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29/33)

네 가족

“사장님.”

장갑을 끼고 화단을 정리하던 예하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두 손을 단전 아래에 곱게 모은 매니저가 면구하다는 낯으로 서 있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울상인지, 예하는 대번에 어떠한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효주가 접시를 또⋯⋯.”

“또?”

예하의 눈썹이 움찔, 경련했다. 한 달 전에 뽑은 알바생이 영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만 사고를 쳤다. 접시를 깬다거나, 음료를 잘못 가져다준다거나. 뭐 이런 건 괜찮은데, 고가의 커피 머신을 고장 낸다거나, 천 크레딧을 만 크레딧으로 계산해서 손님을 놀라게 한다거나, 파우더 통을 엎는다거나, 물에 녹지 않는 원두 찌꺼기를 변기에 때려 넣어 화장실을 못 쓰게 하기도 했다. 아무튼, 창의적으로 사고를 쳐대는 알바생이었다.

한 달 동안 있었던 사고를 되뇌던 예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안 맞나. 아니면 카페에 불만이 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친 사람 있어요? 효주나, 손님이나.”

“없습니다.”

“그럼 얼른 정리하고 효주 좀 불러줄래요?”

“네.”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매니저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예하는 오픈한 지 일 년 된 카페의 사장이었다. A 섹터 한가운데, 그러니까 한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에 위치한 이곳은 3층짜리 대형 카페였다. 1층에서 3층까지를 통으로 뚫어 10m가 훌쩍 넘는 나무를 들여놓았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육각형 형태의 정원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테이블들이 있는 이색적인 정원 겸 카페.

테이블마다 작은 화분이 놓여있었으며 1층엔 야트막한 개울이, 3층엔 테라스 형태의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마치 유명 왕실 정원에서 티를 마시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한마디로 극상의 호화로움에 서 있는 카페였다.

카페 라테와 밀크티가 유명했으며, 꽃과 식물을 모티브로 한 3단 디저트 트레이 역시 인기가 많았다.

모두 수제로 만들어졌는데, 예하가 하는 거라곤 전반적인 카페 관리, 커피 내리기, 설거지(이마저도 식기세척기가 하고 로봇이 옮긴다), 정원 정리 정도였다. 고급 음료나 디저트는 한건의 도움을 받아 고용한 바리스타와 파티시에들이 제조했다. 예하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문가들의 실력을 따라갈 순 없었기 때문에.

축 늘어진 식물에 지지대를 설치하는 예하 옆으로 인영 하나가 다가왔다. 예하가 흘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다시 식물에 집중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없는 것 같아요.”

효주가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다친 곳이 없으면 없고 있으면 있는 거지, 없는 것 같다는 뭐란 말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효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접시 배상할게요. 제 월급에서 까세요.”

예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카페에서 쓰는 거 되게 비싼 접신데. 얼만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니요.”

“나 돈 많은 거 알죠?”

“⋯⋯.”

갑작스러운 돈 자랑에 효주의 입꼬리가 마뜩잖게 뒤틀렸다. 그런 효주를 본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젊은 애가 귀엽게 보이다니. 저도 늙었나. 이제 서른 좀 넘었는데 벌써 아저씨가 됐나. 그런 생각을 했다.

“알죠. 세상 사람이 다 알죠. 사장님 돈 많은 거.”

효주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예하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나는 물어내라고 할 생각이 없는데 왜 혼자 거기까지 나가.”

“⋯⋯그럼 왜 부르셨는데요?”

“다쳤나, 안 다쳤나 궁금해서요.”

“⋯⋯.”

“놀랐겠다. 우리 카페 접시가 예쁘긴 한데, 내구성은 참 별로예요, 그렇죠?”

“⋯⋯.”

“조금만 조심히 대해줘요.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주문하기가 너무 귀찮아. 그거 어엄-청 유명한 사람이 하나하나 만드는 거라서 시간도 오래 걸리거든.”

예하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종알종알 이었다. 듣는 이는 답이 없었다. 일을 마친 예하가 탈탈 손을 털며 일어났다. 장갑을 벗은 그가 효주를 바라봤다.

“윤 파티시에한테 가서 에끌레르 하나 달라고 해요. 놀랐을 테니까 그거 먹고,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예하가 이만 가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지척에 버티고 선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뭐해요? 안 가고?”

“진짜 이게 다예요?”

“응?”

“왜 안 혼내세요?”

“에이⋯⋯, 이런 실수는 혼낸다고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내가 애가 둘이라서 잘 알아요.”

예하가 익살맞게 눈살을 구겼다. 머신 사용법을 익힐 줄 모른다거나, 음료에 정해진 컵을 매치시키지 못한다거나 하는 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접시를 깨트린 건 말 그대로 실수니까. 그런 걸 일일이 혼내기엔 카페에 일이 너무 많았다.

“⋯⋯감사합니다.”

예하를 빤히 바라보던 효주가 기어들어 가듯, 사과 아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예하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깨 놓고도 놀랐겠거니, 싶었다. 윽박질러봐야 서로 짜증만 날 테고. 일은 못하지만 열심히는 하니까 곧 나아지겠지.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뱉은 예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또 손 볼 식물이 있나 관찰하는 거였다. 그때, 매니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최 회장님 오셨어요.”

그 말에 예하의 만면 가득 웃음이 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흙 묻은 장갑을 앞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예하가 신나게 발을 옮겼다.

3층으로 올라가자 막 트랜지션 주차장에서 내려오는 한건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양쪽 손을 쥔 큰 애와 작은 애까지. 광대를 한껏 올린 예하가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자그마한 두 사람이 온몸으로 안겨 왔다.

“아-아빠아!”

“아빠!”

이제 아홉 살이 된 첫째 찬하와 네 살이 된 둘째 세현이었다. 그들을 한아름 끌어안은 예하가 말랑한 볼을 마구 비볐다. 헤어진 지 고작 여덟 시간밖에 안 됐는데 일 년쯤 떨어져 있던 것처럼 반가웠다. 아이들 특유의 고소한 냄새에 저절로 웃음이 스며 나왔다.

“오늘 학교 재미있었어?”

“응. 완전!”

