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건의 과거
세현을 안아 든 예하가 병원에 들어섰다. 한 달 만에 오는 병원이었다. 억제제를 맞아야 하는데, 카페가 바빠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닥터 유가 넉넉히 한 달은 괜찮다 해서 버티고 버티다 이제야 온 거였다.
예하와 한건, 두 사람이 애초에 약속한 가족계획은 아이 셋이었으나, 조금 미루기로 했다. 임신한 몸으로 일하는 걸 한건이 두고 볼 리도 없고. 낳은 후에도 문제였다.
낳기만 하면 한건이 키워주겠노라 말하긴 했다. 그러나 이제 막 태어난 갓난쟁이를 집에 두고 일을 한들, 손에 잡히겠는가. 그래서 이 년쯤 미루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히트사이클 와선 안 됐다. 저도, 한건도 이박삼일 눈 뒤집고 섹스만 해댈 게 뻔했으니까.
그래도 얼른 셋째를 보고 싶긴 한데. 찬하, 세현이와 나이 터울이 너무 벌어지면 서로 유대를 쌓기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고민에 빠진 예하가 로봇처럼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 세현이 탁탁 예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빠. 저기야.”
“⋯⋯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예하가 붕어처럼 되물었다.
“선샌님 방. 저긴데.”
세현이 방금 지나쳐온 진료실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에 닥터 유의 진료실이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예하가 빙글 몸을 돌렸다.
“고마워.”
예하가 슥슥 세현의 머리칼을 쓸며 진료실에 들어섰다. 똑똑 노크 후 문을 열자 앉아있던 닥터 유가 벌떡 일어나며 예하를 반겼다.
“예하 씨. 왔어요? 세현이도 안녕?”
“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이거.”
예하가 묵직한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카페에서 가져온 베이글이었다. 닥터 유는 여전히 이 병원에서 가장 바쁜 의사였으니까. 또 점심을 건너뛰었을 게 뻔했다.
“으아아아. 연어 베이글!”
그녀가 뒤꿈치를 들썩이며 베이글을 반겼다. 종이봉투에 얼굴을 처박은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예하가 느릿하게 소파에 앉았다.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세현이 고개를 쳐들고 눈을 맞춰왔다. 의사 선생님 이상해. 그런 말을 눈빛으로 쏴댔다. 예하가 검지를 세워 입술을 눌렀다.
쉿. 배고프면 다 그래.
한참 베이글 냄새를 들이켜던 닥터 유가 뒤늦게 진료를 시작했다. 진료랄 것도 없었다. 한두 번 하던 것도 아니고. 알코올 솜으로 소독하고, 주삿바늘을 쑤시고, 밴드를 붙이면 끝났다.
기다란 바늘이 예하의 팔로 다가갔다. 그때, 세현이 닥터 유를 불렀다.
“선샌님.”
“응?”
“우리 아빠 안 아프게 주사 놔주세요.”
풍성한 속눈썹이 깜빡깜빡 애처롭게 닥터 유를 올려다봤다. 닥터 유와 예하가 동시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예하가 세현의 정수리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럼. 선생님 엄청 똑똑한 사람이야. 주사쯤이야 안 아프게 놓을 수 있어.”
닥터 유가 가슴을 한껏 펼치며 으스댔다.
“피도 안 나게 해주세요.”
세현이 옳다구나, 하며 또 다른 부탁을 얹었다.
“⋯⋯응. 그건 노력해볼게.”
닥터 유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바늘을 찔러 넣었다. 약물을 투여하고 바늘을 뽑을 때쯤, 예하가 타이밍 좋게 세현의 눈을 가렸다. 피를 닦아낸 닥터 유가 얼른 밴드를 붙였다.
“짠! 봐봐. 선생님이 아빠 피 안 나게 주사 놔주셨다.”
손을 거둔 예하가 세현에게 팔을 내밀었다. 토끼 무늬 밴드가 방긋거렸다. 세현이 엄지로 조심히 밴드를 문질렀다.
