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31/33)

당신의 부재

한건은 바쁜 사람이다. 결혼하기 전부터, 또 결혼한 후에도 한건은 여전히 바쁜 사람이었다. 예하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알고, 통감하고 있었다. 가끔 가족 여행이나, 저와 관련한 이런저런 일로 업무를 미룰 때가 있긴 했으나 후에 그만큼 바짝 일을 몰아 해야 했다. 더군다나 하루에 두 번씩 아이들의 등교와 하교를 책임져야 하니 오죽할까.

가끔 뻑뻑한 눈두덩을 문지르며 홀로그램을 보는 한건에, 예하는 카페를 때려치우고 경영 일을 배워볼까. 또는 찬하와 세현이 언제 커서 한건의 일을 줄여주려나. 그런 생각을 종종 해왔다.

일 좀 줄여. 하지 마. 다른 사람 시켜. 그러한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저도 저만의 일을 하고, 일구고, 그에 응하는 결과를 움켜쥐었을 때의 기쁨을 아는지라, 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하물며 저는 고작 해봐야 몇 년이지만, 한건은 십 년이 훌쩍 넘게 해온 일인데. 거기다 딸린 직원이 수만이고. 쉽게 일을 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한건이 출장을 가는 일은 정말 흔치 않았다. 계약서에 [‘을’은 ‘갑’의 동의 없이 사흘 이상 출장을 가지 않는다]라는 게 적혀있기도 했고. 한건 역시 예하와 아이들을 두고 외출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성 실장을 영원히 대신 보낼 수도 없는 거고, 간간이 일박 이일 정도의 출장은 있었다. 그마저도 밤늦게 혹은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근데 이번은 그렇지 못했다. 무려 오 박 육일짜리 출장이었다. 한건과 성 실장이 피치 못할 일이라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는데, 예하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뭐라더라, 이번에 새로운 트랜지션 모델을 출시하면서 과거 트랜지션 리콜 사태를 위로한다나⋯⋯, 이미지를 바꾼다나⋯⋯. 아무튼 그걸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나다녀야 한댔다. 아무래도 한건이 대표로 가야 신용이 생긴다고.

안 가면 안 되겠냐, 했더니 한호 트랜지션은 한호 계열사 중에도 굵직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 말하는 한건의 얼굴에도 짜증이 담뿍 배어있어 예하는 불평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연락 자주 할게. 애들은 혼자 볼 수 있겠어?’

만면을 걱정으로 가득 채운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바람기가 많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육아는 한건이 책임져 왔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허나 이 집에 고용된 직원이 몇 명인데. 문 집사만 있더라도 서너 달은 너끈할 터였다. 예하가 못마땅한 건 한건이 아빠로서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저. 오롯이 저가 문제였다.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자야 한다니. 하루도 벅찬데. 무려 닷새나 혼자 자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 자면 외로움이 조금 가시긴 하겠지만, 말 그대로 조금이었다.

그리고 한 건이 떠난 첫날. 그 날은 참을 만했다. 한건은 틈틈이 전화를 해왔고, 몇 번은 카페 일이 바빠 못 받기도 했다. 그 후에 아이들을 픽업하고, 씻기고, 적당히 놀아주다 재웠다. 한건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유 모를 긴장이 종일 전신을 주무른 터라 세현이 방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뜨고 나서야 한건에게 이렇다 할 굿나잇 인사도 전하지 않고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문 집사가 세 사람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잠이 들었노라, 어련히 잘 보고를 했겠지만 괜히 미안했다.

둘째 날도 그럭저럭 넘겼다. 그 날은 아무리 바빠도 한건의 전화는 칼 같이 받았다. 찬하와 세현이를 양 옆구리에 끼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알종알 보고를 하기도 했다.

한건의 주변은 늘 바뀌었다. 낮이기도 했고, 밤이기도 했다. 호텔이기도 했으며 트랜지션 안이기도 했고, 번지르르한 건물 안이기도 했다. 대부분 슈트 차림에 올린 머리였다. 가끔은 뉴스나 기사를 통해 한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알기도 했다.

둘째 날 밤은 아이들을 아예 침실에서 재웠다. 찬하와 세현이가 한건 아빠가 없어서 침대가 엄청 남는다며 시무룩하게 말했는데, 하마터면 주책없이 눈물이라도 떨어트릴 뻔했다. 그리고 피난처에서 혹 자식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부모처럼 아이들을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날은⋯⋯ 잘 자지 못했다. 언뜻 잤는데 새벽 두세 시쯤 일어나서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한건은 지금 어디일까. 미국? 런던? 아니면 좀 가까운 중국인가? 몇 시간 만에 휙휙 바뀌는 위치라 성 실장이 시간별로 스케줄을 알려줬음에도 가늠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곳이 밤일지, 낮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전화할 수도 없었다.

분명 피곤할 텐데. 전화해서 깨우면 어쩌나. 그럴 바엔 좀 참고 말지. 그런 생각을 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오늘. 한건이 떠난 지 어언 사흘이 지났다.

입맛이 없었다. 아이들 밥은 챙기면서도 정작 저는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만 움직였다. 한건이 있었다면 ‘그렇게 먹으면 출근 못 하게 할 거야’라며 엄포를 놨을 텐데. 그리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 영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몸이 찌뿌듯하다. 가슴께도 허하고.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든 날씨가 그렇게 매섭지도 않은데 괜히 으슬으슬하고. 언젠가 임신한 몸으로 한건과 떨어져 있을 때와 비슷했다. 그만큼 이유 없이 불안하고 외로웠다.

카페 출근도 하지 않고 한건의 드레스 룸에서 두어 시간 멍하니 서 있기까지 했다. 담뿍 밴 그의 냄새가 어찌나 좋은지. 입꼬리가 저절로 호선을 그렸다. 그러다 한건에게 전화가 와서 부리나케 정원으로 달려갔다.

[출근 안 했어?]

멀끔히 차려입은 한건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예하라니. 평소와 달랐다. 그것은 변화를 뜻했고, 변화는 대개 위험을 동반했다.

“응.”

예하가 거짓 없이 진실을 내놓았다.

[왜? 어디 아파?]

한건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아니. 그냥 가기 싫어서⋯⋯. 농땡이 부리고 싶었어.”

예하가 어설프게 웃으며 대꾸했다. 한건은 잠시 침묵했다. 특유의 짙은 시선으로 예하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예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불편했는데, 지금은 저게 다 관심이고 걱정이고 사랑임을 잘 알았다.

[찬하랑 세현이는?]

“찬하는 등교 잘 하셨고, 세현이는 등원 잘 하셨고. 지금쯤이면 둘 다 점심 먹고 있겠네.”

[네 점심은?]

“⋯⋯곧 먹을 거야.”

한건의 한쪽 눈이 살짝 어그러졌다. 미심쩍은 것이다. 분명 통화가 끝나자마자 문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들들 볶을 게 뻔했다. 예하가 속으로 문 집사를 향해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형은? 밥 먹었어?”

예하가 능청맞게 말머리를 돌렸다. 한건은 그걸 알았지만, 굳이 꼬집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대충.]

“대충이 뭐야. 뭐 먹었어. 상세히 보고해.”

예하가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제법 엄한 표정을 해 보였다. 한건이 피식 웃으며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커피.]

“그리고?”

[⋯⋯커피.]

“뭐야. 형은 먹지도 않았네.”

예하가 부루퉁하게 말을 쐈다. 옆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뒤튼 한건이 그런 예하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폈다. 살짝 뾰족해진 눈썹과, 일그러진 눈가, 볼록 튀어나온 아랫입술, 턱 위로 자글자글 올라온 호두 주름까지.

[밥이 잘 안 들어가. 네 냄새를 못 맡았더니, 여기가 답답해서. 커피도 꾸역꾸역 마시는 거야.]

한건이 쿡, 자신의 명치를 찍었다. 그에 예하의 속눈썹이 위로 동그랗게 말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건이 저가 없으니 밥을 못 먹겠단다. 그 말에 기쁘면, 미친 걸까. 예하가 벅벅 입가를 문지르며 치미는 미소를 숨겼다.

“뭐든 먹어. 빵이라도 먹어. 아니면 약을 먹든가. 빈속에 시커먼 커피만 때려 넣지 말고.”

요즘엔 영양소가 알차게 담긴 약이 많이 나온다. 다섯 알 정도 먹으면 하루쯤은 굶어도 괜찮았다. 음식을 썩 즐기지 않는 한건은 피치 못할 사정일 때 이따금 먹는 듯한데, 그마저도 더부룩하다며 싫어했다. 허나 커피만 주야장천 마시는 것보단 그게 나을 터였다.

[그럴게.]

“못 믿어. 거긴 점심이야, 저녁이야? 아무튼 세 시간 내로 먹는 사진 찍어 보네.”

예하의 고집에 한건이 탄성 같은 웃음을 흘렸다. 신경질 내는 예하가 왜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너도 보네.]

“좋아. 나는 삼십 분 뒤에도 보낼 수 있어.”

예하가 당차게 말했다. 한건이 푸스스 웃었다. 예하는 그 웃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재채기처럼 토해지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보고 싶어.”

[⋯⋯.]

“보고 싶어, 형.”

한건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어찌나 진한 시선인지. 홀로그램을 통해서도 또렷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핥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한건이었다.

[금방 갈게.]

“⋯⋯응.”

그렇게 통화가 마무리됐다. 예하는 한건의 얼굴이 떠 있던 허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 언젠데. 오늘 오면 안 돼?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해? 나랑 찬하랑 세현이보다 일이 더 중요하냐고. 형은 나 안 보고 싶어?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 나는 시시각각 무너지는 게 이렇게나 선연한데. 왜 형은 여전히 그렇게 멋있어?

