공격은 주원에게 절망감을 심어줬다.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로 네놈 말이 맞는 거겠지?”
“예, 지금쯤이면 지하에 있는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였을까, 이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의 말을 따른 것은.
이미 주원의 무리는 일주일간 큰 피해를 봤기에 섣불리 옥상의 바질리스크에게 도전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지금 지하에서 싸우고 있다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습격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옥상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미끼. 진짜 보스는 지하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살근거리듯 이야기하는 동권의 말에 주원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옥상에 있는 괴물을 우리가 잡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
이미 이 게임이 얼마나 악질인지는 첫 번째 퀘스트에서 경험하지 않았던가.
인간들의 심리를 이용해 단순한 함정을 설치해 뒀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바질리스크는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동권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다른 패거리들의 의견도 대략 비슷했다. 처음에는 함정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금방 묻혔다.
“형님, 고것들이 옥상의 몬스터를 흔쾌히 내어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어쩐지 옥상의 몬스터를 흔쾌히 넘겨주더라니.”
주원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게 다 자신의 오만이다. 그 송사리들이든, 옥상의 몬스터든 자신이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옥상의 몬스터는 너무 강했고, 송사리들은 자신을 속이고 지하로 내려갔다.
‘가만두지 않겠다.’
주원은 한층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그의 뒤를 쫒아가던 동권은 속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멍청한 것들끼리 열심히 싸워봐라.’
일은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다.
“다 네 덕이다. 고맙다. 만약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 썩을 놈들에게 속고 있었겠지.”
“아뇨. 오히려 저를 믿고 대장님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권의 옆에서 묵묵히 걸어가던 남자가 동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본래 동권이 머물던 방을 지키던 남자였다.
그가 별 의심 없이 주원에게 안내해 준 덕에 일이 막힘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거기다 제 편을 들어주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편이라고 할 것까지야. 내가 의견을 들어보자고 한 것이니 책임을 졌을 뿐이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지만, 워낙 험악한 인상인지라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았다.
‘뭘 좋다고 웃어.’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고생이다.
동권에게는 행운이었던 점이지만.
“저기 있군.”
주원이 손을 들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멍청한 놈들, 입구를 지키는 놈도 없다니.”
“우리가 이곳에 올 걸 생각도 못한 모양이야?”
킬킬 거리며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장 내려가서 그 개놈들의 멱을 따주마.”
주원의 눈이 붉게 빛났다.
“혹시 주변에 숨어 있는 놈이 있는지 봐라.”
“아까부터 찾아봤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형님.”
“그래?”
계단의 입구를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다니, 주원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령 자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했어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뒀어야 했다.
거기다 이상함을 느낀 건 주원뿐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없지?’
동권 역시 최소한 몇 명 정도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니.
“형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저희가 오면 다 죽을 텐데 보초를 세워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잡기 위해 모두 내려간 게 분명합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서있는 주원에게 한 남성이 말했다. 방금 전에 동권과 대화를 하던 자다.
“맞습니다, 행님. 어서 갑시다!”
“죽은 형제들을 생각하면 아주 열통이 터지는구만요.”
그 남자의 말에 다른 이들의 움직임도 들끓었다.
이래서야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래, 확실히 그럴 수도 있어.’
주원이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어차피 현균과 그 무리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지하라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 보스 몬스터를 한시라도 빨리 잡는 거다.
주원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선 들어간다.
“좋아, 가자. 녀석들은 모조리 죽이는 거다!”
“오오!”
주원의 외침에 큰 소리로 환호하며 우르르 계단으로 몰려 들어갔다.
동권 역시 무리에 껴서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럴싸한 의견인 것 같기는 한데.’
동권은 힐끗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멍청한 줄로만 알았더니 생각도 조금 하는 건가?
‘그리고…….’
아까부터 가슴팍에 맴도는 묘한 불안감. 자신의 뒤에 따라오는 옵저버도 평온한 걸로 보아 자신의 신도 이 상황을 위기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묘하게 불안했다.
“음?”
어둑어둑한 지하계단을 내려온 주원은 주변을 살피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둡군. 손전등이라도 가져올걸 그랬어.’
서둘러 오다보니 미처 손전등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도 신의 아바타인 주원에게 이정도 어둠은 문제될 게 없었다.
어차피 몬스터들은 먼저 내려간 현균의 무리가 모조리 처치한 탓에 자신들은 걷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형님, 저거 사람 아닙니까?”
“……그런 것 같군.”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 그곳에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보초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늦었어. 나는 좀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넌…….”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사슬낫을 유유히 막아내던 녀석.
후에 동권에게 들은 바로는 이름은 김세한이라고 했다.
“미안한데, 이 아래로는 출입금지거든. 지금 얌전히 돌아간다면 못 본 척 해주지.”
씩 웃으며 말하는 세한의 말에 주원의 인상이 찡그려졌고, 주변에서 옅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저거 미친놈 아냐?”
“뭐? 출입금지? 저게 지금 뒤지고 싶나.”