“안 아펏써?”
“응. 하나도 안 아팠어.”
확고한 예하의 말에 세현이 닥터 유를 향해 꾸벅 목을 숙였다.
“고맙슴니다, 선샘님.”
“아휴, 아니야. 고맙긴 뭘.”
닥터 유가 깔깔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더니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책상 여기저기를 뒤진 그녀가 손바닥만 한 육면체를 들고 왔다. 예하와 세현의 시선이 그것에게 끌려갔다.
“이것 봐. 세현이 온다고 해서 선생님이 준비한 거야.”
“아빠 이게 뭐야-아?”
사각형을 받아든 세현이 예하를 보며 물었다. 반들반들하고 딱딱한 촉감이 영 어색했다. 고개를 쭉 내뺀 예하가 닥터 유의 선물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이거 큐브? 큐브 맞죠?”
색색의 작은 사각형이 줄지어 붙어 있는 큐브였다. 예하에게도 생경한 물건이다. 미디어에서 본 적은 있으나 실제로 만져본 적은 없었다.
“맞아요. 세현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봐봐. 이렇게, 이렇게, 돌려서 같은 색깔끼리 맞추는 거야.”
닥터 유가 손가락을 놀리자 뚝딱뚝딱 금세 노란색 면이 맞춰졌다. 그러자 개나리 빛 나비 홀로그램이 퐁, 하고 튀어나와 날갯짓했다.
세현의 눈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한건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사줬지만, 거기에 큐브는 없었다. 세현이 인형 놀이나 모래 놀이처럼 무언가를 가지고 노는 걸 썩 즐기지 않았던 터라.
하지만 큐브는 조금 다른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퍼즐이나 수학에 가까웠다.
세현이 작은 손으로 조물조물 큐브를 만지기 시작했다. 목까지 푹 고꾸라트리고 한껏 집중했다.
“이거 좋아하는 거 맞죠?”
닥터 유가 예하에게 물었다. 예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네. 맞아요. 이런 거 주면 다 풀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해요. 문 집사 말로는 한건이 형도 어렸을 때 그랬대요.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몰랐을 거래요.”
예하가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닥터 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듣고 보니 최 회장님 어렸을 때도 궁금하네요.”
“어⋯⋯ 그러게요. 어렸을 때 사진 같은 게 있으려나.”
“있지 않을까요? 유명인사였으니까 파파라치에 찍힌 사진이 있을 거예요.”
호오. 예하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해 보였다. 실천은 바로였다. 태블릿 바를 꺼내든 예하가 한건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기사 사진밖에 뜨지 않았다. 한호 그룹 최한건 회장 결혼, 한호 그룹 최 회장 오메가와 결혼, 회장 취임식 중인 최한건 회장, 등등의 제목을 단 사진들이었다.
“으음⋯⋯. 안 나오네요. 직접 물어봐야 하나?”
“회장님은 그런 걸 따로 보관하고 계실 성격이 아니신데.”
“아무래도 그렇죠?”
“최한건 과거, 그렇게 검색해봐요. 모름지기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한 건 오래 남는 법이니까.”
닥터 유의 말에 이번엔 최한건 과거를 검색했다. 전과는 사뭇 다른 사진들이 떠올랐다. 익숙한 사진도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 모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이십 대 초반의 사진이 있었는데, 단단하게 굳은 표정이며 냉소적인 분위기며 지금과 다른 점이 없었다.
예하도, 닥터 유도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재미있는 게, 그러니까 놀릴 만한 흑역사가 있을 줄 알았거늘. 하긴, 스미스를 관리하는 게 한건인데 그런 걸 남겨놓는 것도 이상했다.
흥미를 잃은 예하가 무감한 낯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곳에서 멈춰섰다. 낯선 사진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리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예하의 입꼬리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의 검지가 허공을 나돌며 머뭇거렸다. 그러다 꾸욱 사진을 터치했다. 작던 사진이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
“⋯⋯.”
