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33)

우리, 함께, 같이.

블루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커프스 버튼은 블랙 슈트에도, 화이트 슈트에도 잘 어울렸다. 영롱하고, 아름답다. 굳이 불만을 표하자면 조금 무겁다는 것. 꼭 지금의 상황 같았다. 아름다운 상황이지만, 어깨가 결릴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건은 능숙한 손길로 예하의 드레스 셔츠 소매에 커프스 버튼을 달았다. 예하의 얼굴을 다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손톱만큼 작은 걸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예하가 동그랗게 입술을 모았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무슨 뜻이야?”

“음……. 늘 저기 뒤에 있는 사람들, 저런 사람들이 해주니까.”

예하가 드레스 룸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을 흘끔거렸다. 스타일리시한 젊은이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까지 제각기 가위, 줄자, 구두 등을 들고 한건과 예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눈길이 어찌나 노련하고 날카로운지. 바늘이 팔뚝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불편했다.

실없는 의문에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아무래도 오피스 슈트와 턱시도는 다르니까. 어떠한 점이 다르다 명확히 말할 순 없었으나 조금 더 단단하고, 훨씬 더 반짝반짝했다.

예하가 손바닥으로 한건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감촉에 명치께가 간지러웠다.

예하의 양쪽 소매에 커프스 버튼을 달아준 한건이 뒤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지척에 서 있던 익명이 하얀색 슈트 재킷을 들고 왔다. 한건은 그것 역시 친히 제 손으로 예하에게 입혔다. 예하는 인형처럼 두 팔을 들었다가 내리며 그의 시중을 받았다.

그러나 입은 쉬지 않고 불평을 토해냈다. 사무치는 긴장감에 입술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원래 이런 건 각자 준비하고 짠, 하고 나타나서 서로의 모습에 감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예쁘다. 너무 멋있다. 그런 말 하면서. 드라마랑 영화에선 다 그러던데.”

“틀렸어.”

“……틀렸다고?”

“내가 하면, 그게 맞는 거야.”

예하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린 한건이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예하가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이끌려갔다. 가까이서 마주하는 한건의 얼굴엔 온통 기쁨이 점철되어 있었다.

“아무렴, 왜 아니겠어.”

예하가 한쪽 입꼬리를 추켜 올리며 이죽였다.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하의 모습을 감상했다.

아름답고 하얀, 나의, 나만의 연인.

몇 시간 뒷면 나의 가족이자 남편이 될 성역.

발끝에서부터 내달려오는 감동은 곱씹고 되뇔수록 몸뚱이를 부풀려갔다. 이러다 감동을 이기지 못해 뻥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뇌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한건의 손가락이 차분히 가라앉은 예하의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예쁘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예하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그가 슬쩍 한건을 밀어냈다.

“너는, 너는…… 나비넥타이 진짜 안 어울려.”

예하가 검지로 톡톡 한건의 나비넥타이를 두드렸다. 검은색의 나비 모양 타이는 한건이 늘 하던 넥타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짧고 뚱뚱한 게,

“너무…… 귀여워.”

너무 귀여웠다. 앞과 뒤가 다른 예하의 말에 한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때때로. 예하의 언어는 찬하의 웅얼거림보다 알아듣기가 힘들다.

“욕이야. 칭찬이야?”

한건이 물었다.

“……몰라.”

예하가 말을 뭉뚱그렸다. 한건이 집요하게 예하를 응시했다.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가는 눈동자와 옴질거리는 아랫입술로 말미암으면, 그는 지금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웠다. 한건이 성큼성큼 예하를 향해 다가갔다. 당장 품에 안아 뽀뽀를 퍼부어주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예하가 게처럼 옆으로 걸으며 한건을 피했다. 한건은 기다란 다리로 느긋하게 그를 따라잡았다. 결혼식 당일에 있기엔 조금 뭐한 신랑과 신랑의 술래잡기였다.

“결혼식을 꼭 해야 해?”

예하가 야구공 던지듯, 말을 던졌다.

