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 (33/33)

허니문 베이비

바다에 가고 싶다는 예하의 말에 한건이 선택한 곳은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물론, 말이 작다는 거지 리조트만큼 큰 별장을 짓기에 하등 모자람이 없는 크기였다.

트랜지션에서 내리자 열대기후 특유의 후끈함이 온몸으로 달려왔다. 예하가 기분 좋은 얼굴로 어깨를 오그렸다.

사방이 바다다.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려도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태양 아래의 바다. 일렁이는 파도. 얽히는 물소리. 그 물에 흩어졌다 모이는 모래알갱이들. 실바람을 서핑 삼아 타고 다니는 바다 특유의 짠 내.

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낯설어서 아름다웠고, 그렇기에 감동적이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바다로 다가갔다. 그의 구두가 멀끔한 주차장을 넘어 백사장에 닫기 직전이었다. 한건이 그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마른 몸뚱이가 속절없이 한건의 품으로 떨어졌다.

“옷 갈아입고. 밥도 먹고. 그 후에.”

한건이 또박또박 문장을 조각냈다. 결혼식장에서 바로 온 터라 두 사람은 아직 슈트 차림이었다. 드레스 셔츠에 구두 신고 물장구를 칠 순 없었다. 더군다나 예하는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아침부터 지금까지 공복의 상태였다.

“치이⋯⋯.”

예하가 입을 삐죽였다.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들어 별장 안으로 옮겼다. 짐을 든 수행원 몇 명이 그들을 뒤따랐다.

별장은 컸다. 크고, 또 컸다. 한건의 집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으나, 별장은 공허할 정도로 컸다. 본가는 침실에 찬하 방, 서재, 손님방, 응접실, 수영장, GYM, 정원 등 여러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면 별장은 개인 공간이 필요한 화장실이나 드레스룸을 제외하곤 운동장만큼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원룸처럼 뻥 뚫려있었다.

가까이엔 거실과 부엌, 다이닝룸이 있었고 멀찌감치엔 침대가 보였다. 한쪽 벽은 통유리로 되어있었는데 반이 열려있는 걸 보아하니 통째로 여닫는 게 가능한 듯했다.

“우와⋯⋯.”

예하가 가감 없이 감탄을 내놓았다.

열린 창을 타고 바닷바람이 흘러왔다. 파도 소리도 들린다. 꼭 바깥과 집 안이 교류하는 것 같았다. 라탄으로 만들어진 소파와 대리석 테이블도 모두 바다를 향해 앉아있었다.

창밖에는 장작이 든 유리 난로와 돔 형태의 흔들의자, 선베드, 원목 테이블, 파라솔, 그리고 물 미끄럼틀이 있었는데 그대로 바다와 연결됐다. 예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원 대신 바다를 집 앞에 두다니⋯⋯. 더군다나 이 바다가 다 네 거라니⋯⋯. 돈이 좋긴 좋구나.”

그 말에 예하의 겉옷을 벗기던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아직도 내 돈에 감탄하는 게 놀라워, 나는.”

예하가 뒤를 돌아 한건을 바라봤다. 한건이 그의 소매를 들고 커프스 단추를 끌었다. 타이도 풀고, 빡빡한 셔츠 단추도 하나하나씩 풀었다. 얼른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히고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야 빨리 놀고, 빨리 씻고, 제가 고대하던 첫날밤도 길-게 보내지 않겠는가.

“네 돈으로 또 뭘 할 수 있을까?”

예하가 퍽 희한한 질문을 했다. 한건이 평이하게 대답했다.

“뭐든 할 수 있겠지. 뭘 할 수 있냐 따지기보다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게 빠를걸.”

“그런가. ⋯⋯그럼 뭘 하지?”

예하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한건의 재산을 탕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치고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돈도 써 본 적이 있어야 잘 쓰는 법이다. 예하는 한건에게 받은 백억 크레딧을 아직 반의반도 쓰지 못했다. 그러잖아도 씀씀이가 크지 못한데, 은행에서 이자를 엄청 얹어줬다. 거기다 한건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붙여놓은 자산관리사가 어찌나 능력이 좋은지. 쓰면 메꿔지고, 쓰면 또 메꿔졌다.

예하가 얼빠진 얼굴로 반지를 매만졌다. 결혼반지가 약지에 채워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버릇이 생겼다.

“아! 찬하 줄까?”

예하가 기껏 생각해낸 ‘돈 쓰는 방법’은 하나 있는 아들에게 주는 거였다. 한건이 예하의 셔츠를 벗기며 킥킥거렸다. 누가 누구한테 돈을 주겠다는 건지.

“지금 찬하가 너보다 재산이 많아. 벌써 한호 그룹 대주주거든. 한호 트랜지션이랑 크레딧 쪽에도 있고. 건설도 주려고 준비 중이야. 가치가 수조쯤 되겠지.”

한건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하며 티셔츠를 가지고 왔다.

“⋯⋯그래?”

예하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때, 얼굴 위로 쑥 얇은 티셔츠가 씌워졌다. 예하가 손을 올려 팔을 빼냈다. 잠깐 옷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익었다.

“그럼 내가 돈이 제일 적어?”

주제가 뜬금없는 곳으로 튀었다. 한건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명품 따위에 돈 쓸 궁리를 할 줄 알았는데. 재산에 관심을 가지다니. 그가 돈에 흥미를 갖게 된 걸 기꺼워해야 하는 건지, 큰일이라 겁을 집어먹어야 하는지 구분이 안 됐다.

한건이 예하의 귓불을 주물럭거렸다.

“왜? 돈 줄까?”

그 말에 예하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이제 네 살이 된 찬하보다 제 돈이 적다니. 돈에 욕심이라곤 하등 없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묘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얼마나 가지고 싶은데?”

한건이 예하의 손을 끌고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의 허기를 채워줄 음식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도 드론들이 접시를 끊임없이 가지고 왔다.

바로 옆에 직원이 상주하는 건물이 따로 있었다. 신혼여행이니 온전히 둘이서만. 청소도, 요리도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말 것. 한건이 명령한 거였다.

예하가 침묵한 채 한건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가지고 싶은가. 쉬운 질문이 아니다. 예하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라지만 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저는 돈 쓰는 법을 모르는 천민 출신이니까.

통장에 넣어봐야, 아무 의미 없는 숫자로 썩어갈 게 분명했다.

한건이 예하에게 방울토마토를 내밀었다. 예하가 그것을 받아 물었다. 툭, 터지는 과육에 혓바닥이 시큼해졌다.

고민을 이어가던 예하는 뜬금없이 궁금한 게 생겼다. 대체 한건의 재산은 얼마기에, 얼마나 줄 수 있냐는 질문에 얼마나 가지고 싶냐고 되물었을까.

“최한건.”

“응.”

“네 통장에 얼마 있어?”

“⋯⋯.”

육즙이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를 썰던 한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예하는 말을 거르는 법이 없다. 뭐, 부부까지 된 마당에 그럴 필요가 있겠냐마는 가끔 미간이 띵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왜, 결혼하면 그런 거 서로 공개하지 않나? 너는 내 통장에 얼마 있는지 알잖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도 알면서. 나는 왜 아무것도 몰라? 우리 인제 부부인데?”

이어지는 예하의 논리 아닌 논리에 한건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한건의 재산을 궁금해하는 이들은 많다. 이래저래 주운 정보로 얼마 정도를 가지고 있다, 말하고 다니는 기자도 있고, 유명한 다큐에서 재벌의 재산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을 때도 한건은 빠지질 않았다.

암암리에 알려진 재산이 얼마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애당초 관심 있게 보질 않아서. 전 세계의 은행에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는 차명계좌는 감히 상상도 못 할 테니 보나 마나 틀린 금액일 것이다.

“이리와.”

한건이 톡톡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예하가 냉큼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낸 한건이 이리저리 터치하기 시작했다. 어디 어디 은행에 돈을 넣어놨더라. 수백 개가 넘어가는 계좌라 일일이 반추하기가 어려웠다.

한건이 계좌 정보를 띄웠다. 0이 셀 수 없이 많이 붙은 계좌였다. 그런 계좌가 하나, 둘, 셋, 넷⋯⋯ 수십 개가 떴다. 그것을 모두 모아 더했다. 숫자가 촤르르륵, 빠르게 올라갔다. 똑똑한 스미스도 수 초가 걸리는 계산이었다.

“유형고정자산이랑 투자자산, 그러니까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건 얼마나 있는지 나도 확실히 몰라.”

한건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입을 헤 벌리고 숫자를 보던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모른다고? 재산이 얼만지 모른단 말이야?”

본디 진정한 부자들은 자신의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모른다더라, 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설마 사실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따로 계산해봐야 해. 시간이 좀 걸리겠지.”

한건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 전담 자산관리팀을 불러 알아봐야 했다. 사 놓은 땅과 건물, 주식을 일일이 현금 수치화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억 단위가 왔다 갔다 할 테니.

그쯤, 끝을 모르고 올라가던 숫자가 마침내 멈췄다. 한건이 그 홀로그램을 예하 앞으로 밀었다. 예하의 눈동자가 기차놀이 하듯, 줄줄이 붙은 숫자를 하나하나 세어갔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천억⋯⋯, 천억 다음이 뭐야? 그런 숫자가 세상에 존재해? 왜 뒤에 0이 더 있어?

“이거는 현금. 그러니까 묶여있지 않고 언제든지 빼 쓸 수 있는 재산이야. 집에도 크레딧이 있는데 손대지 않은 지 좀 돼서. 거기까진 모르겠네.”

한건은 집에 찬밥이 좀 있는데, 아이스크림이 좀 있는데, 어제 먹고 남은 치킨이 좀 있는데, 따위의 문장에나 어울릴 법한 어투로 말했다.

네 번쯤 숫자를 세어보던 예하가 포기하고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안 기분이다. 그가 제게 알파를 낳는 조건으로 백억을 제시했을 때만 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의 돈이 있었으면 백억이 그에겐 또 다른 의미로 말도 안 되는 돈이었겠구나 싶었다.

“얼마 줄까?”

한건이 물었다. 자랑하듯 으스대는 투도 아니었고, 비아냥도 아니었다. 정말 일차원적으로 얼마가 가지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모르겠어.”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재산을 알기 전만 해도 반 줘, 반! 그렇게 외쳐볼까 했는데. 제가 아무리 경제관념도 없고 염치도 없기로서니 그건 좀 아닌 듯했다.

됐어. 그때 준 백억도 그대로 있는데, 내가 돈을 어디다 써. 옷도 네가 사줘. 밥도 네가 사줘. 집도 있어. 트랜지션도 있어. 돈 쓸 곳이 하등 없었다. 예하가 그리 말하려 할 때, 한건이 홀로그램을 움직여 ‘성 실장’이라 적힌 단어를 터치했다.

뚜르르, 단조로운 신호음이 여섯 번쯤 이어졌다. 일곱 번이 울리기 직전, 잠깐 화면이 암전되고 성 실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간 게 예고 없는 연락에 조금 놀란 듯했다.

[예, 사장님. 신혼여행 중에 연락 주실 줄은 몰라서 응답이 조금 늦었습니다.]

그가 송구한 마음을 전했다. 원래 성 실장은 신호음을 세 번 이상 울리게 하는 법이 없었다.

“괜찮아.”

한건이 너그러이 그를 용서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내 재산 공동명의에 강예하를 올렸으면 하는데.”

[⋯⋯예?]

성 실장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어디에, 뭘 올려? 바르게 들었으나 믿기 힘든 말이었다.

“뭐라고?”

예하 역시 그랬다. 이 미친놈이 웬일로 오늘은 미친 짓을 하지 않는구나, 싶더라니. 난데없이 성 실장에게 연락한 이유가 이런 것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기를 찍던 예하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건이 무감한 낯으로 자신의 포크를 예하의 손에 들려줬다.

“강예하가 돈 가지고 싶대. 그래서 다 주려고.”

[⋯⋯.]

성 실장의 침묵이 늘어졌다. 그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을지, 누구보다 예하가 잘 알았다. 당사자인 자신도 이리 어이가 없는데, 그는 오죽할까.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머리가 띵 했다. 팔자에도 없는 수천억, 아니 얼마야, 아무튼 그런 돈을 강제로 떠안게 생겼다. 이 정신 나간 최한건은 내가 돈을 어디다 어떻게 쓸 줄 알고, 그러다 패가망신하면 어쩌려고 이리 무모하게 행동한단 말인가.

[처리,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해외 부동산이나 은행은 한국만큼 업무처리가 빠르지 않아서⋯⋯.]

성 실장이 더듬더듬 말했다. 한건이 고개를 주억였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괜찮지?”

뒤의 질문은 예하에게 던진 거였다. 예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맹한 낯으로 한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긍정으로 해석한 한건이 성 실장과의 통화를 끝냈다.

“자, 이제 네가 제일 돈이 많아.”

모든 홀로그램을 밀어치운 한건이 턱을 괴고 예하를 응시했다.

“내가 제일?”

예하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갸웃거렸다.

“내 것은 너랑 내 명의고, 네 통장에 든 돈은 오롯이 네 거니까. 따져보면 네가 제일 많지.”

한건의 설명에 예하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한건의 돈을 ∂라고 했을 때, 예하의 돈은 한건의 돈 ∂ 더하기 현재 통장에 있는 백억이 된다. 결국엔 한건보다 예하의 재산이 더 많다는 거다.

예하의 입꼬리가 묘하게 씰룩였다. 한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

“⋯⋯어. 그런 것 같아.”

예하가 떨떠름히 답했다. 오 분 만에 재벌이 되었다. 그것도 재벌 중의 재벌이라는 한호의 재산을 전부 가진. 얼떨떨함은 금세 환희로 바뀌었다. 와. 이제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오히려 돈 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눈이 번쩍 뜨였다.

쪽.

예하가 턱을 쭉 내밀어 한건의 볼에 짧게 키스했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한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한 눈썹 위로 홈이 파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예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이런 짓을 하면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만면에 기쁨이 보이질 않았다.

“⋯⋯너한테 돈을 대가로 이런 걸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조금 당황스럽네.”

한건이 예하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문지르며 읊조렸다. 그런 한건을 물끄러미 보던 예하가 비싯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돈 많이 벌어와. 내가 더 좋은 거 해줄게.”

“허⋯⋯.”

한건이 짧게 숨을 끊어냈다. 예하가 왜 인제 와서 돈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진즉 좀 밝히지. 그럼 돈에 파묻혀 살 수 있게 해줬을 텐데. 그를 제 옆에 잡아두기도 훨씬 쉬웠을 거고. 아쉬움과 허망함이 동시에 북받쳤다.

“밥 먹자. 배고프다.”

허나 한건의 마음을 추호도 모를 예하는 마냥 해맑기만 했다. 한건이 자욱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접시에 고기를 올렸다.

