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우리는⋯⋯
예하는 오랜만에 희찬과 은호를 만났다. 어엿한 사회인이 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셋이 만나기만 하면 철없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갔다. 그래서 더 즐거웠고, 행복했다.
처음엔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가, 대학 생활 이야기가 나오고, 호화로웠던 점심이 그립다느니 요즘엔 돈을 벌어도 쓸 시간이 없다느니 공무원 좋다는 거 다 옛말이라느니 그런 흔한 한탄이 이어졌다. 예하 카페에 두어 번씩 등장하는 진상 손님을 함께 욕하기도 했다.
거나하게 웃을 때, 눈이 마주칠 때, 찰나의 정적이 흐를 때마다 부지런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네다섯 시간이 흐르니 세 사람 다 불콰하게 취한 상태가 됐다.
술자리가 파투난 건 자정이 훌쩍 넘어서였다. 가장 취한 건 예하였다. 근래 아이들을 돌보느라 술은 입에도 못 댔더니 주량이 반절로 줄었다. 헌데 전과 같은 양을 마셨더니 아주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트랜지션도 희찬의 부축으로 간신히 탔다. 그래도 똑똑한 스미스는 알아서 집으로 향해줬다. 시트에 드러누운 예하가 반쯤 감긴 눈으로 차창 밖을 쳐다봤다. 검고, 또 검은 하늘밖에 없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창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근데 그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코가 오뚝하니 잘생긴 얼굴인데. 알코올에 절인 뇌로 한참 고민해봐도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트랜지션이 늦은 시간의 하늘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예하를 애타게 기다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는 듯이.
예하는 트랜지션이 내려앉을 때까지 용케 자지 않고 버텼다. 집에 가야 해. 가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굿나잇 인사를 해야 해. 그럼 아빠도 잘 자라며 양 뺨에 입을 맞춰줄 텐데. 그걸 꼭, 꼭 받고 자고 싶었다.
어, 근데 이 시간이면 자지 않으려나. 그럼 어쩌지.
예하가 코를 찡긋거리며 트랜지션에서 내렸다. 공허할 정도로 넓은 주차장이 예하를 반겼다. 알싸한 밤공기가 머리칼을 쓸고 지나간다. 찬 공기에 술이 좀 깰 만도 한데, 어째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예하가 비척비척 발을 옮겼다. 근데 입구가 어디더라. 아니, 출구를 찾아야 하나. 눈앞도, 머릿속도 뱅글뱅글 돈다.
“이제 와?”
그때, 커다란 인영 하나가 어둠을 뚫고 예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욱!”
예하가 한 박자 느리게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기까지 했다.
“⋯⋯.”
“⋯⋯.”
가벼운 정적이 흘렀다. 치솟는 딸꾹질을 눌러 내린 예하가 가늘게 눈을 떴다. 눈앞 존재가 귀신이냐 인간이냐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짧은 머리. 큰 키. 넓은 어깨. 커다란 덩치. 인간이라고 하기엔 몹시 크지만, 그렇다고 귀신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잘생겼다. 두 다리도 떡하니 바닥을 버티고 서 있고.
그러니까⋯⋯ 예하의 가물가물한 정신이 내린 판단에 따르면, 이 존재는 남자 사람이었다. 사람 남자인가? 남자 사람? 몰라. 아무튼, 그랬다. 사람이라 생각하니 자라처럼 오그라들었던 목이 원상복귀 했다.
“누구세요?”
“⋯⋯하?”
“여기 이렇게 막 계시면 안 돼요. 아무나, 응?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데⋯⋯ 어뜨케 들어오셨지-이⋯⋯?”
예하가 갸웃갸웃 고개를 뒤틀며 혼잣말 같은 질문을 이어갔다. 남자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그가 어디 한번 계속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어딘가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취한 예하는 그런 것까지 알아챌 상태가 못 됐다.
예하가 휘휘 팔을 저었다.
“얼른 가세요. 들키면 큰일 나요.”
“아.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여기 바닥도 내가 골랐고, 트랜지션도 전부 내,”
“아, 아아! 관리인이시구나!”
예하가 남자의 말을 뚝 자르며 짝짝 손뼉을 쳤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탐험가 같은 얼굴이었다.
“⋯⋯.”
남자가 허망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경비, 경비원이신가?”
예하가 턱을 쓰다듬으며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남자가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예하가 한 발자국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근데 이 시간에 왜 여기 계세요?”
“아, 아아!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아시는구나?”
남자가 예하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예하가 꺄르르, 웃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보여줬다.
“아우, 당연하죠! 지금이 보자, 어! 한 시 사십팔 분!”