찬하가 커다란 눈을 살풋 접으며 대답했다. 예하가 기특하다는 듯 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세현이는 유치원 재미있었어?”

이번에는 세현에게 물었다.

“나쁘지 않았써.”

한건을 꼭 닮은 눈매의 세현이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귀 뒤에 꽂으며 답했다. 예하가 기쁘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쪽 입술을 부딪쳤다. 별로였어. 별로. 싫어. 재미없었어. 시시했어. 유치해, 라는 대답이 대부분인데, ‘나쁘지 않았어’ 정도면 최상급이었다. 모래 놀이나 노래 부르기 말고, 수학 문제라도 푼 모양이다.

“아빠는 오늘 재미이써써?”

세현이 물었다. 그녀는 놀라운 성장 속도를 보이던 찬하보다 훨씬 더 빨리 말을 익혔다. 아무리 알파라도 그렇지. 이 정도면 천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어찌나 조숙한지. 덩치만 아니면 찬하보다 누나 같았다. 얼굴만 한건을 빼다 박은 게 아니라 성격도 그랬다. 한건의 어릴 적 모습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응. 아빠는 늘 재미있지. 우리 딸 배는 안 고파?”

“나 체리 에이드.”

“좋아. 찬하는?”

“나는 베이글. 크림치즈 넣어서!”

“알았어. 2층 가 있으면 아빠가 금방 만들어서 갈게.”

그 말에 찬하가 세현의 손을 꼬옥 잡았다. 무표정으로 찬하에게 손을 내어준 세현이 그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2층에는 가족을 위한 프라이빗 룸이 따로 만들어져있었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던 예하가 비로소 한건에게 시선을 던졌다.

“왔어?”

“응.”

“형은 오늘 일 재미있었어?”

예하가 익살맞게 물으며 한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욱이 풍겨오는 한건의 냄새에 피로가 싹 가셨다.

“그럴 리가.”

한건이 단단하게 굳은 표정으로 부정을 내놓았다. 연한 피곤이 낀 얼굴에 예하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듯 한건의 턱을 매만졌다.

“나 장사 잘되는데, 회사 관두고 카페에서 알바할래?”

장난기 넘치는 예하의 말에 한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일 안 하고 네 뒤만 쫓아다닐 건데. 감당할 수 있겠어?”

“듬직하니 좋겠네. 힘도 세고. 얼굴도 잘생겼고. 이만하면 우수하지.”

한건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 예하의 옆에 붙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찬하와 세현이 한호를 물려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정점에 서 있는 한호를 지켜야 했다. 아니. 지금보다 더 크고, 더 대단한 한호를 물려주고 싶었다. 그 후에 느긋한 시간을 보내도 늦지 않다.

“형은 뭐 먹고 싶어?”

한건의 가슴팍에 턱을 대고 목을 쳐든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네가 내린 커피.”

이제 누구보다 한건의 취향을 꿰고 있는 예하라 커피는 기가 막히게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예하가 자신 있다는 듯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한건이 참지 못하고 예하의 볼과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어욱, 여기 카페거든!”

기겁한 예하가 한건을 밀어냈다. 한건이 한호의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오메가와의 결혼’과 ‘알파 자식 둘’까지 공공연히 밝혀졌으나, 애정행각을 드러내는 건 아직 불편했다.

“뭐 어때. 저기 기자도 있는데. 오랜만에 사이좋은 한호 家의 모습 한번 보여주지 뭐.”

한건이 구석진 곳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여성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한건이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태블릿 바를 화분 뒤에 세우고 있는 꼴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초짜 기자인 듯했다. 제 회사가 만든 태블릿 바를 들고 저를 도촬하다니. 참으로 괘씸하지 않은가.

“기자? 어디? 아우. 한동안 안 보이더니.”

예하가 아니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나름 커피까지 시키고 앉은 손님인데 쫓아낼 수도 없고.

처음 카페를 오픈했을 땐 손님 반, 기자 반이었다. 또 그 기자 중엔 한호의 오메가를 캐기 위해 온 이가 반, 한건의 지극한 오메가 사랑을 캐기 위해 온 이가 반이었다. 그래도 상도덕은 있는지 커피나 디저트를 하나씩 시켜서 무어라 말은 못 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마 한건이 몰래 손을 썼으리라 가늠만 할 뿐이었다.

“얼른 내려가자. 얼른.”

치를 떤 예하가 한건의 손을 끌었다. 한건이 큭큭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 * *

한건이 느슨하게 풀어놨던 타이를 졸라맸다. 어째 사업상 바이어를 만나는 것보다 세현의 유치원 선생님을 만나는 게 더 떨렸다.

차창 너머로 개나리색 유리를 두른 유치원이 보였다. 폭죽이나 블록 따위가 팡팡 터지는 홀로그램은 볼 때마다 속이 다 시끄러웠다.

사실 처음부터 세현을 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세상에 좋은 선생이 얼마나 많은데. 돈 주고 집에서 시키면 되지. 그리고 알파의 인생에 선생이라는 존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책 두어 권만 던져줘도 알아서 지식을 쌓는 게 알파였으니까.

하지만 예하가 극구 반대했다. 그도, 저도 둘 다 사회성이 영 떨어지니 아이들이라도 타인과 부대끼며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건은 딱히 동의하지 않았으나 근래 육아 서적이란 서적은 죄다 독파 중인 예하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그래서 지금은 찬하는 초등학교에, 세현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트랜지션에서 내리니 야트막한 담장에 걸터앉아있는 세현이 보였다. 한건이 슈트 재킷을 벗으며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재킷으로 세현을 꽁꽁 여몄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가을바람이 제법 매섭다. 한건이 두 손으로 세현의 볼을 감쌌다. 따끈한 게 다행히 찬기는 없었다.

“아빠 쪼끔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시퍼서.”

세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한건이 잠시 넋을 잃었다. 이리 사랑스러운 말을, 이리 무감하게 말할 수 있다니. 제 딸이지만 참으로 신비로웠다.

“오셨어요, 세현이 아버님.”

세현의 뒤에 서 있던 유치원 교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한건이 덩달아 허리를 굽혔다.

“예.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세현이만큼 얌전한 애가 어디 있다고. 근데⋯⋯.”