삐죽삐죽 선인장 가시처럼 모나게 치솟는 심술이 많았으나 참아냈다. 예하는 이제 아이가 둘이나 있는 아빠고, 어른이고, 어엿한 남편이었으니까.

* * *

“한건 아빠 언제 와?”

예하의 허벅지를 베고 큐브를 돌리던 세현이 물었다.

“두 밤만 더 자면 돼.”

예하가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대답했다.

“두 밤이나?”

세현이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더니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며 지나간 날을 되뇌었다.

“세 밤 지났는데 또? 그럼 한건 아빠 다섯 밤이나 안 와?”

“응. 아빠가 많이 바빠.”

예하가 자못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현의 자그마한 얼굴이 덩달아 침울해졌다. 침실이 삽시간에 우중충해졌다.

그런 두 사람에, 베개를 깔고 누워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찬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세현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화가 나서 불을 뿜기 직전의 공룡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아마 두 사람이 자주 보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공룡을 표현한 것이리라.

“으워어어!”

찬하가 괴이한 소리를 흉내 냈다. 그에 세현이 꺄악, 비명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똑똑하대도 결국엔 어린아이라 저런 일차원적인 개그에 심히 취약했다.

“아빠, 아빠! 오빠 봐!”

세현이 깔깔거리며 찬하를 비웃었다. 그런데도 찬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콧구멍을 더 열심히 벌름거렸다. 자그마한 콧구멍이 빠끔빠끔 바쁘게도 움직였다. 그 모습에 예하도 실없는 웃음을 흘려야 했다.

찬하와 세현이는 침실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온갖 공룡 흉내를 냈다. 양팔을 옆으로 크게 펼친 채 익룡을 흉내 내기도 했고, 베개를 물어뜯거나 손가락을 갈퀴 모양으로 만들며 흉포한 육식 공룡을 흉내 내기도 했다. 쿵쿵 뒤꿈치에 힘을 주고 뛰는 게 어찌나 요란한지. 한건의 집이 으리으리한 독채가 아니었다면 퍽 곤란한 일이 자주 있었으리라.

예하는 반쯤 넋을 놓은 채로 두 아이의 폭격 같은 놀이를 구경했다. 나이 터울이 꽤 있는데도 잘 논단 말이지. 찬하가 잘 놀아주는 건가. 애들끼리 친하게 지내려면 셋째도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낳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한건이 형이랑 다시 상의를 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차에 갑자기 뚝, 소음이 끊겼다. 세현이 소파에 얼굴을 처박고 자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가 아무렇게나 얽혀있는 게, 퍽 괴이한 모습이었다.

정말⋯⋯ 한창 뛰어놀다가 갑자기 기절하듯 자는 건 경험할 때마다 신기하다.

예하가 그녀를 추슬러 침대에 눕혔다. 세현의 전용 베개도 끼워주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토끼 인형도 안겨줬다. 이불을 덮은 후, 조명까지 줄이자 침실이 한층 그윽해졌다.

찬하가 세현의 옆에 꼬물꼬물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손가락으로 살살 세현의 머리칼을 쓸어줬다. 예하가 흐뭇하게 그 장면을 바라봤다.

“세현이는 정말 예뻐.”

찬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치? 기적 같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컸을까.”

예하가 세현의 가슴팍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세현은 예쁘다. 물론, 제 자식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분명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유전학적으로 호감형의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세현은 유별났다.

아주 갓난쟁이일 때, 한참 세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한건이 정말 축구공만 한 분홍색 진주 같다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문 집사나 성 실장도 세현을 보는 눈엔 유달리 애정이 그득했다.

덕분에 일 년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예쁘다는 말을 듣고 사는 세현은 무슨 감탄을 들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찬하는 어렸을 때 아이 예뻐라, 찬하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뻐, 그런 말을 하면 사르르 웃으며 ‘아빠 닮아서!’ 해줬었는데. 세현은 ‘너는 나를 예뻐해라. 나는 큐브를 만질 테니.’ 정도의 반응이 다였다.

“아가 때가 제일 예쁜 줄 알았는데. 왜 지금까지 예뻐?”

찬하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보면 그가 낳아 기른 줄 알리라. 예하가 소리 없이 웃었다.

세현이가 태어나기 전엔 혹 찬하가 질투하면 어쩌나. 의도치 않은 무관심에 상처받으면 어쩌나. 그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다행히 찬하는 세현이를 아주 예뻐했다. 기다렸던 공룡이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아니라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베개를 껴안고 세현의 침대 아래에서 자기 일쑤였고, 울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얼굴로 예하와 한건을 불렀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젖병을 물려주기도 했고, 더듬더듬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세현이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거리다 ‘으브⋯⋯빠!’라며 말을 했었다. 예하와 한건이 드디어 아빠라 불어줬다며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데, 찬하가 그랬다. ‘왜 아빠라고 생각해? 오빠일 수도 있지?’라며 심각한 낯으로 예하와 한건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었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예하가 찬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계속 예쁠 거야. 너처럼.”

그 말에 찬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나도 예뻐? 세현이만큼?”

“그럼. 아빠 너 처음 봤을 때 천산 줄 알았어. 한건 아빠 몰래 너 훔쳐서 도망가려고 했었다니까.”

예하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찬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한건의 손을 잡고 작은 몸뚱이로 뒤뚱뒤뚱, 짤뚱한 다리로 아장아장 식당을 들어오던 모습이 생생했다.

“도망? 나 훔쳐서?”

처음 듣는 이야기에 찬하의 광대가 호기심으로 볼록 솟았다.

“응. 찬하가 그만큼 예뻤어. 지금도 예쁘고. 그래서 아빠가 많이 행복해.”

“내가 예쁜 게 좋아?”

턱 아래에 꽃받침을 한 찬하가 풍성한 속눈썹을 분주하게 깜빡였다. 예하가 참지 못하고 그의 동그란 이마에 쪽쪽 뽀뽀했다. 그 간지러움에 찬하가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혹 세현이 깰까, 급하게 소리를 죽였다.

“한건 아빠가 나랑 예하 아빠랑 엄청 닮았대. 눈이랑 입술이랑, 요고, 보조개도.”

찬하가 소곤거리며 자신의 볼을 쿡 찔렀다.

“맞아. 찬하 너 나 닮아서 예쁜 거야.”

예하가 으스대듯 말했다. 찬하가 맞다며 동조했다. 그게 또 예뻐서 온 얼굴에다 뽀뽀를 해줬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학교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체육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 등등. 찬하의 통통한 입술이 종알종알 말하는 건 뭐가 됐든 그렇게 재미나고 신기했다.

찬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오늘 체육 시간에 날아다닌 모양이었다. 예하는 아주 오랫동안 찬하와 세현이 자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보는 모습인데, 봐도 봐도 질리질 않았다.

어떻게 이런 애들을 내가 내 배로 낳았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근데 또 언제 이렇게 컸지? 잘 걷지도 못하던 모습이 선한데. 밥도 먹여주고, 옷도 갈아입혀 줘야 했는데. 이제는 혼자 숟가락질도 잘하고,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귀고⋯⋯. 이러다 금세 어른이 되면 어쩌지. 너무 빨리 크는 건 싫은데.

얼른 큰 모습을 보고 싶다가도 평생 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마구 휘몰아쳤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예하가 바르게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자연히 한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떠난 후로는 늘 이랬다. 찰나의 틈만 생기면 항상 그가 비집고 들었다.

지금은 어디 있으려나. 거기는 몇 시지. 잠은 좀 잤나. 아까 밥 먹는다고 사진은 보내왔던데 진짜 먹긴 했을는지⋯⋯.

한건이 몹시 그리웠다. 정말 사무치게 그리웠다. 결혼하기 전에도 이 정도는 숱하게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그의 냄새, 그의 체취, 품, 널따란 가슴, 단단한 어깨, 큼지막한 손, 짙은 눈빛, 뜨끈한 체온. 한건의 모든 요소를 차근차근 되짚었다. 그저 막연히 보고 싶어 하는 게 힘들어서 조각조각 잘라내 조금씩만 그리워하려고.

헌데 어째 가슴이 자꾸 답답해졌다. 돌멩이를 삼킨 듯 명치가 묵직하게 당겼다. 갈비뼈 사이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예하가 이불을 조금 더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혹 아이들이 깰까, 조심조심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결국은 사무치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뒤꿈치를 세운 예하가 침실을 나왔다.

새벽녘의 복도는 고요했다. 예하는 그 새벽을 정처 없이 걸었다. 자주 가던 정원도 오늘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술을 먹자니 내일이 걱정이고. 그러다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한건의 서재 앞에서였다.

예하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서재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삐릭. 짧은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갇혀있던 한건의 냄새가 전속력으로 들이닥쳤다. 그 냄새에 호되게 얻어맞은 예하가 하아⋯⋯, 후끈한 숨을 흘렸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여기에 이렇게 좋은 것이 숨어있을 줄 알았다면 진즉 와볼 걸 그랬다. 이제야 발견한 게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예하가 후읍, 후읍, 방정맞게 숨을 들이켜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는 여전했다. 어둡고, 무겁고, 깔끔하고. 소파며 책상이며 의자며, 무엇 하나 한건의 냄새가 배있지 않은 게 없었다. 서재를 크게 한 바퀴 돈 예하가 한건의 의자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좌우에서 번쩍이는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한호의 로고가 느리게 회전했다.

예하는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그 로고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더듬더듬 의자 헤드를 쓸었다. 도톰한 니트 하나가 손에 걸려왔다. 한건이 가끔 어깨에 걸치고 있는 니트였다. 그것을 둘둘 뭉친 예하가 코를 파묻었다.