* * *

장애물 하나 없이 드넓게 펼쳐진 노을은 생전 처음 마주하는 것이다. 바다가 그 노을을 닮아 붉게 물들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농홍한 빛의 새로운 우주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수영장은 바다 안에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바닷속을 오롯이 볼 수 있는 수영장이었다. 그 경계가 모호해 마구 물장구를 치다 벽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또한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그와 비슷한 파동을 만들어 꼭 바다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영장 턱에 기댄 예하가 느긋하게 다리를 휘저었다. 코앞에 바다가 있는데 정작 저는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있다니. 회의감이 들었다. 한건에게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수백 미터 앞부터 정화장치를 돌리고 있어 그리 나쁜 수질은 아니지만, 수영장만큼 깨끗하지 않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얕은 수심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 푹 꺼지는 지형 탓에 물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성게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게 세 번째, 돌이 거치므로 다리가 긁힐 수 있다는 게 네 번째, 등등 너무 많아서 기억도 안 났다.

덕분에 예하는 게임 하다가 여행지에 끌려온 철부지 아들처럼 비죽, 입술을 내밀고 있어야 했다.

예하가 흘끔 뒤를 살폈다. 칵테일 잔을 든 한건이 수영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오려면 수십 초는 걸릴 듯했다. 때를 놓치지 않은 예하가 손으로 바닷물을 떠 호롭, 마셨다. 연못에서 목을 축이는 동물 같은 모양새였다.

“⋯⋯짜다.”

예하가 혀를 베에 내밀며 중얼거렸다. 더할 나위 없이 짠 소금물이었다. 그 꼴을 오롯이 목도한 한건이 만면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그걸 왜 먹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바닷물이 짜지, 달까 봐?”

한건이 주홍색에서 붉은색으로 그라데이션된 테킬라 선라이즈를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그것으로 입을 헹궜다. 달콤한 음료에 짠 기운이 가셨다.

“나는 그거 거짓말일 줄 알았어. 이렇게 큰 바다가 전부 짜다는 게 말이 돼? 평생 이 물 먹고 사는 물고기는 안 짜잖아. 고등어고 연어고 요리할 땐 간을 해야 한다고. 아니면 싱거워.”

“하⋯⋯.”

“뭐. 왜 그렇게 봐. 바다 처음 오면 그럴 수도 있지.”

예하가 뻔뻔한 낯으로 쫍쫍 칵테일을 빨아당겼다. 한건이 물에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나중에, 찬하가 조금 더 커서 ‘아빠, 바다는 왜 짜?’라고 물으면, 그때 함께 설명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하가 반쯤 잠겨있는 선베드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찰박찰박 옆자리를 두드렸다. 한건이 그의 옆에 누웠다. 옆에 있는 선베드가 아니라, 꾸역꾸역 예하의 선베드에 몸을 비집고 들었다. 예하는 나지막이 짜증을 비치면서도 슬쩍 옆으로 비켜줬다.

결국엔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야 했다. 이 넓은 수영장에, 선베드는 무려 여섯 개가 있는데. 이다지도 붙어 있어야 하나, 불만이 치솟았다. 그래도 기특하게 참아냈다. 어쨌든 ‘신혼여행’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여행이니 이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싶었다.

예하가 반쯤 감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파도 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열대기후 특유의 후끈한 바람이 보드랍게 머리칼을 흩트렸다. 휴식, 휴가. 그런 단어와 참 잘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태양을 마주하고 있던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기가 점령한 하늘임에도 제법 눈이 부셨다.

그런 예하를 보고 있던 한건이 큼지막한 손을 예하의 이마 위에 대고 그늘을 만들었다.

“선글라스 가지고 올까?”

“아니. 그냥 여기 있어. 형 냄새 좋단 말이야.”

예하가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다 눈을 번쩍 떴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건이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다. 짧게 지나갔으니 모를 것이다.

“⋯⋯형? 형이라고 했어, 방금?”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건인데.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한건의 눈썹이 들썩였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다. 예하가 기억을 찾은 후로는 듣지 못했었다.

예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잘못 나온 거야. 못 들은 거로 해.”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거로 해?”

“너는 대단한 최한건이잖아. 그러니까 할 수 있어. 해 봐.”

예하가 검지로 톡톡 한건의 미간을 두드렸다. 한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예하의 검지를 앙, 물었다가 놨다.

“형이 편하면 형이라고 불러. 최한건도 괜찮고, 야, 너, 하물며 씨발새끼랑 개새끼도 괜찮아.”

“⋯⋯.”

“네가 내 남편인데 호칭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어.”

한건이 예하의 이마와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예하가 그런 한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끔. 아니 종종, 한건이 저를 참 지독하게도 사랑하는구나, 느낄 때가 있다. 지금처럼 당연한 것을 바라지 않을 때. 별거 아닌 것에도 감사할 때.

그럼 사랑을 받는 이로서, 또 그를 사랑하는 연인이자 반려자로서, 그가 불쌍해졌다. 늘 아프고, 울었던 것은 자신임에도 그랬다.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두툼하고 단단한 그의 가슴 근육 사이에 눈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다. 명치에 쿡 박혀있는 흉터. 완벽히 아문 것이다. 닥터 유가 분명 잘 아물었다고 했다. 사실은 실탄이 아니라 비비탄에 맞은 것 같다며 농담도 했다.

그런데도 곧 피를 쏟아내면 어쩌나, 콸콸 쏟아지다 못해 한건의 심장까지 나와버리면 어쩌나, 무서울 때가 있었다.

예하는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질질 새던 한건의 뜨거운 피를 아직 잊지 못했다. 정작 흉터를 가진 건 한건인데, 고통은 제 가슴 속에 남았다.

예하의 검지가 흉터 주위를 나돌았다. 그러던 그가 문득,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자기야’는 어때?”

“⋯⋯.”

“드라마에서 보니까 애 이름 따서 찬하 아빠, 찬하 아빠 이렇게도 부르던데. 그건 너무 긴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보조개가 드러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너그러워진다. 한건과 더 좋은 관계가 되고 싶었다. 더 많은 걸 나누고, 더 행복하고,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

뭐, 어차피 결혼까지 한 마당에. 좀 행복하면 어떤가. 닥터 유가 과거는 과거에 묻어두고, 현재엔 발도 못 들이게 하랬다.

한건이 꽉 어금니를 짓씹었다.

“네가 이럴 때마다 몸 어딘가가 터져버릴 것 같아.”

갈비뼈가 욱신거리고, 잇몸이 간지럽다. 목적 없는 가학성도 솟구쳤다. 그러다가 땅에다 머리를 찧고 싶기도 했다. 예하와 함께하면, 그가 저를 바라볼 때면, 또 이리 제 심장을 찢어발길 때면 세상이 멸망했다가 재창조되는 것 같았다.

한건의 말에 예하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럼 안 되는데. 돈은 누가 벌어와. 자기라고 부르지 말아야겠다.”

“너 진짜⋯⋯.”

한건이 뿌득 이를 갈았다. 그 소리를 코앞에서 들은 예하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몸을 사릴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거머쥐고 자신의 골반 위로 올렸다. 그리고 작은 뒤통수를 감싸 그대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진득하게 얽히는 입술은 부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수준이었다. 타액이 넘나들고, 숨을 공유하고, 사랑이 오고 갔다. 혀를 쭉쭉 빨아대는 한건은 늘 그렇듯 힘이 넘쳤다.

한건의 손이 예하의 수영 팬츠 속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갔다. 커다란 손 때문에 수영복이 딱 달라붙어 성기와 둔부를 자극했다. 물론, 살덩이를 떡처럼 주물럭거리는 한건의 손이 가장 자극적이었다.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을 밀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떨어진 입술에 한건의 입꼬리가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그런데도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왜.”

“아, 안에 들어가서 해⋯⋯. 여기는 바깥이잖아.”

예하가 흘끔흘끔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들리는 거라곤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그런데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이렇게나 광활한 공간에서 섹스하는 취미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저번에도 수영장에서 했었는데?”

한건이 슬쩍 예하의 팬츠를 내렸다. 토실토실한 알궁둥이 한쪽이 드러났다. 예하가 부리나케 다시 팬츠를 올렸다.

“그, 그건 집이었잖아.”

“여기랑 뭐가 달라.”

“아무튼 달라. 들어갈 거 아니면 안 해.”

예하가 짐짓 엄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잠깐 고민하던 한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팬츠 안에서 손을 빼냈다. 예하가 싫어! 안 해! 라고 해버리는 것만큼 큰 낭패가 없기 때문이다.

[제2조. ‘을’은 ‘갑’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

한건은 계약서에 적힌 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지켜볼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괜히 고집을 부려 예하가 화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었다. 다시없을 신혼여행인데. 저가 이 첫날밤을 얼마나 고대했는데.

한건이 예하의 엉덩이 아래를 받치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물이 쏴아아,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예하가 한건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쇄골에 코를 묻었다. 스멀스멀 뿜어지는 알파의 페로몬에 침이 고였다.

한건은 기다란 다리로 단숨에 수영장을 가로질렀다. 가지런히 개켜진 스포츠 타올을 집어 예하의 어깨에 둘러줬다. 별장 안으로 들어와서 그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창문도 닫아?”

한건이 훤하게 뚫린 창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쿠션을 껴안은 예하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한건은 창문을 닫고 유리까지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예하는 섹스하는 모습을 물고기나 구름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됐어?”

어둑해진 실내를 확인한 한건이 다시 물었다.

“응.”

예하가 대답했다.

“이리 와.”

한건이 빙긋 웃으며 팔을 벌렸다. 잠깐 멈칫한 예하가 쿠션을 내던지고 와다다 한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뒤를 빠듯하게 채우는 성기는 늘 버겁다. 벌써 수십 번을 받아들인 것임에도 그랬다. 내벽이 팽팽하게 벌어지고, 주름이 펴지는 느낌에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엎드려 누운 예하가 흐트러진 이불을 세게 움켜쥐었다.

“으응, 아⋯⋯! 읏, 흐응⋯⋯.”

“하아⋯⋯, 예하야.”

한건이 도드라진 예하의 목덜미 뼈에다 쪽쪽 입을 맞췄다. 전립선이 짓눌릴 때마다 꿈틀거리는 근육과 돋아나는 소름, 곤두서는 솜털 따위가 얼마나 예쁜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마 영원히 아무도 모르겠지.

한건이 이를 세워 잘근잘근 하얀 살결을 씹어댔다.

“우으, 응⋯⋯, 으응⋯⋯.”

붉게 달아오른 예하의 입술 새로 끊임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건의 골반이 퍽퍽 엉덩이를 때리면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몸이 위로 밀렸다. 그럴 때마다 성기가 이불에 쓸렸는데, 그게 어찌나 자극적인지. 예하가 슬쩍 허리를 들었다. 이불과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건은 그것을 조름으로 해석했다. 귀두까지 성기가 빠지더니 부욱, 내벽을 거칠게 긁으며 들어왔다. 속에 가득 차 있던 한건의 정액이 외설적인 모양새로 질질 새나갔다.

“히윽⋯⋯.”

예하가 버석하니 굳었다. 자극을 피하고자 허리를 들었을 뿐인데, 곱절로 센 쾌감이 몰아쳤다. 예상하지 못한 오르가슴이었다. 자극, 쾌감, 알파의 페로몬. 그런 것들에 취약한 오메가의 몸뚱이가 금세 절정에 치달았다.

예하의 어깨가 바짝 올라붙었다. 곧 분홍빛 성기가 주르륵, 주륵 정액을 토해냈다. 한건이 손바닥으로 그것을 쓸어 예하의 사타구니에 펴 발랐다. 자신의 정액에 예하의 정액, 애액 등으로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허벅지가 육욕을 샘솟게 했다.

“벌써 쌌어?”

한건이 연한 웃음을 띠었다. 제가 주는 쾌락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예하는 볼 때마다 짜릿하다.

“우으⋯⋯. 아, 알면 잠깐만, 좀⋯⋯.”

예하가 손을 뒤로 뻗어 한건의 골반을 밀어냈다. 아직 절정의 여운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뒤를 쑤셔대는 성기는 멈춤을 몰랐다. 끝없이 쌓이는 오르가슴이 괴롭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싫어.”

한건이 능글맞게 말하며 더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짜부라지는 전립선에 예하가 자지러졌다. 사지 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굳은 내벽을 부득부득 밀고 들어와 깊은 곳을 내리찍는 귀두에 눈물이 저절로 퐁퐁 샘솟았다.

“아흑!”

한건의 골반이 둔부를 납작하게 짓누를 정도로 깊게 치대졌다. 예하의 몸뚱이가 갓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퍼덕였다. 그리고 잠깐 물러났던 한건의 성기가 다시 쿠욱, 쑤셔박히는 순간,

“히익⋯⋯.”

예하의 성기 끝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찌익 쏟아졌다. 이불을 축축하게 적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쫙 펴진 손가락과 발가락은 뻐근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예하는 수 초 동안 바들바들 경련했다. 확 오므라드는 내벽 역시 경련이 일었다.

한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다 자신의 허벅지까지 축축이 적시는 물을 발견했다.

“뭐야. 뭐 했어, 방금?”

“모, 몰라⋯⋯. 으, 몰라⋯⋯.”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무슨 상황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제 몸 어디가 잘못됐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척추가 녹아내리는 듯한 환촉이 인다. 원초적인 공포가 치밀었다.

예하가 자신의 골반을 바투 쥔 한건의 손을 더듬었다. 후끈한 열기와 달리 시린 온도를 가진 결혼반지가 느껴졌다. 그러자 신기하게 불안함이 가라앉았다.

한건이 성기를 빼냈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왜 벌써 나가느냐고 청승맞게 한건을 올려다봤지만,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예하를 뒤집어 그의 성기와 마주했다. 말랑말랑하게 늘어진 성기는 장맛비에 흠뻑 젖은 모양새였다.

한건이 그것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자 예하가 퍼드득, 몸을 뒤틀며 또 쭉 투명한 물줄기를 싸질렀다. 판판한 예하의 아랫배가 축축해졌다. 한건의 검지가 그 위로 그림을 그리듯 지나다녔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한건도 얼떨떨했다.

예하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속눈썹에 눈물이 아롱아롱 매달렸다.

“못, 됐어, 진짜⋯⋯.”

섹스만 하면 아주 끝장을 본다. 몸을 반으로 쪼개겠다는 듯 아래를 들쑤시면서 입술은 한없이 다정하고, 또 제 애원은 귓등으로 처듣고.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해?”

한건이 예하의 눈가를 핥으며 물었다. 제가 제공하는 쾌락에 꿈틀거리는 예하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푹 익은 시금치처럼 늘어진 예하가 웅얼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결혼식 준비에, 몸도 마음도 고단했던 결혼식에, 수영에, 섹스까지 이어지니 몸뚱이가 못 견딘 건지. 아니면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다 보니 쾌락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지.

예하의 가슴팍이 바쁘게 들썩였다. 모자란 호흡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그런 예하를 지그시 응시하던 한건이 가느다란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부드럽게 녹아내린 예하의 성기와 달리 제 것은 아직 울룩불룩, 한창이었다. 둥그스름한 귀두가 척척한 예하의 주름 위를 배회했다.