교사가 말끝을 흐렸다. 세현을 안아 든 한건이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괜히 심장이 펄떡였다.

“오늘 세현이가⋯⋯, 점심을 반도 채 안 먹었어요. 댁에 가셔서 간식 꼭 챙겨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한건은 왜, 라고 묻지 않았다. 세현이 다니는 유치원의 식사는 제가 따로 추천한 쉐프가 만든다. 그러니 입맛에 맞지 않아 안 먹었을 리는 없고. 분명 세현의 부리부리한 심사가 뒤틀릴 만한 사건이 있었으리라. 가는 길에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가보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세요. 세현이, 안녕. 내일 보자.”

“네, 선샌님. 안녕.”

세현이 단조로운 어투와 어울리지 않게 손을 잼잼 쥐었다 펴며 인사했다. 교사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트랜지션에 올라탄 한건이 차내 냉장고에서 키즈 요구르트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았다. 세현에게 내밀자 세현이 조막만 한 손으로 그것을 채갔다. 한건이 슥슥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배 안 고파?”

“고파.”

“예하 아빠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하자.”

“웅. 나 초록색 샌드위치 머글 거야.”

“알았어. 아빠가 예하 아빠한테 말해 놓을게.”

한건이 보란 듯이 홀로그램을 켜 예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세현. 기분 암전. 아보카도 샌드위치 필요.]

답장은 금세 왔다.

[Copy That.]

세현이 요구르트를 쥔 지 얼마 되지 않아 꼬로록, 꼬록, 빨대가 바닥을 훑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건이 빈 통을 받아 휴지통에 던졌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한건이 넌지시 물었다. 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건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를 꼽으라면 첫 번째는 예하고, 두 번째는 당연 세현이었다.

제대로 짜증이라도 나면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했다. 차라리 엉엉 울면 무엇 때문에 그렇겠거니, 가늠이라도 하지. 그럴 때마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숫자를 풀었는데,”

“응. 풀었는데.”

“하나 틀렷써.”

“⋯⋯그랬어?”

한건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숫자란 수학 문제를 뜻한다. 유치원생의 수학 문제 하나가 뭐 그리 대수겠느냐마는. 세현에게는 몹시 큰일이었다. 그것도 ‘틀린 문제’라면 토끼 인형을 사흘 밤낮 쥐어패도 풀리지 않을 대사건이다.

“어려웠어?”

“⋯⋯아니.”

어려웠구나. 한건이 세현 몰래 가늠했다. 보통 유치원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하지 않는다. 이제 말을 배우는 애들한테 무슨 수학이겠는가. 허나 세현의 유치원은 조금 특별했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트인 애들을 모아놓은 유치원인지라.

시작은 일반 유치원이었으나 도통 적응을 못 했다. 세현은 밥 먹기 싫다고 울고,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고 울고, 선생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자신의 또래들을 극히 혐오했다. 그래서 엘리트 유치원으로 옮겼는데, 가끔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빠가 도와줄까?”

한건이 세현의 볼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자 세현이 흐응, 콧소리를 냈다.

“풀어써. 아빠 오기 전에.”

“아⋯⋯ 그랬어?”

한건이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파악하니 자연히 다른 모습도 상상이 됐다. 밥도 제대로 안 먹었다 하고, 근데 틀린 문제는 또 꾸역꾸역 풀었다 하고.

“낮잠도 안 잤어?”

“응.”

세현이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한건이 그런 세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친구들이 낮잠을 잘 때, 혼자 작은 테이블에 앉아 씩씩거리며 문제를 풀었을 거라 생각하니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멋대로 웃었다간 단단히 삐칠 세현이라 입술을 꼭 물고 참아냈다.

“안 졸려?”

“졸려.”

세현이 시트에 툭, 머리를 기댔다. 한건이 그녀의 허리께를 안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세현이 익숙하게 한건의 가슴팍에다 볼을 묻었다. 담요를 꺼내 덮어준 한건이 작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자. 카페 도착하면 깨울게.”

“으응⋯⋯.”

세현은 금세 잠이 들었다. 수학 문제를 부득부득 풀면서 낮잠엔 약하고. 이럴 때면 영락없이 애였다.

그쯤, 트랜지션이 이번엔 초등학교 앞에 멈춰섰다. 찬하의 학교였다. 한건은 매일 이렇게 두 아이의 하교를 챙겼다. 저보다 예하의 시간이 조금 더 유연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예하만 보내기엔 걱정이 되는지라. 저에게 일정이 있을 땐 예하와 성 실장이 동행하나 보통은 제가 했다.

“아빠!!”

찬하가 트랜지션에 올라타자마자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한건이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쉬, 세현이 잔다.”

“오오, 알았어.”

찬하가 턱을 내밀며 목소리를 낮췄다. 한건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세현의 머리칼에도 입을 맞춘 찬하는 곧장 홀로그램을 켰다. 그리고는 바쁘게 타이핑을 해댔다. 홀로그램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온갖 이모티콘이 가득한 메시지가 덕지덕지 난리다.

요즘 찬하는 친구들과 노는 것에 푹 빠졌다. 주말에도 친구 집에 가겠다며 떼를 써서 예하가 못내 섭섭해했다.

한건이 비스듬히 턱을 괴고 찬하를 응시했다.

“학교 재미없지?”

“엉?”

그러잖아도 큰 눈을 댕그랗게 뜬 찬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반문했다.

“재미없잖아. 시시한 거나 배우고.”

“⋯⋯.”

긍정의 침묵이었다. 찬하도 알판데, 베타 중심의 교육 과정이 맞을 리 없었다. 하물며 재벌들이 다니는 엘리트 학교도 아니고 A 섹터에 있다는 것 말고는 평범한 학굔데 오죽하랴. 한번 훑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일주일 내내, 또 가끔은 한 달 내내 배우니 그렇게 지루할 수 없을 터였다.

찬하가 홀로그램을 밀어 껐다. 그리고는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듯, 한건의 옆에 딱 붙어 속삭였다.

“작년엔 그랬는데,”

“그랬는데?”

“올해 담임 선생님이 이거 줬어.”