“⋯⋯내가 시간을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닐 텐데.”
“그럼요?”
예하가 그럼 네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 거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뭐든 알려주겠노라, 인자한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는 말을 잃었다. 예하가 술에 취한 건 물론 약에 취한 것도 봤는데, 이런 주사는 또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 꼴로 집은 잘 찾아왔네.”
남자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제가 애도 아니고, 집을 왜 못 찾아요. 우리 찬하랑 세현이도 집은 잘 찾을 텐데⋯⋯.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진짜 누구세요? 혹시 도둑이에요? 안 되는데. 우리 집 훔쳐갈 거 엄청 많거든요.”
예하가 양팔로 큰 원을 그렸다. 훔쳐갈 게 정말-정말 많은 모양이었다. 남자가 삐딱하게 선 채 눈썹을 들썩였다.
“그쪽 남편 됩니다만.”
“⋯⋯남편요? 저한테 남편이 있어요?”
“⋯⋯.”
남자가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가 놨다. 이쯤 되니 부러 저를 골탕 먹이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허나 맹하니 풀린 눈도, 예하의 냄새를 가릴 만큼 자욱한 술 냄새도, 벌겋게 익은 얼굴까지. 뭐 하나 거짓인 게 없었다.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제 존재를 잊었다니. 조금 슬펐다.
남자가 침울한 낯으로 예하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려 손가락을 얽었다. 비틀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아 보고만 있기가 힘들었다.
예하가 마주 잡은 손과 남자를 번갈아 봤다. 그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진짜 제 남편이세요?”
“네.”
“와⋯⋯. 그렇구나⋯⋯.”
“와, 그렇구나? 그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야? 바깥에서 웬 놈이 남편이라 그래도 그렇구나, 하고 따라갈래?”
“어, 그건 아닌데⋯⋯. 그쪽은 되게 잘생겼잖아요.”
“⋯⋯.”
“그러니까 좀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아.”
예하는 뭐가 그리 좋은지 비싯, 웃기까지 했다. 남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보조개가 드러났다.
“⋯⋯.”
남자는 대화를 포기하기로 했다. 저리 예쁘게 웃는데 제가 뭘 어쩌겠는가. 남자가 예하를 부축해 집으로 향했다.
예하를 소파에 앉혀둔 한건이 물을 가져왔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찬물로. 예하는 목이 탔는지, 제법 많은 양의 물을 단번에 먹어치웠다.
한건은 곧장 다시 물을 가져왔다. 예하는 그것도 반이나 삼켰다. 그쯤엔 흐리멍덩하던 초점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그의 발치에 쪼그려 앉은 한건이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티셔츠도 쑥 벗겨내고, 홈웨어를 뒤집어씌웠다. 예하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게으르게 바지를 내렸다. 찬하가 반쯤 졸며 옷을 갈아입을 때와 똑 닮은 모습이었다. 내가 애 셋을 키우지. 한건이 예하 몰래 한탄했다.
“애들은?”
예하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자지. 지금이 몇 신데.”
한건이 예하의 바지를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아이들의 근황을 묻는 걸 보니 술이 깬 모양이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어어⋯⋯. 나 집에 어떻게 왔어? 형이 데리러 왔어?”
“그럴 리가. 내가 가면 친구들이 불편할 거라고 절대 오지 말랬잖아. 전화도 안 받아 놓고는.”
한건은 전화가 불통인 내내 예하의 뒤를 밟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당장 술집에 쳐들어가 가게를 작살내고, 은호와 희찬에게 호되게 말을 쏘아붙인 뒤 예하를 둘러업고 나오고 싶었다. 허나 그럼 예하가 화낼 게 자명해서 참고 참았다. 그를 기다리는 내내 주먹을 쥐고 있었던 터라 손톱이 손바닥을 죄 파고든 게 아직도 쓰라렸다.
“근데 나 집에 어떻게 왔어?”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물었다. 한건의 눈썹이 비죽, 위로 치솟았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화났어?”
“안 나겠어? 너 아까 나한테 누구냐고 물어봤던 건 기억해?”
“⋯⋯아니.”
“뭐라더라. 여기 있으면 큰일 나니까 나가라 그랬나? 그리고 뭐, 도둑이냐고도 물었던 것 같은데.”
한건이 듣기 좋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예하를 비난했다.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취한 저가 한건을 못 알아본 모양이다.
“미안.”
예하가 조물조물 한건의 볼을 쓰다듬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올려다봤다. 아직 용솟음치는 분노를 갈무리하지 못했는데, 차마 예하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한건이 예하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집에 돌아와 준 거로도 만족해야지. 제 주제에 어찌 감히 이래라저래라 예하의 행동에 말을 얹겠는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예하의 손길에도 지나치게 행복했다.