“또, 또?”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건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꿈틀거렸다. 말랑말랑하게 익은 엉덩이를 양손 가득 움켜쥔 그가 예하를 아래로 끌어당기며 성기를 쑤셔 넣었다.

“으읏⋯⋯!”

예하의 목이 확 뒤로 넘어갔다.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뒷구멍이라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기분이 그러했다. 뱃가죽이 뻥 뚫린 느낌. 모골이 송연했다. 땀구멍이란 땀구멍은 죄다 열렸다. 예하의 페로몬 역시 자연히 팽창해갔다.

“하아⋯⋯.”

한건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진득하게 밀려오는 페로몬이 말도 못 하게 황홀했다. 뇌가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귓구멍으로 뇌수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한건의 허리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천천히, 또 빠르게. 힘이 빠져 늘어진 예하의 골반을 억척스레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 제 허벅지를 받치고 깊숙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으흥, 아! 너, 너무 깊어! 배가 뚫릴 것 같⋯⋯ 아, 최한, 건⋯⋯.”

한건이 까득 이를 짓씹었다. 예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이한 가학성이 뒷덜미를 치고 올라왔다. 예하를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잘근잘근 씹어먹고, 빨아먹고,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다. 송곳니가 자라나고, 머리 위로 뿔이 솟는 것 같았다.

한건의 광대가 경련으로 꿈틀거렸다. 그 얼굴을 오롯이 마주한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익숙한 얼굴이다. 육욕, 성욕, 색욕 그런 것으로 점철된 얼굴. 이 표정이 나타날 때면 해가 지는 것이든, 해가 뜨는 것이든 둘 중의 하나를 마주할 때까지 정사가 이어졌다.

“최한건, 최한건. 나 봐.”

파랗게 질린 예하가 한건의 볼을 더듬었다. 한건의 뜨거운 콧김이 손등을 스쳤다. 예하가 다급하게 한건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아니, 끌어당기려 했다.

“잠깐만, 잠깐, 아앙, 윽!”

그 순간, 한건이 퍽! 치고 들어왔다. 흠씬 두들겨 맞은 배 속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예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더 나올 것도 없는 성기가 삐질삐질 알 수 없는 액체를 흘려보냈다. 확 오므라든 내벽이 한건의 성기를 쪽쪽 빨아댔다.

그 자극에 한건이 절정을 토해냈다. 예하가 창백하게 질렸다. 끈적한 액체가 울컥울컥 차오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한건은 그에 그치지 않고 부득부득 뒤를 더 밀고 들어왔다. 고환이 예하의 회음부에 눌려 짜부라질 정도였다.

“허윽, 으⋯⋯, 흐⋯⋯.”

빠끔, 벌어진 예하의 붉은 입술이 달콤한 신음을 토해낸다. 이따금 꺽꺽 숨이 북받치는 소리도 섞여 났다. 그럴 때면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가 떨어지며 한건을 조롱했다.

한건이 마른 입맛을 다시며 예하의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두껍고 단단한 두 팔로 작은 몸뚱이를 세게 껴안았다. 그 채로 허리를 뭉근하게 놀렸다.

제 품 안에서 박동치는 예하가 느껴진다. 더할 나위 없이 살아있는 예하. 저를 품고 있는 예하. 나의 강예하. 나의 반려. 나의 성역.

“예하야, 사랑해.”

“흐으, 아! 아아! 흡, 흐앙⋯⋯.”

“사랑해. 응?”

“우으⋯⋯. 흐, 윽! 그, 그만⋯⋯.”

“사랑해.”

한건이 응축된 고백을 줄줄이 이었다. 하지만 예하는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고, 감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귀두가 내벽을 북북 긁으며 들어왔다.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그것에 헛구역질이 다 나왔다. 두툼한 성기에 눌린 전립선이 괴롭다.

예하가 한건의 등을 할퀴듯 긁었다.

나 죽어.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제 괴로움을 한건이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한건은 들어주지 않았다. 섹스만 하면 어디가 모자란 사람처럼 구는 그다. 예하의 몸과, 예하의 온기, 그리고 페로몬. 그것만 받아먹고 사는 존재 같았다.

예하가 툭 힘없이 팔을 떨어트렸다. 희뿌옇게 번진 시야로 붉게 물든 손톱이 보였다. 제가 할퀸 한건의 등가죽이 끝내는 피를 본 모양이다.

허나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움찔거리지도 않았고, 뾰족한 시선으로 예하를 노려보지도 않았다.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처박고 흐읍, 흐읍, 숨을 들이마시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우으⋯⋯. 진짜⋯⋯, 짐승 같은 새끼⋯⋯.”

그 말에 한건이 반쯤 풀린 눈동자로 예하와 시선을 맞췄다. 욕설을 자각했기 때문은 아닌 듯했고, 그저 소리를 따라온 시선이었다.

늘 또렷하던 검은 동공이 묘하게 탁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한건의 얼굴은 아니었다. 어쩌면 예하만 볼 수 있는 얼굴일지도 모른다.

“사랑해.”

한건이 버릇처럼 사랑을 속삭였다. 그 말에 예하가 호흡을 말아먹었다. 근래의 한건은 고백에 몹시 너그럽다. 버릇 같기도 하고, 시시각각 북받치는 사랑을 참지 못해 토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예하가 물끄러미 한건을 올려다봤다. 뒤를 헤집는 성기는 참으로 난폭한데, 눈빛은 다정하기 그지없다. 찰박찰박 허벅지를 때리는 골반은 흉포한데, 사랑을 말하는 입술은 귀엽다 못해 깜찍하기까지 했다.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건의 목덜미를 힘껏 껴안았다.

그래, 신혼여행인데. 그 이름도 유명한 ‘첫날밤’인데. 까무러칠 때까지 섹스 한 번 해보자.

* * *

예하가 팅팅 부은 눈꺼풀을 간신히 떼어냈다. 희뿌연 눈앞도 헤쳐내지 못했는데 통각이 먼저 기상을 반겼다. 전신의 마디마디에 녹이 슨 느낌이었다.

“으⋯⋯.”

움직일 수가 없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몸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침대 속으로 침식하는 기분이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눈부신 햇살은 평소와 조금 다른 빛깔이다. 규칙적인 소음도 들려왔다. 적막에 적막을 얹어놓은 듯한 한건의 집과는 달랐다.

예하는 수 분 동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안개 속에 파묻힌 것처럼 자욱하던 정신이 점차 또렷해졌다. 그때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됐다.

낯선 침대. 넓은 창.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 철퍽이는 파도 소리. 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널브러진 제 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아. 나 결혼하고 신혼여행 왔었지. 그리고 최한건이랑 섹스하다가 또 기절했구나.

예하가 차근차근 기억의 편린을 맞춰갔다. 모든 걸 상기했더니 저절로 한숨이 올라왔다. 딱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만큼만 섹스하는 건 무슨 기분일까. 제 인생에 배를 맞춘 이라곤 한건밖에 없으니 비교 대상이 없었다.

야한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해가 뜰 때까지 섹스만 하진 않던데. 한건이 독보적으로 절륜한 게 틀림없다. 몰래 정력에 좋지 않은 걸 먹이기라도 해야 하나. 이러다 찬하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판이다.

꿈틀꿈틀 이불을 헤치던 예하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한건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 침대에 없으면 출근했다는 뜻인데, 신혼여행 중에 출근할 리도 없고. 어딜 갔나.

예하가 침대 아래로 다리를 던졌다. 바닥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처럼 느껴졌다. 사타구니 아래로 감각이 없다. 자신이 제대로 설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를 악문 예하가 다리에 힘을 줬다. 간신히 바닥을 딛고 서자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가 울긋불긋, 불그죽죽 난리도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꼭 꽃무늬 스타킹이라도 신은 모양새였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예하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벽이 없어 광활할 정도로 넓은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건을 찾는 건 쉬웠다. 저 멀리서 그의 넙데데한 등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한건은 예하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평소의 그라면 예하가 침대를 벗어나는 순간, 일렁이는 냄새를 맡았을 텐데. 미간을 좁히고 눈을 부릅뜬 것이, 지금 하는 일에 보통 집중한 게 아닌 듯했다.

예하는 한건과 가까워질수록 눈을 의심해야 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몽중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한건은⋯⋯ 그러니까 한건은⋯⋯ 달걀을 작살내고 있었다. 세상의 달걀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지대한 사명감을 띤 사람 같기도 했다. 침대만큼 커다란 조리대에 깨지다 못해 으깨진 달걀 껍데기가 수북했다.

“뭐해?”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어, 일어났어?”

한건이 끈적한 두 손을 옆으로 벌리고 고개를 숙여 예하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빙긋 웃는다. 방금까지 생명이 될 수도 있었던 알을 수십 개나 깨버린 사람답지 않게 보기 좋은 미소였다.

“뭐하냐고.”

예하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조리대 위를 살폈다. 그건 관찰이기도 했고, 염탐이기도 했다. 소금, 후추, 설탕으로 보이는 알갱이들이 여기저기 난자해있고 드문드문 알이 굵은 고춧가루도 섞여 있었다. 반쯤 녹아 뭉그러진 버터와 번들거리는 식용유도 있었고, 부서진 파스타 면과, 고추장도 있었다.

저 검은 물체는 무엇인가. 설마 미역인가. 저건 또 무엇인가. 설마 대추인가. 붉은 피를 질질 쏟아내는 비트는 왜 있는 건가.

규칙 없는 재료들이라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스크램블.”

한건이 당당하게 답을 내놓았다. 예하의 만면이 희한하게 뒤틀렸다.

“⋯⋯형이?”

요리를? 직접? 대체 왜? 그의 표정은 어제, 바닷물을 마시는 예하를 보고 한건이 지었던 표정과 똑 닮아 있었다.

한건이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예하는 그 웃음에 동조해주지 못했다.

“대체 스크램블에 미역이랑 대추는 왜 들어가는데?”

예하도 요리에 박식하진 않았으나, 적어도 스크램블에 미역과 대추, 고추장이 낄 자리가 없다는 건 알았다. 혹, 서민에게 알려지지 않은 값비싼 요리를 만드는 걸까. 아니면, 먼 나라의 민속 음식이라거나.

하지만 한건이 분명 자신의 입으로 ‘스크램블’을 만든다고 했거늘.

“그냥⋯⋯ 넣어보고 싶었어.”

한건이 물에 불리지 않아 딱딱한 미역을 뒤집개로 툭툭 건드렸다. 예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차마 못된 말을 뱉을 순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뒤집개를 든 한건이 귀엽기도 하고. 볼과 가슴팍에 달걀 물을 묻히고 있는 게 웃기기도 하고. 저를 위해서 생전 해보지 않았던 요리에 발을 담근 게 기특하기도 하고.

예하가 티슈로 한건의 가슴팍을 닦아냈다. 탄탄한 근육 여기저기에 튄 달걀 물이 불편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나한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나를 독살하고 싶었던 거야?”

예하가 턱짓으로 접시에 올려진 물체를 가리켰다. 푸른빛이 돌고 있는 ‘파란 스크램블’이 있었다. 옆 접시에는 ‘새까만 스크램블’이, 그 옆옆 접시에는 ‘붉은색 스크램블’이 또 그 옆에는 달걀 없는 ‘대추 스크램블’이 버터에 절여져 있었다.

아무튼, 흔히 생각하는 스크램블은 절대 아니었다.

“⋯⋯먹으면 죽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보여?”

한건이 시무룩하게 뒤집개를 내려놓았다. 넓고 두꺼운 그의 어깨와 짙은 눈썹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예하는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행복한 아침이었다.

* * *

예하는 요트라는 걸 일평생 드라마나 영화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비단 예하뿐만이 아니라,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터였다.

하얀 세일(sail)이 달려있고, 앞부분이 매끈하게 빠진 한건의 요트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빌딩만큼 커다란 요트를 예상했었던 터라.

한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요트를 사고 싶었지, 화물선을 사고 싶던 게 아니란다. 그래서 부러 적당한 크기의 것을 골랐다고. 그렇다고 해도 요트는 집채만큼 컸다.

요트를 타고 바다를 달리는 기분은 가히 황홀했다. 머리칼 사이사이를 쓸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은 모래사장에서 느끼던 것과 전혀 달랐다. 훨씬 생동감 넘치고, 곱절은 더 신선했다.

덱(Deck)에 올라선 예하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찌뿌듯했던 근육이 바닷바람에 휩쓸려 사르르 녹아내렸다. 동그란 광대 위로 발간 행복이 올라왔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살피며 뿌듯하게 웃었다. 아파서 못 움직인다고 징징거리는 걸 고집스레 끌고 나오길 잘했다. 한건이 덱 가운데에 움푹 팬 보울로 들어갔다. 보통 그물을 설치하지만, 한건은 그물 대신 투명하고 쫀쫀한 질감의 막을 선택했다.

“이리 와.”

한건이 예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싫어. 뚫릴 것 같아.”

예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한건이 서 있는 보울은 꼭 비닐을 판판하게 당겨 놓은 모양새다. 투명해서 두께도 가늠할 수 없었다. 잘못 디디면 뻥 뚫려 그대로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칠 듯했다.

벌써 수십 분을 나왔으니 수심도 깊을 텐데. 수영도 잘 못 하는데. 물속에 상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제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면 그 대단한 한건도 어찌하진 못할 것 같았다.

예하의 작은 머리통 위로 삐용삐용 위험 사이렌이 울렸다. 한건이 슬핏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곳에서 겁이 많은 예하다. 언제는 택시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 적도 있으면서.

“안 떨어져. 나도 서 있잖아. 이리 와.”

한건이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예하가 한건의 손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커다랗고, 단단하고, 마디마디가 올곧은 손은 언제 봐도 참 믿음직스럽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은 예하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펄쩍 뛰어 보울 위로 올라갔다. 발바닥에 닿는 질감은 꼭 트램펄린 같다. 발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훤히 보였다.

한건을 꼭 움켜쥔 예하가 뒤꿈치로 조심조심 바닥을 문질렀다. 단단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떨떠름한 예하의 낯에 한건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기겁한 예하가 퍼덕퍼덕 사지를 휘저었다. 한건은 그대로 길게 누워 자신의 몸 위에 예하를 올려놨다.

“뭐 하는 거야!”

예하가 빽 고함을 질렀다. 한건이 능글맞게 웃으며 예하와 눈을 맞췄다.

“이제 떨어져도 같이 떨어질 거야. 죽어도 같이 죽겠지.”

“⋯⋯.”

“그래도 무서워?”

“⋯⋯.”

예하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거렸다. 한건의 품은 견고하고 안정적이었다. 더군다나 등을 감싼 손은 태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자신을 놓지 않을 것 같았다.

코로 한숨을 내쉰 예하가 몸을 늘어트렸다.

“안 무서워. 이제 놔도 돼.”

“진짜?”

“어, 진짜.”

예하가 한건의 가슴 위에서 내려왔다. 독특한 바닥이 아직 무섭긴 했으나, 한건이 있으니 참을 만했다. 뻣뻣하게 누운 예하가 하늘을 바라봤다.