찬하가 가방 옆구리에서 작은 태블릿 바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한건이 내용물을 펼쳤다. 빼곡한 활자가 나타났다. 한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활자를 훑었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이거 봐도 괜찮다고 했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래. 선생님이 나 때문에 알파를 공부했는데, 나한테는 이런 게 맞을 거랬어.”

태블릿에 든 건 중등 교육 과정의 이론과 문제들이었다. 한건의 눈꼬리가 마뜩잖게 구겨졌다.

“⋯⋯이렇게 따로 공부할 거면 학교를 옮기는 게,”

“아니야. 지금 학교가 좋아. 친구들도 좋단 말이야.”

찬하가 허겁지겁 한건의 말을 잘랐다. 한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좋다니 뭐라 할 순 없지만, 아니꼬운 건 아니꼬운 거였다. 아들이 잘난 머리를 썩히고 있는데,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한건이 찬하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싫다. 배울 게 없다. 재미없다. 그럴 땐 언제든 말해. 아빠가 예하 아빠한테 말해서 학교 옮겨볼게.”

“예하 아빠는 알아.”

“⋯⋯알아? 어떻게?”

한건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모르는 사실을 예하가 알고 있다니.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말했으니까.”

찬하가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고백했다.

“근데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예하 아빠가 하지 말랬어. 한건 아빠는 당장 학교 옮기라고 할 거라고.”

“⋯⋯.”

한건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어떻게 알았지. 하여튼 대단한 강예하. 무서울 정도로 저를 꿰뚫어 보고 있다. 한건이 코를 찡그렸다. 그러자 찬하가 바쁘게 입을 달싹였다.

“예하 아빠가 초등학교랑 중학교는 평범하게 다니고 고등학교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대.”

“⋯⋯그러고 싶어? 중학교 가서도 지금처럼 혼자 고등학교 공부해야 할 텐데?”

“응.”

단호하고 강경한 음성이었다. 확신에 찬 얼굴. 미래에 대한 기대. 지금 찬하는 한건의 어릴 때와는 퍽 달랐다. 예하가 저 몰래 애들한테 어떠한 교육을 하는 걸까.

“준호가 그랬는데, 자기가 다니는 학교는 쉬는 시간도 없대. 친구들이랑 놀 시간도 없고, 운동장도 없대. VR 스포츠 시간은 있는데, 별로 재미없대. 그리고 맨날 공부만 한대. 학교 가기 싫어서 이모한테 때 쓴다고 했어. 근데 나는 학교 좋아. 주말에도 가고 싶단 말이야.”

찬하가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준호는 한건의 친구인 ‘분홍 생머리’의 베타 아들이다. 그녀의 아들은 한건이 다녔던 역사 깊은 엘리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정말 가끔 만나는데 그 와중에도 학교 상황까지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아빠는 그게 좋던데.”

한건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감히 누가 나한테 말도 안 걸고. 공부만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그런 한건을 보는 찬하의 얼굴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아니야. 나는 싫어.”

“⋯⋯.”

“아무튼, 나는 아빠들 닮아서 똑똑하니까, 어디서든 공부 잘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찬하가 익살맞게 웃었다. 사르르 휘는 눈이며, 폭 들어가는 보조개며 너무할 정도로 예하를 빼다 박았다. 거기다 이리 사랑스러운 말이라니. 한건이 찬하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리와.”

한건이 찬하를 향해 까딱까딱 손짓했다. 찬하가 옆구리에 착, 들러붙으며 헤헤 웃었다. 한건이 그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슬하의 자식들이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오늘 밤, 아이들이 잠들면 예하와 와인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와인을 준비할까. 안주는 무엇으로 할까. 그러다 야릇한 분위기까지 잡히면 금상첨화련만.

한건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멀리 예하의 카페가 보였다.

예하의 카페는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손님이 방문했다. 디저트는 굽는 대로 나갔고, 음료 주문도 밀려있었다. 그런데 하필 직원 하나가 사정이 있어 못 나온다고 통보를 해왔다. 덕분에 예하는 눈앞이 다 핑핑 돌 지경이었다.

요즘 카페는 로봇이 음료를 제조하고, 서빙하고, 정리도 한다. 그러니 사람이 몰리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예하의 카페는 대부분의 일을 인간이 직접 했다. 예나 지금이나 ‘수제’라는 건 이상한 맹신을 주는 힘이 있었으니까.

근데 그 말로가 이러하다니. 커피를 내리던 예하가 진지하게 로봇 몇 대를 놓을까, 고민했다. 아니면 카페 규모를 줄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테이블을 치워버린다거나.

예하가 뻑뻑한 눈두덩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그러고 있으니 손 하나가 쑥 다가왔다. 효주의 손이었다.

“응⋯⋯?”

예하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안약이에요.”

효주의 손에 들린 건 일회용 안약이었다. 예하가 흐릿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일은 못해도 눈치는 좋다. 그래서 도통 미워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오늘 힘들죠? 손님이 너무 많네. 모름지기 카페라 하면 질펀-하게 앉아있어야지. 테이블 회전이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예하가 전혀 사장답지 않은 불만을 토하며 안약을 땄다. 안구가 시원해지니 정신이 좀 들었다.

“그러니까요. 요즘 사장님 남편분 벌이가 좀 별로예요? 무슨 커피를 이렇게 팔아 재껴요?”

효주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사장 앞에서 하기엔 수위 높은 불만이었다. 그러나 예하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게.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네. 우리 남편 아직 잘나가는데. 나 왜 이렇게 바쁘게 살지?”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페를 좀 작게 지을 걸 그랬다. 한건의 옆에 붙어살다 보니 이상한 것만 배워서는. 뭐든 최고, 최대가 아니면 괜히 찝찝했다. 사람을 더 고용할까. 조리대에 기댄 예하가 진지하게 고심했다.

그런 예하에 효주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사라졌다. 예하는 자랑을 자랑이 아닌 것처럼 하는데, 또 자랑으로 들리게 하는 요상한 재주를 가졌다.

예하의 손목시계가 가볍게 진동했다. 한건의 메시지였다.

[최세현. 기분 암전. 아보카도 샌드위치 필요.]