“하기 싫은 이유는 뭔데.”

한건이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흘리며 물었다.

“그냥…… 번거롭고, 귀찮고, 중요한 것도 아니고, 어…… 오는 사람도 없고, 또…….”

예하가 우물우물 말을 씹었다.

계약서에 서로의 지장이 찍힌 후, 결혼식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썩어나는 게 돈이고, 비공개 결혼식이라 하객도 몇 없고, 이래라저래라 말을 얹는 양가의 부모도 없고, 걸림돌도 없으니 빠른 게 당연했지만 무서울 지경이었다.

“기각.”

빠르게 발을 놀린 한건이 사냥감을 휘어잡듯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쑥 당겼다. 가벼운 몸뚱이가 태풍에 쓸린 나비처럼 안겨 왔다.

“그러는 너는 왜 꼭 결혼식이 하고 싶은데?”

품에 안긴 예하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제가 아는 한건은 이렇게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행위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을 한 후에 일어나는, 또 해야 하는 일들이다. 이를테면 부부의 도리 같은 것. 같이 살고,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뭐 그런 거 말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혼인 신고서만 작성해도 되는데. 굳이 굳이 이렇게 일을 벌이는 한건이 이상했다.

한건이 예하와 진득이 눈을 맞췄다.

“최한건을 남편으로 맞아 평생 사랑하시겠습니까?”

“뭐?”

나긋하게 떨어지는 질문에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한건이 씨익 웃으며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 질문에 네, 라고 대답하는 네가 보고 싶어.”

“하아……. 그걸 위해서 이 짓을 한단 말이야?”

“응.”

한건은 참으로 당당했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고작 그 한마디를 듣자고 수십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며칠을 버리고, 수억 원을 썼단 말인가. 한건은 여전히 멀다. 그의 사고는 보통 사람이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궤도를 그렸다.

짧게 한숨을 내쉰 예하가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걸쳤다. 그 모든 게 제 사랑에 굶주렸기 때문이려니. 그리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한건의 귓불을 주물렀다.

“그게 목적이면 빨리 말하지 그랬냐.”

“…….”

“지금도 해줄 수 있는데.”

한건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몇 번 예하의 말을 되뇌던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진짜?”

“그래.”

예하는 쉽게 긍정을 내놓았다.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겪을 것 못 겪을 거 구분 없이 겪은 사이에. 애정 어린 한 마디쯤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해줄 수 있었다.

“그럼 해줘.”

한건이 예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예하가 푸흐 웃음을 흘렸다.

“싫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결혼식 때 말해줄게.”

한건의 만면이 억울함에 잔뜩 구겨졌다.

“못됐어, 너.”

“와. 내가 그 말을 최한건한테 듣다니. 오늘이 내 결혼식인 것보다 그게 더 특별하다.”

예하가 놀랍다는 듯 짝, 손뼉까지 쳤다.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심이었다. 하물며 그의 가슴팍에 총알을 박아 넣었을 때도 못됐다느니, 나쁘다느니 같은 말은 안 들었는데. 고작 이런 이유로 한건에게 비난을 들을 줄이야. 근데 어째 기분이 좋았다. 저도 썩 정상은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해주긴 한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재차 이어지는 한건의 확인에 예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한건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갰다. 그 모습에 예하는 볼 안쪽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적정선을 모르는 초등학생처럼 한건을 놀려댈 것 같았다.

“사랑해.”

한건이 쪽쪽쪽, 예하의 볼과 턱에 뽀뽀를 쏟아부었다. 간지러운 입맞춤이 몇 번 이어지더니 곧 당연한 수순처럼 입술이 짙어졌다. 귓불을 빨고 목덜미를 핥는 숨결에 욕정이 가득했다. 예하가 한건을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다.

“……으음, 떨어져, 좀. 옷 구겨져.”

아침부터 온갖 요란을 다 떨며 준비했단 말이다. 그래도 결혼식인데, 한건과 결혼한 이상 아마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서야 다시 없을 결혼식일 텐데. 구겨진 옷으로, 입술이 순대처럼 퉁퉁 부은 채 치르고 싶진 않았다.