공기 중에 흩뿌려져 있던 한건의 냄새보다 조금 더 짙은 냄새가 느껴졌다. 그 향을 맹렬히 들이켰다. 가슴팍이 뚱뚱하게 부풀 정도로 들이켜고 또 들이켰다. 그쯤 되니 자연히 아래에 열이 몰렸다.

눈을 가늘게 뜬 예하가 괜히 아무도 없는 서재를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슬쩍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차마 바지를 내리진 못하고, 천 위로 은근히 문지르기만 했다.

“흐으⋯⋯.”

그래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한건과 섹스를 한 지 얼마나 됐더라. 아이들 때문에 한참을 못 했으니 제가 이리 야심한 새벽에 난데없이 발정할 만도 했다.

성기는 금세 단단해졌다. 아랫입술을 핥은 예하가 한 번 더 서재를 둘러봤다. 여전히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에이 씨. 짧은 비속어를 흘린 예하가 냅다 바지와 드로즈를 내렸다. 쿠퍼액으로 번들번들해진 성기가 드러났다.

예하는 한 손으론 한건의 니트를 쥐고, 반대 손으론 성기를 흔들었다. 흡, 흐읍, 물속에서 호흡기를 단 듯 주기적으로 한건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이따금 성기에 닿는 결혼반지가 어찌나 차가운지 움찔움찔 사타구니가 떨렸다.

“아응, 아⋯⋯.”

자위가 이렇게 자극적인 행위였나. 결혼한 이래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말도 못 하게 낯설었다. 그 낯섦은 자극이 되어 돌아왔고, 그 자극은 곧 쾌감이 됐다.

“후읏, 응, 한건이, 형⋯⋯. 아아⋯⋯.”

예하의 손이 빨라졌다. 눈썹 위로 야트막한 홈도 파였다. 자꾸 터져나가는 달뜬 신음이 민망해서 입술을 겹쳐 물었다. 니트에다 부러 얼굴을 처박기도 했다.

“아, 좋아⋯⋯. 흣, 으응, 한건이 형, 거기 좋아⋯⋯.”

예하는 한건과 나누었던 수많은 정사를 되뇌었다. 그가 빨던 자신의 유두. 그의 두툼한 성기가 드나들던 뒷구멍. 그 홧홧한 온도. 그 자극. 그 열락과 쾌락. 그리고 제 귓가에, 또는 이마 위에 흩어지던 한건의 거친 숨소리. 비벼지는 살갗. 짓눌리는 골반과 엉덩이.

그걸 하나씩 뇌까리다 보니 절정은 금방이었다.

“흣!”

예하가 아귀힘으로 기둥 아래부터 귀두까지 세게 훑어내리는 순간, 하얀 백탁액이 후두둑 쏟아졌다. 한건의 검은 책상이 순식간에 천박해졌다. 예하가 마약에 취한 듯 뭉근히 녹아내린 표정으로 그 정액을 응시했다. 그러고 있으니 엄청난 자괴감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미친⋯⋯.”

나 지금 뭐 한 거야. 화장실도 아니고 최한건 서재에서 자위한 거야? 미쳤지, 미쳤어. 예하가 휴지를 찾았다. 문 집사가 서재에 튄 정액을 발견하면 자살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그가 오랜만에 씨발, 씨발 비속어를 읊조렸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바지를 추스를 틈도 없었다.

예하가 멀찌감치 떨어진 바에서 와인 주둥이를 닦기 위한 붉은색 수건을 발견했다. 일어나기 위해 막 엉덩이를 들썩였을 때였다.

[좋았어?]

낮은 음성이 귓바퀴를 차갑게 할퀸 건. 예하가 바윗덩이처럼 버석하니 굳었다. 이 목소리는⋯⋯, 그러니까 이 특유의 저음은 분명⋯⋯.

[좋아 보이던데.]

예하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건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건의 얼굴을 비춘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한건의 책상 위, 한호의 로고가 느리게 회전하던 그 자리였다.

한건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멀끔한 슈트 차림이었고, 배경은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트랜지션 안쯤 되는 듯했다.

“왜, 왜⋯⋯. 왜 형이, 왜⋯⋯.”

예하가 더듬더듬 말을 다졌다.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가 저도 모르게 한건에게 전화를 걸었던가? 흥분해서 몰랐나? 아니면 지나치게 똑똑한 스미스가 신음과 섞여 뱉었던 한건의 이름을 알아차리고 멋대로 전화를 걸었나? 다 필요 없고, 한건은 언제부터 저기 떠 있었던 거지? 설마 처음부터? 아니면 조금 전부터?

혼돈과 혼란을 담뿍 담은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경련했다. 한건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하야. 너 내 서재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있는지 알아?]

“⋯⋯어?”

[그 정보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 거 같아?]

“⋯⋯어어?”

[정보뿐만 아니라 각종 비리도 많지. 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 비리라든가, 최태성 관련이나, 아론이나, 뭐 네 대학 입학 관련 자료도 있고, 사업 관련은 셀 수도 없어.]

“⋯⋯내, 내가 그런 걸 찾으러 들어온 건 아니고⋯⋯.”

예하는 한건의 음성이 음산한 이유가, 제가 멋대로 서재에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한호가 단숨에 풍비박산 날 정보가 가득한 곳에 멋대로 들어온 건 분명 잘못이 맞았다.

[그래서 서재 문이 열리면 나한테 알람이 와. 하루에 두 번. 많으면 네 번 정도. 대개 청소를 위해 들른 문 집사거나, 내 명령으로 무언가를 가지러 온 성 실장이거나, 또 가끔은 찬하랑 세현이가 놀다가 잘못 들어오기도 하거든.]

“⋯⋯그래?”

예하가 은근슬쩍 바지를 올렸다. 그럼 뭐하나. 책상 위엔 제가 난잡하게 싸질러 놓은 정액이 저를 비웃고 있는데. 예하는 차라리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다.

[근데 예하야. 한국 시각으로 새벽 두 시가 넘은 이 시간에, 누가 서재에 들어오겠어. 놀란 내가 서재 CCTV를 켠 건 당연한 거야. 그렇지?]

“어어⋯⋯.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널 발견한 게 감시로 인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엉?”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등장에 예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한건은 당당하다는 듯 어깨를 펴고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예하가 수십 초간 그가 주절주절 뱉어 놓은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한건이 [‘을’은 ‘갑’의 동의 없이 ‘갑’을 감시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어기지 않았다는 걸 밝히려 했다는 것을.

예하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바짝 곤두섰던 어깨가 사르르 풀렸다.

“응. 알아. 형이 나 감시 안 한 거.”

[그래. 다행이네. 그래서, 좋았어?]

한건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예하가 대번에 다시 굳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발가락은 꼬물꼬물 땅을 파고 들어가려 했다.

“어, 어,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문이 열리면 알람이 온다니까.]

“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 봤다는 거구나. 아후, 죽고 싶다, 진짜. 부부 사이에 뭐 숨길 게 있겠냐마는, 숨기고 싶은 건 있었다. 하필 들어와도 서재에 들어와서는⋯⋯. 또 하필 한건은 왜 일하는 중이 아니라 이동하는 중이어서는⋯⋯.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벼, 별로 안 좋았어.”

[좋아 보이던데. 내 이름도 부르고.]

능글맞은 한건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던 예하가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막상 놀리는 걸 보고 있으니 배알이 꼴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예하가 의자에 늘어지듯 기댔다.

“그래! 좋았다! 이제 형 좆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더라. 됐냐?”

[⋯⋯.]

한건의 만면이 단숨에 딱딱해졌다. 그의 진한 눈썹이 가파른 비탈길을 그렸다. 몹시 아니꼽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예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출장 가랬나? 내가 오죽했으면 자위를 했겠냐고!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건 전적으로 한건의 탓이었다.

한건이 퉁명스러운 예하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가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예하가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예하야. 내가 지금 당장 가서 내 좆이 더 좋은지, 네 손이 더 좋은지 비교할 수 있게 해줄까?]

그 말에 예하가 눈을 홉떴다.

“뭐야. 지금 올 수 있는 거야? 근데 안 오는 거야? 어?”

주제가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잠깐 눈살을 찌푸렸던 한건이 피곤한 낯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갈 순 있어. 그럼 스케줄이 어그러질 테니까, 추후에 다시 와야겠지. 그때는 시간이 곱절로 길어질지도 모르고.]

“아⋯⋯. 근데 왜 온다 그랬어? 사람 기대하게?”

[내 좆이 네 손에 지는 게 더 싫으니까.]

하여튼, 미친놈. 예하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예하는 한건이 더 이상 출장을 단축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성 실장과 비서팀이 들고 온 출장 계획은 이 주였다. 근데 한건이 절대 못 한다고 엄포를 놔서 일정을 줄이고,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이동 시간도 줄여서 타이트하게 짜놓은 게 오박 육일이었다. 아마 지금 한건은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테였다.

그걸 아는데⋯⋯ 그래도 아쉽고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예하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빨리 정정해. 네 손보다 내 좆이 좋다고. 아니면 나 신경 쓰여서 일 못 해.]

한건이 답지 않게 애처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에 예하가 저도 모르게 슬핏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한건은 참으로 신통방통하게 미친놈과 귀여운 남편 사이를 넘나든다.

“형 좆이 더 좋아. 내 거 흔드는 내내 형 좆 상상했어. 형 손이랑, 형 가슴도 상상하고.”

거저 던져주다시피 한 예하의 말에 한건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는 네 좆 만지지 마. 누구 마음대로 만져, 거기를.]

“하아⋯⋯. 네. 그럼요. 아무럼요. 만지지 않겠습니다.”

예하가 다 귀찮다는 듯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수건을 가져와 벅벅 책상을 닦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홀로그램용 만년필과 금빛 스탠드에도 튀어있어서 기겁했다. 분명 엄청나게 비쌀 텐데. 미간을 좁힌 예하가 꼼꼼하게 정액을 닦아냈다.