그들의 반응도 당연하다.
옥상을 공략하며 꽤 많은 사람이 죽긴 했지만, 주원이 이끄는 무리는 족히 서른이 넘었다.
세한은 그런 그들 앞에서도 태연하게 떠들었다.
“너는 참 뻔하게 움직인다, 야.”
“……실성한 거냐?”
거기다 명백히 배신한 동권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동권은 그런 세한의 모습에 입가를 꿈틀거렸다.
“뭘 믿고 나대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넌 이제 곧 죽는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애초에 난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뭐?”
“이민아.”
나직한 세한의 목소리에 동권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움찔거렸다.
그리곤 옆은 빛이 흘러나오며 몸집이 단번에 줄어들었다.
스르륵.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전까지 자신의 곁에 있던 험악한 남성이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정말, 계속 시키기만 하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민아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냉큼 세한에게 돌아갔다.
물론, 그녀를 막는 자는 없었다.
작금의 상황을 쫒아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유도한 거거든. 기왕 하는 김에 다 한 번에 처리해 버리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그리고 이 녀석들도.”
세한은 손가락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위에 있는 녀석까지.”
동권은 술술 풀리던 일이 사실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순순히 자신을 주원에게 안내했던 것도, 여론이 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던 것도.
“저 계집애 때문이었나.”
“그래. 내가 부탁 좀 했지.”
자신의 배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일이었지만, 동권은 도리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로 유도해서 다 함께 죽자는 건가?”
“그러게, 이제 어떡할 거야?”
민아 역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세한에게 물었다.
사실 그다지 긴장한 기색은 없다.
민아의 변신 스킬을 사용하면 혼자 몸을 빼는 건 일도 아니다.
“뭘 어떡해? 그냥 싸우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만약 무슨 일 날 거 같으면 난 빠진다~.”
“그러던가.”
민아와 대화를 마친 세한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촉박한가.’
얼추 맞기는 했지만, 여유 시간이 좀 부족했다.
“가세요.”
“응?”
일련의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서 못 내려가게 막고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굳이 두 명이 있을 필요는 없죠.”
“……혼자서 한다고?”
“네.”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지수의 모습에 세한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주변을 훑었다.
현재 주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술렁이고 있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덤벼올 거다.
‘되려나?’
주원은 확실히 강자다.
지수와 거의 동등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으며 신에게 받은 강력한 스킬도 지니고 있으리라.
‘좋아.’
세한은 결정했다.
“야, 우린 위로 올라간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꺅!”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민아를 세한은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아참, 저놈은 죽이지 마.”
“저놈?”
“박동권.”
“……노력할게요.”
지수는 진심으로 싫은 티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어딜 가려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내줄 것 같으냐!”
갑자기 민아를 안아든 세한의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중에서 가장 빠른 건 단연 주원이었다.
쉬이익!!
어둠속에서 주원의 사슬낫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세한을 향해 날아왔다.
검을 들어 막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싸우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흡!”
순간적으로 허리를 낮추고 민아를 빙그르르 돌리며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세한은, 단번에 주원을 향해 접근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세한의 모습에 주원은 숨을 삼켰다.
‘내가, 전혀 보지 못했다고?’
자신이 누군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닌 신의 아바타다. 그것도 하데스의 아바타다.
그런 자신이 지금 세한의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했다.
“지수가 혼자서 잘하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와주고 가는 게 좋겠지.
“하압!”
오른팔은 민아를 안고 있었기에 세한은 왼팔을 크게 뒤로 젖힌 후, 주원의 가슴팍을 강하게 후려쳤다.
퍼어억!
“크아아악!”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막은 주원이었지만, 세한의 주먹을 겨우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세한의 현재 능력치는 F랭크 올 카운터 스톱 상태.
현재 플레이어들의 능력치는 누구도 세한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부우웅!
“우와악!!”
주원의 거체가 뒤로 날아가며, 그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을 우르르 쓰러트렸다.
“헐.”
그 어이없는 광경에 민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원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준인지는 몰랐다.
“저, 저거!”
“형님!”
경악한 건 민아뿐이 아니었다.
주원의 부하들 역시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돼.”
신장만 2미터가 가까이 되는 주원을 장난감처럼 날려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부탁한다.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빼. 그리고 꼭 죽일 필요 없어,”
“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지수의 모습에 세한은 어쩐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의 지수와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착각인가?’
보통 때의 지수도 냉정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그때의 지수는 명백히 공포가 눈에 담겨 있었지만, 지금은…….
세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어차피 차차 알게 되겠지.’
세한은 아마 그것이 지수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간다.”
지수의 머리가 미약하게 끄덕여졌다.
아무튼 지금은 서둘러 옥상으로 향해야 했다. 현균은 지금쯤 한창 4층을 넘어 5층으로 진입 중일 거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켁!”
“으헉!”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들을 발로 꾹꾹 짓밟으며 세한은 빠르게 내달렸다.
옥상에 있는 괴물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