진료실 위로 자욱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하도, 닥터 유도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건과 어떤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검은 생머리의 여자가 트랜지션에서 내리고 있었고, 한건은 트랜지션 문 앞에 서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사진은 연사로 찍혀 짧은 동영상처럼 끊임없이 움직였는데, 마지막 프레임은 마주 잡은 손을 확대한 장면이었다.
한건의 크고 단단한 손과,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진 여자의 손이 틈 없이 맞물려 있었다.
“⋯⋯예, 옛날이겠죠? 아니, 과거니까 당연히 옛날이겠지.”
닥터 유가 더듬더듬 예하를 위로하려다 실패했다. 예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사진을 이리저리 움직여 뉴스 기사를 확인했다. 몹시 오래전 기사였다. 예하와 한건의 첫 만남이 있기 4년 전이었다.
[한호 그룹 최한건 이사, 성산 그룹 정다슬 상무과 핑크빛 데이트]
참으로 적나라한 제목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예하가 길지 않은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었다. 데이트. 데이트⋯⋯. 그것도 핑크빛 데이트⋯⋯. 핑크빛 데이트가 뭔데. 뭐 하나 분홍색인 게 없는데 어디가 핑크빛이라는 건데.
“에이, 그때면 뭐⋯⋯.”
닥터 유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슬쩍 홀로그램을 밀어 꺼버렸다. 하지만 예하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에 있던 일이다. 저를 만나기 한참 전 일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데이트도 할 수 있지. 사랑도 할 수 있고, 연애도 할 수 있지. 저를 만나기 전인데,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을 시긴데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역류할 것 같았다. 치미는 배신감에 눈앞이 다 아득해졌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한건은 분명 제가 첫 연애라 했다. 설마, 그마저도 숱한 거짓말 중 하나였던 걸까.
저는 뭐 하나 그가 처음이 아닌 게 없는데! 예하가 거세게 콧김을 내뿜었다. 머리 위로 뿔이 솟는 듯했다.
“예하 씨, 잠깐만. 진정 좀⋯⋯.”
“이 개새끼⋯⋯.”
“어우, 예하 씨. 세현이도 있는데!”
기겁한 닥터 유가 세현의 양손으로 세현의 귀를 막았다. 그때, 예하의 손목시계가 반짝였다.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한건의 메시지였다. 썩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미끈하게 빠진 트랜지션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온 한건이 세현을 받아 들었다. 여전히 큐브에 빠진 그녀는 자신을 안은 게 예하인지, 한건인지 아니면 괴한인지 구분조차 못 하는 듯했다.
한건이 예하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예하가 인형처럼 텁텁한 얼굴로 그의 키스를 받아냈다.
“닥터 유가 뭐래?”
“별말 없었어.”
“근데 이렇게 오래 있었어?”
“수다 떨었지. 오랜만에 만났잖아.”
예하가 무표정한 낯으로 트랜지션에 올라탔다. 묘하게 시린 분위기가 맴돈다. 그 모르게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가 편 한건이 예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트랜지션이 소음 하나 없이 위로 떠올랐다. 예하는 뭐 그리 대단한 풍경이라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병원 온 거 한 달 만이지?”
“응. 그동안 바빴으니까.”
“⋯⋯카페 좀 덜 나가면 안 돼? 차고 넘치는 게 돈인데 무슨 일을 그렇게 죽자고 해?”
한건이 예하의 뒤통수에다 대고 불만을 토해냈다. 그 나름대로 참고 참다가 표하는 불만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꼬박 일 년을 참았다. 예하가 하고 싶다니까. 하지만 병원도 못 갈 정도로 바쁜 건 영 아니꼬웠다.
“재미있잖아. 그리고 주말엔 안 나가는데, 뭐.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창문에 부딪힌 예하의 음성이 유달리 탁하게 들렸다. 이런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선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한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저보다 예하를 위한 것이니까. 반드시 조율해야 했다.
“주말엔 애들이랑 놀잖아. 너는 언제 쉬어.”
“형도 안 쉬면서.”