그런 예하를 구경하던 한건이 자신의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근데 예하야.]

“응.”

[나 너 자위하는 거 녹화했는데. 그거 보면서 자위해도 돼?]

“⋯⋯.”

수건을 든 예하가 목석처럼 굳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걸 녹화하냐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으나, 참아냈다. 저도 이렇게 몸이 다는데, 절륜한 한건은 오죽하랴.

“해, 해. 근데 형도 딱 한 번만 해. 나도 한 번 했으니까.”

[고마워.]

한건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예하가 픽, 웃음을 흘렸다.

“고마우면 빨리 와.”

[노력할게.]

한건은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기이할 정도로 질긴 정신력으로 오박 육일 내내 침대에 한 번도 눕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트랜지션이 이동하는 와중에 슬쩍슬쩍 눈만 붙였으리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만 응시하고 있었다. 홀로그램 속의 한건은 더할 나위 없이 한건인데, 그 같지가 않다. 나의 최한건은 저렇게 납작하지 않은데. 더군다나 이다지도 무색무취하다니. 묘하게 낯선 게, 불쾌할 지경이었다.

[보고 싶다, 예하야.]

한건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역시 예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예하가 처연히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 후에 또 정적이 흘렀다. 예하가 흘끔, 홀로그램 귀퉁이에 떠 있는 시간을 살폈다. 어느새 세 시가 훌쩍 넘었다.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 이제 자러 갈래.”

[그래, 잘자.]

“응. 안녕.”

통화는 담백하게 끝났다. 질질 끌어봐야 당장에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쓰잘데 없는 미련만 남을 게 뻔했다. 예하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대로 서재를 가로지르다, 다시 돌아왔다. 한건의 니트를 가지고 가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코를 박고 자야, 찰나나마 눈을 붙일 수 있을 듯했다.

* * *

예하는 열 시가 훌쩍 넘어서야 눈을 떴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침은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대였으니까. 아이들을 추슬러 각각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야 했고, 저도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근데 이 시간까지 자다니.

예하가 텅 빈 침대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있는 거라곤 구겨진 한건의 니트뿐이었다. 아이들은 아마 잘 등교했을 테다. 철두철미한 문 집사가 어련히 알아서 보냈겠지.

예하가 마른세수를 했다. 제법 잔 것 같은데,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그래도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어제도 쉬었으니, 오늘은 출근해야 했다.

카페는 바빴다.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아이들을 픽업하러 갈 시간이었다. 후다닥 카페로 데리고 와서는 간식을 챙겨줬다. 그래 봐야 쉐프가 아침에 만들어준 쇠고기 유부초밥과 미역국을 내놓은 게 다였다. 그리고 또 일했다.

오늘은 유독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면, 한건이 보는 날 역시 빠르게 도래할 테니 말이다.

근데 어째 몸이 녹록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니 후끈한 열이 올랐다. 목도 칼칼하고,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죽비죽 배어 나왔다. 옆에서 잔 정리를 하던 효주가 얼굴이 영 아니라며 어디 아프냐 물을 정도였다.

예하가 이마를 짚었다. 제가 느끼기에도 유달리 뜨끈한 온도가 느껴졌다. 설마 히트사이클인가. 그럴 리 없는데. 억제제를 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분명 히트사이클은 아니었다. 그와는 완전히 다른 열기다. 목이 따끔따끔한 것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는 듯 어깨가 무거운 것도 달랐다.

몸살이나 감기가 온 듯한데. 증상을 보아하니 그저 그런 감기는 아니렷다. 더 심해지기 전에 닥터 유를 만나러 가는 게 좋을 듯했다.

예하가 매니저에게 이른 퇴근을 전달하고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느새 내려온 찬하가 세현의 손을 꼭 쥐고 서 있었다.

“아빠! 나 숙제 다 했어. 우리 저녁 뭐 먹어? 나 배고파.”

“세현이두 배고파.”

묘하게 닮은 두 쌍의 눈동자가 예하를 올려다본다. 예하가 꾹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참새 같은 입술들이 배가 고프다는데, 일단 애들 밥부터 먹이고. 그게 우선이었다.

찬하와 세현이는 늘 그렇듯, 체력이 넘쳤다. 밥만 먹이고 병원에 가야지, 씻기기만 하고 병원에 가야지, 자는 것만 보고 병원에 가야지. 그러다 보니 어언 밤 열 시였다. 그런데도 깔깔거리며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도통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놀이방 벽에 기댄 예하가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저릿저릿한 게, 숨 쉬는 것도 힘들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까끌까끌하던 목젖은 선인장처럼 따끔거렸다.

요 며칠 제대로 못 먹고, 못 자고, 신경은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몸이 지칠 만도 했다. 예하가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까칠한 피부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아, 큰일인데. 아프면 안 되는데. 한건이 오려면 아직 하루나 남았는데. 제가 아프면 아이들이⋯⋯, 뭐⋯⋯ 돌봐줄 사람이 많으니 괜찮긴 하다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닥터 유를 집으로 부를까. 하지만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대단한 병도 아니고 고작 감기로 오가라 하기가 뭣했다. 몇 안 되는 막역한 사이에 고용주처럼 굴고 싶진 않았다.

집에 약이 있을 텐데. 그거라도 먹어볼까. 문 집사한테 말하면⋯⋯. 근데 괜히 말했다가 한건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그 성격에 분명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돌아올 텐데. 그래놓고 나중에 또 출장을 가겠지. 그건 죽어도 싫었다.

예하가 데굴데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세현이 다가왔다. 동그란 눈두덩에 졸음이 가득 껴있었다.

“아빠. 세현이 졸려.”

“어어, 아빠가 재워줄게. 가자.”

예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세현이 허벅지에 철썩 달라붙어 왔다.

“아빠랑 같이 잘래! 아빠도 지금 자.”

“어, 음⋯⋯. 오늘은 안 돼⋯⋯.”

그냥 몸살이면 좋겠다만, 감기면 아이들에게 옮길 위험이 있었다. 저에게 병균이 옮아 아픈 아이들을 상상했더니 숨통이 콱 막혔다. 예하가 은근히 세현을 떼어냈다.

“왜 안 대?”

세현이 앙칼지게 물었다.

“아빠가 음⋯⋯ 할 일이, 어, 할 일이 좀 있어서. 세현이 먼저 자.”

“⋯⋯.”

잇단 예하의 거절에 세현이 뾰족하게 눈을 치켜떴다. 퉁퉁하게 부푼 아랫입술에 심술이 가득했다. 지금의 상황이 몹시 아니꼽다는 표정이었다. 며칠 같이 잘 자다가 갑자기 혼자 자라니. 서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빠가 미안해.”

예하가 세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도 세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한숨을 내쉬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예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세현과 찬하는 별다른 탈 없이 잠들었다. 세현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아서 마음이 쓰리다만,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홀라당 까먹을 테니 괜찮았다.

침실로 돌아온 예하가 문 집사를 호출했다. 그녀는 금세 나타났다. 언제, 어디서 부르든 오 분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머리를 멀끔히 넘긴 그녀가 가볍게 묵례했다.

예하가 큼큼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혹시 집에 약이 있나요?”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지요? 닥터 유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고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닥터 유를 부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문 집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굳이 전문의를 두고 약 따위에 의존하려는 예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요즘 나오는 약은 웬만한 중병까지도 치료가 된다지만, 예하는 그러면 안 되는 몸이었다. 지극히 모시고 또 모셔도 모자람이 없는, 귀한 몸이란 말이다. 알파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낳았는데. 하물며 나중에 하나 더 낳겠다는데. 문 집사는 예하를 위해서라면 총도 대신 맞을 수 있었다.

“아니, 진짜 괜찮아요. 내일 아침에 일찍 가려고요. 그러니까 지금은 약만 좀 주세요.”

“⋯⋯.”

예하의 간곡한 거절에도 문 집사는 쉽사리 긍정을 내놓지 않았다. 특유의 무감한 표정이었으나, 못마땅함이 미약하게 뜰썩이고 있었다.

예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몸이 아프고, 아이들과 함께 자지 못하고, 와중에 한건은 없고. 그것만으로도 귓바퀴가 화끈거릴 정도로 짜증이 나는데 문 집사까지 얹지 말아줬으면 했다.

“주세요, 그냥.”

예하가 조금 더 힘을 실어서 말했다. 명령과 비슷한 어투였다. 문 집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예.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약 드시기 전에 식사는 따로 하지 않으실는지요.”

“괜찮아요. 약 먹고 바로 잘 거라.”

문 집사는 금세 약을 가지고 왔다. 알약을 삼킨 예하가 물 한잔을 말끔히 비워냈다. 식은땀을 자꾸 흘리니 갈증이 끊이질 않았다. 문 집사가 빈 잔을 거둬갔다. 짧게 고개를 숙인 그녀가 막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문 집사님.”

“네.”

“혹시 제가 내일 또 못 일어나면⋯⋯ 아이들 좀 부탁해요. 물론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

“예. 신경 쓰겠습니다.”

문 집사가 연하게 미소 지었다. 찬하와 세현의 시중을 드는 건 퍽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안심한 예하가 막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협탁에 올려진 스미스 위로 작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한건의 전화였다.

예하가 볼 안쪽을 지그시 씹었다. 낮에 아이들과 함께 잠깐 통화한 이후로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받아야 하는데,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그 귀신 같은 눈썰미로 제가 아프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아프다고 하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올 게 뻔한데. 그 사이에 닥터 유도 호출해 놓을 거고, 멀끔히 나을 때까지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게 할 텐데.

한건 특유의 유난을 가늠한 예하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문 집사가 아직 침실에서 나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한건의 이름이 깜빡이는 홀로그램 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예하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제가 안 받으면 문 집사님한테 전화하겠죠?”