하얀 돛과 푸른 하늘, 몽글몽글한 구름이 눈앞에 펼쳐졌다.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한국은 어디로, 어떻게 눈을 돌려도 높다란 빌딩과 난잡한 홀로그램, 그리고 빽빽한 트랜지션뿐인데. 이다지도 쾌청한 하늘이라니. 고전 영화에서나 본 풍경이었다.

“예쁘다⋯⋯.”

예하가 아낌없이 감탄을 내놓았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그가 좋아하니 저 역시 행복했다. 앞으로 자주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돈도 열심히 벌어야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예하와 찬하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지. 생전 해본 적 없던 다짐도 했다.

“이대로 한국까지 갈 수 있어?”

한참이나 하늘을 보던 예하가 물었다.

“있지. 내년 찬하 생일 때나 도착하겠지만.”

한건이 웃음기가 밴 음성으로 답했다. 예하가 흐음, 목울대를 일렁였다. 집과 참 멀리 떨어져 있구나. 그걸 이제야 자각한다.

꾸물꾸물 몸을 옆으로 돌린 예하가 한건을 쳐다봤다. 미끈하게 솟은 그의 코가 오늘따라 높아 보였다. 예하가 검지로 그의 콧대를 매만졌다.

“찬하는 언제 와?”

“이틀 뒤에.”

“내일 오라고 하면 안 돼?”

그 말에 한건의 눈썹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예하는 지금이 ‘신혼여행’임을 전혀 자각하고 있지 못한 듯했다. 물론, 찬하와의 여행도 중요하지만 그건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은가. 마음만 먹으면 수십, 수백 번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란 말이다.

“이거 우리 신혼여행인데. 고작 이박삼일로 끝내자고?”

“뭐 어때. 가족 여행인 셈 치면 되지.”

“가족 여행 중에는 섹스 못 하잖아.”

그 말에 예하의 만면이 콰득 일그러졌다. 섹스라니. 어젯밤의 정사로, 아니 반나절의 정사로 아직 온몸이 쑤시는데. 또 섹스라니.

“⋯⋯또 하려고?”

예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원래 신혼여행 때는 삼시 세끼마다 하는 거야.”

한건이 씨익 입꼬리를 한껏 째며 웃었다.

“누가 그래?”

“다 그래.”

“⋯⋯.”

예하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 대부분의 신혼이 삼시 세끼마다 섹스를 한다고 치자. 그들은 아마 한 번의 절정을 섹스로 명명할 것이다. 하지만 한건은 한번 시작했다 하면 기본이 세 시간이었다. 세끼에 맞춰 섹스하면 삼 곱하기 삼, 그러니까 총 아홉 시간 섹스만 하겠단 말이었다.

“마침 딱 점심때네.”

한건이 능글맞은 낯으로 예하의 허리께를 더듬었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어 한건에게서 떨어졌다. 지금은 바닥이 뚫리든 말든, 하등 상관없다. 포악한 파도보다 한건이 더 큰 위협이었다.

“나 아파.”

예하가 자못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건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어디가?”

“뒤에.”

“뒤에 어디?”

예하가 한건의 손을 채가서는 엉덩이를 쥐게 했다.

“여기.”

“⋯⋯아.”

한건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걱정이 한층 사그라졌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통각인데도 그랬다. 참 얄궂지.

한건이 다시 예하의 옆에 바짝 붙어왔다. 예하가 가느다란 손목으로 그를 밀어냈다. 허나 뼈대부터 다른 체격 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한건의 손이 쑥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한건을 반겼다.

기겁한 예하가 허리를 뒤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 아프다고. 못해!”

“안 넣을게. 만지기만 할게.”

“얼씨구. 누가요? 최한건이요?”

예하가 눈을 홉뜨며 비아냥댔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쪽,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땠다.

“네가 싫다면 안 해.”

“⋯⋯.”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아랫입술을 누르듯 쓰다듬었다. 육욕과 아쉬움이 엉망으로 뒤섞인 손길이었다. 예하가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 발정 난 짐승을 어찌하면 좋으랴.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제가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진짜 만지기만 할게.”

한건이 제법 단호한 낯으로 다짐했다.

“하아⋯⋯. 알았어. 들어가서 해. 들어가서.”

오늘의 패배는 예하 몫이었다.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한건이 거칠게 콧김을 뿜으며 예하를 안아 들었다. 보울을 올라온 그가 빠르게 선실로 향했다. 그의 뒤꿈치에 두드려 맞은 선체가 쿵쿵쿵, 악을 질렀다.

선실 안은 호화로웠다. 보드라운 카펫과 은은한 무드등, 매끈한 가구들이 호텔 방을 연상시켰다. 테이블 위에 온갖 핑거푸드들과 음료가 가득했으나 지금은 식욕이 아니라 다른 욕(慾)을 해갈해야 했다.

두 사람은 선실에 들어서자마자 입술을 부딪쳤다. 그리고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서로의 입술을 강렬하게 빨아댔다. 마구잡이로 엉킨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 공간을 메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으응, 흐⋯⋯.”

한건의 혀는 늘 그렇듯 난폭했다. 예하의 혀를 제 것인 양 가지고 놀기도 하고, 입천장을 긁거나 입술을 물어뜯기도 했다. 그러나 수년간 그의 키스를 받아온 예하는 이제 그것을 쾌락으로 느낄 수 있게 됐다.

한건이 예하를 소파에 눕혔다. 그 후 가랑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팔굽혀펴기하듯 예하의 양옆에 손을 지탱한 그가 다시 입술을 붙이려 할 때였다.

“지, 진짜 만지기만 할 거지?”

예하가 께름칙한 얼굴로 물었다. 한건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거렸다.

“⋯⋯빠는 것도 안 돼?”

한건이 퍽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비를 구했다. 예하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고민하는 거였다. 답은 금세 나왔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의 성기는 흉포할지라도 혀는 늘 따뜻하고 보드라웠으니 괜찮을 성싶었다.

한건의 얼굴이 단숨에 바뀌었다. 쩌억, 입을 벌린 그가 예하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리고 당장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살갗을 씹어댔다. 연약한 살결 위로 잇자국이 올라왔다. 그것을 혀로 삭삭 핥았다.

“으읏, 아⋯⋯.”

예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프긴 하나 내뺄 정도는 아니었다.

예하가 한건의 팔뚝과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저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데, 전신을 누르고 있는 덩치 때문에 움찔거리기도 힘들었다.

그때, 한건이 예하의 윗도리를 뒤집어 깠다. 어젯밤에도 한참이나 물고 빨았던 터라 분홍빛으로 맛깔나게 익어있는 유두가 반갑다고 인사했다. 한건이 그 인사에 응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응!”

살가죽이 연한 가슴을 억척스레 모아쥔 한건이 그곳에다 입술을 묻었다. 쭉쭉 흡입력 있게 빨아당기자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유두가 봉긋 튀어나왔다. 한건이 검지와 엄지로 그것을 눌렀다가 비틀었다가, 또 잡아당기기도 했다.

찌릿찌릿한 쾌감에 예하의 허리가 들썩였다.

“왜 젖은 안 나올까.”

한건이 엄지로 유두를 짓이겼다. 예하가 헙, 숨을 말아먹었다. 그러다 한건의 말을 되뇌곤 눈을 크게 떴다.

“흣, 아으⋯⋯ 뭐, 뭐라고?”

“임신했을 때 말이야. 출산 후에도 그렇고. 배는 불렀는데 젖은 안 나왔잖아.”

“다, 당연히 안 나오지.”

“그게 왜 당연한데?”

“나는 남자잖아!”

“응. 남자, 오메가지.”

예하가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였다. 허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의문이 전혀 뜬금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게. 애를 낳고 키우는데. 젖은 왜 나오지 않을까.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애당초 남자 오메가는 불콰하게 취한 신이 잘못 창조했다고 여겨지는 종(種)이었다.

“안 나와. 아무튼 안 나와.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마.”

“⋯⋯.”

“아, 나오면 어쩔 건데! 그거 너 먹으라고 나오는 것도 아니거든!”

예하가 빽, 소리를 지르며 한건을 밀어냈다. 하지만 한건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묘한 눈으로 예하의 유두를 쳐다봤다. 예하가 가슴을 가리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러나 한건이 더 빨랐다.

그는 기필코 젖을 먹겠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유두를 빨아댔다. 살갗이 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흣, 아아, 응⋯⋯.”

예하가 어깨를 위로 올리며 목을 오그렸다. 한건은 유두를 한참이나 물고 빨았다. 가끔 이가 유두를 할퀴기도 했는데, 그대로 물어뜯어 버리는 건 아닐까,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파아, 응? 최한건, 거기 아파아⋯⋯.”

참고 참던 예하가 결국 탁탁탁 한건의 팔뚝을 때렸다. 비로소 한건이 물러났다. 타액에 흠뻑 젖은 유두가 번들번들 음란하게 빛났다.

울상을 한 예하가 자신의 유두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시뻘겋게 부푼 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타깃으로 입술을 옮겼다. 손은 한참 전부터 엉덩이를 으깰 듯이 주무르고 있었다. 예하의 바지가 쑥 아래로 내려갔다. 반쯤 서 있는 성기가 드러났다. 언제, 어느 순간에 마주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한건이 군침을 삼켰다. 예하의 나신만 앞에 두면 어금니 사이로 자꾸 침이 배어 나왔다. 평생 음식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신 적이 없거늘. 예하 앞에서는 인간의 거죽을 벗게 됐다.

한건이 한입에 성기를 물었다.

“우읏⋯⋯.”

예하가 저도 모르게 한건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후끈하고 척척한 입안. 목구멍에 찌부러지는 귀두. 기둥을 핥아 내리는 혀. 그리고 센 흡입력. 쾌락에 나약한 오메가의 몸이 절정에 치닫는 건 일순간이었다.

예하가 발가락을 접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아으응!”

한건의 혀 위로 하얀 탁액이 뿌려졌다. 평소보다 묽은 맛이었다. 어젯밤 내내 쏟아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건은 그것을 남김없이 삼켰다. 쩝쩝 혀를 놀리며 맛을 되뇌기까지 했다.

예하가 힘없이 늘어졌다. 뜀박질을 친 것처럼 숨이 가빴다. 허나 한건은 그런 예하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예하의 골반을 쥔 그가 작은 몸뚱이를 휙 뒤집었다.

“왜, 왜?”

놀란 예하가 뒤를 돌아봤다. 설마 넣으려고. 안 넣기로 했으면서! 넣기만 해봐! 그런 눈으로 한건을 노려보는데, 둔부가 쫙 옆으로 갈라지고 뜨끈한 게 닿아왔다. 한건의 성기와 온도는 비슷했으나, 크기가 달랐다. 훨씬 말랑하고, 작은 것.

“흐앙⋯⋯.”

예하가 철퍼덕 앞으로 쓰러졌다. 혀였다. 한건은 유두에 성기까지 먹어놓고서도 부족했던지 이번엔 뒷구멍을 쭉쭉 빨아댔다. 허벅지가 달달 경련할 정도로 큰 자극이었다.

“거, 거기 아니야, 흐, 아니⋯⋯ 아응!”

예하가 자신의 골반을 바투 쥔 한건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이렇게 큰 쾌락은 고통스럽다. 애무가 아니라 괴롭힘에 가깝단 말이다.

성기를 빨리는 것과 뒤로 한건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쾌락 점이 진동했다. 아무래도 오메가다 보니 뒷구멍만큼 예민한 곳이 없었다.

굴곡 사이에 코를 묻고, 씨근덕거리던 한건이 잠깐 입술을 뗐다. 예하의 말대로 퉁퉁 부어있는 주름이 보통 아픈 게 아닌 듯싶었다. 근데 이상하게 식욕이 돈다. 통통하게 부푼 구멍이 어찌나 맛깔스러워 보이는지.

눈을 번뜩인 한건이 게걸스레 구멍을 빨아댔다. 쭉쭉 세게 빨아당기면 볼록 튀어나온 그것이 달큼한 냄새를 풍긴다. 그러다 혀를 쑤시면 오물거리며 기뻐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읏, 으, 아, 흐잇⋯⋯.”

예하의 손끝이 벅벅 소파를 긁었다. 한건의 혀를 피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으나 불가능했다.

한건은 예하의 구멍을 빨면서도 손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고환을 문지르거나, 엄지로 회음부를 짓누른다거나,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예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파드득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만, 우응, 흣, 그만해⋯⋯. 응?”

예하가 사타구니를 힘껏 오므렸다. 그리고 물장구를 치듯, 다리를 휘저었다. 한건이 비로소 떨어져 나갔다.

예하가 소파에 불을 비볐다. 가만히 몸만 대주고 있었는데도 진이 다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건이 빨아도 되냐, 물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을 걸 그랬다.

예하의 몸을 타고 올라온 한건이 불그스름하게 익은 귓불을 잘근거렸다. 거친 그의 숨소리가 예하의 귓바퀴를 콕콕 불편하게 찔렀다. 아니, 그것보다 허벅지를 찌르는 살덩이가 더 불편했다.

우람하고, 두껍고, 단단하고, 화끈거리는 한건의 성기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동시에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제가 아무리 오메가로서니, 어찌 됐든 남자인데 이다지도 발기한 채로 방치하는 건 고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예하야⋯⋯.”

한건의 저음이 예하의 양심을 살살 긁어댔다. 그가 자신의 성기를 예하의 엉덩이에 대고 문질렀다. 얇은 바지 너머로 불끈거리는 성기가 선연히 느껴졌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몇 번이고 누르고 또 누르던 말을 내놓았다.

“⋯⋯하, 할래?”

“⋯⋯.”

구원과도 같은 그 말에 한건이 묘한 낯으로 예하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아프게 쓸린 뒤를 분명 제 눈으로 다 봤거늘. 그런데도 이리 말하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됐어. 아프다며.”

한건이 볼록 튀어나온 예하의 목뼈에 키스하며 말했다. 그러나 엉덩이를 꾹꾹 누르는 성기는 여전했다.

예하는 한건의 거절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뒤로 꺾어 한건과 눈을 맞췄다.

“아니면, 빨아줄까?”

그건 잘할 수 있어. 예하가 보란 듯 혀를 베에, 내밀었다. 그 모습이 천진하면서도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한건이 쿡쿡 웃음을 흘려댔다.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가만히?”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예하가 반문했다.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밴드 형식으로 된 바지를 쑥 내리고는 성기를 예하의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기겁한 예하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아, 안 넣는다며!”

“안 넣어.”

둔부 사이에 성기를 포갠 한건이 슥슥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몹시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건의 성기가 당장이라도 뒤를 뚫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비벼지는 뒷구멍과 성기, 틀어 잡힌 엉덩이. 그 모든 게 뒤섞여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창조해냈다.

“흐아⋯⋯.”

예하가 소파에 이마를 묻었다. 대체 한건은 이런 걸 어디서 배워오는 건지 모르겠다.

한건은 예하의 엉덩이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성기를 마찰시켰다. 나중에는 예하가 살갗이 따가워 못하겠다고 울상을 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본 한건이 테이블 위에서 손바닥만 한 것을 낚아챘다. 보기만 해도 혀가 단 메이플 시럽이었다.