“나야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 말에 예하가 팩 고개를 돌렸다.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할게.”
매섭게 말이 튀어나갔다. 트랜지션 안이 대번에 싸늘하게 식었다. 한건의 진한 눈썹이 가파른 경사를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유한 곡선을 유지하던 예하의 기분이 갑자기 왜 곤두박질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건이 제 허벅지 위에 앉아있는 세현을 살폈다. 무언가 힌트가 있을까 해서. 하지만 큐브에 빠진 세현은 아빠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든, 총질하며 싸우든 하등 관심이 없는 듯했다.
트랜지션은 한참 동안 정적만 끌어안은 채 비행했다. 예하는 뒤통수로 진득이 박혀오는 한건의 시선을 알았으나 꿈쩍도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의 머리칼을 죄다 쥐어뜯고, 가슴팍에 총알구멍도 하나 더 내주고 싶었다.
나는 아르바이트생 땀도 닦아주지 말라고 화를 내더니. 자기는 데이트를 해? 그것도 핑크빛 데이트? 되뇌었더니 또 짜증이 났다. 예하가 콱콱 바닥을 찼다. 트랜지션이 뻥 뚫려 그대로 하늘로 나부끼면 차라리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았다.
창밖으로 익숙한 집이 보였다. 한건과 같이 들어가서, 같이 저녁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잘 걸 예감했더니 속이 다 메슥거렸다.
그때, 진료실을 나서기 전, 닥터 유가 소리치듯 말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꼭 회장님이랑 대화해 보세요! 알았죠? 혼자 마음 졸이지 말고.’
‘⋯⋯글쎄요.’
‘두 분, 이제 부부잖아요. 그런 건 함께 토론하면서 답을 찾아가야죠.’
예하가 흘끔 한건을 살폈다. 중지로 눈썹뼈를 문지르고 있는 모습이 그 역시 예하의 분노에 물든 듯했다.
“형.”
“⋯⋯.”
“세현이 데려다주고 나랑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자.”
그 말에 한건의 눈가가 살짝 어그러졌다. 예하가 이렇게 제대로 판까지 깔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건 처음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한건이 세현을 추슬러 안았다.
“집에선 못 할 이야기야?”
“애들 앞에서 엄한 꼴 보이기 싫어서 그래.”
예하가 시리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퍽 무서운 예고다. 크게 화를 낼 테니 알아서 준비하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한건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유 모를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한마디 말로 한건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는 건, 예하뿐이었다.
야경이 멋진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어서 가족끼리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기껏 시켜놓은 음식들이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한건은 예하가 먼저 말문을 틀 때까지 기다렸다. 예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무엇을 알았는지 차마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다. 한건이 알기로 오늘 예하에겐 특별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도.
“형.”
예하는 엉덩이가 배길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응.”
한건이 가볍게 대답했다.
“형 나한테 내가 첫 연애라고 했었던 거 기억나?”
“그럼.”
“그거 혹시 거짓말이었어?”
“뭐. 첫 연애가 넌 거?”
“응.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나한테 아빠를 찾아주겠다느니, 첫눈에 반했다느니, 사랑하던 오메가가 죽었다느니 했던 것처럼. 그런 거짓말이었냐고.”
뜬금없는 옛날이야기에 한건이 코를 찡긋거렸다. 과거를 들췄을 때, 한건은 당당한 게 하나도 없었다.
저를 보고 비명을 지르던 예하. 울부짖는 예하. 심장이 멈췄던 예하.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예하. 무너지는 예하. 아픈 예하. 모두 한건의 죄였으니까.
늘 상기하고 있는 기억이다. 잊으면 안 되는 기억이기도 했다. 그래야 제 주제를 알고 예하의 발밑에 있을 수 있으니.
헌데 ‘첫 연애’라는 주제는 조금 뜻밖이었다. 그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점이 뭐가 있나. 생각해봐도 퍼뜩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한건의 침묵이 의도치 않게 길어졌다. 예하가 미적지근해진 와인을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목이 탔다.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려 하는데, 한건이 대신 술을 따랐다.
