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002. 롤플레잉 게임(1)
“헉!”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크게 눈을 떴다. 방금 있었던 일 때문인지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 찬찬히 주위를 살핀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말로 돌아왔다.”
눈에 들어온 건 내가 오래전에 다니던 대학 캠퍼스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대학,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세계란 지극히 평화로웠다.
“상태창은 아직 열리지 않나.”
허공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즉, 아직 녀석들이 강림하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나는 느긋하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대체 이런 평화가 얼마만인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거기서 뭐해요?”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검은 긴 생머리에 어여쁜 여성이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한지수.”
“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수는 대학교에 와서 친해진 여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월반했는지 나보다는 한 살 연하였는데, 항상 내가 혼자 있으면 말을 걸고는 했다.
나름 친한 사이였지만 예의가 워낙 바른 녀석이라 마지막까지 내게 말을 놓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름을 튼 게 전부였던가.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무것도 아냐.”
내가 실없이 대답하자 내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던 지수가 말했다.
“또 밤 세서 게임하고 피곤한 거죠? 그러다가 이번 학기 학점도 위험할 거예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왜냐면 어차피 다음 학기는 시작되지 않을 거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서 종알거리는 지수에게 물었다.
“오늘, 며칠이지?”
“네? 그야 8월 17일이잖아요.”
나는 지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8월 17일.
과연 그때 메시지 창 말 그대로였다.
게임을 처음부터 시작하게 해준다더니, 딱 그 첫날로 돌려줄 줄이야.
“왜 그래요? 설마 날짜도 잊고 여태 게임만 한 건 아니겠죠?”
“어, 맞아.”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게임을 했다.
결말까지 방금 보고 온 참이다.
비록 그 결말은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죽는 배드 엔딩이었지만.
“건강에 안 좋으니까 어느 정도는 신경 쓰면서 해요.”
“그래.”
지수는 남을 챙기기 좋아하는 성격이었지. 대학에서 아싸 노선을 타던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준 것도 지수뿐이었다.
내게는 상당히 고마운 존재였다.
“하여튼…….”
지수는 내게 뭔가를 더 말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지만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시선의 끝에 있는 건 상당히 잘생긴 얼굴의 남학생이었다.
이름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녀석이다.
아마 이종현이었나.
지수에게 추근거리고 나를 게임폐인이라고 무시하던 녀석.
‘저 녀석은 어떻게 됐더라?’
아마 내 기억으로는 이곳에서 벗어난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첫 번째 스테이지도 클리어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굳이 이동할 필요 없어.”
“어, 왜요? 만나기 싫어하지 않았나요?”
그랬나? 사실 지금은 별다른 감정도 없다.
이때의 나는 말 그대로 구제불능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해도 납득이 갈 수준이었지.
뭐, 대부분은 가물가물해서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지수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팔짱을 끼었다.
“으음, 그래도 제가 싫어요. 혹시 저한테 말 걸면 귀찮아지니까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이야기한 지수는 어디로 이동하는 게 좋을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딱 멈췄다.
“……저게 뭐죠?”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그 말에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내가 실제로 체험했었다는 점에서 기시감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 이 말이 시작이었어.’
그날도 그랬다.
전날 밤 새서 게임하고 온 뒤, 벤치해서 휴식하는 내게 지수가 다가왔다.
그리고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지수는 이렇게 말했지.
“저거 뭐예요? 무슨 영화촬영 같은 건가요?”
그래, 이렇게.
캠퍼스 한쪽 구석에서 녹색 형상을 한 괴물들이 기어 나왔다.
그리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킬킬 거리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녀석들을 보고 뭔가 싶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뭐야?”
“사람이 변장한 거 아냐?”
“하지만 이렇게 작은 사람이 어디 있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녹색 괴물들에게 말했다.
걔 중에는 손을 뻗으며 다가가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도 가요.”
지수가 손을 끌었다.
예전에는 나도 이 손에 이끌려 저 괴물들을 보러 갔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작은 초록색 괴물의 모습은 금방 사람들에게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데…….”
지수는 궁금한지 목을 쭉 빼고 그런 사람들 사이로 초록색 괴물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런 지수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붉은색 액체가 바닥을 적셨기 때문이다.
“어?”
아연한 지수의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사람이 찔렸어! 저거 뭐야?!”
초록색 괴물, 흔히 고블린이라 부르는 몬스터의 손에는 피가 묻은 녹슨 검이 들려 있었다.
고블린의 앞에는 칼에 찔린 남성이 고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저게 뭐예요? 정말로 괴물이에요?”
지수는 그렇게 말한 후, 내 팔을 잡아끌었다.
“뭔가 이상해요, 어서 도망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낄낄 거리는 고블린 주위로 대략 열이 넘는 고블린들이 점차 기어 나왔다.
기어 나온 고블린들은 주변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그건 악수였다.
주로 약자를 노리는 고블린에게 있어, 등을 돌리는 짓은 죽여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키익, 케켁.”
우리에게도 한 마리의 고블린이 접근하고 있었다.
녹슨 칼을 들고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고블린에게 살인은 단순한 사냥이 아닌 유희다.
그렇기에 고블린들은 사람을 죽일 때 웃는다.