예하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피로가 순식간에 휘발했다. 우리 딸내미가 또 뭐에 심사가 뒤틀리셨을까.

[Copy That.]

답을 보낸 예하가 냉장고에서 청포도를 꺼내왔다. 세현이 좋아하는 청포도 에이드도 함께 해줄 생각이었다. 그가 샌드위치를 만들고, 청포도를 갈고 있을 때쯤 한참 이곳저곳을 나돌던 효주가 돌아왔다.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아무래도 정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카페다 보니 실내온도가 조금 높다. 가만히 앉아있는 손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온도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직원들에겐 더웠다.

“땀 닦아야겠다.”

예하가 티슈를 집어 효주에게 내밀었다. 효주가 됐다는 듯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관자놀이에 매달린 땀은 여전했다.

그에 예하가 티슈로 땀방울을 꾹꾹 찍어줬다. 별 뜻 없는 행동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주말마다 온 집을 뛰어다니며 노는 찬하와 세현이 떠올랐다는 것? 땀을 닦아주는 것 따위야 일도 아니었다. 땀이 흐른다. 닦는다. 말 그대로 일차원적인 행동이었다.

효주가 기겁하며 예하의 손을 쳐내려 했다.

“어우, 사장님. 징그럽게 뭐하시는 거,”

“뭐해?”

낮게 가라앉은 한건의 목소리가 효주의 말을 댕강 잘라냈다. 예하를 포함해 카페 직원 모두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예하가 한껏 상기된 낯으로 뒤를 돌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작 여덟 시간 떨어져 있었는데 사무치게 그리웠던 가족이 반가워서.

“왔어?”

“뭐 하냐고.”

한쪽 팔로는 세현을 안고, 반대쪽 손으로는 찬하의 손을 쥔 한건이 엄한 표정으로 캐물었다.

“아, 오늘 손님이 엄청 많았거든. 효주 씨가 땀까지 흘릴 정도로 고생했다니까.”

예하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부르르 어깨까지 떨며 한탄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잼잼 쥐었다 펴며 아이들에게 인사했다.

한건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그가 원했던 답은 그게 아니었던지라. 머리털이 다 삐죽 서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비상등처럼 깜빡였다.

한건이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팍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속에서 뱅글뱅글 도는 공기가 화염처럼 뜨거웠다.

그가 휙,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예하의 영역이다. 제가 아무리 독불장군이라 하더라도, 예하가 일궈놓은 일터에서 성을 낼 순 없었다.

손짓으로 매니저를 부른 한건이 세현과 찬하를 넘겨줬다. 매니저가 빙긋 웃으며 아이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멀어지는 아이들을 보던 한건이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거센 힘에 예하의 몸이 사선으로 기울었다.

“어어⋯⋯. 왜?”

“따라와.”

“나 일하는 중인데? 저기 세현이 샌드위치도 만들어 놨는데?”

예하는 오늘따라, 하필 오늘따라 눈치가 없었다. 유독가스로 가득 찬 한건의 가슴팍에다 성냥불을 던져 넣었다. 으득 이를 짓씹은 한건이 힘으로 예하를 끌었다. 처음엔 적당히 발을 끌며 반항하던 예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랐다.

한건이 멈춘 곳은 정원의 구석 어귀였다. 인공 냇물 소리와 분수 소리가 조금 시끄럽고, 주위는 울창한 숲과 같아서 밀회를 나누기엔 딱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건의 눈동자에 예하가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단단히 뭉친 페로몬으로 보나, 못되게 솟은 눈썹으로 보나 한건은 지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왜 화가 났을까. 분명 출근할 때는 기분이 좋았거늘. 거기다 출근 후에 처음 만나는 건데.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예하가 까닭을 고민하는데, 한건이 성큼 한 발자국 다가왔다.

“네가 땀을 왜 닦아줘?”

땀을, 왜, 닦아, 줘. 예하가 그의 말을 차근차근 곱씹었다. 그러다 비로소 깨달았다. 아. 저가 효주의 땀을 닦아준 걸 보고 화가 난 거구나. 이유를 알았으나 공감하진 못했다.

“⋯⋯땀을 흘리니까?”

“알바생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한건이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그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콧잔등을 간질였다.

“음⋯⋯.”

예하가 목으로 신음했다. 효주에겐 손도 있고, 발도 있다. 근데 여기서 ‘효주 씨 사지 멀쩡해.’라고 대답했다간 한건이 이곳을 통째로 불 질러 버릴 것 같았다.

바른 자세로 곧추선 예하가 한건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효주 씨 땀을 닦아준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뽀뽀한 것도 아니고, 눈 맞추고 웃은 것도 아니고,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예하가 의외라는 듯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놀랍게도 한건이 타인에게, 정확히 말해 이성에게 질투를 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예하는 한건의 집에 갇혀 살았거나, 한건이 준 집에 갇혀 살았거나 아무튼 그가 창조한 세상에 감금되어 있었던지라 타인과의 접촉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당연히 한건이 질투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또⋯⋯, 또, 이런 이유로 질투하는 건 좀 유치하지 않은가.

한건이 예하의 양쪽 팔꿈치를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허리까지 굽히고 억척스레 시선을 맞췄다.

“나, 세현이, 찬하를 제외하곤 그 누구와도 접촉해선 안 돼.”

“왜?”

“왜라니. 계약서에 적혀 있잖아.”

“그런 조항이 있었어?”

“너 결혼했어, 예하야.”

“내가 결혼한 거랑 내 가게에서 힘들게 일한 아르바이트생 땀을 닦아준 게 무슨 상관인데.”

팔짱을 낀 예하가 반항을 가득 담은 낯으로 말했다. 대충 한건의 감정선이 보이나 순순히 응해주긴 싫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더 있을 줄 알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과 마주하는 일을 하는데. 불가피한 스킨십이 전혀 없으리라, 단언할 순 없었다.

“내가 말한 결혼에는 그거까지 포함이야. 다른 사람과 신체적인 접촉? 하지 마. 감정적인 교류? 하지 마. 안 돼.”

한건은 타당한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설득시킬 의사 자체가 없는 듯했다. 물론, 한건이 명령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움직일 직원이 수만 명이긴 하나 예하는 그 수만 명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갑’인데.