허나 한건은 물러나 주지 않았다. 자신이 곱게 입힌 드레스 셔츠를 슬쩍 빼내더니 허리춤 안으로 손을 집어넣기까지 했다.

“이왕 구겨진 거 그냥…….”

“미친놈아!”

예하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지금 이 공간에 사람이 몇인데! 경악 어린 눈으로 주위를 훑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예하가 퍽퍽 한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자 한건이 앓는 소리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예하가 폭력을 멈췄다. 혹 많이 아픈가 싶어서. 그러나 한건은,

“아, 미친놈이라고 하지 마. 섰어.”

라고 하며 예하의 속을 뒤집었다.

“안 떨어져!”

널따란 드레스 룸에 예하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순조로운 결혼식이 될 듯했다.

* * *

어제, 그러니까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정확히는 열네 시간 정도. 두 사람은 한건의 입을 빌리면 가벼운 정사, 예하의 입을 빌리면 짐승 같은 정사를 끝낸 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창밖으로 진한 어둠이 밀려왔다. 바쁘게 움직이던 도시도 수면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예하가 반쯤 감긴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이제는 내려다보는 불야성이 익숙하다. 땅에 붙어사는 게 당연했을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척척하고 더러운 땅을 밟을 일이 없다.

한건의 품에 깊숙이 기댄 예하가 와인을 홀짝였다. 쌉싸름한 액체는 제법 겪었음에도 아직 맛을 모르겠다.

“최한건.”

예하가 축축하게 잠긴 음성으로 한건을 불렀다.

“응.”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에 코를 묻은 채 답했다.

“우리 행복할 수 있을까?”

퍽 서정적인 의문이었다. 그만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건은 망설임을 모르는 이였다.

“그럼.”

그가 단호히 대답했다. 예하의 고민이 허탈할 정도로 확신에 찬 답이었다. 예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돌렸다. 붉은 액체가 일렁일 때마다 잔이 탁하게 번졌다.

“나는 아직도 네가 아파.”

“…….”

“어쩌면 계속 아플지도 몰라.”

“…….”

“그런데도 다 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느릿하게 이어지는 예하의 목소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허공을 가로질러 온다기보다는 바닥을 기어온다는 묘사가 맞을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안 되는 건 없어. 불가능한 것도 없고.”

한건이 예하의 아랫입술에 묻은 와인을 엄지로 닦아냈다.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말이야 쉽지.”

“나는 그 어떠한 말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믿어도 돼.”

한건의 말에는 거짓도 장난도 없었다. 예하가 고개를 들고 한건과 눈을 맞췄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언제 봐도 신기하다. 어떻게 보면 차갑고 시린데, 또 어떻게 보면 데일 듯 뜨겁기도 했다.

“정말? 약속할 수 있어?”

“응. 오롯이 네 행복을 위해서 살게.”

한건이 예하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꽉 손을 힘주어 잡았다. 예하가 빡빡하게 얽힌 열 개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한건의 옹골찬 손은 때로는 사슬이고 때로는 동아줄이다. 처음부터, 그리고 여전히 그 간극에 머물고 있다.

“나를 사랑해?”

예하가 다시 물었다.

“그래.”

한건은 이번에도 긍정을 내놓았다.

“나를 위해서 뭘 줄 수 있는데? 돈? 아니면 한호 그룹이라도 줄 거야?”

“아니.”

“그럼?”

“나.”

“…….”

“나를 줄게.”

예하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한건의 답은 참으로 많은 것을 포용하고 있었다. 앞서 예하가 말했던 돈과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가지고 있는 또 누리고 있는 혹은 누리게 될 것까지 모든 걸 포함한 말이었다.

한건이 가만가만 예하의 손을 쓰다듬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면.”

“…….”