“세한 오빠!”
세한, 정말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이었다.
지수는 가만히 있는 내 앞을 지키듯 가로막았다.
역시 기억에 있는 모습이다.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나를 지수는 껴안아서 구해줬다.
지수의 새빨간 피가 내 몸을 적셨지.
‘그래, 맞아.’
내가 처음으로 본 지인의 죽음은 지수였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주제에 내게 도망가라고 말하던.
‘그런 지수를 난 버리고 도망갔어.’
찌질한 새끼.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
이제, 메시지가 들릴 때였다.
[곧 게임이 시작됩니다.]
[시작에 앞서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2회 차가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벌 떨며 겁에 질려있던 김세한은 이제 없었다.
나는 한번 세계의 끝을 본 싱글 플레이어다.
‘이번에는 달라.’
[1회차 클리어 특전으로 DLC구매가 가능해집니다.]
[1회차 클리어 특전으로 1회차에 남은 포인트가 계승됩니다.]
[1회차 클리어 특전으로 ‘커뮤니티’에 접속권한을 얻었습니다. 동기화가 완료되면 이용해 주세요.]
여러 개의 메시지가 스쳐지나갔다.
난 그 모든 걸 무시했다.
그보다 지금 내 앞에서 달려드는 고블린을 처리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이번에는 결코 전처럼 되지 않아.’
간신히 얻은 2회차의 기회였다.
나는 결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2회차를 시작하는 나의 다짐이었다.
“캬악?!”
내가 갑자기 달려들자 고블린은 당황한 모습으로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목을 향해 휘두르는 녀석의 검을 피한 후, 그대로 달려들어 팔을 비틀어 꺾었다.
우드득!
“끼에엑!”
팔이 비틀리자,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지면으로 떨어지는 검을 낚아챈 나는, 그것을 그대로 고블린의 목에 쑤셔 넣었다.
푸욱!
“후우.”
살을 찢고 들어가는 감각.
본래 이 시기의 나라면, 고블린을 찌르는 순간 구토했을 시기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무감각했다.
[스테이지 최초로 고블린을 처치하셨습니다.]
[보너스로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좋아.’
포인트란 능력치를 올리거나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할 때 필요한 자원이다.
이렇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특정한 업적을 달성하면 얻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신의 아바타가 되어 후원을 받든가.
‘잠깐만.’
나는 고블린을 달려들 때 들려왔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1회차에 남은 포인트가 계승된다고 하지 않았나?’
2회차 패키지를 사고 남은 건 70만 포인트.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김세한]
[보유 포인트: 700300]
“미친.”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상태창에 표시된 포인트는 전생에 쓰고 남은 70만 포인트 그대로였다.
맙소사, 70만 포인트면 능력치를 현재 올릴 수 있는 최대한도로 모두 올려도 남을 양이었다.
물론, 능력치는 메인 퀘스트마다 올릴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지만, 70만 포인트면 매번 최대치로 찍어도 한참동안 넉넉히 사용할 수 있었다.
‘또는 포인트 상점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펑펑 구매하든지.’
어느 쪽이나 상당한 혜택이다.
하지만…….
‘능력치는 섣불리 올려선 안 되겠지.’
능력치를 최대로 올리게 되면 다른 플레이어들과 차이가 크게 두드러질 것이다.
특히 이제 막 게임이 오픈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럼 신과 GM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메인 퀘스트에도 영향이 올 것이며, 앞으로 뭔가를 할 때에도 큰 제약에 걸릴 게 분명했다.
“세, 세한 오빠?”
포인트의 사용 유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그건 뭐예요?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지수의 시선은 나와 내가 죽인 고블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왜냐면 고블린은 이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비켜! 비키라고!!”
“이 괴물들은 뭐야!”
평화롭던 캠퍼스가 아수라장이 되는 데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쫓는 작은 괴물들의 모습은 지독하리만치 현실성이 떨어졌다.
나는 지수의 말에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곧 알게 될 테니까.
[동기화 완료.]
[여러분은 신들의 게임에 초대되셨습니다.]
“어어?”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수뿐이 아니다. 고블린에게 쫓겨 도망가던 사람들도 갑작스런 알림에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메인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해야 합니다.]
[클리어를 실패하게 되면 세계는 멸망하게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도움말’을 참조해 주세요.]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일방적인 메시지를 납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게임이라니!”
“으아악, 살려줘!”
“이런 시발!”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갑작스런 메시지에 소리를 지르는 사람, 고블린과 맞서 싸우는 사람.
“세한 오빠……. 지금 이게 무슨 소리예요?”
지수가 멍한 얼굴로 내게 중얼거렸다.
아마 똑똑한 그녀라면 지금 메시지를 듣고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내게 굳이 질문을 하는 건, 그저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리라.
“방금 들었잖아? 말 그대로지.”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어딘가에 계신 높으신 분들이 우리의 세계를 게임판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야.”
“게임판……. 이라니요?”
지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보통은 그렇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런 세계가 되어버렸으니까.
“갑자기 들리는 이상한 소리. 허공에 나타나는 알림창, 보이지 않아?”
“보, 여요.”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본 첫날의 풍경.
그것을 이번엔 지수도 함께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