“네. 아마 그러실 겁니다.”

“그리고 문 집사 님은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할 거고요?”

“네. 제 일이니까요.”

예하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이 집에선 아픈 것도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된다.

“그냥 잔다고. 피곤한 것 같다고. 아이들도 잘 잔다고. 그렇게만 보고해달라고 하면⋯⋯ 해주실 거예요?”

예하가 자못 애처롭게 문 집사를 바라봤다. 제발. 나를 더 피로하게 하지 말길. 당연히 한건이 오면 좋지만, 그건 또 다른 출장을 말미암는단 말이다. 그럼 지금껏 참아온 게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예하는 어렴풋이 그녀의 입에서 부정이 나오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문 집사는 한건의 사람이었으니까. 예하는 아직 이 저택의 사람들이 어려웠다. 가끔은 적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과거의 기억을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구하라시면, 함구하겠습니다.”

허나 문 집사의 대답은 퍽 놀라웠다.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네.”

예하가 뚫어지라 그녀를 바라봤다. 제 편에 선 문 집사를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문 집사는 그저 일의 경중을 비교했고, 지금은 예하의 말을 듣는 게 맞다 판단했을 뿐이었다. 한건은 현재 중차대한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고, 예하가 아프다면 앞뒤 분간 없이 날아오고 볼 텐데. 그건 훗날 또 다른 부재와 문제를 만들 터였다. 그러니 예하의 말마따나, 숨기는 게 옳았다.

“감사⋯⋯해요.”

예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 집사가 로봇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쉬세요. 내일 오전에 닥터 유의 방문 일정을 잡아놓겠습니다.”

문 집사가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녀의 퇴장을 지켜보던 예하가 허겁지겁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문 집사 님!”

“네.”

문 집사가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혹시 한건이 형이 왜 제대로 보고 안 했냐고 뭐라고 하면,”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예하 님의 명령을 따랐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고요.”

예하가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긁었다. 가끔 한건의 지나친 사랑을 저보다 타인이 더 잘 알고 있을 때가 있다. 닥터 유나, 문 집사나, 성 실장이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마다 몸 어디가 간지러웠다.

문 집사가 침실을 나가고, 예하는 비로소 온전히 혼자가 됐다.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이불이 바윗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에 짓눌려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한건이 보고 싶었다.

“콜록, 콜록.”

예하는 전날처럼 늦잠을 자지 않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기상이었다. 거슬리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로 치받는 기침에 눈을 뜬 거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가 아직 새벽에 물들어 푸르렀다. 예하는 자신이 밤새도록 저 차가운 새벽을 마시고 또 마신 게 아닐까, 의심해야 했다. 분명 약을 먹고 잤는데도 몸이 불덩이였다. 땀에 젖은 앞머리는 축축했고, 베개와 시트도 여기저기 땀 얼룩이 묻어있었다.

“콜록, 콜록.”

예하가 둔탁하고 따끔한 기침을 토해냈다. 목젖으로 모자라 폐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목구멍이 죄다 부르튼 느낌이었다.

와, 이거 그저 그런 몸살이 아닌데.

예하는 뒤늦게야 심각성을 통감했다. 근육이 다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늦더라도 닥터 유를 만날 걸 그랬다.

몇 번 마른침을 삼키던 예하가 문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에겐 저가 아직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하고, 닥터 유를 최대한 일찍 불러 달라 부탁했다.

찬하와 세현이 막 등교했을 때쯤, 닥터 유가 방문했다. 예하가 아프다는 소식을 너무 오랜만에 들은 그녀는 온갖 호들갑을 떨며 등장했다. 다행히 큰 병이 아니라 감기몸살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런데도 닥터 유는 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 이렇게 아플 동안 최 회장님은 뭘 했냐, 돈이 그렇게 많은 데도 아이들 키우는 게 힘든 거냐, 카페 일이 살인적일 정도로 많냐, 앞으로는 주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억제제뿐만 아니라 영양제에 비타민제까지 맞아라. 아주 많은 잔소리를 해댔다.

어쩐지 그 잔소리에 마음이 푸근해진 예하는 주사에 링거까지 맞고 푹 잤다. 오늘만 힘겹게 보내면, 내일 돌아오는 한건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종일 자다, 늦은 새벽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음산한 얼굴의 한건과 이른 재회를 해야 했다.

* * *

출장이 열두 시간쯤 남은 시점이었다. 막 마카오 일정을 마친 한건이 트랜지션에 몸을 실었을 때이기도 했다. 이제 베이징 일정만 마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카오 특유의 화려하고, 번잡하고, 속 시끄러운 야경을 보던 한건이 꾹꾹 눈두덩을 눌렀다. 닷새 내내 평균 세 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했더니 피곤은 둘째치고 안구가 너무 건조했다. 그래도 괜찮다. 예하와 아이들을 한시라도 일찍 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음 출장엔 가족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데리고 다니리라, 한건이 다짐했다. 고작 닷새 못 봤다고 세 사람의 얼굴이 어찌나 눈에 아른거리고 사무치는지. 미팅 중에도 넋을 놓기 일쑤였다.

차체에 떠 있는 시간을 노려보던 한건이 괜히 홀로그램을 괴롭혔다. 예하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는 거였다. 문 집사 말로는 오늘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다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카페도 안 나가고 집에서 대체 뭘 하는 건지.

예하 몰래 슬쩍 CCTV를 봐볼까.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러다 며칠 전처럼 좋은 장면을 관람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못된 생각을 하던 차였다.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전화가 온 건.

통화는 길지 않았다. 정보 전달이 주된 목적이라 삼 분이 채 안 됐다.

“집으로 가.”

통화를 끝낸 한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

의도치 않게 모든 통화 내용을 들은 성 실장이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곧장 트랜지션을 돌렸다.

“어, 어, 어떻게 형이 여기에⋯⋯. 언제 왔어? 일은?”

예하가 미처 잠을 다 털어내지 못한 얼굴로 캐물었다. 그러나 한건은 답이 없었다. 특유의 진한 눈빛으로 예하를 짓누르기만 했다.

한동안 두 사람 대신 적막이 대화를 나누었다. 예하는 눈앞에 있는 한건이 실재라는 걸 판가름하느라 바빴고, 한건은 나름대로 화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강예하가 아프다니. 하물며 저는 그걸 몰랐다니. 거기다 옆을 지키지도 못했다니. 혼자 끙끙 앓았을 예하를, 혹 아이들에게 감기가 옮을까 문을 꽉 닫아놓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었을 그를, 등신 같은 제 일을 방해할까 저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를 가늠했더니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한건이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리고 예하의 이마를 문질렀다. 지글지글 끓는 듯한 열은 아니었으나 제법 후끈한 온도가 느껴졌다. 닥터 유도 다녀갔고, 주사에 링거까지 맞았다는데 아직도 미열이 있다. 그럼 그전엔 얼마나 아팠다는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치받는 분노로 정수리가 다 지끈거렸다.

“언제부터 아팠어?”

“어⋯⋯, 어제?”

“하아⋯⋯. 숨길 거였으면 철두철미하게 숨겼어야지, 예하야.”

한건이 예하의 눈썹뼈를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예하가 흐리멍덩한 동공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한건의 눈에는 너무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처럼 보였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픈 걸 숨겨. 내가 눈 뒤집혀서 무슨 짓 할 줄 알고.”

한건이 본격적으로 예하를 꾸짖기 시작했을 때였다. 예하가 한건의 품으로 뛰쳐 들었다. 두 팔로는 목덜미를 세게 껴안고, 온몸으로 안겨 왔다.

“⋯⋯나중에, 나중에 혼날게.”

“⋯⋯.”

“지금은⋯⋯, 지금은 그냥⋯⋯.”

형만, 우리 둘만, 어? 예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더듬거렸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진하고 퇴폐적인지. 등줄기에 소름이 다 돋았다. 꼭 눈동자에 갇혀 사지가 얽매이는 듯했다.

“아, 형⋯⋯ 제발⋯⋯.”

예하가 목적 없는 애원을 내놓았다. 자신이 뱉어 놓고도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명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하보다 예하를 더 잘 아는 한건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예하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그가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예하의 통통한 입술을 잡아먹듯 한입에 삼켰다. 예하가 기다렸다는 듯 힘껏 한건을 끌어안았다.

거스를 것 없이 벌려진 입술 틈으로 혀가 넘나들었다. 타액이 뒤섞이고, 숨이 엉켰다.

“으응⋯⋯.”

한건의 힘과 무게에 밀린 예하가 그대로 침대로 넘어갔다. 팔굽혀펴기하듯, 양팔 사이에 그를 가둔 한건이 더욱 깊숙이 입술을 비볐다. 예하가 지지 않겠다는 듯, 아랫도리를 한건의 배에 문질렀다.

키스는 길었다. 입술과 혀가 아릿해질 때쯤에야 떨어졌다. 두 사람은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상대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서로에 찔끔, 눈물이 다 났다.

“보고 싶었어.”

한건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음절 하나하나에 응축된 감정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예하가 미소 지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보조개가 드러났다. 한건이 그 보조개에다 촉,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키스했다.

입술을 물고 빨고, 턱을 핥고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알파와 오메가 특유의 체취가 가장 많이 일렁이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흐읍, 흡. 짐승처럼 서로의 냄새를 탐했다. 오 개월도 아니고, 고작 오 일 떨어져 있었는데. 그 그리움이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웠다.