예하가 아무런 말 없이 한건의 어깨너머 허공을 바라봤다. 벌써 결혼한 지 사 년이 흘렀는데. 어째 한건은 아직도 이리 정열적인가. 어렵다. 계약관계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부부로 성장했는데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난제가 참으로 많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한건이 묵언 중인 예하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왜 대답이 없어.”

“알았어.”

예하가 다른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의심할 여지없는 긍정이었다. 한건이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이렇게 쉽게? 분명 거나한 비난을 들을 거라 예상했는데. 제가 말해 놓고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허나 어쩌겠는가. 정말 싫은데. 죽을 만큼 싫은데. 배앓이 꼴려 죽겠는데. 차라리 죽으라 하면 죽겠다 싶을 정돈데. 머릿속에 자꾸 못된 계획이 세워지는데.

“응. 진짜. 안 할게. 말 섞는 것도 싫으면, 앞으로 매니저 통해서만 대화할게. 형이 싫다니까.”

예하가 담담히 모든 소통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했다. 뻣뻣하게 뭉쳐있던 한건의 입술이 느슨히 풀렸다. 분노가 삽시간에 휘발했다. 머리 위로 냉수가 쏟아진 듯, 정신 또한 맑아졌다.

그쯤, 예하가 자신의 팔뚝을 쥔 한건의 손을 털어냈다. 퍽 쌀쌀맞은 손길이었다. 한건의 손이 줄 잘린 연처럼 나부꼈다.

“그러니까, 나한테 멋대로 화내지 마.”

예하의 음성이 순식간에 심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또 이런 식으로 화내면, 나도 화낼 거야.”

“⋯⋯.”

“엄청. 화. 낼 거야.”

그가 검지로 한건의 명치를 꾹꾹 짓눌렀다. 주름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던 넥타이가 구겨질 정도로 센 힘이었다.

두 가슴의 한가운데. 언젠가 총알이 살가죽을 뚫고 들어갔던 그곳.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뚜렷한 흉터가 들러붙어 있는 곳이었다. 한건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뻣뻣이 세웠다.

“이것 봐. 빨개졌잖아. 형이 잡아서.”

어느새 낯빛을 바꾼 예하가 자신의 두 손목을 보란 듯이 들이밀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

“⋯⋯미안.”

눈썹 끝을 뚝 떨어트린 한건이 조심조심 손목을 쓰다듬었다. 예하가 아프다니 가슴이 아팠다. 제가 만들어놓은 것임에도 그랬다. 천지 분간 못 하는 등신이 다름없다.

“앞으로 화를 낼 땐. 뭐 때문에 화가 났고.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말로 해.”

“⋯⋯.”

“일할 땐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나한테는 왜 야차처럼 굴어.”

예하가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금 더 성장했다. 어엿이 두 아이를 둔 아빠로서, 또 한건의 반려자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해졌다. 물러날 때와 양보할 때, 또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았다.

오늘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줬으나,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려줘야 했다. 한건은 누구보다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이지만, 이런 쪽으론 철부지에 가까웠으니까.

“잘못했어.”

한건이 머뭇거림 없이 잘못을 시인했다.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 밉보이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하가 한건의 넥타이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슈트 재킷도 가다듬었다.

“응.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형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

예전이었다면 머리채부터 잡혔겠지. 발목이 부러져서 침실에 갇혔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고막이 터질 정도로 뺨을 얻어맞았다거나, 발정제를 먹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을지도.

예하는 알았다. 한건이 아주 많은 것을 참고 사는 중이라는 걸. 그는 배우고, 학습하고, 교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참는 거다. 제가 싫어하니까. 또 죽어버릴까 봐. 또 머리가 어떻게 돼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그러니 이해할 수 있었다. 예하 역시 한건이 필요했고, 그를 너무나 사랑했고, 외로운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이해해야만 했다.

지천에 가시와 불구덩이가 널린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포기하고, 양보하고, 하나씩 맞춰가야지만 평화로울 수 있었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작은 몸뚱이가 저항 없이 안겨 왔다. 그가 예하의 관자놀이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랑해, 예하야.”

“⋯⋯나도.”

예하가 한건을 마주 안았다. 폐부 가득 한건의 냄새가 스몄다. 언제, 어디서 맡든 아랫도리가 꿈틀거리고, 뒷구멍이 간지러워지는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진득하니 입을 맞춘 지도 오래된 것 같다. 아이들이 자꾸 부부 침대에 들어와 자니 뭘 할 수가 없었다.

“오늘 퇴근하고 와인 마실까? 오랜만에?”

고개를 바짝 쳐든 예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도 그 생각했는데.”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별것이 다 통한다.

예하가 상기된 얼굴로 뒤꿈치를 들썩였다. 예전에는 틈만 나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체력이 모자랄 정도로 몸을 섞었었는데. 근래는 모든 게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 얼른 정리하고 들어갈 테니까, 애들이랑 열심히 놀아 줘. 일찍 곯아떨어지게.”

한건의 볼에 짧게 입 맞춘 예하가 앙큼하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한건이 멀어지는 예하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엎었다 뒤집었다 제멋대로다. 그런데도 좋아죽겠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한건이 주책맞게 치솟는 입꼬리를 검지와 엄지로 꾹꾹 눌러 내렸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푸흐흐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 * *

주말의 오후 햇볕은 유독 따스하고, 유난히 나른했다. 널따란 집만큼이나 널따란 창으로 노을이 밀려오면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예하는 그 시간이 참으로 좋았다. 네 가족이 모여 간식을 먹거나,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수영장에 떠 있거나, 아니면 한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낮잠을 자거나. 뭐 하나 좋지 않은 게 없었다.

오늘은 점심을 먹은 후부터 내내 수영장에서 놀고 낮잠을 잤다.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예하였다. 옆구리가 뜨끈했다. 예하가 흐릿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찬하가 왼쪽 옆구리에, 세현이 오른쪽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를 아울러 품에 안고 있는 한건까지.

찬하와 세현은 예하의 냄새가 담뿍 배어있는 안방 침실을 유독 좋아했다. 각자 제 방에서 자다가도 늦은 밤, 난데없이 예하의 옆구리를 파고들곤 했다.