“그건 다 거짓이 맞지만, 네가 첫 연애라는 건 거짓이 아니었는데.”
목적 없는 연락과 썸, 그리고 주기적인 만남, 쓸데없는 안부 인사. 뭐 하나 서툴지 않은 게 없었다. 덕분에 지극히 혐오하던 로맨스 영화와 로맨스 소설까지 읽었거늘. 예하가 왜 그런 의심을 하는지 모르겠다.
담담한 한건의 말에 예하가 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끄집어냈다. 닥터 유와 보던 창이 그대로 떠올랐다. 한건의 핑크빛 데이트가 쓰인 기사였다.
“그럼 이건 뭔데?”
한건의 눈이 슬핏 가늘어졌다. 몹시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다. 필요 없는 기억이라 완전히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사진이네.”
한건이 참으로 무감하게 답했다.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예하가 쾅,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충격에 접시들이 달달달 경련했다. 한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사진이라서 사진이라 했는데, 그게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하와의 대화는 겪어도 겪어도 어렵다.
“아, 선봤을 때 찍힌 사진.”
“서-언? 선을 봤다고?”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안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금방이라도 눈알이 굴러떨어질 듯했다. 그냥 데이트도 아니고, 무려 선이었다니. 선이라 하면 모름지기 결혼을 전제하에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한건은 이리도 무감할 수 있는 건가. 어이가 없었다. 뒤통수가 거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려왔다.
그쯤, 한건은 예하의 기분이 왜 바닥을 쳤는지 눈치챘다. 어디서 어떻게 어쩌다 본 건지 모를 저 사진 때문이리라. 첫 연애가 자신이 아니라 사진 속의 여자라 오해했겠지.
화가 날 만도 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한건은 아마 눈 뒤집고 온갖 패악을 일삼았을 터였다. 아니면 질투로 속앓이를 하다가 내장이 비비 꼬여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사장으로 승진시켜준다고 했거든.”
한건이 잔잔한 음성으로 변명을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래서 홀랑 나갔어?”
“응.”
경영에 막 발을 들인 참이었다. 권력에 목말랐고, 일에 욕심이 많았다. 춘헌은 뭐 하나 그냥 주는 게 없었다.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그에 응하는 보상이 주어졌다. 선 역시 그런 꼭두각시놀이의 단막에 불과했다.
“뭐 잘 맞았으면 결혼까지 했을 수도 있겠네?”
옴팡지게 팔짱을 낀 예하가 한껏 비아냥댔다. 한건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음⋯⋯. 그건 아마 아닐 거야. 결혼 생각이 없었던 때라.”
결혼을 가늠해본 적도, 꿈꿔본 적도, 바란 적도 없었다. 예하를 만나고서야 가능성을 열어둔 부분이다. 앞서 말했듯, 그때는 권력과 일에 대한 욕심뿐이었다.
뭐, 춘헌이 회사를 주겠다는 전제로 결혼을 깔았다면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지금 밝혀봐야 하등 도움이 안 될 듯하니 숨겨두자.
“결혼할 것도 아닌데 선을 왜 봤어?”
예하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범죄자를 취재하는 형사 같은 자세였다. 말똥말똥하게 치켜뜬 눈이 짜증 내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귀여워라. 한건이 볼 안쪽을 지그시 씹어 치솟는 미소를 삼켰다.
“주가 상승에 도움이 되니까.”
“무슨 선이 주가 상승에 도움이 돼?”
“한호와 성산이 합친다는 소문이 돌면 당연히 주가가 오르지. 대기업과 대기업이 전략적으로 함께 가겠다는 건데.”
“⋯⋯.”
따박따박 쏟아지던 예하의 질문이 뚝 멎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건은 사진 속의 여자와 선을 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저 하나의 비즈니스에 불과했던 거다. 미팅을 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만남.
한건이 테이블 위로 예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어. 저것도 회사에서 고용한 파파라치한테 보여주기 위해 연기했을 뿐이야.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 아마 저쪽도 그럴걸.”