“애들은?”
한건의 귓바퀴를 주무르던 예하가 좀 전과 같은 질문을 내놓았다.
“잔다니까.”
“⋯⋯나 애들 보러 갈래!”
“자는데?”
“그래도! 뽀뽀할래! 할 거야!”
예하가 한건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엉덩이를 씰룩이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왜, 물만 마셨는데 왜, 다시 취하는 거야⋯⋯.
한건이 푹,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나섰다.
예하는 찬하와 세현의 방을 돌며 뽀뽀 순회공연을 거하게 치렀다. 온갖 소음을 다 내며 애들을 깨울 줄 알았는데,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불도 추슬러주고, 머리도 쓸어주더니 이마에다 정말 뽀뽀만 했다. 그렇게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까치발을 들고 방을 나왔다.
한건이 덩달아 숨을 죽이고 그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이제 원하는 걸 다 이뤘으니 자러 가자고 할 참이었는데, 예하가 복도를 반대로 가로질렀다. 한건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그를 따라잡았다.
“또 어디가?”
“애들 안고 자고 싶어⋯⋯.”
“애들 방은 저쪽이야.”
예하의 손목을 잡아챈 한건이 그를 멈춰 세웠다.
“내가 안고 자면 깨잖아⋯⋯.”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음울하게 읊조렸다. 한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들을 안고 싶은데, 그럼 깰 것 같으니 못 하겠고. 그래서, 뭐. 어쩌자고.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런 의문을 담고 예하를 내려다봤다.
“아쉬운 대로 애들 인형이라도 안고 자려고.”
예하가 건너편에 있는 장난감 방을 쳐다봤다. 이별한 연인을 보듯, 아련한 시선으로.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취한 예하는 도통 가늠이 어렵다. 이리저리 규칙 없이 튀는 게 찬하나 세현보다 더 했다.
“형은 내 옆에 있을 거지?”
한쪽 어깨를 살짝 내린 예하가 낭창하게 물었다. 한건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어딜 가든 옆에 있을 거야.”
“그럼 나랑 같이 저기서 자자.”
예하가 한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고개를 주억인 한건이 별다른 말 없이 끌려갔다. 굳이, 구태여, 억 소리 나게 좋은 침대를 두고 장난감 사이에 구겨져 자겠다는 예하를 이해할 순 없었으나 말리진 않았다.
예하가 하고 싶다면,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제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놀이방은 다른 방보다 곱절은 더 컸다. 세현은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데, 혼자 있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찬하 놀이방 벽을 틔워 방 두 개를 합쳐버렸다.
세현이 맞추다 만 큐브와, 찬하가 가지고 노는 공룡 피규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한쪽엔 어린이용 트랜지션과 자동차가 줄지어 주차되어 있다. 큼지막한 VR 게임기들도 잔뜩이었는데 세현과 찬하의 흥미를 사지 못해 새것과 다름없었다.
한건만큼 커다란 기린 인형을 지나친 예하가 가지런히 정리된 인형 더미에 쓰러지듯 누웠다. 곰, 토끼, 복숭아, 팅커벨, 산타, 두더지, 거북이. 온갖 모양새의 인형이 예하의 아래 짜부라져 비명을 질러댔다.
“이리 와, 빨리.”
예하가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한건이 군말 없이 그의 옆에 몸을 뉘었다. 인형은 생각보다 푹신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것도 있고, 솜이 가득 차 단단한 것도 있어 고르지 못한 흙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갓난쟁이 때도 이런 곳에 몸을 뉘었던 적은 없던 것 같은데. 별 경험을 다 한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몸 위로 올렸다. 그리고 대충 단단한 인형들을 솎아 멀리 내던졌다. 그 꼴을 지그시 보던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턱을 괴고 눈을 맞춰왔다.
“우리 셋째 만들까?”
난데없는 말이었다. 술 취해 아이들의 놀이방에 누워있으면서 할 말은 더욱 아니었고.
“⋯⋯지금 말고. 네가 기억할 수 있을 때.”
한건이 코가 큰 오리 인형을 내던지며 대꾸했다.
“왜. 나 기억할 수 있어.”
“아닐걸.”
분명 예하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운이 좋아 혹은 나빠, 지금 정사를 나누어 당장 임신을 하더라도 ‘대체 어쩌다 히트사이클도 아닌데 임신한 거냐’며 눈을 부라릴 게 뻔했다. 그럼 닥터 유가 저를 흉포한 짐승 보듯 볼 텐데, 그것도 싫었다.