한건이 손바닥 위로 시럽을 쏟았다. 그리고 그것을 예하의 엉덩이와 사타구니까지 철퍽철퍽 펴 발랐다.

한건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생각했다. 끈적하겠지만, 다 하고 또 핥아주지 뭐. 그러고 보니 중국의 길거리 음식인 ‘탕후루’ 같다. 강예하 엉덩이 탕후루. 거기까지 생각하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한참 전에 지친 예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든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이제는 그가 제 뒤를 뚫고 들어와도 그러려니, 할 수 있을 듯했다.

마침내 준비를 끝낸 한건이 예하의 골반을 쥐어 올렸다. 예하가 얼떨결에 무릎으로 섰다. 그러자 이번엔 허벅지 사이로 한건의 성기가 쑥 들어왔다. 예하가 멍청한 낯으로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 성기 아래로 한건의 성기가 비죽 나와 있었다. 제 것에 비해 몇 배나 큰 성기는 볼 때마다 신기했다.

한건이 그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타인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정사 중인 모습이었다.

한건이 세 번쯤 왕복했을 때, 참다못한 예하가 확 허벅지를 오므렸다. 삿갓 모양으로 된 귀두와 울룩불룩 핏줄이 선 성기가 기이하리만큼 세세히 느껴진다. 허벅지가 이렇게 예민한 부분이었구나. 일평생 그걸 처음 깨달았다.

“으응, 흑, 이, 이상해⋯⋯.”

예하가 뒤를 돌아보며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아프진 않지?”

한건이 퍽퍽 허리를 쳐대며 물었다.

“어어. 그렇진 않은, 아흣!”

그때, 한건의 귀두가 예하의 성기 옆구리를 부욱, 세게 긁었다. 예하가 자지러지며 긴 신음을 뽑아냈다. 그건 또 다른 쾌락이었다. 한건의 것과 제 것을 함께 움켜쥐고 흔든 적도 많은데, 이다지도 소름이 끼치진 않았다.

한건이 옳다구나, 하며 거칠게 허리 짓을 이어갔다. 예하는 허리도, 팔도, 다리도 말랐으면서 허벅지는 통통했다. 겨드랑이 안쪽은 말랑했고, 볼살은 보드라웠다. 물론, 엉덩이가 가장 으뜸이다.

아니, 아무튼. 통통한 허벅지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건 뜨거운 내벽과는 달랐다. 메이플 시럽 때문에 끈적하고, 부드럽고. 옴팡지게 조이진 않는데, 그래서 느긋한 맛이 있었다.

“하으, 응, 아읏!”

“후우⋯⋯.”

후끈하게 달아오른 한건의 숨결이 예하의 등줄기 위로 내려앉았다. 예하가 움찔 등허리를 떨었다.

예하의 등 위로 가슴팍을 딱 붙인 한건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뭉근하게 늘어진 메이플 시럽이 척척척 야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절정이 가까워진 순간, 한건이 예하의 둔부를 반으로 쫙 벌리고 구멍 위로 성기를 짓이겼다. 녹진해진 구멍이 한건의 귀두를 쉽게 받아들였다.

“흐익⋯⋯!”

예상치 못한 침입에 예하가 사지를 뻣뻣하게 굳혔다. 다행히 한건은 더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귀두 끄트머리만 넣은 채 정액을 쏟아냈다. 뜨겁고 진득한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예하도 절정에 다다랐다.

마음껏 정액을 싸지른 한건이 예하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몸을 뒤집어 예하를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렸다.

“하아, 하아⋯⋯.”

“후⋯⋯.”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거친 숨소리만 토해냈다. 예하가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질퍽한 질감이 영 별로였다. 더군다나 한건이 사출한 정액 때문에 속까지 더부룩했다.

“씻고 싶어.”

예하가 나른하게 읊조렸다.

“씻겨줄게.”

한건이 가만가만 예하의 등을 두드리며 답했다.

“진짜?”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턱을 괴고 그를 올려다봤다. 맑은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했다. 한건이 피식 웃으며 예하의 볼을 매만졌다.

“내가 언제 안 씻겨준 적이 있다고.”

“그래. 그렇지. 근데 대부분은 다른 것도 같이했잖아. 이번엔 씻기기만 해줘. 제발.”

예하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혼자 씻자니 아득하고, 한건의 도움을 받자니 지금보다 더 고단해질 것 같아 무섭고. 진퇴양난이었다.

한건의 눈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둔부에 난자한 메이플 시럽을 쪽쪽 빨아 먹을 계획이었는데. 못된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럽고, 많이 아쉬웠다.

“⋯⋯알았어.”

한건이 마지못해 긍정했다. 예하가 그제야 안심한 듯, 한건의 가슴팍에 푹 얼굴을 묻었다. 졸린다. 바다고 요트고 여행이고, 모두 상관없으니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한건이 손바닥으로 예하의 눈을 가렸다. 안락한 색의 어둠이 도래했다.

“자도 돼.”

“응⋯⋯.”

“잘 자.”

한건 특유의 낮은 음성과 함께 예하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예하가 다시 눈을 뜬 건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이었다. 아직 정사의 여파를 털어내지 못한 몸이 노곤했다. 파도 소리가 가깝지 않고, 바닥이 일렁이는 느낌도 없는 걸 보니 별장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예하가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이제는 눈을 뜨자마자 한건을 찾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한건은 예하의 옆에 눕듯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책장이 몹시도 여유로웠다.

책. 책이라. 늘 홀로그램을 들고 일을 하는 모습만 봐왔지, 책을 읽는 건 처음 봤다. 그것도 종이책. 먼 옛날, 기술이 발전하고 4차 산업혁명이 오면서 많은 연구자가 그래도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종이책은 사라졌다고 표현해도 어폐가 없을 정도였다. 점차 감소하던 종이책 소비자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종이책은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것처럼 하나의 취미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니 ‘책을 읽는 모습’은 굳이 한건으로 국한하지 않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하가 꼭 명화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한건을 쳐다봤다.

한건의 검은 눈동자가 활자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잔잔하게 움직였다. 어떠한 구절이 마음에 들 때, 혹은 들지 않을 땐 살풋 눈살을 구기기도 했고, 입술을 달싹이기도 했다. 출근할 때와 달리 차분히 내려온 앞머리가 일렁였다.

“형 되게 잘생겼다.”

그걸 보고 있으니 자연히 흘러나오는 감탄을 막지 못했다. 한건이 책에서 예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어났어?”

그가 엄지로 예하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예하가 한건의 손바닥에다 익숙하게 불을 비볐다. 눈을 뜨자마자 느끼는 한건의 냄새와 체온이 참 좋았다.

“좋아해.”

뜨끈한 시선의 예하가 말했다. 담담하고, 평온하게 이어진 고백이었다.

“⋯⋯.”

그러나 한건은 난데없이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얼이 빠졌다. 예하가 표하는 사랑 고백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멀미가 났다.

눈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한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하는 빙글빙글 웃는 낯이었다.

“나 잘생긴 사람을 되게 좋아하나 봐. 형 얼굴 보니까 갑자기 사랑이 막 샘솟네.”

예하가 길게 팔을 뻗어 한건의 턱을 쓰다듬었다. 한건이 그제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한테 이런 말을 듣는 게 이렇게 쉬울 줄 몰랐는데.”

고작 타고난 얼굴 따위로 예하에게 사랑받다니. 허무하면서도 기뻤다. 책을 덮은 한건이 예하를 끌어안고 그의 옆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예쁜 이마와 동그란 콧잔등에 꾹꾹 입술을 찍었다.

예하가 눈앞에 있는 한건을 가만히 바라봤다.

최한건. 세상에서 가장 무섭던 사람과 어찌 이리됐을까. 고통과 눈물로 점철된 그때 그 시간이 아직도 뚜렷한데. 어쩌다 이다지도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됐나. 놀랍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고, 또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형을 사랑하기 때문에 듣기 쉬운 말이 된 거야. 옛날 그대로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한건이 있어 불행했으나 한건이 있으므로 안온했다. 예하는 여전히 그 기이한 간극에 서 있다. 한건이 온 힘을 다해 안온으로 끌어당기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 불행 쪽으로 풍덩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해. 그럼 자주 말해줄게.”

예하가 경고하듯 한건의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한건이 그 손을 낚아채 아프지 않게 이를 세웠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예하를 주시했다. 흔들림 없이 곧은 눈빛.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단단하게 뭉친 숨소리.

그건 반드시 그러겠노라, 기필코 네 사랑을 쟁취하겠노라는 대답이었다.

잠깐 침묵하던 예하가 한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콕 박았다.

“근데 형이 조금 덜 잘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형을 너무 좋아하거든.

소곤소곤 비밀처럼 속삭인 예하의 말에 한건의 만면 위로 웃음이 스몄다.

가히 완벽한 신혼여행이었다.

* * *

예하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한건과 신혼여행으로 갔던 바다와 달리 물 색깔이 금빛인 바다였다. 맨발로 딛고 선 모래는 밀가루처럼 보드라웠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풍경인 것처럼 느껴졌다.

예하는 끊임없이 걸었다. 하지만 다리가 아프지도, 땀이 나지도 않았다. 머리칼을 살랑이는 바람이 참으로 청량했다. 예하는 무심코 지금 이 순간이 봄의 정점에 다다라있을 때라고 판단했다. 누구든 이 풍경을 보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바다의 끝에 다다랐다. 예하의 부족한 지식으로는 ‘바다의 끝’을 정의할 수 없었으나, 그냥 느낌이 그랬다.

바다의 끝에는 큼지막한 조개가 하나 놓여있었다. ‘큼지막한’이 뜻하는 크기가 손바닥만 한 크기를 뜻하는 건 아니었고, 뭐가 좋을까. 그래. 침대. 침대 정도 되는 크기였다.

침대만큼이나 커다란 조개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면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앞의 이것은 참으로 예쁜 조개였다.

하얀 빛깔은 영롱했고, 주홍색과 분홍색이 파스텔처럼 내려앉은 게 이제껏 봐왔던 그 어떠한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입을 동그랗게 벌린 예하가 조개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아니, 느껴지지 않았나. 잘 모르겠다.

예하는 한참 동안 조개를 보고 있었다. 꼭 대가의 작품을 감상하듯이. 잘 만들어진 조각을 보듯이. 또 아니면 장대한 자연에 감격한 듯이.

집에 가져가고 싶다. 한건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개는 무거워 보였다. 껍질이 아주 두껍고, 단단해서 한건이 와도 들지 못할 듯했다.

아쉽게 입맛을 다신 예하가 뒤를 돌았다. 오래 나와 있었으니 한건이 걱정할 것이다. 얼른 집에 가야지.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데, 툭 무언가가 허리께를 쳤다. 예하가 뒤를 돌아봤다.

조개가 있었다.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움직였나? 혼자 움직인 건가?

신기한 마음에 조개 아래도 살펴보고 모래사장도 살폈으나 바퀴 같은 걸 찾지 못했다.

그때, 예하는 느꼈다. 이 조개가 자신과 함께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예하가 조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개는 예하의 앉은키보다 훨씬 더 컸다. 그 그림자에 예하가 가려질 정도였다.

예하가 손등으로 조개를 두드렸다. 혹시 누가 있나, 싶어서. 누가 있으면 좀 나와보라고. 네가 몹시도 귀한 듯하니 내가 데리고 가주겠노라고. 그리 말해주려 했다.

예하의 의도를 알아챘을까. 조개가 꿈틀 경련하더니 서서히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세찬 빛이 쏟아졌다.

빛을 이기지 못한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축구공만큼 커다란 진주가 예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 * *

식탁에 앉은 예하가 맛깔스럽게 구워진 연어 스테이크를 지그시 바라봤다. 선홍색에 그릴 자국이 난 고깃덩이는 예하가 즐겨 먹는 요리 중 하나였다.

“⋯⋯.”

근데 왜 이렇게 입맛이 안 돌까. 일어나자마자 먹는 첫 끼거늘. 옆에 앉은 찬하도, 하물며 한건도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는데. 왜 저만 이리도 음식을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을까.

“왜. 속이 안 좋아? 아니면 메뉴가 별로야?”

이상함을 느낀 한건이 물었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 예하가 천천히 포크를 들어올렸다.

살이 연한 연어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사르르 무너졌다.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행동이 어찌나 께름칙한지, 사약이라도 마시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연어가 입술에 닿는 순간, 예하가 포크를 던지듯 내려놨다. 챙그랑!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에, 찬하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아빠?”

눈을 동그랗게 뜬 찬하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예하를 쳐다봤다. 예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 마저 먹어.”

그가 슥슥 찬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갸웃, 뒤튼 찬하가 곧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한건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예하의 상태와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예하를 따라 수저를 내려놓은 한건이 쉐프를 불렀다. 다른 음식을 만들어 오라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예하가 괜찮다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 연어를 한가득 떠 텁, 입에 물었다.

“우욱⋯⋯.”

허나 삼키기도 전에 다시 뱉어내야 했다. 생선의 비늘을 입에 넣은 기분이었다. 잡은 지 한참 되어 썩은 생선의 내장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몹시 별로였다. 어쩐지 먹기 싫더라니. 쉐프가 요리를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예하는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한건의 집 요리사는 늘 지나치게 완벽했으니까. 더군다나 찬하도, 한건도 맛있게 잘 먹고 있지 않은가. 이건 오롯이 예하의 문제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언젠가 한 번 경험한 적 있는 상태라는 거였다. 음식 냄새로 모자라 식탁 냄새, 식기의 쇠 비린내, 정체 모를 메케한 냄새까지 느껴지는 예민한 후각. 울렁거리는 속. 저릿한 근육. 어딘가 피로한 몸.

파랗게 질린 예하가 한건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한건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해 있었다.

닥터 유의 검지가 톡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홀로그램에 알 수 없는 활자가 자욱했다. 그것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다. 한참 홀로그램을 노려보던 닥터 유가 고개를 들었다.

퍽 상반된 표정의 예하와 한건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둘 다 상기된 얼굴이다. 한쪽은 화로, 한쪽은 기대로.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이렇듯 끝과 끝을 내달렸다.

“아니죠?”

예하가 퍽 공격적인 어투로 캐물었다.

“음⋯⋯.”

닥터 유가 쉽사리 답을 주지 않고 목으로 신음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쌍의 눈알이 얼른 답을 내놓으라 독촉했기 때문이다.

“임신 7주 차예요.”

그녀의 말에 예하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머리 위로 우르릉 쾅쾅 번개가 내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히트사이클도 아니었단 말이에요. 예정일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예하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러자 한건의 눈썹이 대번에 구겨졌다.

“조심해야지.”

한건이 혹 그 하찮은 마찰에 상처가 났을까, 예하의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예하는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임신을 바랐던 건 자신이다. 억제제까지 끊으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고작 한 달 앞당겨진 임신이 뭐가 그리 큰일이겠냐마는, 그 한 달 동안 할 일이 많았단 말이다.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문득 잊고 있던 꿈이 떠올랐다. 바닷가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조개를 만났던 꿈. 그 조개에서 튀어나온 진주가 제 품에 안기던 꿈. 잠에서 깨어나서도 신기하리만큼 또렷하게 기억나던 그 꿈. 그게 태몽이었다니.