한건이 턱짓으로 사진 속의 여자를 가리켰다. 솔직히 이름은 알았다. 그 후로도 사업상 이래저래 부딪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한건처럼 일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공적인 일을 떠난 대화는 단 한마디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진짜야?”
예하가 턱을 당기고 뾰족한 시선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한건이 망설임 없이,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가 확인받고 싶은 건 사랑이다. 그리고 한건은 그가 차고 넘치게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충만하다 못해 터질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끝까지 너뿐이었고, 너뿐일 거야.”
몹시 예하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예하가 팔짱을 풀었다. 그런데도 뒤틀린 입꼬리는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심사가 꼬여 있는데, 짜증 낼 명분이 없으니 입술만 부루퉁히 내밀고 있는 거다.
한건이 슬핏 미소를 흘렸다.
“고작 이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어?”
“고작이라고? 당연히 짜증 나지! 나는 뭐 하나 형이 처음이 아닌 게 없는데!”
눈을 잔뜩 홉뜬 예하가 씩씩거리며 신경질을 냈다. 이건 결코 고작이 아니다. 만약 한건이 ‘그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진지하게 만났었다’라고 실토하면 찬하와 세현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 잠적할 생각까지 했단 말이다. 그만큼 중대한 일이었다.
한건이 구겨졌다 펴졌다, 또 구겨지길 반복하는 예하의 얼굴을 기껍게 구경했다. 질투하는 강예하. 흔치 않은 모습이라 즐겁기 그지없었다.
한건이 예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마른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런 쪽으로는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뭐 하나 네가 처음이 아닌 게 없으니까.”
“⋯⋯.”
“첫사랑도 너고, 첫 연애도 너고, 첫 결혼도 너야.”
“⋯⋯.”
“끝도 너겠지.”
한건이 예하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한 치의 거짓도 가미되지 않은 진심이었다. 예하는 분명 저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의 손에 죽겠다고 대신 총까지 맞았는데, 아닌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
예하는 아무런 말 없이 한건의 냄새만 들이켜고 있었다.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를 보듬어 안았다. 이렇게 체온을 마주하고 있는 게 예하에게 얼마나 큰 안정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단하게 뭉쳐있던 예하의 승모근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괜찮아?”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로소 포크를 들었다. 종일 굶었더니 허기가 졌다. 역시, 한건의 페로몬만큼 좋은 약이 없다. 그러나 다 식어 기름이 뻑뻑하게 굳은 고깃덩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감퇴시켰다.
한건이 직원을 불러 테이블을 치우고 모든 메뉴를 새로이 주문했다. 예하가 와인도 더 먹고 싶다며 한건의 귀에 종알종알 속삭였다.
테이블이 따뜻한 접시들로 가득 차고, 두 사람은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그 사진은 어쩌다 찾았어?”
한건이 예하 몫의 고기를 썰며 물었다.
“아, 문득 형 어릴 때 모습이 궁금해서. 세현이랑 똑 닮았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래저래 찾아보다가 우연히 본 거야.”
부지런히 움직이던 한건의 칼질이 잠깐 멈췄다.
“⋯⋯남편 과거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뭐 어때. 남편이 유명인이면 그럴 수도 있지.”
예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리고는 한건이 잘라놓은 고깃덩이를 앙 입에 물었다. 입안 가득 터지는 육즙에 기분이 붕 떠올랐다. 또 하나는 한건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조심해. 형이 내 뒷조사하듯이 나도 형 뒷조사할 거야. 시간 날 때마다. 매일.”
예하가 장난스레 협박 아닌 협박을 내놓았다. 한건이 얼마든지 그러라며 코웃음을 쳤다. 예하가 찾는 게 경영 관련 비리나 범법 행위가 아니라, 사랑에 국한된 정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떳떳했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엔 예하의 광대가 술기운에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 채로 수플레를 퍼먹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만면에 미소를 띤 한건이 엄지로 슥슥 그 광대를 문질렀다.