예하의 목젖에 코를 비비던 한건이 윗도리를 추켜올렸다. 드러난 예하의 허리가 어찌나 홀쭉한지. 제대로 못 먹었구나, 싶어 또 가슴이 아팠다. 아쉬운 마음에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예하 역시 한건의 슈트 재킷을 벗겨냈다.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도 풀고, 와이셔츠 단추도 끌었다. 한건의 두툼하고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게 어찌나 감동적인지. 코끝이 찡했다.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였다. 와중에도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못 본 시간의 할당량을 채우겠다는 듯, 집요하게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아! 형⋯⋯.”

한건이 예하의 가슴팍을 한껏 베어 물었다. 판판한 가슴 위로 도드라진 분홍색 알갱이가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성심성의껏 물고 빨고 또 깨물었다. 그럴 때마다 예하의 허리가 들썩였다.

“으응, 아⋯⋯.”

예하가 한건의 귓바퀴를 주물렀다. 머리가 짧은 탓에 까슬까슬한 뒷덜미도 쓰다듬었다.

유두가 씹힐 때마다 발끝이 꼬물거렸다. 뜨끈한 혀가 그 끝을 핥으면 사타구니를 오므렸고, 힘주어 세게 빨면 어깨를 움츠렸다. 한건은 그런 예하의 반응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더군다나 빨면 빨수록 자욱하게 풍겨오는 페로몬이라니.

제 품에, 제 손에 있는 게 진정 예하구나. 새삼 느껴져서 허겁지겁 다시 입술을 겹쳤다. 엉킨 숨이 마구잡이로 넘나들었다. 타액과 페로몬도, 그리웠던 마음도.

예하의 치아와 잇몸, 혀끝과 목구멍까지 빨던 한건이 잠깐 물러났다. 호흡을 따라오지 못한 예하가 툭툭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여린 턱선을 잘근거렸다. 뭐 했다고 그렁그렁해진 눈가를 핥기도 했다.

“하아, 하아⋯⋯. 나 감기 걸렸어.”

예하가 한층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입술을 섞을 대로 섞어놓고, 이제 와 밝히기엔 자못 부끄러운 사실이었다. 한건이 피식 바람기가 많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알아.”

“닥터 유가 옮길 수도 있대.”

“알아.”

“나한테 감기 옮으면, 내가 열심히 간호해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으응⋯⋯.”

한건이 재차 예하의 입술을 삼켰다. 말을 길게 하는 걸 보니 숨을 제법 고른 듯해서. 한건은 바쁘게 혀를 놀리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예하의 홈웨어 팬츠를 벗기고, 드로즈까지 내렸다. 예하 역시 더듬더듬 한건의 바지버클을 풀었다.

“이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한건이 툭, 반쯤 발기한 예하의 성기를 건드렸다. 며칠 전 화면 속 너머로 봤을 때, 얼마나 만지고 싶던지.

“많이 봐. 계속 봐도 돼. 만져도 돼.”

예하가 소곤거렸다. 한건의 입꼬리가 가파른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나 아직 네 동영상 보고 자위 못 했는데. 대신 오늘 많이 해도 돼?”

“⋯⋯미쳤어?”

“왜? 싫어?”

“‘많이’라니. 그걸로 퉁 칠 생각이었단 말이야? 안 돼. 오늘 잠잘 생각 하지 마.”

예하가 한건의 코끝을 앙 깨물었다. 그에 한건이 주책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하는 날이 갈수록 사랑스럽다. 한때는 한계를 모르고 부푸는 마음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이 사랑이 어디까지 팽창할는지 궁금하고, 동시에 경이로웠다.

“바라는 바야.”

한건이 예하의 무릎에 걸려있던 옷가지들을 단숨에 내던졌다. 예하가 킥킥거리며 다리를 벌렸다. 아직 감기를 털어내지 못한 사지가 묵직하지만, 한건과 뒹굴며 땀을 진탕 흘리면 멀끔히 나을 것 같았다. 그 어떠한 약보다 한건이 효과적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한건이 예하의 허벅지 아래를 쥐고 휙 위로 끌어당겼다. 예하의 몸이 단숨에 반으로 접혔다. 하늘 위로 솟구친 성기가 조금 부끄러웠다. 그런 예하를 알았을까.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핥은 한건이 한입에 예하의 것을 집어삼켰다.

“하으응!”

후끈한 입안에 예하가 날카로운 교정을 내질렀다. 한건이 답지 않게 움찔 어깨를 떨며 놀랐다. 그가 몇 번 빨지도 않은 성기를 빼냈다.

“예하야. 말 안 한 게 있는데.”

“흐⋯⋯, 뭔데?”

“문밖에 애들 있어. 그렇게 소리 지르면 들릴지도 몰라.”

“⋯⋯뭐?”

예하의 눈이 빠질 듯이 커졌다. 그가 다급하게 침대 귀퉁이의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 십칠 분. 찬하와 세현이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을 시간이었다. 근데 그런 아이들이 왜 침실 문 앞에 있어?

“네가 다 나을 때까지 문 앞에서 자겠대. 그래서 복도에 이불 펴고 자고 있어, 지금.”

“⋯⋯찬하랑 세현이가, 내가 아픈 걸 알아?”

“어.”

“어떻게 알아?”

“어떻게 몰라?”

예하와 한건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서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건이 예하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속삭였다.

“나한테 네가 아프다고 전화한 것도 찬하야.”

“⋯⋯.”

“가끔 까먹나 본데. 최찬하 내 아들이야. 얼굴은 널 닮았지만 속은 날 더 많이 닮았을걸.”

예하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낯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대충 닥터 유나 문 집사가 연락했겠거니, 넘겨짚었는데. 설마 찬하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한건이 쪽쪽 예하의 얼굴 여기저기에 짧은 키스를 흩뿌렸다.

“예하 아빠가 아픈데도 일한다면서, 혼내달라던데.”

“⋯⋯.”

“그리고 네가 자기한테 안 아프다고, 일어났으면서 아직 잔다고, 거짓말하는 게 너무 싫대. 그것도 혼내 달래.”

“정말⋯⋯ 형이랑 똑같네.”

예하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한건이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나보고 얼른 와서 예하 아빠 고쳐놓으라더라. 내가 없어서 네가 아픈 것 같대.”

“⋯⋯.”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찬하가 벌써 많이 컸구나. 내 같잖은 거짓말을 꿰뚫어 볼 만큼이나 똑똑해졌구나. 감동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언제⋯⋯ 그렇게 자랐지?”

“잘 자라고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

한건이 예하의 이마에 입술을 묻은 채 말했다. 예하의 목선을 타고 내려간 그가 명치, 단전, 아랫배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성기에 다다랐다. 그가 귀두를 춥, 빨았다.

“그래도, 내가 네 좆 빠는 건 몰라도 되는 나이니까, 소리 좀 죽여.”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크게 벌린 한건이 다시 예하의 성기를 삼켰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머금은 그가 쭙쭙 신나게 빨아댔다.

예하가 널브러진 한건의 셔츠를 끌어와 입에 물었다. 신음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한건의 냄새가 담뿍 밴 셔츠라 흥분이 곱절로 부풀었다.

“우응, 흐⋯⋯. 흣!”

한건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레 예하의 것을 빨아댔다. 출장 내내 자취를 감췄던 식욕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가능만 하다면 예하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었다.

“아, 으응, 읏, 형⋯⋯.”

예하가 한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귀두를 짓누르는 혀가 뜨겁다. 기둥을 바짝 조이는 입안에 사타구니가 바르르 떨렸다. 한건은 성기뿐만이 아니라 동글동글한 고환부터 회음부까지 싹싹 빠짐없이 핥았다. 가끔은 뒷구멍을 빨기도 했다.

“흐으⋯⋯. 좋아.”

예하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마음 같아선 목이 쉴 때까지 신음을 지르고 한건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아이들이 지척에 있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

한건이 예하의 고환을 쪽 머금었다가 놓으며 물었다. 예하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훤히 벌리고 성기를 빨리는 주제에, 자못 순수한 얼굴이었다. 피식 웃은 한건이 예하의 회음부를 세게 빨았다.

“으응, 아⋯⋯.”

거세지는 자극에 예하가 한건의 셔츠를 마구 구겨 입을 틀어막았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뚫어지라 주시했다.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이면서도 절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쾌감에 일그러졌던 예하의 눈가가 사르르 풀어졌다. 절정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광대도 울긋불긋했다. 감기로 인한 미열이, 쾌락이 만든 열락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한건의 펠라는 조금 괴로울 정도로 자극적이다. 귀두부터 뿌리까지 한 번에 머금고 쭉쭉 빨아올리는데. 정액은 물론 정기에 영혼까지 다 뽑히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그의 후끈한 콧바람이 아랫배를 간질이고, 큼지막한 손이 엉덩이나 유두를 꼬집으면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흐우, 응, 형, 나 쌀, 것 같아. 아흐⋯⋯.”

예하가 탁탁탁 한건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건은 슬쩍 눈짓만 할 뿐, 물러나 주지 않았다. 그대로 입에 사정하라는 말이었다.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한건과 가릴 게 무엇이 있겠냐마는, 아직 그의 입에 사출하는 건 조금 남세스러웠다.

하지만 한건이 쭈우웁, 하고 세게 빨아당기는 순간. 다짐이 무색하게 픽, 정액을 싸지르고야 말았다.

“아으응⋯⋯!”

한건은 혀 위에서 찰랑거리는 예하의 탁액을 한 번에 넘기지 않았다. 마치 고급 와인을 시음하듯, 입안에서 몇 번 굴리다 꿀꺽 삼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입가에 묻은 정액을 혀를 내어 삭삭 핥아 먹었다. 한건의 붉은 혀가 빼꼼 나왔다가 사라졌다.

“⋯⋯.”

예하가 밭은 숨을 내쉬며 그런 한건을 멍하니 쳐다봤다. 세상에. 어떻게 남의 정액을 저렇게나 섹시하게 먹지. 가끔, 한건의 잘난 얼굴에 치명상을 입을 때가 있다.