옛날엔 애들이 작아서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는데, 지금은 제법 커서 갑갑했다. 헌데 그마저도 적응해버렸다.

예하가 눈만 굴려 세 사람을 살폈다. 가지런히 눈을 감은 채 세상모르고 수면에 빠진 그들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언제 봐도 흐뭇한 광경이다.

찬하와 세현의 머리칼을 번갈아 쓸어주던 예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높다란 빌딩, 소리 없이 왁자지껄한 홀로그램과 그 사이사이를 헤집는 트랜지션들. 그 모든 게 하나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완전히 다른 차원 같기도 했다.

예하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었다. 더없이 현실적인 이 순간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울 줄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행복할 줄이야.

그렇게 하염없이 정적인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왼쪽 옆구리가 꿈틀거렸다. 예하가 고개를 내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말똥말똥한 눈의 찬하가 예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예하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찬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예하가 살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로 내려가 찬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쥔 찬하가 조심히 침대를 벗어났다.

살금살금 침실을 나온 두 사람이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동시에 뱉어내는 숨이 괜히 우스워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아빠, 나 배고파.”

찬하가 슥슥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치? 아빠도 고파.”

예하가 그를 따라 배를 쓰다듬었다. 점심을 든든히 먹었는데, 수영에, 아이들 시중에, 샤워에, 낮잠까지 잤더니 배가 홀쭉해졌다. 메뉴를 고민하던 예하가 눈을 반짝였다.

“우리 오랜만에 짜파게티 해 먹을까?”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입맛이 까다롭던 세현은 딱 한건의 혀를 닮았다. 그래서 짜고 단 것을 썩 즐기지 않았다. 덕분에 짜장면을 못 먹은 지도 좀 됐다. 두 사람을 두고 외식하기는 좀 그렇고, 아쉬운 대로 짜파게티를 선택했다.

예하의 권유에 찬하의 얼굴이 대번에 활짝 폈다.

“어! 좋아!”

“쉬⋯⋯. 아빠랑 세현이 깨면 안 돼.”

예하가 검지를 세워 입술을 가렸다. 찬하가 그를 따라 입술을 가렸다. 슬쩍 뒤꿈치를 든 두 사람이 조심조심 주방으로 향했다.

식당이 아닌 주방은 예하에게도, 찬하에게도 영 어색한 장소였다. 결혼 후에 직접 요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한건의 집은 때에 맞춰 완벽한 요리가 매번 다른 메뉴로 제공됐고, 가끔 무언가가 먹고 싶다 지나가듯 말해도 금세 준비가 됐다.

난데없는 예하의 등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쉐프들이 퍼뜩 일어났다.

“예하 님?”

“저⋯⋯ 주방 좀⋯⋯ 쓸 수 있을까요?”

예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엄청난 이력을 자랑하는 그들 앞에서 짜파게티를 만들려니 상당히 민망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저희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쉐프가 빙긋,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우, 아니요. 아니요. 그렇게 대단한 음식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서⋯⋯.”

예하가 손사래를 치며 게처럼 옆으로 걸었다. 덩달아 긴장한 찬하가 예하의 허벅지에 철썩 달라붙었다.

영 불편해 보이는 그들에 쉐프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비로소 안심한 예하가 제 몸집의 곱절은 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온통 고기뿐인 냉장고였다. 그다음 냉장고를 열었다. 이번엔 색색의 채소들이 예하를 반겼다. 또 다음 냉장고 앞에 서서야 예하는 짜파게티 같은 인스턴트는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멍청하긴⋯⋯.

소리 없이 혀를 찬 예하가 찬장을 뒤적였다. 그러나 마른 재료와 파스타면, 각양각색의 조미료와 향신료뿐이었다. 인스턴트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최상급의 재료가 즐비한 이곳에 인스턴트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예하가 흘깃 찬하를 살폈다. 오랜만에 마주할 짜파게티에 한껏 기대한 얼굴이 보였다. 낭패다. 얼른 편의점에 다녀와야 하나.

“혹시 짜파게티⋯⋯ 있나요? 그 인스턴트, 짜장면.”

예하가 애매하게 웃는 낯으로 쉐프를 향해 물었다. 뜬금없는 라면 타령에 쉐프가 눈썹을 긁적였다.

“어⋯⋯, 가족분들 식자재 창고엔 없고, 직원 전용 간식 창고엔 있는데, 그거라도 꺼내드릴까요?”

예하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곱게 모았다.

“저희가 먹어도 괜찮아요? 직원분들 건데⋯⋯.”

“이 집에 있는 것 중에 뭐 하나 예하 님 소유가 아닌 게 없는데요.”

쉐프가 어째 그런 부탁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예하가 창고를 탈탈 털어먹다 못해 문까지 씹어먹겠다 해도 그러라며 내어줘야 했다.

“어⋯⋯ 그럼 두, 두 개만⋯⋯.”

예하가 수줍게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제 통장에 쌓인 돈이 어마어마하고, 쉐프의 말마따나 이 집에 제 것이 아닌 게 없지만, 남의 밥을 뺏어 먹는 듯해서 영 불편했다.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비렁뱅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쉐프가 금방 다녀오겠다며 등을 돌렸다. 예하가 헙, 헛숨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슬쩍 손가락 하나를 늘렸다.

“아니⋯⋯ 세 개 부탁드려요. 찬하가 한창 클 때라⋯⋯.”

그 말에 쉐프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백오십 크레딧짜리 라면에 미안해하는 예하가 신기해서.

직접 끓여 먹겠다는 예하의 말에도 쉐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주방에서 일하라고 받는 돈이 얼만데, 이 저택의 주인 손에 냄비를 들릴 순 없었다. 쉐프가 최 회장님이 아시면 분명 잘릴 거라고 울상을 했다. 예하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한낱 짜파게티도 쉐프가 끓이니 달랐다. 소고기가 들어가고, 서니 사이드 업으로 익힌 후라이가 올라가고,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오일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단무지와 파김치가 예쁜 접시에 소담히 담겼다. 바삭하게 익힌 군만두는 덤이었다.