“형.”
한참 수플레를 먹던 예하가 한건을 쳐다봤다.
“응.”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문 집사님이 애들 벌써 잠들었대.”
예하가 슬쩍 홀로그램을 들어 보여줬다. 각자 침대에서 자는 찬하와 세현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한건이 홀로그램과 예하를 번갈아 봤다. 여기, 라 하면 설마 레스토랑은 아닐 거고, 호텔을 말하는 걸까. 자고 가자는 건, 제가 생각하는 그것을 포함한 수면이 맞을까.
예하가 턱을 쳐들고 한건의 귓가로 다가왔다. 한건이 한쪽 어깨를 내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오늘 호르몬 억제제 맞아서 콘돔 안 해도 되는데.”
나지막이 속삭여지는 말에 한건은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하얗게 점멸했다가 또 붉어졌다가 갠 눈앞에 예하의 말간 얼굴이 들어찼다.
잠깐 굳어있던 한건이 예하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안 되겠어. 일주일 내내 자도 돼. 이 호텔 사줄 수도 있어.”
그 말에 예하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룸을 잡기 위해 로비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침대에 엎어진 예하가 색색 가쁜 숨을 골랐다. 느긋하게 샤워까지 했는데, 정사의 여파가 여태 폐에 들러붙어 있었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새벽이 밀려왔다. 저는 간신히 한건의 품에서 벗어나 이제야 잘 준비를 하거늘, 벌써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해가 꼴 보기 싫어 리모컨으로 커튼을 쳐버렸다.
그쯤, 손바닥만 한 드라이기를 든 한건이 침대로 다가왔다. 욕실에 바디 건조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예하가 더 이상은 못 서 있겠다며 나가버려 손수 드라이기를 들고 온 거였다.
뜨끈한 바람이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두피와 목덜미를 스치는 온기에 뭉근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괜히⋯⋯ 여기서⋯⋯ 자자 그랬어⋯⋯.”
예하가 쓰라린 목젖으로 꾸역꾸역 말을 만들어냈다. 쇳소리가 잔뜩 낀 음성은 그가 근 몇 시간 동안 내지른 비명 같은 신음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무래도 집에 아이들이 있으니 격한 스킨십이 어려웠다. 궁핍한 접촉에 저도 몸이 달 때로 달아있었던 터라 패기 넘치게 덤비긴 했는데, 역시나 실수였던 모양이다. 사타구니와 둔부, 그리고 말 못 할 그곳, 단단히 잡혔던 골반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잇자국이 낭자한 자신의 손목을 보던 예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최한건은 나이가 얼마나 더 들어야 이 불타는 정력이 한풀 꺾이려나.
그러나 한건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드문드문 발갛게 익은 예하의 엉덩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하의 머리칼이 민들레 씨처럼 가볍게 일렁이고, 드라이기를 제자리에 둔 한건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예하가 꾸물꾸물 허리를 뒤틀어 그의 품에 안겼다. 한건이 익숙하게 그를 보듬어 안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김상필 안 찾네.”
한건이 오랜만에 늙은 얼굴 하나를 상기했다. 결혼하기 전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그의 병실을 들렀던 예한데, 요즘은 들르긴커녕, 언급조차 없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도 싸고돌더니 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걸까.
“응. 나 이제 그 사람 미워.”
“⋯⋯.”
예하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김상필. 기억에서 묻고, 마음에도 묻어버린 이름이다. 제 멱살을 쥐고 알파와 돈을 운운하던 그의 얼굴이 그릴 수 있을 만큼이나 선명하지만, 그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쏟아지던 악취가 아직 코에 아른거리지만, 잊는 중이었고, 잊을 것이었다.
몸을 뒤집은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턱을 괬다. 동그란 눈동자에 슬픔과 후련함이 공존했다.
“내가 애 키워보니까 알겠더라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나 어렸을 때 되게 예뻤을 것 같지 않아? 엄청 귀여웠을 텐데.”