“히트사이클이 아니더라도 임신할 수 있어요. 오메가니까. 음, 아주 많은 시도가⋯⋯ 있어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죠.”

닥터 유가 민망하다는 듯 단어를 조각냈다. 예하가 도끼눈을 뜨고 한건을 노려봤다. 신혼여행 때 임신한 것이다. 분명 그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 뒷구멍에 한건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더 많았다. 하다못해 찬하가 오는 날까지 미루며 섹스를 해댔다.

“아니, 씨발. 어떻게 히트사이클도 아닌데 임신할 때까지 처싸냐!”

예하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한건은 욕을 들어먹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음만 흘려댔다. 그 모습에 예하는 대화를 포기했다. 무슨 비속어를 쏟아낸다고 한들, 한건의 입가에 박제된 저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예하가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저 다음 달에 졸업식인데 어쩌죠?”

“뭐 어때요. 그때까지는 티 안 나요.”

닥터 유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하의 눈가가 마뜩잖게 뒤틀렸다. 그가 세모꼴이 된 눈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여전히 싱글벙글한 한건이 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미치고 환장하겠다.

“어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이 정신 나간 의부증 새끼가 졸업식까지 따라올 것 같으니까 그렇죠!

예하는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봐.

* * *

예하의 불행한 예감은 당연히 현실이 됐다. 한건이 임신한 예하를 바깥에, 하물며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졸업식에 홀로 보낼 리 없었다.

대학교의 졸업식은 춥고, 왁자지껄했다. 하얗게 뿜어지는 입김이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캠퍼스 여기저기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제각각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예하만 침울했다.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그 많은 인파가 홍해 갈라지듯 길을 틔웠기 때문이다.

이유는 극명했다. 제 뒤에 선 한건이 알파 특유의 페로몬을 폭격처럼 터트리고 있었으니까. 한건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밖에 없는 아우라였다.

사진이고 뭐고, 졸업장만 받고 가야지. 임신 전의 계획은 은호, 희찬과 사진도 찍고 맛있는 밥도 먹을 생각이었는데. 모두 무산됐다. 어차피 입덧 중이라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을 터였다.

조경학과 건물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예하와 삼 년 동안 함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었다. 아주 친한 건 아니었나, 오가며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다.

예하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예하를 발견한 학우들 역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예하의 뒤에 벽처럼 버티고 선 한건이 얼굴을 뚫어버리겠다는 듯, 강렬한 시선을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한건의 인상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물론 한호 그룹의 차기 회장이 대학교 졸업식에, 그것도 조경학과 건물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터였다. 그건 좀 다행이었다. 원치 않은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됐으니까.

학우들 사이에 서 있던 은호가 두 손을 번쩍 쳐들며 와다다 달려왔다.

“예하 형, 왔어? 왜 이제 왔⋯⋯.”

예하의 지척까지 온 그가 하얗게 질렸다.

“남편, 남편⋯⋯분도 같이, 오셨⋯⋯네.”

함께 달려오던 희찬 역시 귀신이라도 본 듯 사색이 됐다. 결혼식 후로 처음 보는 한건이다. 아직도 신기한 존재. 알파. 한호 그룹의 최한건. 더군다나 예하의 남편. 곱씹을 때마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됐어.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예하가 진심으로 사과를 전했다. 한건은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사람이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지대한 불편을 느끼고 있을지 누구보다 예하가 잘 알았다. 빨리 나가야지. 얼른 집에 가야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다.

“오우, 아니야. 불편은 무슨.”

은호가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봉긋 솟은 그의 광대가 파르르 경련했다. 예하는 애써 그것을 못 본 척했다.

“형, 졸업식 끝나고 같이 점심 먹자.”

희찬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예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밥 먹다가 헛구역질해서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쑥 뻗어 나오더니 예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폭발이나 돌풍 따위를 막아서는 영웅 같은 자세였다.

“지금 예하가 바깥에서 아무거나 막 주워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다음에.”

그 말에 은호와 희찬, 그리고 예하까지 턱을 뚝 떨어트렸다. 아무거나, 막, 주워, 먹⋯⋯. 뭐 하나 심각하지 않은 음절이 없는 문장이다. 예하가 한건의 손등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내가 길에서 음식 주워 먹어? 아무거나 막 주워 먹는다는 게 무슨 말이야, 대체.”

“바깥 음식은 믿을 게 못 돼. 집에서 먹어.”

한건은 단호하고 강경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예하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황당함과 참담함, 그리고 제 몫이 아닌 부끄러움이 사지를 갉아먹었다. 애써 입꼬리를 틀어 올린 예하가 은호와 희찬을 바라봤다.

“다음에 먹자. 한 칠팔 개월 후에.”

“응?”

“그런 일이, 있어. 아무튼⋯⋯ 다음에 보자. 연락할게.”

예하가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이곳에 머무는 건 그들에게도, 저에게도, 하물며 한건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듯해서.

은호 희찬과 적당히 멀어졌을 때, 예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형 일부러 그랬지?”

“뭘?”

“사람들 노려보고, 말도 막 하고 그랬잖아.”

예하가 판단하기로서니, 한건은 안하무인 독불장군이긴 했으나 적어도 적당히, 나이스하게, 예의 정도는 차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심사가 뒤틀리면 가감 없이 분노를 표출하긴 했지만, 심사가 뒤틀릴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근데 오늘은 아니다. 집에서 학교로 출발하는 순간부터 내내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타인은 그저 차가운 낯이겠거니, 할 수도 있겠지만 예하는 그가 지금 삐졌다, 혹은 토라졌다, 따위의 동사에 응하는 상태라는 걸 알았다. 한건은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싫어?”

“⋯⋯.”

“말해. 빨리.”

예하가 토라진 어린아이를 추궁하듯 캐물었다. 한건의 목울대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가 잠깐 눈알을 굴리며 말을 정리했다. 내키는 대로 내뱉으면, 예하가 기겁하고 도망칠 것 같아서.

“너 가둬두고 싶어.”

허나 순화한 말이 이따위였다. 원래 생각했던 말은 ‘팔다리 묶어두고⋯⋯’로 시작했었으니 분명 순화의 단계를 거치긴 했다.

“뭐?”

예하가 귀를 의심한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가둬두고 이런 퀴퀴한 공기도 못 마시게 하고 싶고, 이렇게 추운 날엔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싶고, 어떤 병균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는 인간들 사이도 못 나돌게 하고 싶고, 좋은 곳에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봤으면 좋겠어.”

“⋯⋯.”

“평소라면 참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힘들어. 너 임신했잖아.”

“⋯⋯.”

“그래도 열심히 참는 중이야. 계약 위반이니까. 괜히 너한테 미움 사서 계약서에 흠집 낼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한건이 무감한 음성으로 줄줄이 말을 이었다. 그의 문장이 예하의 가슴께에 차곡차곡 얹혔다. 숨 쉬는 게 괴로울 정도로 뻑적지근했다.

한건이 오늘 아침, 집을 나오며 손수 둘러줬던 예하의 목도리를 가다듬었다. 사무친 감정을 한 무더기나 쏟아낸 사람답지 않게 다정함이 듬뿍 묻은 손길이었다.

“근데 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지라 짜증 나고, 화나고, 신경 쓰이는 건 어떻게 갈무리가 안 돼.”

“⋯⋯.”

“그 정돈 네가 이해해, 라고 말하면 그것도 싫어할래? 그럼 안 할게.”

“⋯⋯.”

예하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한건을 쳐다봤다.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근래의 한건이 제게 몹시도 좋은 사람이었던지라 과거를 완전히 묻어두고 있었던 거다.

그래, 이런 걸 못 버티던 사람이었는데. 그 얼토당토않은 계약서가 아니었다면 진즉 무슨 짓을 했어도 했을 사람인데. 한건은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맞지 않은 옷을 부득부득 껴입고 있는 듯 불편했을 터였다. 모든 걸 멋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오죽했겠는가.

예하는 한 발자국 물러서 주기로 했다. 일종의 배려였다. 갑과 을로 명명되는 계약 안에 있긴 하지만, 어찌 됐든 부부고 사랑하는 사인데. 한건만 모든 걸 포기하고 사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결혼이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근 백 년은 이어질 텐데.

“⋯⋯이리 와. 왜 뒤에 서 있어.”

예하가 한건의 손목을 끌어당겨 손가락을 얽었다. 그러자 단단하게 뭉쳐있던 한건의 눈썹이 한결 유순해졌다. 예하가 엄지로 그의 손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보는 시선이 많아 입을 맞춰줄 순 없으니 그 대신이었다.

“얼른 졸업장 받고, 집에 가자. 점심 같이 먹어줄 거지?”

예하가 부러 사르르 눈을 휘며 말했다. 입가에 보조개도 폭, 들어갔다. 한건이 가장 좋아하는 예하의 얼굴이었다. 한건의 만면에 금세 연한 웃음이 뱄다.

“뭐 먹고 싶은데?”

“글쎄. 형 좋아하는 신선로 해 달랄까? 그거는 냄새 안 나니까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찬하도 아직 점심 안 먹었겠지? 얼른 가야겠네. 배고플 시간이야.”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발맞춰 걸었다. 그러다 문득, 한건이 걸음을 멈췄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라서. 예하도 덩달아 멈춰섰다. 허리를 숙인 한건이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졸업 축하해.”

“⋯⋯고마워, 형.”

그 낮은 음성이 어찌나 간지러운지, 예하가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별말 아닌데, 왜 이리 남세스러운지 모르겠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이 다시 발을 옮겼다.

“축하 선물로 주식 줄까?”

“아니.”

“그럼 건물?”

“⋯⋯아니. 됐어.”

“이번에 B사에서 새로 나온 트랜지션이 예쁘게 잘 뽑혔던데, 그건 어때?”

“필요 없다니까. 나는 형만 있으면 돼.”

“정말?”

“어. 그러니까 빨리 가자. 제발.”

둘답지 않게 자못 평범한 졸업식이었다. 그래서 뜻깊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 * *

임신 삼 개월 차. 예하는 잠이 늘었다. 그냥 늘었다고 표현하면 부족할 정도로 심각하게 늘었다.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잤다. 그뿐이랴. 찬하와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보다 잠들고, 밥 먹다 식탁에 머리 박고 잠들고, 정원에서 멍 때리다 잠들었다.

덕분에 하루가 아주, 아주 짧았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하늘이 요동쳤다. 쨍쨍했다가 붉어졌다가, 어둡다가, 또 어떤 때에는 어슴푸레하기도 했다.

옆구리에는 찬하가 있을 때도 있었고, 한건이 있을 때도 있었으며, 가끔은 둘 다 붙어 있기도 했다.

오늘은 혼자였다. 예하가 흘끔 스미스 위에 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열한 시. 한건은 출근을, 찬하는 등원했을 시간이었다.

“아우⋯⋯.”

아빠가 돼서 자식 등원도 못 챙기고. 한건과 문 집사가 어련히 잘 보냈겠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가장 짜증이 나는 건, 그렇게 잤는데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다는 거였다.

예하가 꾸물꾸물 이불을 헤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반질반질한 창문으로 까치집이 된 머리가 비쳤다. 덥수룩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그리고 또 한참 멍하니 있었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픈가. 아니면 졸린가. 그것도 아니면 대체 어떤 상태인가.

더듬더듬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초기라 잘 느껴야 조금 부푼 게 느껴졌다. 그저 지방 같은 배를 조물거리던 예하가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베개 아래에서 태블릿 바를 캐냈다.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만지던 예하는 종착지로 어김없이 한건의 이름을 터치했다. 일정한 신호음이 울렸다. 예하가 옆으로 몸을 뒤집었다.

잠깐 화면이 죽더니 곧 한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질되지 않은 머리칼이 평소와 달리 나른해 보였다. 예하가 세상모르고 자는 사이 찬하와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밥 먹기 싫다고 떼를 썼다거나, 양치하기 싫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술래잡기했다거나. 그러니 머리를 만지지도 못하고 출근했겠지. 지금도 저런데 찬하가 갓난쟁이일 때는 어땠을지⋯⋯.

[무슨 일 있어?]

만면에 걱정을 띤 한건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

예하가 자못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의도한 건 아니었고, 그저 방금 잠에서 깨 목이 잠긴 거였다.

[응.]

그러나 한건은 대번에 심각해졌다. 아직 임신 초기인 예하에게는 스치는 공기조차 위험했다(물론 지극히 한건의 독자적인 생각이다).

“점심때 올 거야?”

[그래.]

“좀 빨리 오면 안 돼?”

[왜? 어디 아파?]

“아니, 심심해.”

[⋯⋯.]

긴장으로 곤두섰던 한건의 눈썹이 느슨히 내려앉았다. 이걸 참, 허탈하다고 해야 하는지, 다행이라 해야 하는지.

“찬하 유치원 보내지 말 걸 그랬어.”

예하가 시트에 이마를 파묻고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예하는 두 달 전, 제 고집으로 찬하를 유치원에 보냈던 걸 성심성의껏 후회하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생명체가 뭐라고, 없으니 말도 못 하게 허전했다. 허나 저도, 한건도 사회성이 영 떨어지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 찬하라도 좀 정상적으로 컸으면 했다.

유치원은 시간을 조정할 수 없나. 아침에만 잠깐 다녀와도 되잖아. 무슨 수업을 세 시까지 한대. 예하가 짜증스레 발을 굴렀다. 그의 발길질을 이기지 못한 이불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나 너무 심심해, 진짜⋯⋯. TV도 못 봐⋯⋯. 보면 자꾸 자서⋯⋯. 어제도 영화 세 편이나 봤는데 세 개가 한 편처럼 기억나. 미라가 우주선 타고 고질라 잡는 영화였어⋯⋯.”

예하가 웅얼웅얼 한탄을 토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물쩍어물쩍 눈이 감기고 있었다. 게으른 고양이 같았다. 무겁게 팔랑이는 예하의 속눈썹에 한건이 슬핏 웃음을 흘렸다. 평화로워 보이는 예하에 제 마음도 안온해졌다.

[금방 갈 테니까, 씻고 기다려.]

“⋯⋯응.”

[밥은 먹고 자야지, 예하야.]

“알았어-어⋯⋯.”

예하가 보란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안녕, 좀 이따 봐. 예쁘게 인사를 건넸다. 한건이 그에 응해 손을 흔들어줬다. 홀로그램이 꺼졌다.

길게 기지개를 켠 예하가 느릿느릿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널따란 욕실 가운데에는 침대만큼이나 큰 욕조가 있고, 한 귀퉁이에는 샤워부스가 있다. 예하가 그 두 개를 번갈아 봤다. 얼른 씻고 나갈까, 아니면 느긋하게 앉아있다가 나갈까.

후자를 선택했다. 부산을 떨며 팔다리를 문지르고 싶지 않았다. 찌뿌듯한 몸에 만사가 귀찮은 상태였다.