젓가락을 든 예하와 찬하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쉐프가 요리를 하는 내내 어금니 사이로 고인 침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식당까지 나갈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짜파게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찬하가 후루룹, 면을 빨아당겼다. 예하가 오물거리는 작은 입에 단무지를 넣어줬다. 그리고 자신도 면을 마시듯 물었다.

“괜찮습니까?”

가만히 지켜보던 쉐프가 물었다. 예하와 찬하가 동시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꿀렁거리는 눈썹에 거짓은 하등 섞여 있지 않았다. 쉐프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들의 식사를 구경했다.

“사실, 예하 님과 도련님, 아가씨가 계시기 전에는 음식 만드는 재미가 별로 없었습니다.”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군만두를 베어 물었다.

“아무래도 회장님이 먹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시는 분이 아닌지라⋯⋯. 드시는 음식도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레시피를 써먹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거든요. 헌데 요즘은 예하 님에 도련님에 아가씨까지 열심히 드셔주셔서 어찌나 일할 맛이 나는지 모릅니다.”

쉐프의 말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입에 발린 말이든, 아니든 듣기는 참 좋았다. 저런 마인드로 요리를 하니 늘 맛이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예하와 찬하는 연신 맛있다는 감탄을 연발하며 짜파게티를 작살냈다. 접시에 두 젓가락 정도의 면이 남았다. 예하가 찬하 쪽으로 접시를 밀어줬다. 입가에 짜장 소스를 덕지덕지 묻힌 찬하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파김치로 면을 둘둘 싸서는 입에 넣었다.

세상에. 우리 아들 이제 파김치도 먹고. 다 컸네. 다 컸어.

별것이 다 기특했다. 예하가 작은 뒤통수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쉐프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뭐해, 여기서? 한참 찾았잖아.”

낮은 음성이 주방을 단번에 얼렸다. 예하가 반 바퀴 빙그르르 돌아 입구를 바라봤다. 세현을 받쳐 안은 한건이 서 있었다. 한껏 구겨진 미간과 삐뚜름히 올라간 입술 끝. 단단히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과거의 한건은 예하가 침대에서 일어나면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육아를 하면서부터는 그러지 못했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체력 좋은 찬하와 세현에게 맞춰 이리저리 나부끼다 보면 몸이 힘들다는 게 무슨 말인지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자다 보니 예하와 찬하가 사라진 것도 몰랐다.

침대에 없기에 찬하 방에 갔더니 없고, 세현의 방에도 없고, 정원에 갔더니 그곳에도 없고, 식당에도 없고, 설마 또 물놀이를 하나, 싶어서 수영장에 갔더니 그곳에도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CCTV를 털어 간신히 찾아온 곳이 여기, 주방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어찌나 허탈하던지. 한건은 예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몇 분 동안 납치부터 도망까지 온갖 나쁜 상상을 다 했다.

“일어났어?”

기겁한 한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짜파게티에 기분이 한껏 붕 뜬 예하가 살랑살랑 어깨를 흔들며 다가왔다. 부드럽게 한건의 뺨을 쓰다듬고, 세현을 건네받았다. 아직 잠을 털어내지 못한 세현의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예하가 세현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우리 세현이, 일어났어? 잘 잤어? 응? 배는 안 고파?”

세현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예하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쇄골에 볼을 문질렀다. 잠이 더 고픈 모양이었다.

“멀쩡한 식당 두고 왜 여기 있어?”

한건이 음산하게 물었다.

“어⋯⋯ 어쩌다 보니⋯⋯.”

예하가 턱 아래를 긁적였다. 늘 있던 장소가 아니니 찾는 데 고생을 좀 했겠구나, 싶었다. 처음부터 여기서 먹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음식에 정신을 놨더니 이리 돼버렸다.

“화났어?”

예하가 은근히 물었다.

“아니.”

한건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예하가 실소했다. 화났네, 났어. 그것도 엄청났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바였다. 제가 한건의 앞에서 사라졌던 사건 중에 비극적이지 않은 게 없었으니. 무표정이라도 심장이 철렁할 만큼 놀랐을 터였다.

예하가 한건의 팔뚝에 찰싹 달라붙었다.

“형아도 짜파게티 먹을래?”

“⋯⋯아니.”

“아니면 다른 거? 배 안 고파?”

“안 고파.”

한건이 고개조차 젓지 않고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예하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럼 애들 데리고 영화 볼까?”

“글쎄.”

“정원에 산책하러 갈래?”

“별로.”

“⋯⋯.”

예하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짧은 대답이 답답하고 짜증 날만도 한데, 어째 자꾸 웃음이 튀어나오려 했다. 방금 일어나서 뒷머리가 붕 뜬 한건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덩치는 이 공간에 존재하는 누구보다 크면서 얼굴은 부루퉁하고. 삐지는 수준은 딱 찬하 정도고.

또한, 그의 화가 오롯이 저의 걱정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형 오늘 되게 귀엽다. 막⋯⋯ 놀리고 싶네.”

예하가 한건의 엄지를 주무르며 눈썹을 들썩였다. 음흉한 사십 대 아저씨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예하를 지그시 보던 한건이 쯧, 혀를 찼다. 놀리는 게 재밌다니, 놀리라지. 제가 뭐 어쩌겠는가. 예하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게 재미있다고 시시덕거리면 발가락까지 모두 잘라가라며 손발을 내줄 판이었다.

“이것 봐. 입술도 삐죽거리고. 눈도 이렇게 치켜 올라가 있고.”

예하가 한건의 얼굴 여기저기를 함부로 만져댔다. 한건은 예의 그 무감한 얼굴로 예하의 괴롭힘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그때, 눈치만 보던 찬하가 한건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아빠 화났어? 찬하가 예하 아빠랑 둘이서만 짜파게티 먹어서?”

“⋯⋯아니. 그럴 리가.”

한건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미소 지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광대가 희한할 정도로 봉긋 솟은 어색한 미소였다. 그래도 아들한테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은가 보다. 그에 예하가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방정맞을 정도로 큰 박장대소였다.

그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잔잔한 선율처럼 울려 퍼지는 그 웃음소리에 한건은 픽,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찬하 역시 실실 웃음을 흘려댔다. 어느새 잠든 세현만 고요했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가 만개한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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