“내가 네 발밑에 있어 줄게.”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발밑에 둘 순 없어. 너만, 너한테만 허락된 거야. 강예하. 듣기 좋은 저음이 예하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한건은 자신이 애걸하는 처지면서도 그걸 특권으로 만드는 특이한 재주가 있다. 듣는 이가 허락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런 재주.

예하가 팔을 뻗어 협탁의 첫 번째 서랍장을 열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바닥을 몇 번 훑어 작고 차가운 물체를 찾아냈다.

“이거, 닥터 유가 줬어.”

총알이었다. 한건의 가슴팍에 박혀 들어 끄트머리가 약간 우그러진 은색 총알.

“거짓말이면 이걸 다시 네 심장에 박아넣을 거야. 어쩌면 머리통일 수도 있고.”

예하가 엄한 표정으로 총알을 흔들었다. 한건이 푸흐, 바람 섞인 웃음을 흘렸다. 살인 예고를 들은 사람치고는 몹시도 기꺼워 보였다.

“귀여운 협박이네. 그 전에 애 셋 딸린 아빠는 꼭 되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그럼 잘해.”

“그럴게.”

예하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몸을 겹친 한건이 이마와 콧잔등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 곧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입이 곧장 벌어지고, 쓴 와인 맛이 잠깐 혀 위를 스쳤다. 그 후로는 오롯이 서로만 감각됐다.

혀가 진득하게 얽히고, 점막이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비벼졌다. 방금까지 했던 행위에 비하면 산뜻한 스킨십인데 저절로 허리가 들썩였다. 두 사람은 숨이 거칠어질 때쯤에야 떨어졌다. 한건은 그렇게 입을 맞춰놓고도 아쉬운지 예하의 목선을 따라 잘게 키스를 해댔다.

“근데 둘째 이름은 뭐로 하지?”

예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건이 예하의 쇄골에 코를 묻은 채 대꾸했다.

“글쎄. 나도 나한테 둘째가 생길 거라곤 생각해보지 않아서. 천천히 고민해도 돼.”

“이번엔 내가 지을 거야.”

“좋아.”

“너무 믿고 맡기는 거 아니야? 갑돌이 같은 거로 지으면 어쩌려고?”

“그래도 괜찮아. 누가 감히 내 아들을 놀리겠어.”

“우리, 아들이거든.”

“그래. 누가 감히 ‘우리’ 아들을 놀리겠어.”

“근데 딸이면 어쩌지? 딸 이름으로 갑돌이는 좀 아닌 것 같아. 닥터 유나 심 변호사님처럼 멋진 이름으로 지어주고 싶어.”

“……진짜 갑돌이로 지을 생각이었어?”

깊어가는 어둠이 두렵지 않은 밤이었다.

* * *

두 사람은 한건의 욕정에 말려 아랫도리를 비비다가 하마터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뻔했다. 한건이 흥분 어린 콧김을 뿜으며 결혼식을 몇 시간 미루자 했지만 예하가 극구 반대했다. 이 난감하고, 부끄럽고, 남세스러운 상황을 얼른 해결하고 치워버리고 싶었다.

한건의 집에서 결혼식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트랜지션 창밖을 보던 예하가 뻐끔 턱을 떨어트렸다. 눈을 의심하게 되는 광경이었다. 한건이 그저 그런 결혼식장을 준비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이런 수준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여기, 여기서 결혼한다고?”

“응.”

아래를 내려다보는 예하의 만면에 경악이 가득했다. 하얀 꽃들로 뒤덮인 건물은 아니 타워는 꼭 새로운 세계의 트리 같은 모양새였다.

“여기를…… 여기를 빌렸어?”

“아니.”

“그럼?”

“내 건물이라서 빌릴 필요가 없었어. 개장이 다음 주라 관람객도 없고.”

별 감흥 없는 한건의 대답에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녹슨 N타워를 허물고, 한호가 새로운 랜드마크를 세우니 마니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뉴스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는 한건을 전혀 모를 때라 그 새로운 랜드마크가 제 결혼식장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예하가 멍청한 낯으로 트랜지션 창문을 내렸다.