예하가 엄지로 한건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한건이 앞니로 그것을 잘근거렸다. 지문 하나하나를 핥듯 지분거리다, 손톱을 깨물기도 했다.

그것을 포르노 보듯 하던 예하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 못다 풀어헤친 한건의 바지춤을 두더지처럼 헤쳤다.

“나도, 나도 빨 거야.”

침대에 걸터앉은 한건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드로즈를 벗기지 못하는 것 같아 슬쩍 엉덩이를 들어주기도 했다.

한건의 것은 한참 전부터 단단히 발기한 상태였다. 아니, 그저 발기했다는 표현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두툼한 기둥이 벌떡 서 있고, 올록볼록한 핏줄이 불끈거렸다. 미끈한 생김새의 귀두는 당장 예하의 뒤를 파고들겠다는 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코앞에서 마주한 예하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떡해⋯⋯.”

큼지막한 눈이 아롱아롱했다. 한건이 민망함에 괜히 콧잔등을 긁적였다. 예하가 자신의 흉포한 성기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널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래. 안 빨아도 되니까 이리 올라,”

한건이 툭툭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릴 때였다. 예하가 한건의 성기에 볼을 비볐다.

“얘 잘생긴 것 좀 봐.”

“⋯⋯.”

“며칠 못 봤다고 더 커진 것 같아.”

예하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쪽쪽 뽀뽀를 해댔다. 그 입맞춤에 어찌나 사랑이 담뿍 담겨있는지. 한건은 하마터면 제 성기에 질투할 뻔했다.

기둥뿌리에서부터 귀두까지 촉촉 입을 맞추며 올라온 예하가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 후 크게 입을 벌려 굵직한 귀두를 물었다. 한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하는 아주 열심히 한건의 것을 빨았다. 한건이 뒤통수를 누르거나, 허리를 쳐올리지 않아도 조금이라도 더 삼키겠다며 컥컥거리기까지 했다.

“우윽, 읍, 컥, 흐우⋯⋯.”

“하아⋯⋯, 예하야.”

예하의 풍성한 속눈썹에 동글동글한 눈물이 맺혔다. 그게 얼마나 예쁜지. 한건이 검지로 살살 그것을 털어내 핥아 먹었다. 그러자 예하가 살풋 눈을 접으며 웃었다. 와중에도 쩝쩝거리며 성기를 먹어치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예하는 한참 동안 한건의 성기와 밀회를 나누었다. 어찌나 게걸스레 핥아댔는지, 입가와 턱까지 침 범벅이 됐다. 보다 못한 한건이 예하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번쩍 몸을 들어올렸다.

“그만해, 인제.”

“왜에⋯⋯. 더 할래.”

예하가 마찰로 새빨갛게 물든 주둥이를 삐죽였다. 한건이 그 입술을 쪽 빨았다가 놨다. 예하의 입안에 싸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얼마만의 섹스인데. 아주 진득하고 끈적하게 사정하고 싶었다.

예하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마주 앉힌 한건이 그의 뒷구멍을 살살 쓰다듬었다. 주름이 움찔거리며 척척한 액체를 흘렸다. 사랑스러운 제 오메가의 몸뚱이는 이미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건의 예하의 동그란 어깨에 꾹 입술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검지 두 마디를 쑥,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으응!”

예하가 짧은 신음과 함께 자라처럼 목을 오그렸다. 뒷구멍으로 무언가를 받는 게 몹시 오랜만이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런 예하를 모를 리 없는 한건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놀렸다.

오물조물 조여오는 내벽을 문지르듯 넓히며 천천히 침투했다. 삽입이 깊어졌다. 한 개였던 손가락은 금세 두 개가 됐다. 구멍도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예하가 한건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다.

“하으, 응, 아흣⋯⋯.”

“아파?”

“아니, 아니⋯⋯. 괜찮아⋯⋯. 빨리, 응? 빨리⋯⋯.”

예하가 어린아이처럼 한건을 졸랐다. 한건과는 아주, 아주 많은 섹스를 해왔다. 그의 성기가 내벽을 콱콱 쑤시면 얼마나 지대한 쾌감이 몰아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상상하고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예하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아래에 끼인 한건의 성기가 부푸는 게 느껴졌다. 아아⋯⋯. 얼른 이 두툼한 것이 제 안에서 불끈거리면 좋겠는데. 사무치는 아쉬움에 쩝쩝 입맛을 다셨다.

“후⋯⋯. 그렇게 안 졸라도 돼.”

한건이 한숨처럼 말했다. 저라고 느린 템포를 유지하고 싶겠는가. 다만, 이대로 쑤셔 넣었다간 제가 정신을 놓을 듯해서, 그럼 예하가 피를 보기 때문에 꾸역꾸역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한건의 손이 빨라졌다. 흔들 듯 쑤시다가, 손가락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가위질하듯 벌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예하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 움직임에 고통은 없었다. 한건이 손을 빼내고, 벌름거리는 구멍 위로 곧장 귀두를 맞췄다.

“천천히, 천천히⋯⋯.”

한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정신을,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한 버릇. 그게 아니면 육욕에 눈이 먼 저가 야차로 탈바꿈해 예하를 으적으적 뼈째 씹어먹을지도 몰랐다.

“아윽⋯⋯.”

엄청난 부피감에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제 막 귀두만 들어왔을 뿐인데 뒤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래에 있을 환희를 위해 감내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하지만 눈치 없는 무릎이 본능적으로 침대를 짚고 버텼다. 덕분에 반쯤 들어온 한건의 성기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한건은 예하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랫도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한동안 숨만 몰아쉬던 예하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건이 그의 골반과 등허리를 받쳤다.

“아흐⋯⋯. 큰 게, 보기는, 읏, 좋았는데⋯⋯.”

예하가 농담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한건이 픽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제법 시간이 흐르고서야 완전히 결합할 수 있었다. 맞닿은 가슴팍 너머로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생생히 느껴졌다.

달뜬 신음 두 개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한건이 예하의 귓불을 입안에 넣고 굴렸다. 그의 음습한 숨결이 귓구멍을 간질였다.

“움직여도 돼?”

“응, 응⋯⋯. 대신 살살⋯⋯.”

예하의 허락에 한건의 낯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한건이 그의 명령대로, 살금살금 성기를 빼냈다. 사실 빼냈다기보다는 예하의 골반을 쥐고 위로 들어 올린 거였다. 그러잖아도 가벼웠던 무게가 한바탕 앓으면서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그래서 쥐고 흔들기가 더욱 쉬웠다.

쯧, 혀를 찬 한건이 엉덩이를 살짝 들어 새로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쿠욱! 예하가 느끼는 지점을 직격으로 찔러 올렸다.

“아으응!”

예하의 목이 휙 뒤로 넘어갔다. 미끈한 목선이 드러났다. 거기에 코를 파묻은 한건이 거칠게 예하를 흔들었다. 예하의 엉덩이 사이로 큼지막한 성기가 쑥쑥 드러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제대로 쑤셔박히는 성기에 예하가 날카로운 교성을 내질렀다.

“살, 살살 하라고, 아흑! 읏, 응, 흐익, 아!”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러나 거센 콧김을 내뿜는 한건은 더 이상 한건이 아니었다. 인간의 가죽을 벗어 던진, 짐승 같은 알파였다.

“후우, 아, 예하야⋯⋯.”

한건의 미간이 삼각형 꼴로 구겨졌다. 뿌리를 옴팡지게 조이는 주름하며, 우물우물 성기를 씹는 내벽까지. 눈앞이 아득했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이성을 잃으면 안 되는데. 같잖은 발악을 해봤으나 예하가 숨을 고르며 후욱 뿜어낸 페로몬 한 줌에 정신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찰박찰박. 몇 번 박음질하던 한건이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예하를 침대에 파묻을 듯 짓누르고, 치타처럼 그 위에 올라탔다. 예쁜 선을 가진 다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슬쩍 빠졌던 성기를 꾸우욱, 깊숙이 쑤셨다. 한건의 고환과 예하의 엉덩이가 납작하게 짜부라질 만큼이나 깊은 삽입이었다.

“아아앙⋯⋯!”

교태가 잔뜩 묻은 예하의 신음이 침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한건이 예하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댄 채 말했다.

“쉬⋯⋯. 애들 들어.”

예하의 만면에 억울함이 스몄다. 그럼 좀 살살 하든가! 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구태여 내뱉지 않았다. 저도 몸이 달 대로 달은지라.

예하가 한건의 단단한 목덜미를 한가득 입에 욱여넣었다. 신음 대신 깨물겠다는 뜻이었다. 기꺼이 자신의 살덩이를 내준 한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으, 흑, 읍!”

단단한 귀두가 내벽 깊은 곳을 치받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배 속이 저릿저릿했다. 거기다 거칠게 할퀴어지는 전립선과, 팽팽하게 벌어진 주름, 한건의 페로몬, 뜨거울 정도로 높은 체온. 모든 게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흥분과 쾌감이 한계를 넘어섰다. 머리가 띵했다.

두 사람은 얽을 수 있는 모든 걸 얽고, 비비고, 문질렀다. 탱탱한 입술과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가슴팍, 한 치의 틈 없이 맞물린 아래. 그리고 섹스의 온도를 닮아 뜨거워진 결혼반지까지.

“어흑, 흡, 아, 후응⋯⋯.”

예하가 무딘 손톱으로 벅벅 한건의 등을 긁었다. 손끝이 단단한 근육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간지러운 통각에 한건이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었다.

찰박찰박. 철벅철벅. 척척.