꽃받침을 만든 예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팔랑 예쁘게도 움직였다. 한건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예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럼. 예쁘지. 세현이보다 더 예뻤을 거야.”
“에이, 그건 아니야. 세현이가 더 예뻐.”
절대적으로 딸을 우위에 두는 예하에 한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하든, 세현이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쁜 건 같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아무튼, 내가 그렇게 예쁜데도 방치했다는 건 그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미워.”
“⋯⋯.”
“그래도 뭐⋯⋯. 병원 쓰레기통에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나를 살려준 사람이니까. 치료는 받게 해줄 거야. 그렇게 좋아하는 돈도 줄 거고. 줘 봐야 쓸 수 있을 만큼 회복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다야.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없어.”
예하가 다짐하듯 말했다. 한건의 입장에선 퍽 기특한 다짐이었다. 한건이 칭찬하듯 예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예하가 고양이처럼 목으로 신음했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몸 위로 올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끼리 겹쳐지는 건 포옹을 넘어선 유대감을 창조한다.
“형네 아버지는?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네.”
예하가 한건의 명치에 나 있는 흉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한건이 상필 만큼이나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얼굴을 반추했다.
“⋯⋯잘살고 있지. 안타깝게도.”
참, 쓸데없을 정도로 건강한 아버지다. 지금도 섬에 박혀 가짜 오메가의 엉덩이를 빨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그것만큼 그 다운 죽음도 없을 텐데. 아직 들려오는 비보가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도 만족했다. 예하에게 손을 뻗치지 않고,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니 신경 쓸 일이 극히 줄었다.
이따금 성 실장에게 손주들이 보고 싶다느니, 어째 멀쩡히 살아있는 할아버지에게 인사 한 번 안 오냐느니, 따위의 요구를 한다는데, 한 번도 답해준 적이 없었다. 만약 아이들에게 손을 대면 망설임 없이 패륜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형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야?”
예하가 물었다. 자신을 태성에게 넘기고, 한건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임을 알지만, 형체가 잡히지 않은 사람이라 미워하고 원망하지도 못했다.
한건이 씁쓸하게 웃었다.
“응. 나만큼.”
“⋯⋯.”
덤덤한 대답에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차마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부정 역시 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건은 정말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저에겐 유달리 더 나쁜 사람이었고.
예하는 한건이 아직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저 역시 그랬다. 하지만 저는 잊으려고 노력한다. 허나 한건은 꾸역꾸역 모든 순간을 되뇌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예하는 지금까지 그런 한건을 방관해왔다.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자처해서 받겠다는데, 구태여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옆을 지키고 있노라면 안쓰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은 이제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아.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니까 다⋯⋯ 괜찮아.”
예하가 한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가 혀를 내어 핥기도 했다. 허리를 감싼 한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혀가 금세 깊게 얽혔다. 타액이 넘나들고, 입술이 씹혔다.
한건이 척척하게 젖은 예하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냈다.
“예하야.”
“응.”
“내가 잘할게.”
“⋯⋯지금도 잘하고 있어.”
예하가 슬핏 웃으며 한건의 턱을 매만졌다. 두툼하게 도드라진 목젖도 만지고, 곧게 뻗은 쇄골도 만졌다. 마지막으로 왼쪽 가슴팍 위에 손을 얹었다. 박동하는 심장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한건의 가슴에 묻혀있지만, 제 것과 다름없는 심장이었다.
언제든 마음대로 주무르고 터트리고 짓밟을 수 있는 심장. 그래서 보듬어주고 싶은 심장이다. 이 심장이 제 곁에서 되는대로 오래, 또 세차게 뛰었으면 했다.
“그럼 더 잘할게.”
한건이 예하의 관자놀이에 꾹, 입술을 눌렀다.
“그래. 두고 볼 거야.”
예하가 해사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두고 봐주겠다는 말이 얼마나 너그러운 말인지 타인은 절대 모를 터였다. 한건이 그를 따라 웃었다.
수더분한 밤, 아니,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