시간은 많다. 아이를 가지면 예하가 또 아플 것이고. 그걸 당장 보고 싶진 않았다. 조금 더 있다가. 찬하와 세현이 훌쩍 커서 저와 예하의 손이 필요 없어지면. 그때. 그때 낳고 싶었다.
완강한 한건의 거절에 예하가 입을 삐죽였다. 그러더니 더듬더듬 인형 하나를 잡아 흐읍, 냄새를 들이마셨다.
“아, 애들 냄새난다.”
다음은 한건의 목덜미였다. 그곳에도 코를 묻은 예하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형 냄새도 나.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예하가 물장구치듯 발을 흔들었다. 한결 푹신해진 인형 더미에 예하를 눕힌 한건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응. 행복해. 애들이 있어서. 형이 있어서. ⋯⋯너무 행복해.”
예하가 사르르,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한건이 엄지로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술에 취해 들어올 땐 그렇게 밉더니. 지금은 또 이리 예쁘다.
“예하야.”
“으응.”
“사랑해.”
“⋯⋯나도.”
예하의 대답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던 술기운이 끝내 그를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한건은 그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토닥토닥 그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요즘에는 찬하가 썩 원치 않아서 그에게도 해주지 않는 짓인데, 예하에게 해준다. 소리 없이 웃은 그가 잔잔히 풍겨오는 예하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한건은 이렇게 예하를 재우다가 곧 침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불편한 곳에서 그를 재우고 싶진 않았다. 잠에서 깨면 여기저기 결릴 게 뻔했다. 어차피 어쩌다 곯아떨어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괜찮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새벽 특유의 분위기가 사위에 내려앉았을 때였다. 놀이방 문이 윙, 소리를 냈다. 문에 설치된 잠금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한건의 눈동자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이 저택에서, 이 시간에 돌아다닐 만한 건 청소 드론밖에 없었으니까. 근데 드론은 놀이방 문을 열 수 없었다. 그건 곧 겁 없는 침입자가 제 집에,
“⋯⋯아빠?”
익숙한 음성에 한건의 어깨가 들썩였다. 찬하였다. 조그마한 품에는 더 조그마한 세현까지 안겨있었다.
“왜?”
눈을 크게 뜬 한건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품에 안긴 예하가 너무 곤히 자는지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으로 봤을 때, 별다른 일은 없어 보이는데. 악몽이라도 꾼 걸까.
“왜 여기서 자?”
찬하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하 아빠가 여기서 자고 싶대.”
한건이 덩달아 소곤소곤 말했다.
“왜? 예하 아빠도 인형 좋아해?”
“⋯⋯글쎄. 아닐걸. 찬하는 왜 일어났어?”
“예하 아빠 냄새나서.”
“근데?”
“예하 아빠 냄새 맡으면서 자고 싶어. 복도에 예하 아빠 냄새나길래 그거 따라왔어.”
“세현이는?”
“세현이도 그럴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
바람 소리가 잔뜩 섞인 음성들이 비밀스레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걸 잠자코 듣고 있던 세현이 찬하의 품에서 떨어져나와 와다다 달려왔다. 그리고는 짧은 다리로 한껏 도움닫기를 해 예하 위로 엎어졌다. 기겁한 한건이 공중에서 그녀를 낚아채 제 품에 안았다.
착지에 실패한 세현이 부루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예하 아빠 자. 코- 하는 거야. 깨우면 안 돼.”
“⋯⋯.”
세현이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한건이 그녀를 얼른 저와 예하의 사이에 퍼즐 맞추듯 끼워 넣었다. 세현이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예하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비로소 만족한 그녀가 눈을 감았다.
세현을 수납한 한건이 멀뚱히 서 있는 찬하를 향해 이리 오라, 손을 까닥였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찬하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찬하는 세현 뒤에, 한건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익숙한 위치였다. 네 가족은 동침할 때면 늘 이런 자세로 잤다.
찬하와 세현은 어린 강아지들처럼 킁킁거리며 예하의 냄새를 맡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한건은 새벽이 깊어질 때까지 그들의 뒤에서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적당한 때를 봐 침실로 이동하려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못할 듯싶다.
한건이 찬하와 세현의 뒤통수를 번갈아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는 예하의 머리칼도 쓰다듬었다. 자그마한 머리통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보니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네 가족이 모여 자는 밤은 늘 그랬듯, 충만하고 행복했다. 이다지도 분에 겨운 가족이라니. 감동적이다 못해 경이로웠다.
한창 행복을 만끽하던 한건이 느지막이 눈을 감았다.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어여쁜 찬하와,
귀여운 세현이와,
사랑하는 예하가 나오는 꿈 말이다.
라스트 오메가[LAST OMEGA] 외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