타워의 최상층에 마련된 결혼식장은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모습이었다. 산만큼이나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하얀 장미 잎이 퍼져나갔고, 그 주위엔 스탠딩 테이블이 각종 샴페인과 디저트를 품고 서 있었다.

나무에는 아카시아 꽃이 포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향이 어찌나 찬란한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하얀 구 형태의 조명 수백 개가 허공에 떠 반짝였는데, 가까이서 보는 은하수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

한건이 뿌듯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명한 웨딩 플래너 다섯을 고용해 만든 작품이었다. 예하가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드냐고? 마음에야 드는데…… 어…… 좀 도망치고 싶다.”

새까맣게 타는 예하의 속을 하등 모르는 트랜지션은 흔들림 하나 없이 타워에 내려앉았다. 결혼식은 한건과 예하가 트랜지션에서 내리는 그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예하가 시트 한쪽을 더듬자 물과 탄산수 따위가 올라왔다. 물병을 따 허겁지겁 마른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후우……. 솔직히 나 지금 떨려. 토할 것 같아.”

예하가 덜덜덜 허벅지를 떨며 고백했다. 한건이 긴장으로 단단히 굳은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나도 떨려.”

“네가?”

“응.”

한건이 예하가 마시던 물병을 채가 목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던 예하가 떨던 다리를 멈췄다. 한건도 떨린다니 희한하게도 안심이 됐다. 그 대단한 최한건도 떨린다는데. 저는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뒤통수를 쓰다듬어줘야 할 판이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트랜지션 쪽으로 다가왔다. 예하가 마치 괴한을 보듯 두려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한건과 잠깐 눈빛을 맞춘 사내가 트랜지션 문을 열었다.

“신랑 두 분, 입장하세요.”

비로소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아카시아 냄새가 흠뻑 밴 미풍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한결 평온해졌다. 올가미처럼 손가락을 옥죄고 있는 한건의 뜨거운 손 역시 그 평온에 한몫했다.

하얀 꽃길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그 보드라움이 선연히 느껴졌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성 실장, 문 집사, 백화점 VIP 담당 이 팀장과 심 변호사, 그리고 많이 놀랐을 희찬과 은호. 그들은 모두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예하가 어색한 미소로 눈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꽃길의 끝, 우직하니 선 큰 나무 앞에 다다랐을 때. 예하는 주례의 자리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닥터 유……?”

닥터 유였다. 나무와 잘 어울리는 감청색 드레스에 붉은 립, 그리고 큼지막한 금색 귀걸이를 한 그녀는 방금 지상으로 내려온 결혼의 신 헤라 같았다. 닥터 유는 빙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두 사람.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닥터 유가 단정한 음성으로 입을 뗐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닌데 빨려 들어가듯 집중하게 됐다.

“주례사는 따로 없습니다. 이쪽 신랑께서 결혼식이 길어지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요.”

그녀가 한건을 쳐다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난데없이 병원으로 찾아온 한건이 사회 겸 주례 좀 부탁한다기에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진짜 이도 저도 아닌 역할로 세워둘 줄이야. 닥터 유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는 준비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한건이 주례는 필요 없다 했지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도 주례로 선 김에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걸어온 시간이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누구보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한마디 하자면, 과거의 상처와 고통은 과거에 묻어두세요. 현실에 감히 발도 못 디디게 하세요.”

“…….”

“감히 단언컨대, 두 사람은 강합니다. 그러니 과거로 말미암은 발전만 하시고, 퇴화는 하지 마세요. 부디 앞으로는 사랑만, 행복만 하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닥터 유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연하늘색 슈트에 도트무늬 나비넥타이를 한 찬하가 뒤뚱뒤뚱 한건과 예하를 향해 걸어왔다. 두 손으로 주먹만 한 무언가를 꼭 움켜쥔 채였다. 예하와 한건을 번갈아 쳐다본 찬하가 샐쭉 웃으며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붉은색 바탕에 금이 세공된 반지 케이스였다.