신음을 억누르면 뭐하나. 축축한 피부가 붙었다가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을 퍼트렸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한건의 성기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귀두의 삿갓이 주름에 걸릴 때까지 빼냈다가도 단숨에 단전 아래까지 꿰뚫었다. 그 어마어마한 쾌감에 기겁한 예하가 몸을 뒤틀어도 물러나 주지 않았다.

온통 예하였다. 그런데도 예하가 고팠다. 포만감이 느껴지다 못해 역류할 때까지 그를 먹고, 탐하고 싶었다.

“아흣, 응, 아! 형, 한건이⋯⋯ 형. 흐익!”

“하아, 강예하⋯⋯.”

한건의 허리 짓은 끝없이 강해졌다. 그에 밀린 예하가 침대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였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둔탁하게 흔들렸다. 눈앞도, 정신도 깜박깜박 점멸했다.

자꾸 멀어지는 예하에 한건이 낮게 으르대며 그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바짝 눌러내렸다. 덕분에 삽입이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깊어졌다. 예하가 눈을 홉떴다. 동공이 꽝꽝 언 것처럼 굳었다. 승모근이 단단해지고, 발가락이 부채처럼 펴졌다. 잠깐 숨을 멈췄던 그가 픽픽, 정액을 싸질렀다.

“흐이잇⋯⋯.”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엉덩이와 사타구니, 내벽도 함께 떨렸다. 덕분에 한건의 눈썹 위에 파인 홈이 더 깊어졌다. 한층 눅눅해진 그의 페로몬을 눈치챈 예하가 헙, 헛숨을 들이마셨다.

“형. 잠깐만, 잠깐만, 나 아직, 아흑!”

한건은 예하가 절정을 갈무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 분만, 아니 삼십 초 만이라도 기다려줬으면 좋겠는데. 그 찰나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예하가 퐁퐁 눈물을 쏟아냈다. 서러워서는 아니었고, 아파서도 아니었다. 너무 거대한 쾌락이 무서워서였다. 대체 왜, 할 때마다 이다지도 끝을 내달리는 건지.

잠깐 움직임을 멈춘 한건이 물끄러미 그 눈물을 내려다봤다. 어째 그 눈빛에 더 서러워진 예하가 훌쩍훌쩍 코를 먹었다. 그러더니 한건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아픈 거, 아니니까⋯⋯ 하던 거 계속, 읏, 해⋯⋯.”

그 말에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교태라니. 지금도 그가 좋아죽을 것 같은데. 예하는 저가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에 목매길 바라는 모양이다.

물론, 한건은 그가 그걸 바란다면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리 살 수 있었다. 예하가 숨을 쉬라면 쉬고, 먹으라면 먹고, 죽으라면 죽는 그런 삶 말이다. 얼마나 황홀할까.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 등줄기가 찌르르하게 울렸다.

“예하야, 사랑해.”

한건이 쑥 성기를 뺐다가 쑤시며 말했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도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배 속을 두들기는 성기에 언어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한건은 뒷구멍에 불이 붙은 게 아닌가, 싶을 때쯤에야 사정했다. 숨을 쉴 때마다 주름 사이로 삐직삐직 정액이 새어 나올 정도로 많은 양을 갈겼다.

당연히 그게 끝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층 여유로워지긴 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또 때로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정열적으로 몸을 섞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여러 가지 액체들로 질척하게 젖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기나긴 섹스는 예하가 바랐던 대로,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햇살이 밀려올 때쯤에야 끝났다.

“하아, 하아⋯⋯.”

한건의 가슴팍에 기댄 예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무렇게 널브러진 사지 끝에 감각이 없었다. 어찌나 열심히 몸을 흔들었는지, 진이 다 빠졌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칠 정도였다.

반면, 아직 쌩쌩한 한건은 예하의 손등을 삭삭 핥고 있었다. 링거 바늘이 꽂혔던 곳이다. 하얀 손등에 피딱지가 앉아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탁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던 예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형.”

“응.”

“나 내일도 못 일어날 것 같은데 어쩌지. 오늘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겠어.”

시큰거리는 뼈마디, 한건의 잇자국으로 난도질 된 살갗, 지끈거리는 허리와 쓰라린 엉덩이까지. 어째 감기몸살보다 더 큰 중병을 얻은 듯했다.

“애들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 나 있잖아.”

한건이 예하의 귓바퀴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욱하게 밀려오는 예하의 페로몬에 스트레스로 단단하게 굳었던 뇌가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예하가 가냘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한건이 집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걱정이 증발하는 듯했다. 그러다 번뜩, 원래는 그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출장은? 또 가야 하는 거야?”

한건의 목울대가 나른하게 일렁였다. 예하가 아프다기에 앞뒤 분간 없이 날아오긴 했다만. 남은 일정은 어떻게 될는지. 타 회사와도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라 확답할 수 없었다.

“글쎄⋯⋯. 이번엔 같이 갈까?”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 돼.”

그러자 예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나 단호한 거절인지. 한건의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왜 안 돼?”

“나 카페는 어쩌고? 찬하 학교는? 세현이 유치원은?”

“그거 며칠 빠진다고 큰일이 생기진 않아. 찬하랑 세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아니야. 그래도 학교는 빠지면 안 돼.”

예하가 꼿꼿하다 못해 갑갑한 선비처럼 엄한 표정을 지었다. 한건이 소리 없이 웃었다. 별난 곳에서 보수적인 예하다. 뭐, 애들을 지나치게 풀어놓고 키우는 것보단 나을 듯도 하고. 한건은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던 예하가 턱을 올리고 한건과 눈을 맞췄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응.”

“성 실장님한테 회장하라 그러고, 형은 바지사장하면 안 돼?”

한건의 만면이 묘하게 뒤틀렸다. 바지사장이라. 한호의 최한건이 바지사장이라⋯⋯. 잠깐 고민하던 한건이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뗐을 때였다. 예하가 괴성을 내지르며 한건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으아! 아니야, 아니야! 개소리였어.”

“⋯⋯.”

“내가 좀, 성숙해지도록 할게. 좀, 어? 어른답게 굴어볼게.”

“⋯⋯.”

“다녀와. 그래도 돼. 나는 괜찮을 거야. 대신 빨리 와⋯⋯.”

예하의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곤두박질치다 치솟길 반복했다. 귓바퀴가 빨간 것이, 어른답지 못하게 떼를 쓴 게 못내 부끄러운 모양이다. 한건이 큭큭거리며 예하를 자신의 몸 위로 덮듯 올렸다.

“내가 안 괜찮은데.”

“⋯⋯.”

“바지사장. 그거 제대로 검토해볼게.”

한건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그러잖아도 이번 출장 내내 이 좆 같은 일을 때려치울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한호의 어디든 제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어 발을 빼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확실히 일을 좀 줄일 필요가 있었다.

예하의 말마따나,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쑥쑥 자라는데. 그걸 놓치는 것도 입안이 떫을 만큼이나 아쉬웠다. 내일 성 실장에게 임원진 및 전문 CEO 채용을 준비하라 일러야겠다. 물론, 지대한 지분을 주진 않을 것이다. 그건 미래의 찬하와 세현의 몫이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지금보다 한두 시간만 더. 딱 그만큼만 오롯이 가족에게 쓸 수 있을 정도로 숨통이 트였으면 했다.

한건이 토닥토닥 예하의 등을 두드렸다.

“예하야. 내 앞에선 어른일 필요 없어.”

“⋯⋯.”

“투정 부리고, 짜증 내고, 화내도 돼.”

스물셋의 예하가 아직 선하다. 바락바락 대들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지껄이고, 발길질하고, 악을 지르며 울고, 그러다 웃고, 부끄러워하고, 설레고. 생전 처음 다니는 대학교에 신나 하고, 꿈을 찾고, 공부하던 당시의 예하는 참, 예뻤다.

그리고 예하는 여전히 어렸다. 아이가 있다고, 가족이 있다고 단숨에 어른이 될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앞으로 출장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일은 일인데⋯⋯.”

“회사에선 내가 대장인 거 알지?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못 해.”

한건이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대장이라니. 무려 한호의 회장이면서 그렇게 귀엽고 아기자기한 칭호라니. 예하는 한건이 굳이 그런 단어를 고른 게, 저의 같잖은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하가 한건의 명치께에 붙은 흉터에다 코를 비볐다.

“그래, 그럼. 다시는 출장 가지 마.”

그는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가족으로서, 남편으로서, 반려자로서 이 정도 떼는 써도 될 것 같았다.

“응. 그럴게.”

한건이 곧장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예하가 슥슥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착해.”

“착하면 칭찬해줘야지. 상도 주고. 세현이네 유치원에선 스티커도 붙여주던데.”

“그래. 무슨 상줄까.”

“사랑한다고 해줘.”

“그게 상이야?”

“응.”

한건의 눈에 순진한 기대가 꼈다. 예하가 흐음, 목으로 신음하며 한건의 가슴 위로 턱을 괬다. 한건이 간식을 기다리는 개처럼 예하를 쳐다봤다. 얼른, 빨리, 사랑한다고, 해줘. 딱 그런 눈빛이었다.

예하가 한건의 손목을 쥐었다. 그 후 한건의 손바닥에, 손가락에 그리고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형.”

“고마워.”

한건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예하에게 사랑을 받는 매 순간이 기적이다. 결혼한 지가 어언 몇 년인데, 여전히 가슴이 벅찼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한건이 예하의 볼과 관자놀이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나도 사랑해.”

“응.”

“사랑해, 예하야.”

“응.”

한건은 아주 많이, 또 오래 사랑을 속삭였다. 예하가 대꾸해주다 지쳐서 가물가물 눈을 감을 정도였다. 한건이 이불을 추켜 올리고 그 채로 예하를 껴안았다.

예하가 익숙한 자세로 한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숨소리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한건은 오랫동안 잠든 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볼을 문질러보기도 했다. 그러다 그의 평온에 물들어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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