욕조 가득 물을 받은 예하가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갔다. 쇄골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온수가 나쁘지 않았다. 욕조 턱에 기대어 투명한 유리 케이스로 손을 뻗었다. 온갖 입욕제가 산더미처럼 싸여있는 케이스였다. 아무거나 집어 욕조에 던져 넣었다. 곧 진한 자몽 향이 스멀스멀 풍기기 시작했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예하가 흥얼흥얼 알 수 없는 콧노래를 불렀다. 스미스를 켜 어제 미처 다 보지 못한 영화를 재생시켰다. 붕대를 칭칭 감은 미라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관을 박차고 일어났다. 영겁의 세월이 쌓인 모래바람이 자욱하게 몰아쳤다.

예하가 그것을 무감한 낯으로 바라봤다. 미라가 쾅쾅 발을 구르며 주인공을 뒤쫓아갔다. 긴박감 넘치는 장면인데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다. 아니, 하늘로 솟구치는 꿈인가. 아니다. 이게 꿈은 맞나. 몸이 휙 위로 떠올랐다. 몸을 감싸고 있던 물이 일제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 느낌이 몹시 생생했다. 아무래도 꿈이 아니라 현실인 모양이다.

예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멀건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곳이다. 아마도 욕실. 데구루루 눈을 굴리자 한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에 놀란 듯 씨근덕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닥터 유 불러.”

그가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그리고는 예하의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볼이나, 팔뚝, 또 연하게 부푼 배를.

멍하니 있던 예하가 한건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왔어?”

“너⋯⋯.”

“일찍 왔네.”

잔잔한 인사에 한건의 얼굴이 콰득 구겨졌다.

“너는 도대체가 무슨 정신으로⋯⋯!”

천둥처럼 떨어지는 고함에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그의 페로몬에 목이 저절로 거북이처럼 오그라들었다. 화났나? 왜 화가 났지? 예하는 그가 분노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연한 예하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이던 한건이 꾹 입을 다물었다. 쏟아내고 싶은 화와 원망은 많았으나, 그마저도 임신 중인 예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무서웠다.

“나 보여?”

한건이 물었다.

“보이지 그럼.”

난데없는 질문에 예하가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어지럽거나 메슥거리진 않아?”

“음⋯⋯ 응. 그런 것 같아.”

“하아⋯⋯.”

비로소 안심한 한건이 예하의 목덜미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보드랍게 흘러오는 예하의 향에 인위적인 자몽 냄새가 밴 게 말도 못 하게 싫었다. 입욕제를 전부 내다 버리라, 문 집사에게 일러야겠다.

“왜 그래?”

아직 분노의 시발점을 찾지 못한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대답 대신 예하의 팔을 들어 보였다. 살갗이 불그죽죽하게 익어있었다. 예하가 흡, 숨을 멈췄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챘다.

한건이 막 침실에 들어섰을 때, 예하는 보이지 않았다. 문 집사 말로는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단다. 그럼 욕실에 있다는 건데. 씻으러 가겠다며 저와 통화를 끝낸 게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불안한 예감에 헐레벌떡 욕실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익은 예하가 욕조에 축 늘어져 있었다. 하얀 김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명화에나 나올 법한 시체 같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한건이 첨벙첨벙 슈트를 입은 채로 욕조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예하를 들어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다행히도 예하가 눈을 떴고.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누구를 말려 죽이려고.”

한건이 으득, 이를 짓씹었다. 와중에도 예하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은 풀릴 줄 몰랐다.

“미안. 아기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예하가 가만가만 한건의 등을 문질렀다.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재킷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꼭 눈물 같았다.

“괜찮을 거야. 닥터 유 불렀으니까, 검사해보자.”

한건이 듣기 좋은 음성으로 예하를 안심시켰다. 예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한건이 예하를 샤워 타올로 감쌌다. 그 후 허리와 무릎 아래를 받쳐 들었다.

“밥도 먹여야 해, 씻겨줘야 해. 어째 찬하보다 손이 더 가는 것 같아, 너.”

한건의 한탄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닥터 유가 예하의 배 속을 촬영한 홀로그램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아직 작고 작은 덩어리는 생명체라 부르기엔 과분해 보였다. 닥터 유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말고도 아주 많은 것을 검사했다. 요동치는 그래프, 읽기도 힘든 영어 문장, 알아볼 수 없는 세포 같은 걸 뚫어지라 바라봤다.

한건과 예하는 초조하게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예하가 한건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한건이 손가락을 얽어왔다.

“아기는 건강해요.”

그 말에 바짝 올라붙었던 한건과 예하의 어깨가 동시에 녹아내렸다. 예하가 슥슥 배를 쓰다듬었다. 저의 같잖은 실수 때문에 큰일이라도 났으면 어쩌나, 그 예쁜 조개가 바다로 돌아가 버렸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헌데 닥터 유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아이가 건강하다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아 보였다. 한건과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혹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알파예요. 축하드려요.”

“⋯⋯.”

“⋯⋯.”

짙은 정적이 도래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배 속에 품은 아이가 알파일지, 오메가일지 전혀 가늠하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는데 신기할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기쁨에 도취해 살았다.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알파라. 오메가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제 삶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응당 알파여야 했다. 그런데 묘하게 침울했다.

“알파에, 알파에, 알파라니. 원래 알파가 이렇게 낳기 쉬운 거예요?”

예하가 따지듯 물었다. 못 낳은 아이, 찬하, 그리고 곧 낳을 아이까지 하면 총 세 번이 내리 알파였다. 닥터 유가 검지로 턱 아래를 긁었다.

“어⋯⋯. 뭐, 일반 사람이 남녀를 낳는 비율과 비슷해요. 그런데도 아들 부잣집이 있고, 딸 부잣집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하 씨는 알파 부자⋯⋯.”

닥터 유가 말꼬리를 흐렸다. 뱉어 놓고 보니 참 이질적인 단어였기 때문이다.

예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오메간데, 알파 부자라니. 이제 돈 많은 부자로 모자라 알파 부자까지 됐다.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구분이 안 됐다.

혼란스러워하는 예하를 살피던 한건이 그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뭐든 어때. 내 자식인데. 세상 누구보다 멋지게 키울 거야.”

예하가 습윤한 눈으로 한건을 쳐다봤다. 한건이 그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예하가 힘껏 한건의 냄새를 들이켰다. 그의 심장 박동, 페로몬, 체온, 음성. 그 모든 게 출렁거리던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어차피 한건이 다 키워줄 건데 알파면 어떻고, 또 오메가면 어떤가 싶었다.

* * *

유치원에서 신나게 놀다 온 찬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곯아떨어졌다. 집으로 선생님들을 불러 공부할 땐 늦게까지 깨 있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아홉 시가 조금 넘어가기만 하면 어디서든 입을 헤 벌리고 잤다.

아침마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등원하는 걸 봐선, 유치원이 몹시 재미난 모양이었다.

놀이방에서 잠든 찬하를 안아 옮기고, 무드등까지 켜준 한건과 예하가 조용히 찬하 방에서 나왔다. 이 넓은 집에, 찬하처럼 조그마한 아이가 낼 수 있는 소음이 얼마나 된다고. 그가 잠들었을 뿐인데 널따란 복도가 적막하게 느껴졌다.

한건이 예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예하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둘만의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느릿하게 걸었다. 이제 제법 배가 부른 예하의 발걸음에 맞춰서. 한건은 마음 같아선 예하를 안고 다니고 싶었으나, 그가 싫어해서 참고 있는 중이었다.

예하가 동그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몇 달 전에 꾼 꿈이 떠올랐다.

“형.”

“응.”

“나 꿈꿨다?”

“무슨 꿈?”

한건이 얕게 눈썹을 들썩였다. 길어질 듯한 대화에 예하가 그를 바(bar)로 이끌었다. 술을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고, 지척에 앉을 수 있는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바 모퉁이에 만들어진 자그마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네 개의 빈백이 놓여있는 그곳이었다. 과거와 다름없이, 벌 모양의 조명등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하가 한건의 부축을 받아 빈백에 눕듯이 앉았다. 예하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한건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우리 신혼여행 갔다 와서 꿨는데.”

“응.”

“곰곰이 생각해보면 태몽이었던 것 같아.”

“그래? 무슨 내용이었는데?”

한건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검은 눈동자에 흥미가 자글자글 끼어있었다. 태몽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라. 굳이 예하로 국한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태몽도 잘 몰랐다. 물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서.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오래전의 꿈을 반추했다. 봄바람이 살랑이던 바닷가, 밀가루처럼 보드랍던 모래사장, 그리고 아주 예쁜 조개.

“바다에서 조개를 캤는데, 아니 캔 게 아니고 조개가 있었어. 모래 위에 덩그러니.”

“⋯⋯.”

“진짜 엄청 컸어. 여기, 이 방만큼 컸던 것 같아. 아니다. 그건 너무 크고. 어어, 형만큼 컸어.”

침대만큼 큼지막한 빈백 네 개를 훑어본 예하가 급하게 말을 고쳤다.

“그랬어?”

한건이 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옛날이야기나, 동화 줄거리를 말하듯 상기된 예하가 귀여웠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집에 가져가고 싶었는데 너무 큰 거야. 내가 형만 한 덩치를 어떻게 끌고 가겠어. 그래서 포기하고 뒤를 돌았는데 조개가 막 쫓아오더라.”

“⋯⋯안 무섭든?”

그의 말을 따라 장면을 상상한 한건이 눈살을 구겼다. 제 몸집만 한 조개가 예하를 따라갔을 거라 생각하니 그렇게 괴이할 수 없었다. 사실 태몽이 아니라 악몽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나도 안 무서웠어. 엄청 예쁜 조개였거든.”

예하가 단호하게 부정을 내놓았다. 반질반질 예쁘게 빛나는 조개를 마주한 사람이라면 그 크기가 얼마든, 겁을 먹지 않으리라. 아마 예하가 욕심이 풍만한 사람이었다면 며칠이 걸려도 끌고 가려 했을 테였다.

“아무튼, 그게 따라오니까, 아 이게 나랑 같이 가고 싶어하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나랑 같이 갈래?’하고 조개를 슥슥 문질렀거든?”

“응.”

“그랬더니 조개가 입을 벌리는 거야. 조개가 익을 때처럼 쩍, 하고 벌어지는 게 아니라, 되게 부드럽고 조용히 열렸어.”

“그래서?”

“그리고 엄청 환한 빛이 번쩍번쩍하더니 이만한, 음⋯⋯ 어! 축구공만 한 진주가 내 품으로 날아왔어.”

예하가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며 진주의 크기를 묘사했다.

“동그랗고 예쁜 진주였어. 분홍색 같기도 하고, 흰색 같기도 하고. 빛도 났던 것 같아.”

“으음⋯⋯.”

“이거 태몽 맞지? 왜 잉어 안고, 복숭아 따고 그런 것처럼. 나는 진주를 받은 거야. 이만큼이나 큰 진주.”

예하가 팔을 동그랗게 말아 다시 진주의 크기를 가늠했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흘렀는데, 꿈이 또렷이 기억나는 것도 그렇고, 너무 예쁜 꿈이었던 것도 그렇고. 분명 태몽이 틀림없었다.

“그 진주만큼 예쁜 애가 태어나겠네.”

한건이 예하의 배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축구공만큼 커다란 진주라면 보통 값어치가 아니겠지. 거기다 그냥 진주도 아니고 분홍빛 진주렷다. 시가가 얼마나 하려나. 수억 원을 훌쩍 넘어 박물관에 전시될 수준일 듯한데. 그만큼 귀한 진주면, 분명 대단한 아이가 태어날 터였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하던 한건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스몄다. 그래. 저와 예하의 아이라면, 축구공만 한 진주쯤은 되어야지.

“그렇겠지?”

예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한건이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눈가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두 사람은 한동안 폭신한 빈백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분홍빛 진주와 어울릴 만한 아이를 상상하느라 시간 가는지도 몰랐다. 예하가 살짝 옆으로 돌아누워 한건의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얇은 니트 너머로 단단한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예하가 그것을 조몰락거렸다. 요즘 한건의 가슴을 만지는 게 참 좋다.

“찬하는 내가 태몽을 꿨던가?”

예하가 공중에 붕 뜬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글쎄.”

한건의 미간에 연한 홈이 파였다.

“꿨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

“⋯⋯.”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꿨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았다. 당시의 시간은, 무엇 하나 아프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예하는 고집이 셌다. 입술까지 말아 물고는 열심히 먼 과거를 헤엄치고, 솎아냈다. 그러나 걸려 나오는 게 없었다. 그때 꾼 꿈이라곤⋯⋯ 하나 같이 핏빛이었으니까. 아니면 칠흑 같은 어둠이거나.

“꿨을 거야. 근데⋯⋯, 근데 내가 그때는 매일 악몽만 꿔서, 그래서 기억을 못 하는 걸 거야.”

“⋯⋯.”

“나중에 찬하가 물어보면 어쩌지? 미안해서 기억 안 난다고 어떻게 말하지? 내가 아빤데. 태몽도 모르고. 찬하가 나 미워하는 거 아니야?”

예하가 중얼중얼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한건이 예하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풀었다.

“대충 둘러대. 박을 열었더니 금덩이가 쏟아져 나왔다거나, 숲에서 호랑이나 용을 만났다거나. 흔한 거 많잖아.”

“우리 찬하가 흔한 애야?”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태몽이 뭐가 중요하다고. 잘 태어났고, 잘 자라고 있는데.”

한건이 태몽의 쓸모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진주의 값어치를 가늠하던 방금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러나 침울한 예하의 표정은 쉽게 갈무리되지 않았다.

한건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예하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기억 안 난다고 대충 둘러대도, 찬하는 이해해 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예하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삐죽삐죽 모났던 마음이 한건의 한 마디로 단숨에 동글동글해졌다. 이런 분위기에, 이런 밤에 술이라도 한잔하면 좋으련만. 임신 중이라 불가능했다.

예하는 아쉬운 대로 한건의 냄새만 힘껏 들이마셨다. 그러고 있으니 자연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예하는 구태여 잠을 털어내지 않았다. 여기서 이렇게 잠들어도, 한건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눈을 감은 예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쉬워. 찬하에 관련한 건 다 아쉬워. 내가 못 해준 게 너무 많으니까⋯⋯.”

커가는 걸 못 본 것도 아쉬운데, 태어나는 그 순간은 기억조차 없다. 그게 날이 갈수록 아쉽고, 아쉽고, 또 슬펐다. 한건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줬지만 그것으로 해갈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마 이 아쉬움은 먼 훗날 찬하가 커서, 성인이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테지.

“그런 생각하지 마. 너는 그냥 여기,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다 한 거야. 나머지는 내가 할게.”

예하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붙인 한건이 나지막이 말했다. 예하가 슬핏 웃음을 흘렸다. 어쩜 이다지도 믿음직스럽나. 강하고 힘이 센 알파를 반려로 두고 있는 건, 퍽 좋은 일이다.

“⋯⋯응.”