한건이 그것을 웃으며 받아들었다. ‘고마워.’ 예하가 입 모양으로 감사를 전했다. 예하의 무릎을 꼭 껴안았다가 놓은 찬하가 문 집사의 손을 잡고 멀어졌다.

등허리를 곧게 편 닥터 유가 결혼식의 막바지로 향했다.

“신랑 최한건 님은 강예하 님을 남편으로 맞아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하고 존중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한건의 대답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둘 중에 작은 반지를 빼낸 한건이 그것을 예하의 약지에 끼워 넣었다. 플래티늄, 그러니까 백금으로 만들어진 반지는 이렇다 할 보석 없이 그저 매끈하기만 했다. 원래 한건이 준비한 건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가 박혀 있는 것이었는데, 예하가 이건 반지가 아니라 수갑이라며 치를 떨어 바꾼 것이었다.

“신랑 강예하 님은 최한건 님을 남편으로 맞아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하고 존중…… 사랑만 해주세요. 아무튼,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합니까?”

한건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연 사람다웠다. 그 모습이 꼭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해줄까, 말까. 그런 장난을 담아서.

“…….”

예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한건의 눈썹이 파도처럼 들썩였다. 마주 쥔 손을 꾹꾹 누르며 답을 독촉하기도 했다. 예하가 꽃봉오리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네. 맹세합니다.”

예하가 한건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길쭉한 손에 걸린 반지가 참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그가 손가락을 내놓으며 물어뜯으라 했을 때 그러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짓이었다.

한건의 입술 끝에 힘이 들어갔다. 속눈썹은 일직선으로 뻗고, 눈동자는 습윤하게 일렁였다. 감격에 찬 그의 얼굴을 지척에서 보고 있던 예하가 덩달아 감동에 젖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키스하세요.”

닥터 유가 맺은 마침표에 한건이 쥐고 있던 예하의 손을 쑥 끌어당겼다. 예하가 그의 품에 안기고, 입술이 마주 닿았다. 그 순간 폭죽 소리와 함께 꽃비가 내렸다. 정수리와 귓바퀴, 목덜미, 광대에 닿는 꽃잎이 어찌나 간지러운지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아빠!”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찬하가 뛰어왔다. 한건이 그를 안아 들어 통통한 볼에 키스했다. 찬하가 까르르 웃으며 한건의 목을 껴안았다.

활짝 만개한 두 사람 뒤로 꽃이 흩날리고, 빛이 내렸다. 그들이 예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여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벌렸다.

예하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봤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행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행복할 수 없다고 믿을 때가 있었다.

세상 모두에게 내리는 행복이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눈물로 만들어진 행복 위에 서 있다. 내 상처와 내 고통과 나의 아픈 사랑을 뭉치고 깎아 끝내는 행복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더 기쁘고, 그러므로 더 소중했다.

앞으로도 평탄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이제는 행복만 할 거라는 어리석은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허나 자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옆에 있어 준다면, 저들 사이에 내가 있다면, 저들이 나를 지켜준다면. 그 어떠한 굴곡도, 돌부리도 혹은 낭떠러지도 다 그저 그렇게 흘려보낼 자신 말이다. 더는 그 어느 것도 나를, 또 우리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예하가 한 걸음 한건과 찬하를 향해 다가갔다. 한건이 이마를 마주 대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지만 더없이 또렷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달큰한 고백에 예하가 은은한 선율처럼 미소 지었다. 한건은 나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자신을 통째로 나에게 쥐여 준 사람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 발밑에서 숨 쉬겠노라 맹세했다.

그런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머리를 숙이고, 패배를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복종하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신인데.

“……나도. 사랑해.”

예하가 한건을 따라 속삭였다. 가장 먼저 감탄사를 내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찬하였다. 어찌나 자지러지게 웃는지, 한건도 예하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청량한 하늘이 눈부셨다. 흩날리는 꽃잎은 아름다웠고, 그 속에 있는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반짝였다.

황홀할 정도로 행복했다.

라스트 오메가[LAST OMEGA]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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