덕분에 예하는 평화로이 잠들 수 있었다. 한건은 예하가 깊게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였다. 볼록하니 도드라진 날개뼈에 혀끝이 쌉싸름해졌다.

* * *

예하는 정원 벤치에 늘어지듯 앉아있었다. 만삭이 다가오니 배가 퉁퉁하게 부풀었다. 아니, 그저 부풀었다는 표현은 너무 간소하고,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고, 앉아있는 것도, 하물며 잠을 자는 것도 힘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난이 남아있는지 알아서 더 힘들기도 했다.

이번 임신은 입덧이 길었다. 강도도 곱절로 심했다. 한건이 바로 옆에 앉아 페로몬을 뿜어주는데도 구역질을 몇 번이나 했다. 태동도 심하고, 팔다리도 많이 부었다. 닥터 유는 제 건강에도, 태아의 건강에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찬하 때보다 훨씬 건강하댔다.

보통 까탈스러운 아이가 아닐 것 같았다. 근데 사람 마음이 얄궂은 게, 까탈스러우니 더 마음이 쓰이고, 더 기대가 됐다.

“아빠, 이제 괜찮아?”

예하의 종아리를 주무르던 찬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다섯 살이 되면서 고사리에서 시금치로 진화한 찬하의 손은 제법 야무졌다. 한건이 큼지막한 손으로 꽉꽉 주무르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응어리진 것도 없는 마음이 사르르 풀릴 정도였다.

“응. 이제 하나도 안 아파. 고마워.”

예하가 찬하의 작은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찬하가 배시시 웃으며 예하의 옆구리에 철썩 붙었다. 예하가 그런 찬하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찬하 동생 생기면 혼자 안 놀아도 되니까 엄청 좋겠네.”

“응. 좋아. 빨리 나와서 같이 숨바꼭질하고 싶어.”

그 말에 예하가 푸흐, 헛웃음을 흘렸다. 숨바꼭질. 그만큼 쉽고 간단한 놀이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장소가 한건의 집이라면 조금 문제가 됐다. 집이 넓어도 너-무 넓으니 한 번 숨으면 도무지 찾기가 힘들었다.

“찬하야.”

“웅.”

“동생이 태어나면, 아빠들이 찬하랑 조금 덜 놀아줄지도 몰라.”

“왜?”

찬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예하를 올려다봤다.

예하는 최근, 육아 서적에서 ‘맏이에게 동생이란’ 챕터를 봤다. 외동이던 아이에게 동생이 생기는 건 잠깐의 기쁨과 긴 절망이랬다.

엄마도, 아빠도 분명 친구가 생길 거라 했는데, 태어나고 보니 엄마 아빠 사랑을 독차지하는 괴물인 거다. 늘 자신만 보고, 저와 밥 먹고, 저와 잠을 자던 엄마 아빠가 동생만 보고, 동생을 먼저 챙기고, 동생을 보며 웃는 걸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한다고.

그래서 몰래 동생을 꼬집거나, 젖병을 내던지거나, 혹은 자신이 아기가 된 것처럼 손가락을 빤다거나, 분유를 달라고 하는 이상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함께 뛰어놀 수 있을 때가 되면 자연히 없어지긴 하겠지만, 조건 없는 양보만 요구하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단다.

“찬하는 지금 손이 이만큼이나 크고, 아빠 다리도 주물러줄 수 있고, 혼자 밥도 먹고, 혼자 양치도 하고, 다 잘하지?”

“응. 찬하는 다 잘해!”

“근데 동생은 그걸 못해.”

“왜? 동생 바보야?”

찬하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는 표정을 했다. 예하가 엄지로 찬하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처음이라서 그래. 찬하도 처음엔 못했거든. 근데 한건 아빠가 가르쳐주고, 도와주고 해서 지금처럼 잘하게 된 거야.”

“⋯⋯.”

“그래서 아빠들이 동생 가르쳐 준다고 찬하랑 같이 못 놀지도 몰라.”

그 말에 찬하의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아랫입술이 비죽 튀어나온 게 몹시도 못마땅한 듯했다. 찬하가 생각한 동생은 멋진 티라노사우루스기도 했고,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근데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라니. 그래서 아빠들이 동생하고만 놀아야 한다니. 찬하의 눈에 금세 울멍울멍 눈물이 차올랐다.

예하가 그런 찬하의 볼을 부여잡고 시선을 맞췄다.

“아빠가 찬하 사랑하는 거 알지?”

“우응⋯⋯.”

“아빠도 슬퍼. 찬하랑 매일매일 같이 못 노는 거.”

“⋯⋯.”

“근데 길진 않을 거야. 동생도 찬하처럼 금방 똑똑해져서, 아빠들이 찬하랑 놀 수 있어.”

“진짜? 몇 밤이나 지나야 해?”

“음⋯⋯ 삼⋯⋯년?”

예하의 말에 찬하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꺾였다. 삼 년이라. 그건 아직 배우지 못한 숫자의 단위였다. 일 년도 어려운 판에 삼 년이라니. 찬하의 손가락이 꼼질꼼질 바쁘게 움직였다. 헌데 삼 년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합하고, 또 합하고, 또 합해도 알 수 없는 숫자였다.

혼란에 잠긴 찬하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 아들 어쩜 이렇게 귀엽지.

“별로 안 길어. 찬하 몇 살이야?”

“다섯 살!”

“응. 동생 세 살 될 때까지만 참으면 돼.”

“아, 세 살! 세 살!”

찬하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살이라. 그건 쉽지. ‘3’이라는 숫자는 참으로 적은 거였다. 떡국만 세 그릇 먹으면 되는 거잖는가. 그쯤이야 내일 당장도 할 수 있었다. 찬하는 금세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찬하의 입가에 팬 보조개를 보던 예하가 참지 못하고 그를 껴안았다.

“찬하야, 아빠가 사랑해. 응?”

“나도!”

찬하가 꺄르르 웃으며 예하의 목을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풍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허공에 홀로그램 창이 하나 떠올랐다. 한건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하가 검지를 스와이프하자 한건의 얼굴이 드러났다.

[5분 뒤에 점심 먹으러 갈 거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배가 별로 안 고파.”

예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한건의 눈썹이 들썩였다. 아니꼽다는 표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예하는 아침도 꾸역꾸역 반만 먹다가 말았으니까. 괜히 강요해서 체하면 좋지 않으리라, 싶어서 내버려 뒀는데. 여태 배가 안 고프다니. 문제가 있었다.

“찬하야 먹고 싶은 거 없어?”

예하가 찬하에게로 선택권을 떠넘겼다. 찬하가 흐음, 짐짓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 봐야 나올 메뉴는 뻔했다. 짜장면이나 소시지볶음, 치즈 볼이나 피자 따위겠지.

한참 고민하던 찬하가 벙긋 입술을 뗐을 때였다. 난데없이 예하가 벌떡 일어났다.

한건이 홀로그램 쪽으로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하의 목이 댕강 잘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하가 배를 쓰다듬었다. 아니, 움켜쥐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짧은 신음이 흘렀다.

[예하야⋯⋯?]

“아빠?”

한건과 찬하가 동시에 예하를 불렀다. 그러나 예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됐다.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배꼽 언저리부터 사타구니까지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었다. 옷을 입은 채로 샤워기 아래에 선 듯했다.

“최한건, 이거⋯⋯, 이거⋯⋯.”

하얗게 질린 예하가 더듬더듬 말을 씹었다. 이런 통각은 처음이다. 첫 번째는 출산이라는 게 없었고, 두 번째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았다.

[강예하. 왜 그래? 아파?]

“으⋯⋯.”

[배? 배가 아픈 거야?]

왜 이리 갑자기. 닥터 유가 출산 전에 또 다른 진통이 있을 거랬는데. 이게 원래 이런 느낌인가. 이다지도 아픈 것인가. 막연히 저는 남자라 제왕절개를 하겠거니, 요즘 세상에 배 째는 것쯤이야 수술도 아니니 하등 아프지 않겠거니, 가늠했었거늘. 순진한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지금 갈게.]

한건이 급하게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와 동시에 예하가 풀썩 의자 위로 쓰러졌다. 찬하가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아빠, 아파? 다리 주물러 줄까?”

“아니⋯⋯ 아니, 괜찮아⋯⋯. 가서 문 이모 좀⋯⋯ 불러올래?”

“응!”

우렁차게 대답한 찬하가 와다다 뛰어갔다. 홀로 남은 예하가 우득, 쿠션을 쥐어뜯었다.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다. 배에서 손을 떼면 안의 것이 그대로 쏟아질 것 같았다. 아래는 찬 바닥인데. 이 가녀린 생명체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예하가 색색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한건의 냄새가 밀려왔다. 예하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빨리 왔네.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강예하!”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 작은 움직임마저 버거웠다.

꿈에서 만났던 예쁜 조개가 아른거렸다.

예하가 눈을 뜬 건 병원 베드에 누워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에서였다. 환한 형광등 빛, 손목에 꽂힌 링거, 그리고 병원 특유의 냄새가 파도처럼 예하를 덮쳤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겁이 나는 환경이었다.

“예하야.”

이마 위로 한건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예하가 꿈틀꿈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한건이 손가락을 얽어왔다. 예하가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것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 나 무섭, 무서워.”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눈 뜨면 다 끝나있을 거야.”

“그래도 무서워⋯⋯.”

예하의 눈꼬리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배를 가른다니. 온갖 치료를 다 겪어봤으나 그건 무서웠다. 푹 자고 일어나면 연한 흉터 말고는 이렇다 할 통각조차 없을 텐데도 그랬다.

한건이 쪽쪽 예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짭조름한 눈물에 제 가슴이 다 미어졌다.

“예하 씨. 괜찮아요. 예하 씨는 잘 할 수 있어요.”

닥터 유가 부드럽게 예하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예하가 흐릿한 시선으로 그녀와 한건을 번갈아 봤다. 그런데도 도통 안심이 안 됐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혼자⋯⋯ 가기 싫어⋯⋯.”

예하가 뚝뚝 눈물을 흘리며 웅얼거렸다. 수술실이라니. 너무 끔찍했다. 차라리 정신을 차리지 말 걸 그랬다. 왜 하필 지금 눈을 떠서는⋯⋯.

한건이 그런 예하의 온 얼굴에다 키스를 퍼부었다.

“내가 보고 있을게. 계속 보고 있을 거야. 혼자 아니야.”

한건이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쯤, 닥터 유가 한건의 어깨를 밀어냈다.

“사장님은 여기까지. VIP실 가서 기다리세요.”

“⋯⋯.”

한건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예하를 따라가고 있었다. 예하가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고 텁, 문이 닫혔다.

한건이 털썩 벽에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찬하가 태어날 때도 이런 기분이었는데. 한번 경험했음에도 도통 면역이 생기질 않았다. 옆에서 따라오던 성 실장과 문 집사가 기겁하며 그를 부축했다. 한건이 괜찮다며 그들을 물렸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한건이 예하의 수술 장면을 볼 수 있는 VIP실로 이동했다. 공포에 젖어 서글프게 우는 예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예하가 셋째도 낳고 싶댔는대. 그건 제가 무서워서 못 할 듯싶었다.

수술은 짧았다. 찬하 때는 예하의 몸 상태가 워낙 극악을 달렸던 터라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았는데 이번엔 간단했다. 금세 끝난 수술에 바짝 굳어있던 한건의 어깨가 한결 편안히 풀렸다.

한건은 당연히 예하의 병실에 먼저 들렀다. 닥터 유가 간단한 수술이었기 때문에 금방 깰 거라고 했다.

창백하게 질린 예하는 색색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마저도 어찌나 버거워 보이는지. 한건은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다 아프고, 하물며 숨도 대신 쉬어주고 싶었다.

한건이 예하의 손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파삭하고 깨져버릴 듯 작고 가느다란 손에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지났을까. 예하의 손끝이 움찔, 경련했다. 간이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한건이 예하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얇은 눈꺼풀 아래에 좌우로 움직이는 예하의 눈동자가 보였다.

살아있구나. 곧 눈을 뜨겠구나.

모두 닥터 유를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나 이렇게 통감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됐다. 예하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탁한 눈동자에 한건이 담겼다.

“나 보여? 어때? 아파? 닥터 유 부를까?”

한건이 가만가만 예하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하가 가만히 눈앞의 한건을 응시했다. 지금이 몽중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덩달아 이곳이 어디인지, 또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것인지도 반추가 안 됐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것이다. 저의 예쁜 조개가.

“아기⋯⋯ 아기는?”

그 말에 한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하의 콧잔등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뗀 한건이 뒤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그러자 곧 닥터 유와 자그마한 포대기를 든 간호사가 병실로 들이닥쳤다.

“예하 씨 아픈 곳은 없어요?”

닥터 유의 질문에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마취제가 전신에 퍼져있는지라 누군가가 팔을 떼어낸다 해도 모를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예하의 시선은 간호사가 들고 있는 포대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시선을 알아챈 간호사가 포대기를 조심히 예하의 품에 안겼다.

“알파, 여성, 3.2kg으로 아주 건강하세요.”

예하가 저릿한 손가락으로 작은 덩어리를 껴안았다. 한건이 그를 도와 엉덩이에 손을 받쳤다.

한건도 갓 태어난 신생아를 안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미숙아로 나온 찬하는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으니까.

“아⋯⋯.”

“⋯⋯.”

예하도, 한건도 잠시 말을 잃었다. 곱게 내리깔린 속눈썹과 동그란 코끝, 느슨하게 다물린 입이 말도 못 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보드라운 냄새와 제법 선명한 무게감까지. 이렇게 작은 생명체를 제가 만들었다니. 이다지도 건강하게 숨을 쉬고 있다니.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오메가인 게 기뻤다.

“너무⋯⋯ 예쁘다.”

예하가 축축하게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크면 더 예쁠 거야.”

한건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예하의 눈에 기대가 스몄다. 이번에는 이 작은 얼굴이, 또 조그마한 손이 커가는 모습을 빠짐없이 다 볼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가슴에 새길 생각이었다. 찬하는 갓 태어난 모습, 첫 뒤집기, 첫걸음마, 옹알이, 처음으로 한 말. 그 모든 걸 놓쳐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사랑해, 예하야. 응? 사랑해.”

한건이 예하의 볼에 쪽쪽 입술을 부딪치며 감동을 쏟아냈다. 예하가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한건의 품으로 포대기를 옮겼다. 아직 마취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몽롱하다. 이러다 아이를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이의 모습을 확인했으니 됐다. 일단 조금만 쉬고, 더 말끔한 정신에 정식으로 아이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형, 나 잘래⋯⋯.”

“졸려? 알았어.”

한건이 이불을 추켜올렸다. 닥터 유가 링거에 알 수 없는 약물을 투약했다. 예하의 눈꺼풀이 금세 묵직하게 늘어졌다. 한건은 예하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그의 귓가에 쉬지 않고 속삭였다.

“계속 여기 있을게.”

“⋯⋯응.”

“아기도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

“⋯⋯으응.”

“잘 자.”

“⋯⋯.”

그 말을 끝으로 예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 가족이 네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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